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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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TV 방송 중에 '카메라가 보고 있다'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마트 내에 설치되어 있는 CCTV에 찍힌 만비끼(まんびき: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사람)를 보여준다. 방송을 보면 별의 별 만비끼가 다 등장하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대충 걸친 것 같은 옷 안에 참으로 많이도 집어 넣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이다. 
방송에서 눈에 띄는 점은 그들 대부분이 노인들이나 부녀자라는 사실이다. 내게 없는 것을 보충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남의 것을 집어 오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은 물론 동정 받을 가치는 없지만 그들이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은 있어 보였다. 

『쓰리』는 처음엔 목적이었지만 어느새 사슬이 되는 욕망이 그들 각자의 인생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
등장하는 인물 중 화자인 니시무라, 이시카와(신미), 기자키는 '소매치기' 세계에 속한 인물들로 책은 이들의 제각각 다른 욕망을 보여주는데 이들 중 특이한 인물은 이시카와다.
가진 자들이 소유한 것(=돈)을 훔쳐내는 것, 즉 그 행위 자체에 기쁨을 느낀다는 이시카와는 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소매치기하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대부분 어느 해외 단체에 기부해버린다. 그런 점에서 '소유라는 개념이 없으면 절도라는 개념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시카와는 일견 욕망을 채우기 위해 소매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매치기를 하기 위해 욕망을 비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느 사건에 연루되어 해외로 도피했다가 신분을 세탁하고 신미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 이시카와의 욕망과 얽힌 인물이 바로 니시무라다.
책은 시작부터 니시무라가 소매치기 하는 장면을 집요하게 보여주는데 그 장면들이 색을 거세한 흑백화면처럼 보이는 것은 작가의 건조한 어조 탓이 크다. 
이시카와와 달리 니시무라는 사에코를 잃은 후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거리로 나가 닥치는 대로 남의 주머니를 탐했고 나중에 그의 손에는 영수증 조각까지 들려 있었다는 장면까지 읽다 보면 그의 행위가 타인의 소유물에 묻어 있는 타인의 욕망을 훔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연장으로 니시무라가 수퍼에서 우연히 만난 만비끼 모자, 그중 아이와 나누는 잠깐의 대화에 나오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끝은 대개 마지막이 비참하다'는 말은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욕망은 빈 껍데기라는 것을 니시무라도 알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기자키는 이사카와와 니시무라 두 사람에 비하면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하고 그래서 가장 능동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욕망과 행위가 감상적인 불순물이 없이 서로 직선으로 닿아 있는 기자키에겐 거칠 것이 없고 때문에 한 발은 물에, 다른 한 발은 땅에 딛고 선 사람들이 풍기는 특유의 위태로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카와나 니시무라에겐 무엇보다 두려운 존재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기자키의 욕망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순수한 욕망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결말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처럼 보인다. 

처음『쓰리』라는 제목을 봤을 때, 나는 '3'이라는 숫자를 떠올렸는데 친구는 곧장 '소매치기' 아니냐고 했다. 혹시나 해서 책 속 출판 정보를 확인했더니 정말 원제가 '쓰리'(SURI)다. 이 단어가 일본어인 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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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외에는>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죽음 이외에는 머독 미스터리 1
모린 제닝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피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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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TV에서 본 <셜록 홈즈의 눈물>이라는 영화가 여전히 인상적인 영화로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전반에 걸친 어둡고 음울하고 엽기적인 정서 때문이다. (검색 해보니 비디오로 출시된 제목은 <살인 지령>이다)
매음굴에서 여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셜록 홈즈가 사건을 쫓는데 단순한 치정 살인인가 했던 사건은, 점차 사건의 중심에 부패하고 잔혹한 권력이 연루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셜록 홈즈의 눈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사건 전체를 파악한 셜록 홈즈가 분노하는 장면이었는데, 부패한 권력이 벌이는 그들만의 잔치에 사회의 가장 최하층이라고 할 수 있는 매춘부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분노였다. 여기엔 사건의 전말이 모두 드러났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성역에 대한 분노도 포함된다.
소위 말하는 셜록키언은 아니지만 '셜록 홈즈'를 읽은 이래 나는 아마 그때 처음으로 셜록 홈즈가 어둡고 피폐한 탐정 소설이었던가 의심했던 것 같다. 실제로 어려서 읽은 셜록홈즈는 사건의 미스테리를 푸는 탐정의 활약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최근 다시 읽은 셜록 홈즈는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둘러싼 군상들의 모습과 당시 사회의 분위기가 눈길을 끈다. 

