고독의 발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절판


글을 쓰는 동안 그는 자기가 내부로(자신을 관통하여) 움직이는 동시에 외부로(세상을 향해) 움직인다고도 느낀다. - 기억의 서 제9권에서-244쪽쪽

심지어는 혼자서도, 자기 방의 가장 깊은 고독 속에서도, 자기는 혼자가 아니라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가 그 고독에 대해 말하려고 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를 덮친, 자기는 단지 자신만이 아니게 된다는 갑작스러운 인식. 그러므로 단순히 개인적인 과거의 부활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몰입인 기억, 말하자면 그가 참여를 하는 동시에 목격자인 역사는 그의 일부이면서도 그와는 별개이다. -기억의 서 제9권에서-244-245쪽쪽

세상은 단지 그 안에 있는 것들의 총계가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있는 무한히 복잡한 연결망이다. 낱말들의 의미에서처럼, 사물들은 서로 관련되어서만 의미를 띤다. 파스칼은 이렇게 적고 있다. <두 얼굴이 꼭 닮았을 때 그 자체로는 어느 것도 재미있지 않지만 나란히 있으면 그 유사함이 우리를 웃게 한다.> - 기억의 서 제12권에서-28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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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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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을 돌보는 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남편이 어느 날 가출한다. 소식 한 통 없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는데, 8년 만에 남편이란 사람이 돌아왔다. 외모가 좀 달라진 듯하지만, 그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알아보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다 기억한다. 사람들은 돌아온 탕아를 환영하고, 4년간 이 사람은 농사일과 장사 등에 충실하여 가부장 노릇을 잘 해낸다. 그리고 전에는 그리 금실이 좋지 않았던 각시와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집안의 재산 문제로 작은아버지와 갈등이 생기고, 마침내 작은아버지는 각시를 내세워, 조카가 가짜라는 걸 밝혀 달라고 법정에 호소한다. 각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작은아버지와, 이제는 작은아버지의 처가 된 친정어머니의 등쌀에 마지못해 소송 당사자가 된다. 피고인이 된 남자는 설득력 있게 자신이 진짜 마르탱 게르라고 주장하고, 판사들도 그렇게 믿게 되었는데, 그만 진짜 마르탱 게르가 돌아온다. 가짜 마르탱 게르, 곧 아르노 뒤 틸은 유산을 가로채고 간음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각시인 베르트랑드는 정말로 속았던 것으로 인정되어 간음죄를 받지 않는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를, 오래 전에 TV 영화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던 것도 같다. 이 영화의 고증 작업에 참여했던 역사학자가 영화적인 거품을 빼내고, 사료에 근거하여 당시의 프랑스 남부 농촌 사회, 사건 당사자들이 보았을 세계를 되살리려 했다. 그 노력과 연구의 결과가 이 책이다. 읽으면서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가 생각났다. 옛 사람들이 남긴 조각 기록을 가지고 당시를 되살려 보려 했다는 점에서. “조선 사람들...”이 혜원의 그림을 가지고 그 그림이 보여 주는 시대상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설명한 책이라면, 이 책은 마르탱 게르 사건의 판사 장 드 코라스가 쓴 회고록과 그 밖에 이 이야기를 다룬 온갖 문헌, 그리고 그 시대 농촌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상업적인 계약서, 그 시대 그 지방 주민들의 유언장 등등을 바탕으로 이 사건의 실제 진행 과정을 재구축한다.

돌아온 남편. 그가 진짜 마르탱 게르인지 아닌지 어떻게 밝혀낼까? 지은이는 묻는다. “사진도 없고 초상화도 드물고, 테이프 리코더도, 지문 날인도, 신분증도, 출생증명서도 없고 그나마 교구 기록이 있다 해도 여전히 일정치 않았던 시대에 어떻게 개인의 정체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히 밝힐 수 있겠는가?”(94쪽) 그렇구나. 만약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도 없고, 지문 기록도 없고, 사진이나 녹음기도 없다면 내가 나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가족과 친지가 보증해 주지 않으면 밝힐 도리가 없다.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었다.

이 책의 지은이는 아내 베르트랑드가 속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베르트랑드는 마르탱이라 주장하는 이 남자가 진짜 자기 남편이 아님을 곧 알아차렸지만,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스스로 이 남자와 함께하는 생활을 선택했으리라고 한다. 그리고 돌아온 진짜 마르탱 게르도 베르트랑드에게 “눈물을 치워라. 나의 누이들과 삼촌을 내세워 자신을 변명하지 말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 이상으로 아들, 조카, 형제를 잘 아는 아버지, 어머니, 삼촌, 누이, 형제는 없다. 우리 집에 내린 재앙에 대해서는 너 이외에 탓할 사람이 없다.”(124쪽)고 했다 한다.

