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원고
트래비스 홀랜드 지음, 정병선 옮김 / 난장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사라진 원고>의 시대적 배경은 내게 오래 전 어느 날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1987년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
며칠 째 계속해서 바람에 실려오는 체류탄 가스 때문에,
매점에서 파는 휴대용 휴지가 매일 동이 났었다. 
유난히 체류탄 가스가 매웠던 그날은 결국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모처럼 오후 수업이 없는 날 시내엘 나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노선대로 서울대학교를 경유할 수 없어 중간에서 차를 돌린다고 기사 아저씨가 소리쳤다.
멀리서 바라보니 학교 앞에 마스크를 쓴 한 무리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일명 침묵 시위대.
그리고 앞에는 무장을 한 전경들.
여기저기 깨져 있는 보도블록, 깨어진 화염병 조각들, 
임시로 문을 닫은 상가와 한산한 거리, 그리고 나처럼 말없이 쳐다보는 시민들.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착각이 일었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낯설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그 자리에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며칠 뒤, 6.29 선언이 있었다.

<사라진 원고>은 참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독재자 스탈린과 혁명의 광기와 억압과 정의와 지식인의 고뇌, 그리고 저항과 문학.
새벽녘에 갑자기 들이닥쳐 사람을 잡아가는 사회의 불안과 공포.
거리는 어둡고, 문은 닫혀 있고, 낙서로 어지럽다.
방치된 채 녹슬어가는 가게들과 빈 아파트, 그리고 전쟁과 가난.
파괴되고 빼앗겼으며 유린된 러시아 땅, 어느 한자락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던 파벨.
그러나 스탈린의 숙청이 한창인 지금은 공문서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파벨은 그곳에서 어느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끌려온 작가 바벨을 만난다.
그리고 우연히 바벨의 마지막 작품, 미완성 단편을 읽게 된다.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원고를 손에 쥐었다.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보존을 위해 그 원고를 훔쳐낸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에 바벨은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간첩 행위와 트로츠키 비밀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바벨이 체포되던 날 그의 원고들도 증거로 압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쿠티레프라는 초급 장교가 증거 자료를 가져간 이후로,
바벨의 원고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사라진 원고>는 바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과 소설의 주제, 그리고 시종일관 암울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가르쳤던 파벨의 의식 속을 함께 걸으며 내내 사로잡혔던 생각과 감정은,
전체 정치에 대한 분노도, 지식인의 저항과 고뇌에 대한 연민도 아니었다.
바로 문학과 그 아름다움이었다.
<사라진 원고>는 나에게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문학으로 읽힌다.
조용한 기도 같은, 차분한 일기 같은, 오래 전 편지 같은 작가의 문체는
소리와 움직임이 제거된 곳에서 온몸 위로 쏟아지는 한낮의 눈부신 태양빛처럼 
정적이지만 강렬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답다.
<사라진 원고>는 기억될 가치가 있는, 그리고 기억해야만 할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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