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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크리에이티브 공장, 뉴욕 - 뒷골목 아티스트들이 이끄는 뉴욕의 예술경제학
엘리자베스 커리드 지음, 최지아 옮김 / 쌤앤파커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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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지금 결혼도 글로벌한 '시장'을 형성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디어와 기술이 자본과 미디어와 만나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품'이 되고 '산업'이 되는 시대이다. 10여 년 전, 전국 석차를 헤아릴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사촌 동생이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작은어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몸져 누우셨다. 자식이 '학자'로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 앞에 동생은 무릎을 꿇고, 문화와 예술이 곧 거대한 '권력'을 형성하는 세계적인 산업이 될 것이라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문화와 예술에 인재와 자본이 몰려들면서 세계적인 부와 명성과 인기가 집약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한 문화, 예술 산업이 집약된 대표 도시가 있다. 창의력과 재능으로 무장된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수천 개의 일자리와 수십억 달러의 매출액을 창출하고, 혁신과 경쟁으로 뜨거운 크리에이티브 산업이 집약된 도시, 바로 '뉴욕'이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라는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것이 과연 진정한 '크리에이티브'인가 하는 것에는 딴지를 걸고 싶어지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고, <세계의 크리에이티브 공장 뉴욕>은 '뉴욕'을 탐구 대상으로 하여 일부 특정 도시에서 크리에이티브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집중 조명하는 책이다. 문화와 예술의 저변에 존재하는 사회, 경제적 메커니즘이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번성하는지를 추적했다.

이 책은 이름 자체가 세계적인 브랜드인 유명인부터 뉴욕의 뒷골목 무명 아티스트들까지 문화, 예술계 종사자 100여 명을 인터뷰했다.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크리에이티브가 맨 처음 어떻게 발생했으며, 왜 특정 장소에서 일어나는가를 질문하며 '뉴욕의 예술경제 히스토리'를 구성해냈다. 뉴욕은 어떻게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냈고, 그 크리에이티브는 어떻게 뉴욕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이 안에 작동하는 전쟁(세계2차대전), 제조업의 붕괴, 경제 침체와 싼 집값, 클럽과 밤문화, 자본과 미디어 등의 역학이 재밌다. 

그러나 뉴욕을 바라보는 저자의 눈에서 다소 주관적인 '하트'가 감지된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도취되어 열에 들뜬 목소리. 저자의 분석은 흥미롭지만, 뉴욕에 대한 환상이나 로망에 젖어들고 싶지는 않다. 실제로 영화와 패션계에서 종사하는 친구들이 그곳은 운이 따라주어야 하는 '도박판'이라고 하는 푸념이 생각나기도 해서이지만, 세계를 주도하는 창조적 계급에 속하지도 못하고 뉴욕과는 전혀 상관없는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소외감이 다소 삐딱하게 작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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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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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으로 한국 사회에 다문화 가족이 급증하면서 다문화 가족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뜨겁다. 특히 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의 한국생활 적응을 돕고자 하는 정책적 함의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논의 때마다 단골 손님처럼 등장하는 이론이 있다. 바로 '문화상대주의'이다. '문화상대주의'는 한마디로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견해이다. 

문화상대주의는 한국 사회의 다문화 가족에 대한,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중요한 이해의 지평을 제공한다. 최근 급증한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해 오는 여성들 대부분은 가족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위치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국제결혼을 선택하여 이주해온 여성은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 일방적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받는다. 한국어를 배워야 하고, 시댁의 가풍과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한다. 다문화 가족 내에서, 이주 여성의 모국어를 함께 배우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태도의 밑바탕에서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 여성의 문화에 대한 상대적인 우월감이 작동하고 있다.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들에 비하여 더 수준 높은 문화를 달성했다고 보는 것은 문화에 대한 '진화론'적 시각이다. <문화의 패턴>을 쓴 루스 베네딕트는 바로 이러한 진화론적 문화 이해를 비판하며 '문화 상대론'을 주창했다. 문화 상대론의 대표인 프란츠 보아스를 스승으로 둔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의 패턴>을 통해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의 독특한 환경과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녀는 자기가 소속된 집단 이외의 집단은 모두 열등한 집단으로 보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타민족의 문화를 배척하는 태도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문화인류학 분야의 고전으로 평가되는 <문화의 패턴>은 빠른 속도로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변모하는 한국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야 할 책이다. 루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은 문화 이해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의 패턴>에서 너무 복잡하여 연구가 어려운 서구 문명 대신에 상대적으로 덜 복잡한 문명을 가진 '원시부족'을 현지탐사 방식으로 연구했다. 그녀는 북아메리카의 두 인디언 부족인 '주니 족'과 '콰키우틀 족', 그리고 동부 뉴기니의 '도부 족'의 관습 연구를 통해 인간 행위를 지배하는 윤리가 사회의 관습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어떤 원주민 부족은 '협동'을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부족은 '경쟁'을 가치있는 것으로 보아 개인의 우월성을 성취하는 데 노력을 집중한다. 