글쎄, 그럴까? 물론 오래 같이 생활해온 부부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베르트랑드는 너무 어린 나이(열 살 무렵)에 혼인해서 8년 동안이나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지 못했고, 겨우 2년 정도 성생활을 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다가, 다시 8년 동안 얼굴 한 번 못 보고 살았다. 게다가 이들이 헤어진 건 20대 초반, 다시 나타난 남자는 30대 초반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20대 초반과 30대 초반 사이에 표정부터 몸집까지 얼마든지 달라진다. 게다가 그동안 남자는 군대에 가서 전쟁을 치렀다. 군대와 전쟁은 사람의 성품뿐 아니라 외모도 바꿀 수 있다. 속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베르트랑드보다, 이 사건을 가장 직접적으로 기록한, 마르탱 게르 재판을 직접 담당한 판사 장 드 코라스가 흥미로웠다. 지은이는 이 책의 10장에서, 재판이 마무리되자마자 이 사건을 자세히 기록해 출판한 코라스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다. 코라스의 시각으로 쓴 그 책 “톨루즈 법원에서의 잊을 수 없는 판결(Arrest Memorable du parlement de Tolose)”이 이 사건을 밝혀 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에, 이 자료를 쓴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코라스는 가짜 마르탱에게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구교 갈등이 임박하던 시점, 코라스는 신교에 상당히 기운 사람이었다. 전통 가치에 충실한 보수적 특권층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고, 그 이권을 수호하는 데 충실한 신흥 부르주아에 가깝다. 그리고 코라스는 아내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러니까 뭔가 열정을 가지고 혁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마르탱에게 동질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코라스는 자기 출세의 발판이 될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코라스는, 가짜 마르탱이 유산을 가로채려 한 건 “여자가 자신의 사생아를 남편의 아이라고 속여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과 비견될 만한 범죄”(127쪽)로 더욱이 간음까지 했기 때문에 사형이 타당하다고 한다. 가부장권을 침해하는 것이 사형에 처해질 범죄라니, 혁신을 바라면서도 보수적인 기득권에 편승하려 한 이 사람의 모순, 이 사람 내면의 갈등.

이 사건에 대해 몽테뉴가 썼다는 글이 매우 인상 깊다.

젊었을 때 나는 두 남자가 서로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건과 관련된 소송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 소송은 툴루즈의 판사 코라스에 의해 출간되었다. 판사가 자신이 유죄를 선고한 피고의 사기 행위가 매우 놀랍고도 기이하며 우리나 판사 자신의 지식을 크게 초월하는 것임을 입증하여 나로서는 교수형을 선고한 그 판결이 매우 대담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그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명할 수도,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소송에 말려들었을 때 소송 당사자들에게 100년 후에 다시 와 재판을 받으라고 명령한 아레오파고스 회의[고대 아테네의 귀족정 시기의 핵심 기관]의 재판관들보다 더 자유롭고 솔직하게 다음과 같은 형태의 판결문을 용인하도록 하자. “법정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65~166쪽

법정은 진짜 마르탱 게르가 돌아오기 전까지 아르노 뒤 틸을 진짜 마르탱 게르로 믿고, 그를 고발한 작은아버지 피에르 게르를 무고죄로 심판하려 했다. 법정은 그만큼 진실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가 전지전능하다고, 우리 판단에는 오류 가능성이 없다고 착각하지 말자. 우리 능력 밖의 일에 대해 함부로 심판하지 말자.

흠 하나. 이 책에서는 법정에 선 가짜 마르탱을 “피고”라고 했는데, 가짜 마르탱은 형사재판을 받았으므로 “피고인”이라고 해야 맞다. 원고, 피고는 민사소송에서 쓰는 용어다. (법률용어를 누구나 알기 쉽게 만들었다면 이렇게 헷갈릴 일도 없겠구만.)

그리고 사소한 불평불만 하나. 41쪽에 “르 르와 라뒤리”라는 프랑스 역사학자 이름이 나오는데, 난 처음에 “르 르”라는 사람과 “라뒤리”라는 사람 둘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엠파스 검색 결과 그 사람 원래 이름이 Emmanuel Le Roy Ladurie다.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르 루아 라뒤리”라고 썼으면 그런 착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ㅠ.ㅜ 내가 무식한 탓인 걸 어쩌랴.

