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사랑하는 남녀가 나오는 소설이나 영화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였는 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다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런 소설이나 영화를 본 게 언제지? 스릴러 소설을 읽다가 주인공 남녀가 연애하는 이야기야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으니까 휘리릭 읽어버리는 것이고... 온전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보지도 읽지도 않고 있구나...  마음에 구멍이 난 듯 바람이 스산하게 스쳤던 기억이 난다. 왜 이렇게 삭막해진 것이냐 비연. 예전엔 안 그랬잖은가...

 

맞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몹시 좋아했다. 특히나 애잔한 이야기들. 이루어질듯 말듯한데 이루어지지 않는 슬픈 결말의 사랑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작가나 감독이 펼치는 그 이야기들이 내 감정을 막 쥐고 흔들어서 눈물 뚝뚝 가슴 미어짐으로 며칠을 헤매는 적도 많았던 나란 인간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냐... 몰라. 어쨌든 지금 상태는 그렇다는.

 

그래서 이 책을 사놓고도 제목에 떡하니 박힌 '사랑'이라는 두 글자 때문에 계속 읽지 않았던 것 같다. 뭔가 끌림은 있는데 선듯 손을 내밀어 잡기는 싫은 느낌. 근데 가을이 와서인가. 하늘이 너무 파래서, 구름이 너무 하얘서, 어쩌면 코로나가 주는 약간의 저기압 때문에 이 책을 집어들었나 싶다. 처음에는 외로운 할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하길래 사는 외로움에 대해 마음 깊이 느끼며 읽기 시작했는데 시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여러 사람들이 나오고,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이 마지막에 하나로 모일 때 아 이건 정말 애절한 사랑 이야기구나.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따스한 뭉클함이랄까..가 느껴졌다. 

 

이런 사랑 싫은데. 어릴 때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러나 운명은 잔혹하여 역사의 휘몰아침 속에 헤어지게 되고, 여자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남자는 그 여자를 평생 사랑하며 기다리며 혼자 외롭게 늙어간다. 그녀와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에 자신의 전력을 쏟고는, 그렇게 시들어간다. 이런 사랑 싫다. 또 한번 되뇌면서도.. 괜히 슬퍼진다. 가을이라 그런가.

 

사랑은 뭘까. 그 사람이 나에게 특별해지는 순간. 첫눈에 반할 수도 있고 그저 그렇게 잘 지내다가 어느 순간 가슴에 확 꽂힐 수도 있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고 나서 쭈욱 상승기류를 타다가 세월이 점차 지나 그 사랑이 낡아가는 과정이 싫었다. 낡음의 끝은 권태기인지. 그 전에 헤어지게라도 되면 뭔가가 남아 그 사람에게 낡음 대신 그리움을 덧붙이게 된다. 낡아가는 것도 싫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긴 그림자인 그리움은 더 힘들고 싫다.. 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레오 거스키는 평생을 그런다.

 

 

옛날에 소년이었던 남자, 살아 있는 동안 절대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남자가 그 약속을 지킨 것은 고집스러워서도 심지어는 충실해서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삼 년 반을 숨어 지내고 나니,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아들에게 품은 사랑을 숨기는 것이 생각할 수도 없는 일 같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하나뿐인 사랑일 여자를 위해 그래야 한다면, 어쨌거나, 완전히 사라져버린 남자에게 한 가지를 더 숨기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p26)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게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난 그(녀)를 그리워할거야, 사랑할거야, 영원히 변치 않을거야 결심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 그럴 수 밖에 없음이 그런대로 지탱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둘이서 죄스러운 비밀을 함께 나눈 것 같았다. 전에도 그애를 날마다 학교에서 봤지만 특별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대장 노릇을 하려 드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구석도 있었다. 그러나 그애는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중략) ... 하지만 이제는 그애가 다르게 보였다. 그애의 특별한 힘을 인지하게 되었다. 자신이 선 곳으로 빛과 중력을 끌어당기는 듯한 힘. 전에는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발가락이 살짝 안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p195)

 

 

사랑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추억 어느 한 귀퉁이에 묻어 두었을 이 찰나의 순간. 사랑이 마음에 드는 순간. 여러 장면이 머릿 속에 스친다. 가을이라 그런가보다. 상념이 많아졌다. 사랑도 싫고 그리움도 싫은데 말이다. 지금도 싫지만, 앞으로도 싫겠지만, 그냥 지금은 따스하게 흘러가는 마음을 그대로 두며 커피 한잔에 이 생각 저 생각 해본다. 어쩌면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잘 꾸려낸 작가의 글솜씨도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기운에 취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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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0-12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싫다고 하신 분이 쓰셨다고 하기에는 너무 사랑스러운 사랑 이야기네요. ㅎㅎㅎㅎ 비연님 머릿 속 스친 생각들이 더 궁금합니다.
비연님 덕분에 저는 굿모닝이에요!

비연 2020-10-12 12:38   좋아요 0 | URL
그저 스산한 느낌이 스쳐서... 제 덕분에 굿모닝이라니 다행임다, 단발머리님^^

레삭매냐 2020-10-12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내 삶의 전부˝에도 유효기한이
있는 지 작가에게 물어 보고
싶어지더라구요.

지금은 아닐테니깐요. 책을 읽
다 말았네요. 다시 읽어야 하나
어쩌나...

비연 2020-10-12 12:39   좋아요 0 | URL
다시 읽어보세요, 레삭매냐님~
끝까지 읽으면.. 맘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