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를 봤습니다. 이 스토커stoker는 그 스토커stalker가 아니지만 알고 보면 그 스토커stalker입니다. 엄마 스토커, 열여덟생일을 맞은 딸 스토커, 열여덟생일날 죽은 아빠 대신 나타난 삼촌 스토커, 죽은 아빠도 스토커, 암튼 스토커가의 이야기이니까 스토커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이 중 두 명은 알고 보면 그 스토커인 진정한 스토커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진정한 사냥꾼이기도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스타일의 영화라고 느껴집니다. 스토커를 가지고 치는 말장난과 중의적 의미들, 배우들이 하나같이 풍기는 그로테스크함, 영화의 에로틱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피아노곡들, 스토커가의 저택의 구조와 조명과 가구들과 계단(계단은 딸 인디아 스토커와 엄마 이비 스토커의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됩니다)과 문들(열린 문과 닫힌 문, 이쪽 문과 저쪽 문, 이쪽 문에 선 사람과 저쪽 문에 선 사람의 운명의 변화와 엇갈림), 모두 어느 하나 무심히 만들어지고 무심히 배치되고 무심히 사용되는 것이 없습니다.
인디아 스토커가 이비 스토커의 머리를 빗겨주던 장면이 아빠와 사냥하던 숲의 장면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넘어가던 장면도 확실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내가 놓쳤을 지도 모르는 모든 것이 다 섬세하고 철저하게 의도된 감독과 배우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제 박찬욱의 절정에 달한 이 스타일의 표현이, 가득찬 상징들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집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상징이 아무리 빼어난 스타일로 표현되었다해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는 알아맞힌 것 이상의 감흥이 저 스스로에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해석의 폭이 비교적 좁은 상징보다는 질문의 폭이 비교적 넓은 함의가 담긴 영화들을 저는 대체로 더 좋아해왔으니까요.
바로 어제 얘기했던 <케빈에 대하여>와 어쩌면 마...찬가지로 <스토커> 속 모녀의 관계 역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형태의 일반적인 모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진 않습니다. 이야기의 중심 역시 그러한 모성애는 아니고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장치에 불과해보입니다. 물론 감독이나 각본가가 의도한 다른 의도를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모든 설정이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와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박찬욱 감독의 명백한 의도이기도 할 듯 합니다. 감독의 스타일과 상징들의 총체라는 점에서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도 비슷한 맥락에 두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과 상징들이 이젠 조금 지겹다는 말을 하고 있는 저의 생각들이 전적으로 취향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듭니다.

이런 의문도 듭니다. 남들이 못 보는 것까지 보고 못 듣는 소리도 듣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소녀는 왜 결국 자기 안의 폭력성과 악마를 인정하는 길에 있는 걸까 하는 겁니다. 뛰어난 사냥능력을 가진 자라면 아무래도 이 능력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착한짓보다 나쁜짓이 더 적합하기 때문인 걸까요. 스타일상 착한짓보다 나쁜짓이 더욱 시각적으로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표현 가능하기 때문인 걸까요. 그러니까 결론은 다시 한 번, 역시 스타일에 대한 취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화 후반부 이비 스토커의 자식에 대한 대사는 누구를 쳐다보고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이냐에 따라 똑같은 말이 굉장히 섬뜩한 말이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통쾌한 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시선을 통해 착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디테일들을 떠올리며 곱씹을수록 박찬욱 감독이 얼마나 섬세하게 많은 것들을 영화에 심어두었는지가 느껴집니다. 특히 수미쌍관으로 배치해둔 장면돠 대사, 마지막에 흐르는 음악은 정말이지 섬뜩함을 더합니다. 자막으로 나오는 가사를 보며 원래 있던 음악이라면 다르게도 해석됐을지 모를 이 가사가 영화의 엔딩과 만나니 너무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찾아보니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음악 같았습니다. 아아 끔찍해라! 암튼 이런 쪽으로는 도가 튼 것 같은 박찬욱 감독, 내가 본 그의 필모 중에는 유일하게 특유의 유머감각도 쪽 빼고 철저하게 살벌하게 만든 이 영화는 얘기할 거리들이 많지만 막 그렇게 좋아하기는 조금 버겁습니다. 늙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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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임신한 친구들이 가끔 너희도 빨리 결혼하고 임신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 모르니까 이야기해도 잘 모르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인생의 속도가 비슷하면 만났을 때 공감대도 더욱 커지고 같이 나눌 얘기도 많다고 합니다. 분명 그렇긴 할 겁니다. 아마 여자의 결혼과 남자의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다를 거고, 엄마가 되어본 여자와 엄마가 되지 않았거나 되지 않을 여자가 또 다를 겁니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가슴이 이렇게 철렁한 것은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영화 연출자가 여자라는 점, 그리고 아빠보다는 엄마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점, 그리고 관객인 나 역시 여자이고 잠재적인 엄마라는 점은 과연 이 영화를 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친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너도 빨리 결혼하고 임신해서 자기랑 같이 얘기하자고 했던 친구의 말이. 분명 지금 이 영화를 보는 것과 혹시라도 나중에 엄마가 된 후 이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다른 일이겠지 싶습니다, 친구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친구의 말 속에는 너는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서 경험해본 사람만큼은 잘 모를 거라는 뜻이 포함돼 있는 거니까요.

