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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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미안해.

얼마 전, 김수현의 엄마가 뿔이 났었다. 뿔난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온 가족이 소동했다. 사회도 동요했다. 거센 찬반 논란 가운데 엄마의 편을 들어준 것은 오히려 가부장의 상징인 시아버지와 남편이었다. 아들과 딸은 엄마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엄마의 부재를 몹시 불편해했다. 그동안의 엄마의 수고를 고스란히 며느리가 떠안게 되었다며 같은 여자 입장에서 비정한 시어머니라는 비난도 받았다. 끝내 '가족'은 '엄마'를 놓아주지 않았다. "엄마가 필요해!" 가족 안에 매몰된 엄마의 자아 찾기는 짧은 투쟁으로 가족과 사회를 환기시킨 후, 엄마는 엄마를 필요로 하는 가족에게로, 엄마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번엔 엄마를 잃어버렸다. 신경숙은 느닷없이 엄마를 잃어버리게 한다. 지혜로운 그녀는 우리 스스로 엄마를 찾아 나서도록 만든다.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절박함에는 논쟁이나 비판이나 논란의 여지가 없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그 절체절명의 상황은 우리의 일상을 한순간에 흩으러버리고, 오로지 엄마 찾기에 몰두하게 한다. 오직 엄마만 생각하도록 만든다.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엄마의 자리)? 엄마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엄마의 삶)?  

엄마를 찾아 나선 가족들은 엄마와 함께한 기억을 되새긴다. 가족의 기억 속을 통해 복원되는 엄마의 삶에 관한 진실은, 엄마의 살만 파먹고 살았지 엄마를 전혀 돌보지 못했다는 통한의 눈물과 뼈아픈 후회 속으로 우리 모두를 몰아넣었다. 엄마, 엄마가 많이 아프구나, 엄마의 마음속에 이렇게 큰 원망이 있었구나, 좌절된 꿈을 안은 채 그렇게 살았구나, 엄마 가슴에 묻어둔 그리움의 상처가 이리도 깊구나,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구나. 엄마에게도 낭만이 있고, 비밀스러운 사랑이 있었구나! 

'너'(딸)의 기억 속의 엄마가 너에게 "무얼 갖고 싶으냐"(70)고 물었을 때, 나는 그곳에서 한참 울었다. 더 묻지 않고 책을 사주시는 엄마의 모습에서 어떤 질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는 무얼 갖고 싶었어?" 엄마는 어쩌면 모든 방식으로 끊임없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한 번도 내 엄마의 욕망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았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오빠는 일본 학교 댕겼는디 언니도 댕겼는디 왜 나만 안 보냈을까? 불 꺼진 것만치로 캄캄하게, 평생을 캄캄하게 (...)"(72). 엄마처럼 살기 싫은 건 '너'뿐만 아니라, 엄마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그'(아들)의 기억 속의 엄마는 아들에게 지워진 가족의 짐을 한없이 미안해하면서, '당신'(남편)의 기억 속의 엄마는 짐이 되는 가족을 고스란히 보듬는다. 엄마의 노동,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엄마는 미안한 마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원망도, 분노도, 그리움도 모두 노동으로 표현한다. 쓸고, 닦고, 치우고, 다듬고, 씻고, 썰고, 끓이고, 빨고, 널고, 붙이고, 떼어 내고, 그렇게 가족을, 생명을 돌본다. 엄마의 돌봄. 노동으로 너덜너덜해지고 연약한 육신이 마모되어 가는데도 엄마의 노동은 그칠 줄 모른다.

엄마의 노동과 돌봄을 안전망으로 살아온 우리는 "엄마가 필요해!"라는 한마디 말로 엄마를 여전히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 묶어두려 하고 있는지 모른다. 연인에게 하는 "네가 필요해!"라는 말은 사랑고백이다. 그러나 "엄마가 필요해!"라는 말은 사랑고백이 될 수 없다. 신경숙이 그리는 '엄마'의 모습이 불편하고, 엄마의 그런 모습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엄마는 왜 항상 헌신과 희생으로 대변되어야 하는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만이 엄마로서 대우받고, 뿔이 나서 집을 나가는 엄마는 비난 받아야 마땅한가? 희생하고 헌신하는 엄마상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그려내는 것은 희생과 헌신의 굴레에서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 아닌가?

그러나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달라는 신경숙의 부탁을 받고, 여기저기서 '엄마'를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목격자들이 보았던 '엄마'의 모습은 모두 파란 슬리퍼를 신고, 엄지 쪽 발등이 깊이 패어 빼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상처가 곪아터지고 또 터져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다. 전문가(약사)는 염증이 오래되어 농이 계속 흘러나오고, 냄새도 지독히 난다고 말한다. 엄마의 모습은 어떠해야 한다는 논란에 앞서 우리에게 목격되어지는 엄마의 모습은 신경숙의 잃어버린 엄마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엄마의 삶에 관한 진실이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유일하게 '나'일 수 있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너'도 '그'도 '당신'도 기억을 더듬어 엄마를 찾아 헤맬 때, '나'가 된 엄마가 찾아간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엄마처럼 엄마로 살고 있는 '작은 딸'이다. 더 맘껏 자유로워지기를 바란 딸인데 그 딸이 '나'처럼 새끼를 셋이나 품은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작은 딸은 제 새끼를 돌보느라 잃어버린 엄마를 마음 놓고 찾아다닐 수도 없었다. 자신처럼 세 아이를 길러야 할 딸의 인생을 생각하며, 그 짐마저 엄마인 자신이 덜어주고 싶어 했던 엄마는, 이렇게 딸을 찾아와 그 지친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여 쉬게 해준다. 엄마는, 엄마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254).

'장미 묵주'는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장미 묵주, 엄마는 구원자를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엄마의 삶에서 엄마를 구원해줄, 잃어버린 엄마의 삶을 찾아줄 구원자말이다. 신경숙은 그 엄마를 부탁한다. 우리에게. 엄마를 찾아달라고. 그리고 엄마를 돌봐달라고. 더 늦기 전에.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너덜해진 엄마의 삶이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울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잊고 지내던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게 만든다. 이미 엄마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래서 다시는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그리움과 후회로 터질 듯한 가슴의 통증을 여러 날 달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살을 파먹고 살았던 자식이라는 깨달음이 주는 미안함은 가해자나 피해자로서의 죄책감이 아니다. 자식은 가해자이고 엄마는 피해자라는 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가장 숭고하고 순결한 사랑에 대한 눈뜸이다. 엄마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을 내게 주었던 '엄마'에게 이제 나도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애절함이다.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게 사랑인줄 모르는,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할 줄 모르는 냉정한 연인을 깨우듯, 신경숙은 그렇게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고 있다. 어떤 사상이나 관념이나 도덕률이나 당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초의, 원시의 사랑으로 이성이 아니라 마음으로 반응하고 소통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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