섬나라는 대륙과 달리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육로가 끊어지는 데서 오는 폐쇄성과 고립성 때문인지 유독 엽기적인 사건이 많은 듯 느껴진다. 모린 제닝스의 추리소설『죽음 이외에는』의 배경은 캐나다지만 영국 태생인 로즈 부인의 청교도적인 분위기나 눈이 펑펑 내리는 얼어 죽을 듯 차가운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으로 인해 안개 자욱한 영국의 음울한 정서가 연상된다. 여기에 더해 추운 겨울 밤 나체로 얼어 죽은 채 발견된 어린 소녀의 신분과 종교로 인해 시작부터 편견과의 힘겨루기를 하는 머독 형사의 모습 역시 우울하게 다가온다. 
지금이야 인터넷의 보급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온갖 엽기적인 사건 사고들을 접하면서 '엽기'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만도 하지만 여전히 청교도적 정서의 영향을 받았던 19~20세기 초반의 유럽은 어땠을까. 아마도 어리고 예쁜 하녀가 추운 겨울 거리에서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 큰 파문을 일으켰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도 아이를 임신한 상태이고 사체에서 마약 성분이 발견되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범죄는 보통 생계에서 비롯된다. 먹고 살려고, 죽지 않으려고 벌이는 생계형 범죄가 대부분이다. 반면 가진 사람들의 범죄는 대개 그들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불행은, 가진 사람들의 탐욕이 불러 들인 비극에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자신의 탐욕을 다스리지 못해 벌어지는 (소위)'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범죄야말로 엽기적인 것이 아닐런지. '일어나지 않아도 됐을'과 '일어날 수 밖에 없었을'의 간극은 뚜렷한데, 전자(가진자)는 개인의 책임이고 후자(가지지 못한 자)는 사회의 책임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셜록 홈즈의 눈물>에 비하면 (대체로) 권선징악이라는 결론에 이르는『죽음 이외에는』는 그나마 희망적이다. 
'머독 시리즈'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모린 제닝스의 탐정 추리소설이 TV시리즈로도 제작, 방영되었다니 언제 기회가 있으면 한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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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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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성장소설'이라는 타이틀만 붙이고 말기에는 책 전체에 걸쳐 밑줄을 긋고 싶게끔 만드는 곡진하게 다가오는 문장과 표현들이 참 많다.
처음 보는 작가의 소설을 대하는 기분은 기대 없이 나간 소개팅이랄까, 그랬는데 막상 페이지 수가 늘어갈수록 이 작가를 향한 호감이 깊어지고 종내에는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슬람 정육점』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인상을 풍기는 이 소설은 최근 몇 년 새 부쩍 흔해진 새로운 표현인 '다문화'와 (유사 형태의)대안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에 대해 부연하면 무슬림인 하산이 정육점을 하고 돼지고기를 직접 손질해서 판다는 내용은 그 자체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공존, 공생, 화합을 말하고자 하는 상징인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화자인 '나'가 몇 살인지 혹은 순수 한국인인지조차 알 수 없는 채로 끝을 맺는 소설은 몇 곳 고아원을 전전하다 하산을 따라 서울 어딘가 높은 지대의 동네로 오게 된 '나'의 시선을 통해 '안네의 일기'를 '안내양의 일기'로 잘못 읽었다는 안나 아줌마, 전쟁으로 입은 상처와 공포를 피해 또 다른 전쟁(한국전쟁)으로 도피한 야모스, 잃어버린 기억을 타인의 기록으로 채운 대머리,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말더듬이 유정, 말 그대로 '맹랑'한 맹랑한 녀석 등 소외된 이들, 비주류로 낙인찍힌 이들의 일상과 내면을 보여주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벙어리 신부님 일화였다. 전체 분량에 비하면 아주 짧은 얘기였지만 울림이 꽤 크고 깊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흉터'와 '그림자'를 들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흉터에 대한 비밀은 끝내 비밀로 남지만 뭐 어떠랴 싶기도 하고. 안나 아줌마 말대로 모르는 게 약이고, 모든 것을 꼭 다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이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이들 가운데 백 년 뒤에도 이곳에서 숨 쉴 자는 단 한 명도 없단다. 우리 모두 이 아름다운 하늘과 땅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이곳을 떠나야 하는 존재들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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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 대역본> 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대역 (영문판 + 한글판 + MP3 CD)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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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는 자연이고, 가장 좋은 교육자 역시 자연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나 어렸을 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배경은 아무래도 어린 시절 상당한 기간을 시골 외가에서 보낸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나를 주체로, 세상을 객체로 인식하기 시작할 즈음인 여섯, 일곱 살의 대부분을 시골 외가에서 보낸 것은 내 정서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시골에서 보냈던 유년의 기억은 지금도 뚜렷한데 이를테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개구리를 잡으러 논두렁을 헤집고 다니던 거나, 어느 여름 장맛비에 내 키만큼 범람한 강물에 떠내려가던 돼지가 마냥 신기하기만 하던 것, 상여를 쫓아 길게 이어지던 행렬이 어린 마음에도 아련했던 것 등등 내 유년은 도시의 아이들은 경험하기 힘든 재미있고 특이한 추억들로 가득하다. 