영화는 스페인 토마토축제 현장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시뻘건 으깬 토마토들 사이에 자유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에바가 그 틈에 있습니다. 이미 으깨어져 본래의 형체를 잃어버린 시뻘건 토마토들은 감독의 명백한 의도대로 마치 사방에 흐르는 피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에바가 만끽하는 명백한 자유가 명백하게 불길한 기운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후 엄마인 에바가 무기력하게 누워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에바의 집과 차를 누가 시뻘건 페인트로 어지럽게 칠해놓은 것에서 시작하고, 길 가다 난데없이 뺨이 시뻘게지도록 따귀를 맞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과거의 생기 넘치던 에바는 이제 누구보다 시든 파같은 몰골로 직장을 구하고 장을 보고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분명히 다정한 남편과 애교 넘치는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소파에도 혼자 누워있고 모습도 엉망이고 집과 차에 칠해진 페인트도 혼자 치우고 있고 그 누구도 곁에 없습니다. 그나마 에바에게 관심을 갖고 일도 도와주며 호의를 보여주던 직장동료마저 겨우 춤 한 번 거절당했다고 에바에게 참 나쁜 말을 속삭입니다.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영화를 볼수록 불길해집니다. 이쯤되면 <케빈에 대하여>는 최고의 스릴러 영화입니다. 난데없이 에바와 프랭클린 사이에 생긴 아이는 보통의 아이와 좀 다릅니다. 엄마를 싫어하고 엄마한테만 못되게 굽니다. 함께 사는 남편도, 전문가인 의사도, 케빈은 사랑스러운 보통의 아이라고 말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에바에게는 유독 사납게 굽니다.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사람들이 에바만을 이토록 비난하고 심지어 저주하는 것을 보면, 사실은 케빈이 보통의 아이와 좀 다르게 된 것보다 에바가 보통의 엄마와 좀 달랐던 것이 먼저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릅니다. 린 램지 감독은 실제로 "내 아이가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 두려움" 때문에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감독은 케빈이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난 것은 그리고 더 안 좋은 아이로 자란 것은 보통의 엄마와 달랐던 에바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듭니다.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유랑하던 에바에게 임신은 프랭클린에게처럼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아기를 가졌을 때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러웠을 사람이 실제로도 적진 않겠지만 일단 낳기로 하면 대개는 모성애에 의해 자연스럽게 아기를 사랑하게 됩니다만, 에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에바는 조금도 기쁘거나 반가워보이지 않았습니다. 육마의 과정마저 험난합니다. 에바도 모두가 당연하게 기대하듯 모성애 넘치는 엄마가 아니지만, 케빈도 여느 아기처럼 사랑스럽기만 한 아기가 아닙니다. 가끔 엄마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엄마가 아끼는 것들만 골라 망쳐놓는 케빈의 눈빛과 마주칠 때는 섬뜩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케빈이 커갈수록, 그 섬뜩한 눈빛은 조금씩 나쁜 짓들로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영화가 주는 긴장감이 극도에 달해가면서 실제로 사건도 더는 나쁠 수 없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을 때, 에바가 왜 혼자 그 길고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지를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은 끔찍하게도, 만약 나에게 저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일이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일어났으니까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세상에 그 어떤 극악무도한 놈에게도 엄마는 있으니까요. 그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요. 아이에게 다른 엄마들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사랑을 주지 못했던 엄마라면 또 어떤 마음일까요. 많은 사람이 그 아들의 잘못이 엄마탓이라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무엇보다 그 자신 스스로가 가장 자신을 비난하고 저주하는 주체라면 어떤 마음일까요. 그녀가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오로지 케빈에게 "왜 그랬냐"고, 너무나 묻기 어려웠고 대답을 듣기도 두려운 그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저 수없이 많은 질문이 온 몸에 소름처럼 돋아나지만 차마 '나라면'으로 시작되는 대답을 마련할 수 없고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도, 다 보고 나서도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결국 에바는, 이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케빈을 가장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 됩니다. 드디어 눈을 제대로 맞추고 질문을 던졌을 때 한 번도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았던 아들은 가장 솔직한 대답을 줍니다. "그 때는 아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정말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틸다 스윈튼과 이즈라 밀러의 연기에 감탄하면서도, 틸다 스윈튼은 에바로, 케빈의 엄마로, 이즈라 밀러는 케빈으로, 에바의 아들로 영원히 제 가슴에 박제되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모 과장은 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누가 꺼냈다는 겁니다. 이상하다는 이유가, 대부분의 아기 엄마들이 핸드폰 메인화면에 자기 아이들을 넣어두는데, 그 여자과장은 자신의 셀카를 넣어놨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성적으로는 엄마는 무조건 아이들 사진을 핸드폰 메인에 넣어놔야 하는 거냐고, 아빠가 아이들 사진을 안 넣어놨어도 그렇게 말했겠냐고, 엄마가 되면 자기 자신은 없어지는 거냐고 발끈했지만 그와 동시에 나라면 과연 그랬을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 단순한 일화가, 지금에 와서 무척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겨우 핸드폰 메인화면에 아이들을 넣어두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갖고도 그녀의 모성애를 판단하고 또 많은 경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감히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모성애'란 단어에 이토록 진지하고 무서운 질문을 던진 원작의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 린 램지와 틸다 스윈튼, 그리고 이즈라 밀러가 정말 굉장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질문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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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상 역시 꽤나 오래됐습니다. 이제 더이상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없고 또 고향집에는 현재 제가 살고 있지 않기에 책상이지만 책장으로서의 역할이 더 커져버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책장 위에는 유치원 졸업사진과 고등학교 방송제 때 선물받았던 액자가 놓여있습니다.