1998년 발표되고 한국어판은 2000년에 나왔다.
원제 Le Retour de Martin Guerre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 (지은이), 양희영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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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3-3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소개에서 봤던 것 같아요. 이런 책이 있었군요...흐음~

숨은아이 2005-03-3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이제야 읽은 게 머가 멋져요. ^^
치카님/호호, 작년에 따우님 이벤트에서 받은 책이랍니당.

울보 2005-03-30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어지는데요,,

릴케 현상 2005-03-3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언제나 읽으려나-_-

숨은아이 2005-03-3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읽어보세요. 200쪽도 안 된답니다.
자명한 산책님/저도 그냥 쌓아논 책이 수백 권 됩니다. -_-;

내가없는 이 안 2005-03-3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전에 이 리뷰에 댓글을 어떻게 쓸까, 이러고 있었는데 님 댓글을 먼저 받았네요. 이 책 재미있겠는데요. 저는 이 영화를 프랑스판으로 봤는데 이 책을 읽는 게 훨 재미있겠군요. 영화도 물론 좋았어요. ^^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거, 그거 생각만큼 쉽지 않던데요. ^^

숨은아이 2005-03-3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지요. 저같이 저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은 더욱이. ^^ 이 책, 영화 같은 재미는 없지만 읽는 맛이 있어요. 후주가 엄청나지만... ^^a

하루(春) 2005-03-3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은 봤는데, 책은 미루고 있어요. 언제까지 미룰지 모를 텐데... 님이 그나마 잡아 주셨네요.

비로그인 2005-03-31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사려고 벼르던 책이어요,^^::

숨은아이 2005-03-3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영화 보셨군요. 저도 보고 싶어요.
뽁스님, 사세요! (찌름질... ^^)

이래저래 복잡한 2005-07-0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비스.. 미국인입니다. 영화가 나온 것이 81년, 나탈리 데이비스가 본격 역사저술로 펴 낸 것이 83년. 하버드 대학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죠. 그냥 참고하시라고 적어 봅니다. 그럼~ ^^;

숨은아이 2005-07-03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imulation of Living님, 정보 고맙습니다. ^^
 
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세계사 / 1995년 4월
평점 :
절판


1998년  3월 25일에 쓴 독후감이니, 오래돼도 너무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아직도 검색되는 게 신기해서 옮겨봅니다. 폴 오스터라는 이름을 처음 가르쳐준 책이에요.

***

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세계사(1995)
값 : 6000원

이 책은 시인 최승자가 1994년 8월말부터 1995년 1월 중순까지 미국에 머물렀을 때의 일기다.  아이오와시티의 아이오와대학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 나라를 떠나던 날부터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 또 나중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달을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적은 글이다.

남의 일기를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독자를 예상하고 쓴 글이 아니기에, 쓴 사람만 아는 깊은 뜻이 행간 곳곳에 숨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글을 쓴 사람이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감각으로 이해한 대로만 (객관적인 시각을 가장하지 않고) 하는 이야기라서, 읽는 사람은 글 속의 '나'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글을 읽는 동안은 '나'의 눈과 귀로만 글 속의 세계를 보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 글 속의 세계는 바로 읽는 이가 사는 세계와 같은 실제 세상이기에, 읽는 이는 글쓴이가 아닌 바로 자신의 시각을 아예 놓쳐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남의 일기를 읽는 일이란 두 사람의 시각을 경유하는 일이다.

두서가 없는 점도 일기의 특징이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편하게 쓰는 글인 데다, 특별한 사건이 있다 해도 똑 부러지게 결말이 나지 않은 채 다음날로 넘어가 버릴 수도 있다. 그런 글을 앞에 두고 동시에 두 사람(글쓴이와 글 읽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니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런데도 남의 일기를 읽는 일은 참 매력 있다. 남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나 아닌 사람은 누구나 타인이고 나는 나조차 잘 모르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고, 그 사고방식을 아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건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일까 아니면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습성일까.(아니면 그저 엿보기의 쾌감? - 2004. 7. 22에 덧붙임.) 어쨌든 이 책 자체가 최승자라는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매기는 과정을 보여 주는 건 사실이다. 글쓴이는 책의 들머리,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아마도 이 책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내가 몹시도 지치고 피곤해질 때, 작으나마 내가 새로 배운 것들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이 일기에 나오는, 필경은 아마도 내 눈에만 보일, 꿈틀거리며 새로 태어나려 애쓰는 내 자신의 모습이 내게 힘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새로 배운 것은 아마 이 책 266쪽에 나오는 이 대목이리라.

