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르리라 - 작은 교회 희망의 씨앗
이태형 지음 / 좋은생각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어느 교수님이 들려주신 고백이 기억난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치열하게 살아오신 교수님은
결혼하여 단란한 보금자리를 꾸미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 온 가족의 감격 속에 
3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하던 날, 너무 좋아서 꿈꾸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초대를 받고 한 지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집이 100평대 빌라였단다.
어림잡아도 주방 크기만 30평은 족히 넘어보였다고.
교수님은 자신이 평생을 고생해서 겨우 장만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아파트가
어떤 집의 부엌보다도 작다는 생각에 오래도록 몹시 우울했다고 고백하며 씁쓸해하셨다.

이렇게 우리의 행복은 30평, 100평이라는 소유의 숫자와 크기로 가늠될 때가 많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에서 말한 것처럼,
창문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에 비둘기가 있는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이라고 하기보다,
수억 원대의 집이라고 해야 비로소 그 집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그려지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 모두가 말하는 행복의 길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높아지려고 다투며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 세상에서 스스로 낮아진 사람들,
편안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땀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
가족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개인화 되는 세상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
가진 것이 작아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세상의 풍토와 문화를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들,
바로 작은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이웃과 삶을 나누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성숙과 성장을 '성공'과 혼동하며 사는 나는 감히 이분들의 삶이 '부럽다'는 말을 못하겠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 앞에 숙연해질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 다시 묻는다. 
분초를 다투며 치열하게 사는 나는 지금,
행복한가?
배부른가?

작은 교회의 행복을 소개하는 <배부르리라>는 '작은 것'의 예찬이 아니다. 
진정한 가치의 발견이고, 
욕심으로 어두워진 눈을 밝히는 것이며,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성육신의 참된 뜻이다.
신앙, 사랑, 진정성, 삶, 행복이라는 단어들과 정직하고 진지하게 마주하게 한다.

세상을 거스릴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땅을 일구고 희망을 일구는 '작은 교회'의 사역에서 나는 어떤 해답을 찾았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이 깊이 마음에 새겨진다.
죽을 때까지 아브라함이 법적으로 실제 소유한 땅은 아내를 묻은 막벨라 굴이 전부였다.
그러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풍요를 누렸던 아브라함처럼,
<배부르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풍요를 이미 누리고 있는 '작은 교회'를 목도하며,
참 많이 행복했고, 피어나는 희망으로 마음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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