 

가장 위칸에 꽂힌 책들은 한국소설들입니다. 그대의 차가운 손(한강), 녹천에는 똥이 많다(이청동),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풀밭에서(조세희), 풍금이 있던 자리(신경숙), 홀림 / 궁전의 새 / 인간적이다(성석제),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양귀자), 원미동사람들(양귀자), 오빠가 돌아왔다(김영하),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하성란), 투견(김숨), 여관(한차현), 위험한 독서(김경욱), 지문사냥꾼(이적), 유맹(손창섭), 미칠 수 있겠니(김인숙),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최인호), 지구영웅전설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카스테라 / 핑퐁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꾿빠이, 이상 / 밤은 노래한다 / 세계의 끝 여자친구(김연수), 남한산성 / 공무도하(김훈)이 있습니다.

 

그 아래칸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몇 권 있습니다. 동물 농장(조지 오웰), 다섯째 아이(도리스 레싱), 삶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모래의 여자(아베 코보), 1984(조지 오웰), 위대한 개츠비(스콧 피츠제럴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인생의 베일(서머싯 몸), 인어의 노래(발 맥더미드), 네번째 손(존 어빙),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리브카 갈첸), 천 명의 백인 신부(짐 퍼거슨), 스틸 라이프(루이즈 페니), 9,990원(프레데리크 베그베데), 더로드(코맥 매카시), 휘트먼의 천국(마이클 커닝햄), 가면의 생(에밀 아자르), 작은 것들의 신(아룬다티 로이),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사샤 스타니시치), 신도 버린 사람들(나렌드라 자다브), 이청준 문학상 수상 작품집(이청준 등저), 청동기(장용학), 김승옥(서울 1964년 겨울), 이상문학 전집_수필(이상/김윤식 편저), 김수영 전집_산문(김수영)이 있습니다. 김수영 전집은 한자가 너무 많아서 읽기가 힘들어요 ㅠㅠ

 