"나는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 ... 나는 이 프로그래밍에 더 이상 적응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프로그램화되지 않겠다."

글쓴이가 미국이란 나라에서, 아이오와시티라는 작은 대학 도시에서 뭐 대단히 좋은 점을 보고 그 동안의 자기 인생을 부정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니는 서른몇 해 동안 자신을 규정해 온 사회를 벗어나 다른 사회에서 온, 전 세계에서 온 작가들을 만났고 그 가운데서 고독하게 일기를 썼다. 만남.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

그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바라티라는 작가의 집에 묵다가 바라티의 친구라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는 친구 만들기가 아주 쉽다. 한국에서였다면 이런 유의 대화라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었을 거다. 안면도 없는 사람들끼리, 그것도 얼굴도 모르면서, 전화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는 건. 한국에서라면 주책맞은 여자, 아니 정신나간 여자 축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마 전화를 끊고서, 아니 내가 왜 그렇게 씨알머리없는 짓을 했을까 하는 자기 반성의 과정을 거쳐야 했겠지? 그런데 그게 실은 자기가 하는 반성이 아니라는 것, 그건 어떤 권위, 혹은 어떤 파워를 독점하기 위해, 자기가 독점하려 한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 이게 더 큰 문제다. 그걸 의식조차 못 하고 있다는 게 - 어떤 프로그래머들이 설치해 놓은 소프트웨어에 의해서 내가 그렇게 반성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반성하는 게 아니라 반성당하는 것이라는 사실, 끔찍한 사실."(269쪽)

그니는 가만히 앉아서 이런 결론을 내린 게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꽉 차 있어서 나 외부의 것에는 흥미를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꽉 채우고 있는 그 나 자신은 죽음처럼 송장처럼 내 내부에 누워 있기만 한다. 이 내 내부의 송장을 어서 치워 버리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 문을 열고 나로부
터 나가 다오."(236쪽)

나 자신에게 "나로부터 나가 다오" 하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어느 노래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아직 꽉 차진 못해서 허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평소 밥 먹을 때처럼, 과식하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어 대다 나중에 배불러 죽겠다 소리를 하게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의 129쪽에 인용된 글을 옮긴다. 글쓴이가 '식상할 만큼 너무도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라고 한 글인데, 무식한 나는 처음 봤다. ^_^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misfortune처럼 작용하는,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이의 죽음처럼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마치 자살 직전에 있는 것처럼 혹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숲에서 길 잃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 구실을 해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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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7-23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건가요?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한국 작가를 한 분 아는데, 굉장히 유익한 프로그램이라고 감탄하더군요. 한 대학에서 세계적인 작가들을 대상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다니, 참 대단해요.

책이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 구실을 해야 한다!!!

무식한 저는 첨 봤습니다. 그런데 가슴에 새기고 싶군요 ^^

숨은아이 2004-07-23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건 아니고요, 최승자 시인이 이때 폴 오스터의 책을 읽고 끌린다고 이 책에 썼어요. 이후 최승자 시인은 폴 오스터의 <굶기의 예술>을 번역하기도 했어요. 문학동네에서 나왔던 <굶기의 예술>은 지금 절판된 듯.

로드무비 2004-07-30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별로 잘 쓴 건 아니지만 최승자 시인과의 만남에 대한 짧은글 하나 썼으니 시간 날 때
잠시 들러봐 주세요.^^
가끔 님의 방에 들어와 하나씩 꺼내어 읽을까 합니다.

panda78 2004-08-2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 아이님 리뷰 읽고, 타스타님 이벤트 참가상으로 신청해서 읽었답니다.
최승자씨가 번역한 문학동네판 굶기의 예술은..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 책은 술술 잘 읽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그 다리자르고 팔 자르고 머리 떼놓는다는 시가 과연 어떤 건지 찾아보기까지.. ^^;;

숨은아이 2004-08-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썼던 것인데, 좀 부끄럽네요. ^^; 그런데 그 시는 찾으셨나요? 찾으셨음 저도 가르쳐주시지...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에서 2001년 12월 나옴.


