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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마르코스 지음, 박정훈 옮김 / 다빈치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주로 추운 비가 내리는 한밤중, 아니면 새벽녘입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옥수수 잎을 말아 만든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마르코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때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인 마르코스는 선택을 해야 할 때, 산중에서 길을 잃었을 때, 언제까지 숨어 있어야 할지 몰라 두려울 때,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해답을 얻습니다.
할아버지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처음 만든 일곱 신 중에서 새까맣고 가장 못생긴 신은 인간을 위해 하늘의 해가 됩니다. 해가 되기 위해 땅에서 죽습니다. 가장 하얗고 아름다운 신은 이를 보고 부끄러워서, 땅에서 죽어 하늘의 달이 됩니다. 캄캄한 밤을 밝혀준 것은 진실한 인간들입니다. 너도나도 모두 별이 되니 밤하늘이 너무 밝아 땅에 사는 인간들이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자라는 옥수수 빛깔 남녀들은 스스로 빛을 끕니다. 스스로, 빛을, 끕니다.
할아버지 이야기 속에서, 진실한 인간들은 세상을 처음 만든 일곱 신이 말 중에서 처음 만들어낸 세 단어-자유 민주주의 정의-를 이고서, 그 진실의 무게로 인해 고개를 숙이고서, 거울 위를 걸어갑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걸어갑니다. 어디로 떠나지도 않고 어딘가에 도착하지도 않는 무지개다리처럼. 자신의 등을, 자신의 처음을 마주볼 수 있을 때까지. 자신들의 존재와 길을 비추어주는 거울 위를. 그리하여 스스로 길이 됩니다.
할아버지 이야기 속에서, 비는 땅의 고통을 슬퍼하는 구름의 눈물입니다. 할아버지 이야기 속에서, 구름은 사람들을 위해 빛이 되고자 땅에서 죽어 하늘로 올라간 일곱 신이 남겨놓은 꿈입니다.
세상을 처음 만든 일곱 신과 아주 오래된 조상들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합니다. 서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차이가 있는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이 아주 좋다”고, “자신을 알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이 책의 문체에 쉽게 빠져들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빠르게 녹아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물여섯 가지 이야기 하나하나, 읽다 보면 무언가, 별똥별 같은 것이 뚝, 철렁 마음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철렁, 이라니. 내 속에 깊은 우물이라도 있었을까요. 220쪽밖에 안 되는 책, 한 편 한 편이 길어야 10쪽 남짓 되었지요. 가방에 갖고 다닌 지도 꽤 되고, 이주에는 책 읽을 시간이 없을 테니 오늘 다 읽어야 해, 하고 서둘러 책장을 넘기고 싶었지만, 이야기 하나마다 땅의 고통을 위해 구름이 떨어뜨린 눈물처럼 묵직하게 뚝, 떨어지는 그것 때문에,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책을 덮어야 했어요. 우물에 생긴 파문이 가라앉고 나서야 다음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지요.
마르코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책 끄트머리에 있는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마야족 원주민인가 봅니다. 이 책 속에서 10년 전에 죽었다는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비가 내리는 밤이면 지금도 마르코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봐요.
1998년에 처음 발표되었고, 한국에선 2001년 다빈치 출판사에서 펴냈습니다. 서재주인들끼리 하는 이벤트에서 제가 처음 받은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