또 그 아래칸에는 열하일기1~3(박지원),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 오름 오르다 /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 남해 금산 / 그 여름의 끝 /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 아, 입이 없는 것들 /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성복),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마르셀 프루스트), 기형도 전집 / 기형도 산문집_ 짧은 여행의 기록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입속의 검은 잎(기형도), 행복의 건축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일의 기쁨과 슬픔 / 동물원에 가기 / 우리는 사랑일까 / 불안 / 여행의 기술(양장)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에라스무스, 사랑에 빠지다(페터 회) / book+ing 책과 만나다(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가 꽂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칸에는 월간뱀파이어1 '2' / 2 '너와 나의 20세기' / 4 'mp3' / 5 '지혜롭고아름다운사람을포기하는법' / 6 '빛으로만들어진도시'(모임 별), 불안하니까 사람이다(김현철), 아뿔싸, 난 성공하고 말았다(김어준, 이석원, 신경민 등저), 건투를 빈다(김어준), EBS 다큐멘터리 동과서_ 서로 다른 생각의 기원(EBS 동과서 제작팀, 김명진 공저), 지식e1~4(EBS 지식채널e), 다윈의 식탁(장대익),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리처드 스위프트), 세계화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카를-알브레히트 이멜), 탐욕의 종말(폴 메이슨), 사다리 걷어차기 /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미디어 모노폴리(벤 H. 바그디키언),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 여적(경향신문사 편집부),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홍세화), 당신들의 대한민국(박노자), 뉴레프트리뷰(알랭 바디우 등저), 인사이트 지식사전(조선경제i 연결지성센터),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 논리-철학 논고(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더 건방진 우리말 달인 / 건방진 우리말 달인(엄민용)이 꽂혀 있습니다.

 

역시 아직 못 다 읽은 책이 좀 있지만 쳐다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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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2 0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rma 2015-05-0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간뱀파이어는 저에게도 소중합니다 :) 의외로 팔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월간뱀파이어 몇 호를 말씀하시는 건지 알려주시면 혹시라도 제가 구해보고 알려드릴게요-!

Withmithra 2014-12-2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비밀댓글이라 혹시라도 글 쓰신 분이 남기신거면 파실 수 있으시면 문자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꼭이요ㅠㅠ

2014-12-23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5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rma 2015-05-05 00: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월간뱀파이어는 저에게도 소중합니다. byul@byul.org로 직접 문의해보시면 아마 조태상님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실 거예요-! :) 어려우시면 제게 말씀주세요- 구할 수 있을지 알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

2015-05-05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rma 2015-05-05 00:23   좋아요 0 | URL
꼭 구하시게 되길 바라요 :)
 

이번 설 고향집에 갈 때 다 읽은 책 몇 권을 캐리어 남은 공간에 실어 가져갔습니다. 책을 꽂으려고 보니 자리가 부족했습니다. 오래된 책장 하나는 휘다 못해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책장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리하고 나니 예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책상은 책상 부분을 접을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책상입니다. 25년쯤 전에 사촌오빠에게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너무 튼튼합니다. 고풍스럽기까지 합니다.

 

오른쪽 위칸에는 여명의 진실(어니스트 헤밍웨이), 문학판 제6호 2003년 봄호, 창작과 비평 113, 119, 120, 121, 129, 131~135, 137~139권과 스웨덴에서 사온 이제는 읽을 수 없는 제목의 동화책이 꽂혀 있습니다.

 

아래칸에는 짧은 글 긴 침묵(미셸 투르니에), 무지개와 프리즘(이윤기),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노희경), 지상의 양식(앙드레 지드), 비슷한 것은 가짜다(정민), 야윈 젖가슴(이청준),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파트리크 쥐스킨트 | 헬무트 디틀), 고요한 숲속의 연못(잭 콘 필드), 네가지 질문(스티븐 미첼, 바이런 케이티), 지란지교를 꿈꾸며(유안진),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숲 1~2(신영복), 전태일 평전(조영래), 들꽃 이야기(김지수),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김용택), 자전거여행(김훈), 꽃삽(이해인 | 하정민),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 | 박석무), 나라 없는 사람(커트 보네거트), 산에는 꽃이 피네(법정 스님), 일상적인 삶(장 그르니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혜린),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꽂혀 있습니다.

 

[고요한 숲속의 연못]과 [네가지 질문]은 이성복 선생님께서 꼭 읽어보라며 권해주셨던 책이었고, 역시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글들을 읽었던 그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왼쪽 위칸에는 닥터 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변신(프란츠 카프카), 로맹가리(도미니크 보나), 은의 죄(루이제 린저), 이야기 세익스피어2, 파우스트(요한 볼프강 폰 괴테), 페스트(알베르 카뮈), 슬픔이여 안녕/부베의 연인(프랑수아즈 사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유리알 유희(헤르만 헤세), 호프만스탈(후고 폰 호프만스탈), 사춘기(프랑크 베데킨트), 바보/항아리(루이지 피란델로), 나는 아버지가 하느님인 줄 알았다(폴 오스터),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인간의 조건(앙드레 말로), 카프카의 엽서'누이에게'(프란츠 카프카), 대구사진비엔날레 2008년 도록이 꽂혀 있습니다.