이미 널리 알려지고, 좋은 평을 많이 받은 책에 대해 쓰는 건,
뒷북 치는 것 같아 좀 쑥스럽네요.
하지만 제가 지금 읽은 걸 어떡해요. --;
이 책을 산 건 2002년 1월이네요. 1월 17일에 제 손에 들어왔다고
면지에 적혀 있어요. 이것저것 욕심 내서 사놓고는
(사실 그것도 사고 싶은 것의 1/3 정도밖에 못 사는 거예요)
쌓아뒀다가 한 2년쯤 지난 뒤에야 읽곤 합니다.

알라딘을 통해 산 이 책은
표지 제목 글자를 검은 박으로 입히고(전문 용어로 '먹박' ^^),
글자를 안으로 새기듯 눌렀는데(전문 용어로 '형압'이라 합니다),
제작 공정에 실수가 있었는지 먹박 형압이 두 겹 겹쳐져서 나왔어요.
바꿔달라면 바꿔주겠지만, 제목이 두 겹일 뿐 다른 건 문제가 없어서
그냥 가지고 있기로 했습니다.
결함이 있어 반품된 책은 폐지공장으로 팔리는 수밖에 없는데,
표지를 볼 때 눈이 잠깐 어지러울 뿐 독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책을
폐지로 만드는 건 가슴 아픈 일이잖아요. 이 책에 담긴 내용,
지은이와 편집자의 노력, 아름다운 그림,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이 책의 가치가 순식간에 폐지 몇십 원으로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바라던,
비전문가를 위한 역사책, 교양서는 바로 이런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5, 6년 사이 "그림 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만,
모두 그림 감상자의 눈으로 안내할 뿐
이 그림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게 해주진 않았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긴 하지만 그 시대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이끌어주진 못합니다. 그 그림이 그 시대에 왜 의미가 있는지,
머리로 "그렇겠구나" 생각은 하게 되지만 정말로 공감하진 못합니다.

사실 책이나 화면에서 유럽의 명화라는 것을 보면,
저게 어째서 그렇게 훌륭하다는 건지 궁금증이 다 풀리질 않습니다.
서양 미술사를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아르놀피니의 약혼>이란 그림도
저게 왜 그렇게 유명한지 모르겠습니다.
원화를 못 본 탓도 있겠지요(복제화로 수십 번 본 그림도
정작 원화 앞에 가면 그 감동이 다르다고 하더라구요).

혜원 신윤복(1758-?), 하면 국사 시간에 조선 후기의 3대 화가라고
외웠던 기억이 있지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치지 않고,
그의 그림이 과연 어떤지 보여주지도 않고
그냥 3대 화가라고 이름만 무작정 외우게 하다니,
정말 무식한 교육이었어요.

이 책은 미술책이 아니라 혜원의 그림을 통해
당대의 생활사를 알리는 책입니다.
혜원의 풍속화 30장을 엮은 <혜원전신첩>이란 화첩의 그림
한 장 한 장을 보면서, 그 그림 속 인물이 입은 옷, 머리에 쓴 것 등등을
통해 이들이 어떤 인물일지 알게 해줍니다. 어떤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나온 그림일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그림만으로 정확한 모양새를 파악하기 어려운 옷차림은
실존하는 유물 사진이나 알기 쉽게 새로 그린 그림으로 다시 보여줍니다.

이 과정을 통해 혜원의 그림을 다시 찬찬히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그림을, 혜원은 왜, 무슨 마음으로 그렸을까,
혜원, 그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양반의 풍류, 기생의 풍류에 대해
좀 낭만적으로 생각하곤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기생은 아무리 미화해도 남성중심주의 계급사회의
피지배계급 여성이죠. 양반의 풍류는 우리 선조의 멋이긴 하지만
그들이 풍류를 누리는 방식은 자신들이 천하게 여기는
기생과 광대를 불러 춤추고 노래하게 하고,
여자 주무르는 것이었어요. 목숨보다 지조를 중시해야 한다면서
여자에게만 수절을 강요하는 게 그들의 윤리학이었지요.
해학과 에로티시즘 속에 이런 걸 보여준 혜원,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교정에 단점이 있다면 그림 설명 부분에서 간간이
그림의 왼쪽 오른쪽을 헷갈리게 한 경우가 있고,
편집디자인에 대해 말하자면
한 작품의 일부만을 따서 보여줄 때는 정말 그 부분만 따로 보여줄
분명한 이유(해당 부분에 특별히 주목해야 할 이유.
특정 인물상의 옷차림이나 표정 따위를 따로 이야기할 때라거나)가
있어야 하는데, 물론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장식적인 목적으로 그냥 그림의 인물상 하나를 따서 앉힌 경우도 꽤 되네요. 
그림은 전체로서 이해돼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일부만 발췌하는 건
훼손에 해당한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전체 그림를 보여준 다음에
그림의 일부를 따서 보여주는 거니까 괜찮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장식이 과하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었어요.