<문화의 패턴>은 인간의 생활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화' 이해와 더불어 다양성의 가치를 가르쳐주는 의미 깊은 책이다. '문화인류학을 넘어선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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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원고
트래비스 홀랜드 지음, 정병선 옮김 / 난장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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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라진 원고>의 시대적 배경은 내게 오래 전 어느 날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1987년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
며칠 째 계속해서 바람에 실려오는 체류탄 가스 때문에,
매점에서 파는 휴대용 휴지가 매일 동이 났었다. 
유난히 체류탄 가스가 매웠던 그날은 결국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모처럼 오후 수업이 없는 날 시내엘 나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노선대로 서울대학교를 경유할 수 없어 중간에서 차를 돌린다고 기사 아저씨가 소리쳤다.
멀리서 바라보니 학교 앞에 마스크를 쓴 한 무리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일명 침묵 시위대.
그리고 앞에는 무장을 한 전경들.
여기저기 깨져 있는 보도블록, 깨어진 화염병 조각들, 
임시로 문을 닫은 상가와 한산한 거리, 그리고 나처럼 말없이 쳐다보는 시민들.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착각이 일었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낯설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그 자리에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며칠 뒤, 6.29 선언이 있었다.

<사라진 원고>은 참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독재자 스탈린과 혁명의 광기와 억압과 정의와 지식인의 고뇌, 그리고 저항과 문학.
새벽녘에 갑자기 들이닥쳐 사람을 잡아가는 사회의 불안과 공포.
거리는 어둡고, 문은 닫혀 있고, 낙서로 어지럽다.
방치된 채 녹슬어가는 가게들과 빈 아파트, 그리고 전쟁과 가난.
파괴되고 빼앗겼으며 유린된 러시아 땅, 어느 한자락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던 파벨.
그러나 스탈린의 숙청이 한창인 지금은 공문서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파벨은 그곳에서 어느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끌려온 작가 바벨을 만난다.
그리고 우연히 바벨의 마지막 작품, 미완성 단편을 읽게 된다.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원고를 손에 쥐었다.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보존을 위해 그 원고를 훔쳐낸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에 바벨은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간첩 행위와 트로츠키 비밀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바벨이 체포되던 날 그의 원고들도 증거로 압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쿠티레프라는 초급 장교가 증거 자료를 가져간 이후로,
바벨의 원고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사라진 원고>는 바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과 소설의 주제, 그리고 시종일관 암울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가르쳤던 파벨의 의식 속을 함께 걸으며 내내 사로잡혔던 생각과 감정은,
전체 정치에 대한 분노도, 지식인의 저항과 고뇌에 대한 연민도 아니었다.
바로 문학과 그 아름다움이었다.
<사라진 원고>는 나에게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문학으로 읽힌다.
조용한 기도 같은, 차분한 일기 같은, 오래 전 편지 같은 작가의 문체는
소리와 움직임이 제거된 곳에서 온몸 위로 쏟아지는 한낮의 눈부신 태양빛처럼 
정적이지만 강렬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다.
<사라진 원고>는 기억될 가치가 있는, 그리고 기억해야만 할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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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르리라 - 작은 교회 희망의 씨앗
이태형 지음 / 좋은생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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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어느 교수님이 들려주신 고백이 기억난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치열하게 살아오신 교수님은
결혼하여 단란한 보금자리를 꾸미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 온 가족의 감격 속에 
3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하던 날, 너무 좋아서 꿈꾸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초대를 받고 한 지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집이 100평대 빌라였단다.
어림잡아도 주방 크기만 30평은 족히 넘어보였다고.
교수님은 자신이 평생을 고생해서 겨우 장만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아파트가
어떤 집의 부엌보다도 작다는 생각에 오래도록 몹시 우울했다고 고백하며 씁쓸해하셨다.