여담이지만 그중에는 닭과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는데, 그러니까 국내 영화 <귀신이 산다>에서 배우 차승원이 닭을 무서워하는 장면을 보면서 진심으로 공감했던 나는 말하자면 '닭 포비아(phobia)'다, 사연은 이러하다. 집 앞 개울가에 빨래를 하러 가기 전 이모가 막 쪄낸 고구마를 내 손에 쥐어주었는데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내 고구마가 절반이나 사라지고 말았다. 도둑의 정체는 닭이었다. 뻔뻔한 닭은 내 고구마를 절반이나 먹어 치우고도 도망가기는커녕 정체불명의 머리통을 전후좌우로 까딱이면서 나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는데 당시 여섯 살이었던 내가 다음에 했던 행동은 뻔하다. 쪼그만 몸 어디에 그런 소리가 숨어 있었는지 나는 목청껏 울어 젖혔고 근처 개울가에 빨래를 하던 이모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원제가 '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이고 번역 제목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인 이 소설의 화자는 '작은 나무'(Little Tree)다. 부모님을 갓 여의고 조부를 따라 산으로 온 다섯 살 소년 '작은 나무'의 성장소설인 이 소설이 특별해지는 지점은 '산을 내려오다'(p.526)와 이어지는 '집으로 돌아오다'(p.618) 챕터이다. 공권력의 판단에 의해 작은 나무가 조부모와 산을 떠나 고아원으로 옮겨 가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보여줌으로써 흔히 제도권과 주류로 분류되는 사회의 가치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만 보이는 소소한 일상의 가치를 또렷하게 변별할 수 있게 한다.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공생하는 것을 배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묘사(p.193)를 통해 자연의 생장과 인간의 생장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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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깨달음>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젊은 날의 깨달음 -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
혜민 (慧敏)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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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주변에 나무도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으면, 소리가 날까?"(p.27,『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나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한동안 교회에 열심히 나가셨는데 그러다 또 한동안은 절에 다니셨다. 지금은 어느 한 종교에 적을 두지 않고 다만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불교에 (아주)조금 더 친밀감을 느끼시는 듯 한데, 제사가 이유라면 아버지의 종교는 '유교'여야 되지 않을까 싶지만 어쨌든 매번 종교를 향한 아버지의 방향 전환은 매끄러웠다. 반면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엄마는 종교 없이 이십대를 보내고, 우리를 낳은 뒤로 (개신)교회에 열심히 나가시더니 지금은 카톨릭 교회에서 영세를 받고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서 미사를 올리는 카톨릭교인이시다. 부모님의 종교 역사를 굳이 꺼내는 이유는 말하자면 종교에 관한한 비교적 유연하셨던 부모님 덕에 나 역시 종교간 경계에 비교적 자유로운 잣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 내 mp3 목록에는 CCM과 반야심경, 천수경 등이 사이좋게 함께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던 중에 특히 눈에 띄었던 구절이 다음 구절이다.

(…전략)교리에만 집착하면 종교 간의 건널 수 없는 차이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실제 실천 수행으로 들어가면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을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발표했다. - p. 119

언제부터인가 종교의 의미와 역할보다 종교인의 의미와 역할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내 종교는 정교요, 네 종교는 이단이라 목소리를 높이고 손가락질 하는 양태를 심심찮게 본다. 사회가 분화하고 다변화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의 한 단면이려니 이해하면서도 가끔 본질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껍데기가 설치는 세상이 되었나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혜민 스님은 이번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저자의 약력을 먼저 읽고 책을 펼치면서 한 때 내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 그 의미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물론 저자가 아닌 내가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나 책을 읽어가는 동안 다만 한 가지,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절대적인 무엇. 그것이 종교를 통한 구원이든, 절대자에게 복종하는 믿음이든, 자신의 내면을 향한 정진이든... 세상의 복잡한 욕심과 번뇌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나려는 한 출가인의 기꺼운 그 걸음이 부러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이후는 아포리즘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 책 전반이 그러하다. 책을 읽는 내내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는 편안한 기분이 든다. 
百人百色이라고 했다. 행복의 추구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적인 면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러니 누구의 선택, 누구의 방법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자리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도움을 줄 때 우리들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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