 

아래칸에는 별밤365일(이태형), 유희열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유희열), 경향신문에서 부록으로 줬던 Travel 오늘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난다(김석종), Travel 오늘 우리는 이곳으로 떠난다, Friendship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은 먼 법이 없다(메이브 빈치), 황홀의 순간(릴케| 로댕), 클림트, 황금빛 유혹(신성림), 예술가로 산다는 것(박영택), 케테 콜비츠(카테리네 크라머), 가우디, 공간의 환상(안토니 가우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박명욱), 예술의 숲(오귀스트 로댕), 진중권의 현대미학강의, 미학오디세이1~3(진중권),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김남희), 유럽의 걷고 싶은 길(김남희), art attack 도발(마크 애론슨),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프라임 키숀), 에곤 실레(프랭크 휘트포드), 파리블루(김영숙), 작가의 방(박래부| 안희원| 박신우), 반 고흐, 태양의 화가(파스칼 보나푸)가 있습니다.

 

아직 못 다 읽은 책도 읽고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책도 있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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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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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하게, 읽었던 모든 책에 대한 감상문을 적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위 리뷰라는 걸 쓰기 시작한 지는 나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원래는 모든 감상문들을 반말(?)로 쓰다가, 얼마 전부터 이렇게 존댓말(?)로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을 적어봤는데 그게 굉장히 마음이 편한 겁니다. 반말로 쓰다 보면 왠지 제가 되게 잘난체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스스로도 약간 거북할 때가 있었는데, 존댓말로 써보니까 반대의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겸손해지는 기분이랄까,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내가 느낀 건 느낀 대로 더 솔직한 감상이 써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독서감상문도 겸손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그 동안은 뭘 쓰던지 그럴 듯해 보이게 멋있게 쓰고 싶은 헛된 욕심 때문에 책을 읽기만 하고 그 감상을 글로 쓰지는 않은 경우가, 게으름 때문에 못 쓴 경우 다음으로 많았습니다. 이제는 짧게라도, 멋있지 않게라도, 꼭 책을 덮은 후에는 이렇게 글로 남겨보겠습니다(낡은 결심이라 여전히 자신은 없습니다만).

 

저는 부끄럽지만 무언가를 사는 것으로 적지 않은 기쁨을 느끼는 자본주의 노예의 전형입니다. 그 중에서도 책을 사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집에 읽지 않은 책이 가득 쌓여있어도 큰 죄책감 없이 새로 나온 책이나 읽고 싶었던 책이나 혹은 이벤트 중인 책을 삽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음에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과거에는 반드시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후에 새로운 책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여러 책을 동시에 읽기도 합니다. 출퇴근할 때 갖고 다니는 책으로는 너무 무겁거나 두꺼운 양장은 가급적 피하고 주로 집에서 그런 책을 읽습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에 갈 때는 가면서 다 읽어서 고향집에 책을 두고 올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 남아 있는 책을 들고 가거나 아예 돌아올 때까지 읽을 만큼 분량이 넉넉하게 남아 있는 책을 고르는 식입니다.

 

[시계태엽오렌지]를 사둔 게 얼마나 된 일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고향집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지난 연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러 집에 가서 작은 서점에 온 기분으로 읽을 책을 골랐는데, 그게 시계태엽오렌지였습니다.

 

고전들이 대개 그렇듯이 뒷표지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찬사가 가득합니다. 기대를 안고 책을 읽기 시작하고는 살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주인공이 너무 거칠고 사악하더군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앤서니 버지스가 당시 영국 십대들의 비속어들을 모아 스스로 고안해낸 nadsat이라는 언어라고 설명돼 있네요) 말을 뱉고 있었습니다. 흔히 이 작품과 함께 언급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조지 오웰 작품 속 등장 인물들과도 사뭇 달랐습니다. 샐린저나 오웰의 작품 속 인물들은 반항하는 모습도 왠지 우아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고나 할까요, 반면 알렉스는 그야말로 못돼 ()먹은 데다가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대개는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의 편에 서게 되지만 시계태엽오렌지를 읽을 때는 차마 그러지 못합니다. 일단, 알렉스는 전혀 멋있지가 않으니까요! 클래식을 좋아하는 취향마저도 그를 더욱 사악하게 보이게 할 뿐, 전혀 우아하지가 않습니다.