이렇게 우리의 행복은 30평, 100평이라는 소유의 숫자와 크기로 가늠될 때가 많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에서 말한 것처럼,
창문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에 비둘기가 있는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이라고 하기보다,
수억 원대의 집이라고 해야 비로소 그 집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그려지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 모두가 말하는 행복의 길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높아지려고 다투며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 세상에서 스스로 낮아진 사람들,
편안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땀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
가족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개인화 되는 세상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
가진 것이 작아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세상의 풍토와 문화를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들,
바로 작은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이웃과 삶을 나누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성숙과 성장을 '성공'과 혼동하며 사는 나는 감히 이분들의 삶이 '부럽다'는 말을 못하겠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 앞에 숙연해질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 다시 묻는다. 
분초를 다투며 치열하게 사는 나는 지금,
행복한가?
배부른가?

작은 교회의 행복을 소개하는 <배부르리라>는 '작은 것'의 예찬이 아니다. 
진정한 가치의 발견이고, 
욕심으로 어두워진 눈을 밝히는 것이며,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성육신의 참된 뜻이다.
신앙, 사랑, 진정성, 삶, 행복이라는 단어들과 정직하고 진지하게 마주하게 한다.

세상을 거스릴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땅을 일구고 희망을 일구는 '작은 교회'의 사역에서 나는 어떤 해답을 찾았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이 깊이 마음에 새겨진다.
죽을 때까지 아브라함이 법적으로 실제 소유한 땅은 아내를 묻은 막벨라 굴이 전부였다.
그러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풍요를 누렸던 아브라함처럼,
<배부르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풍요를 이미 누리고 있는 '작은 교회'를 목도하며,
참 많이 행복했고, 피어나는 희망으로 마음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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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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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미안해.

얼마 전, 김수현의 엄마가 뿔이 났었다. 뿔난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온 가족이 소동했다. 사회도 동요했다. 거센 찬반 논란 가운데 엄마의 편을 들어준 것은 오히려 가부장의 상징인 시아버지와 남편이었다. 아들과 딸은 엄마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엄마의 부재를 몹시 불편해했다. 그동안의 엄마의 수고를 고스란히 며느리가 떠안게 되었다며 같은 여자 입장에서 비정한 시어머니라는 비난도 받았다. 끝내 '가족'은 '엄마'를 놓아주지 않았다. "엄마가 필요해!" 가족 안에 매몰된 엄마의 자아 찾기는 짧은 투쟁으로 가족과 사회를 환기시킨 후, 엄마는 엄마를 필요로 하는 가족에게로, 엄마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번엔 엄마를 잃어버렸다. 신경숙은 느닷없이 엄마를 잃어버리게 한다. 지혜로운 그녀는 우리 스스로 엄마를 찾아 나서도록 만든다.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절박함에는 논쟁이나 비판이나 논란의 여지가 없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그 절체절명의 상황은 우리의 일상을 한순간에 흩으러버리고, 오로지 엄마 찾기에 몰두하게 한다. 오직 엄마만 생각하도록 만든다.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엄마의 자리)? 엄마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엄마의 삶)?  

엄마를 찾아 나선 가족들은 엄마와 함께한 기억을 되새긴다. 가족의 기억 속을 통해 복원되는 엄마의 삶에 관한 진실은, 엄마의 살만 파먹고 살았지 엄마를 전혀 돌보지 못했다는 통한의 눈물과 뼈아픈 후회 속으로 우리 모두를 몰아넣었다. 엄마, 엄마가 많이 아프구나, 엄마의 마음속에 이렇게 큰 원망이 있었구나, 좌절된 꿈을 안은 채 그렇게 살았구나, 엄마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의 상처가 이리도 깊구나,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구나. 엄마에게도 낭만이 있고, 비밀스러운 사랑이 있었구나! 