국보 135호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은 혜원이 그린 그림 30장을 화첩으로
엮은 것인데, 처음에 누가 엮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위창 오세창 선생이
다시 사들여서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답니다.
오세창 선생은 일제시대에 사재를 털어, 국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를
모은 분으로 유명하지요. 그분이 모은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간송미술관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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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6-0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 책을 읽다 보면 사극에서 무심코 보고 넘어간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도 있는데요. 드라마 <대장금>에서 대전별감이 기방을 운영하는 게 나오잖아요? 대전별감이 무슨 기방? 했는데, 이 책을 보고 그게 어쩐 일인지 알았어요. 또 의녀들이 머리에 쓰는 "가리마"라고 하더군요. 혜원의 그림에 그게 나와요. 드라마에 나온 모양과는 조금 다르데요. 드라마에선 좀더 세련되게 디자인한 듯.

호랑녀 2004-11-13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책꽂이엔 읽고 싶어 충동구매해놓은 책들이 쌓여 있는데, 또 보관함에 넣는 이 의미는 무엇일꼬...

학교도 관둬서 당장 문화생활비가 구멍났는데...

숨은아이님 댁이 어디세요? 아무래도 가서 빌려읽어야겠어요...ㅠㅠ

숨은아이 2004-11-1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한참 전에 쓴 글을... ^^ 기꺼이 빌려드리지요! 참, 그런데 전에 저도 호랑녀님 리뷰 보고 이미 절판된 [조선의 왕비]를 속절없이 보관함에 넣어놓고 있는데, 그거 빌려주실래요? 딜? ^^
 
남자이야기
김성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새삼 깨달은 점도 많습니다. 역시 남자는 여자에게 수수께끼이고, 여자는 남자에게 수수께끼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남자든 여자든, 인간은 영원한 수수께끼 아닌가요. 나 자신도 수수께끼인데. 서른두어 살 즈음엔 세상을 좀 알 것 같다, 남자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자신감도 생겼어요. 하지만 2, 3년 더 살아보니 다시 "모르겠다"로 돌아갔지요.

이 책은 저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사람의 시각, 조금 더 지혜로워진 느낌?

하지만 전 TV나 책에서 "여자는 이렇잖아요," 하고 규정해버린 명제에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난 청바지 한 벌 사려고 서너 시간씩 돌아다니는 거 질색이에요. 여동생 옷 사는데 한번 같이 갔다가 짜증나 미치는 줄 알았답니다. 내가 아는 누군가 "여자는 보석을 좋아하잖아"라고 말하면 난 안 그런데, 합니다. 예뻐 보이긴 하지만 그냥 빛나는 돌멩이일 뿐인데 저기다 왜 수만 원, 수십 만 원을 들이는지 이해 안 됩니다. 1000원 정도 한다면 사서 갖고 다녀주겠어요.

일반화는 그래서 위험하죠. 난 안 그런데, 왜 자기가 그런 걸 가지고 모든 여자가 그렇다고 일반화하지? 남자도 그렇겠죠. 하지만 많은 사람을 관찰한 결과 보편적으로 도출되는 행동 유형, 누구나 반복하는 어리석은 실수는 있겠죠. 그런 걸 되돌아보게 해주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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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 2004-06-1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역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겠지요.
그 책을 나름대로 감명깊게 읽고는 누군가(!)에게 술김에 선물(!)해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왠지 그 책을 줘야만 하는, 나보다는 그 사람이 읽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답니다.
그 책에서 건질건 사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자."였습니다.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게 느낄 지 모르지만, 어쨌든 다르다는 겁니다. 이것만 잊지 않고 살렵니다. :)

서른두어 살 즈음에 세상을 알 것 같다고 느꼈다니, 대단하십니다. 난 여전히 세상도 사람도 모르겠습니다.

숨은아이 2004-06-12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어떤 전문가의 연구 성과는 아님. 지은이는 방송작가. 눈썰미와 관찰에서 나온 글일 뿐. 그리고 서른두어 살 즈음에 세상을 알 것 같았다가, 지금은 다시 모른다니까!

2004-06-12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