 

전혀 멋있지도 않고 그다지 철학도 없어 보이는(물론 초반에도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을 여러 차례여 걸쳐서 피력하기는 합니다만) 알렉스의 인생은, 아마 그렇기 때문에 꼬이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서 원래 이런 깡패조직(?)의 보스는 그래도 그만한 카리스마와 멋있는 점이 있어서 부하들이 적어도 그가 힘이 빠지기 전까지는 목숨 바쳐 보필하곤 하는데, 알렉스는 스스로가 보스라고 믿는 그 작은 패거리 안에서도 신임을 잃고 미움을 삽니다. 그래서 그 불행한 감옥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1부입니다.

 

2부는 알렉스가 감옥에서 보낸 한 철을 다룹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루도비코 치료를 자진해서 받게 됩니다. 좋아하는 클래식도 마음껏 들을 수 없고 나쁜 짓도 마음껏 할 수 없어서 갑갑한 알렉스는 감형에 혹해서 루도비코 치료의 마루타가 되기로 합니다. 이 치료법은 일반적인 교화와는 달리 나쁜 생각을 하거나 나쁜 짓을 보게 되면 구역질이 나거나 몸에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일종의 세뇌입니다. 알렉스는 선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진 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알렉스의 루도비코 치료를 반대하는 유일한 사람은 신부입니다. 세상의 신부님들이 으레 그렇듯, 인간은 원래 선하다고 생각하고 또 선함이 내재돼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영악한 알렉스는 이런 신부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를 압니다. 듣고 싶은 음악도 실컷 듣고 말입니다. 알렉스가 원래는 선하다고 신부님은 속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 그의 믿음이 일부는 맞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앤서니 버지스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하게 딱 떨어지는 결말로 나온다기보다,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와 갈등을 남기기도 합니다.

 

3부는 소위 기계적교화를 마친 알렉스가 시계태엽오렌지가 되어 사회에 나온 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감옥에서 기계가 되는 동안 직업을 갖고 평범한 사회인이 된(척 하는) 옛 친구들도 만나고 과거에 못된 짓을 했던 사람들도 만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대충 짐작이 가능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알렉스는 보복을 당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기보다는 그저 당하고 있는 편이 편합니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억지로 선해진 상태로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면 재미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사람 덕(?)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잠시 알렉스는 신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다시 악마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자 알렉스는 그런 것들이 이제 조금 귀찮아집니다. 돈도 모으고 싶고 혼자만의 시간도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시간과 자신의 모습들을 청춘이라 이름 붙입니다.

 

엄마가 싫어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엄마가 싫어하는 염색과 파마를 하고, 화를 내시던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냥 좀 놔두면 안 되냐고, 어차피 나이가 더 들면 하라고 해도 안 할 거라고 말입니다. 이 책의 결말은 이런 느낌입니다.

 

그런데 정말 알렉스도 그럴까요? 그랬을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동정이나 연민을 갖기는커녕 즐거움을 느끼던 알렉스가 단순히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이 모든 나쁜 짓을 관두고 평범한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철이 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걸까요.

 

과거에 조지 오웰의 책을 읽고 섬뜩한 예언가 같다고 쓴 적이 있는데, 앤서니 버지스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아동성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화학적 거세가 실제로 행해지거나 도입을 두고 논란이 이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요. 물론 화학적 거세와 루도비코 치료법이 서로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이 등장할 당시에만 해도 루도비코 치료법은 일종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면 화학적 거세는 실제로 가능한 과학기술이 됐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혼란과 고민은 이제 실제로 반드시 한 번씩은 거쳐야 할 마음의 짐이 됐습니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과 또 그 나쁜 사람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나쁜 일을 당해야 하는 사람’, 또 현재는 나쁘지만 앞으로 철이 들지도 모르는 사람과 철이 들지도 모르지만 점점 더 나빠질 수도 있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저는 비겁해서 나쁜 놈들은 무조건 똑같이 보복해줘야 해, 어떻게 해서도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해야 해, 라고 큰 소리로 외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나쁜 놈은 나중에 착한 사람이 될지언정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단지, 결코 100% 합의로 만들어질 수는 없을 그 방식과 정도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이 고민해봐야겠죠. , 역시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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