'너'(딸)의 기억 속의 엄마가 너에게 "무얼 갖고 싶으냐"(70)고 물었을 때, 나는 그곳에서 한참 울었다. 더 묻지 않고 책을 사주시는 엄마의 모습에서 어떤 질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는 무얼 갖고 싶었어?" 엄마는 어쩌면 모든 방식으로 끊임없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한 번도 내 엄마의 욕망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았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오빠는 일본 학교 댕겼는디 언니도 댕겼는디 왜 나만 안 보냈을까? 불 꺼진 것만치로 캄캄하게, 평생을 캄캄하게 (...)"(72). 엄마처럼 살기 싫은 건 '너'뿐만 아니라, 엄마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그'(아들)의 기억 속의 엄마는 아들에게 지워진 가족의 짐을 한없이 미안해하면서, '당신'(남편)의 기억 속의 엄마는 짐이 되는 가족을 고스란히 보듬는다. 엄마의 노동,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엄마는 미안한 마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원망도, 분노도, 그리움도 모두 노동으로 표현한다. 쓸고, 닦고, 치우고, 다듬고, 씻고, 썰고, 끓이고, 빨고, 널고, 붙이고, 떼어 내고, 그렇게 가족을, 생명을 돌본다. 엄마의 돌봄. 노동으로 너덜너덜해지고 연약한 육신이 마모되어 가는데도 엄마의 노동은 그칠 줄 모른다.

엄마의 노동과 돌봄을 안전망으로 살아온 우리는 "엄마가 필요해!"라는 한마디 말로 엄마를 여전히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 묶어두려 하고 있는지 모른다. 연인에게 하는 "네가 필요해!"라는 말은 사랑고백이다. 그러나 "엄마가 필요해!"라는 말은 사랑고백이 될 수 없다. 신경숙이 그리는 '엄마'의 모습이 불편하고, 엄마의 그런 모습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엄마는 왜 항상 헌신과 희생으로 대변되어야 하는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만이 엄마로서 대우받고, 뿔이 나서 집을 나가는 엄마는 비난 받아야 마땅한가? 희생하고 헌신하는 엄마상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그려내는 것은 희생과 헌신의 굴레에서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 아닌가?

그러나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달라는 신경숙의 부탁을 받고, 여기저기서 '엄마'를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목격자들이 보았던 '엄마'의 모습은 모두 파란 슬리퍼를 신고, 엄지 쪽 발등이 깊이 패어 빼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상처가 곪아터지고 또 터져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다. 전문가(약사)는 염증이 오래되어 농이 계속 흘러나오고, 냄새도 지독히 난다고 말한다. 엄마의 모습은 어떠해야 한다는 논란에 앞서 우리에게 목격되어지는 엄마의 모습은 신경숙의 잃어버린 엄마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엄마의 삶에 관한 진실이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유일하게 '나'일 수 있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너'도 '그'도 '당신'도 기억을 더듬어 엄마를 찾아 헤맬 때, '나'가 된 엄마가 찾아간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엄마처럼 엄마로 살고 있는 '작은 딸'이다. 더 맘껏 자유로워지기를 바란 딸인데 그 딸이 '나'처럼 새끼를 셋이나 품은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작은 딸은 제 새끼를 돌보느라 잃어버린 엄마를 마음 놓고 찾아다닐 수도 없었다. 자신처럼 세 아이를 길러야 할 딸의 인생을 생각하며, 그 짐마저 엄마인 자신이 덜어주고 싶어 했던 엄마는, 이렇게 딸을 찾아와 그 지친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여 쉬게 해준다. 엄마는, 엄마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254).

'장미 묵주'는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장미 묵주, 엄마는 구원자를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엄마의 삶에서 엄마를 구원해줄, 잃어버린 엄마의 삶을 찾아줄 구원자말이다. 신경숙은 그 엄마를 부탁한다. 우리에게. 엄마를 찾아달라고. 그리고 엄마를 돌봐달라고. 더 늦기 전에.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너덜해진 엄마의 삶이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울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잊고 지내던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게 만든다. 이미 엄마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래서 다시는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그리움과 후회로 터질 듯한 가슴의 통증을 여러 날 달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살을 파먹고 살았던 자식이라는 깨달음이 주는 미안함은 가해자나 피해자로서의 죄책감이 아니다. 자식은 가해자이고 엄마는 피해자라는 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가장 숭고하고 순결한 사랑에 대한 눈뜸이다. 엄마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을 내게 주었던 '엄마'에게 이제 나도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애절함이다.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게 사랑인줄 모르는,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할 줄 모르는 냉정한 연인을 깨우듯, 신경숙은 그렇게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고 있다. 어떤 사상이나 관념이나 도덕률이나 당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초의, 원시의 사랑으로 이성이 아니라 마음으로 반응하고 소통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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