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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은 행복인가또 행복은 우연이 아닌 인간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의도적인 학습이나 훈련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인가?


 행복은 객관적인 선 관념에 더해서 주관적인 만족감까지도 동시에 포괄하는 개념이다. 또한 만족감에는 배고픔이나 목마름과 같은 생리적 욕구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욕구에 대한 해소도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행복하려면 단순한 자신의 욕구 충족을 넘어서 인식되는 요소들이 기대에 맞게 온전하게 참되며, 선하고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행복이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이 모두 선하며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므로, 행복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행복한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금세 다른 욕구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한편, 행복 추구의 수단으로 학습이나 훈련을 지목한다면 이는 외부 요소에 의존한 행복이 아닌 내부 조건을 변화시키는 데서 오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욕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적인 욕구를 줄여서 만족의 기대 수준을 낮추는 일이다. 그렇다면 전자에서는 외적 조건을 나의 욕구 충족에 유리하도록 하는 지식을 학습하거나 노하우를 훈련하는 일이 될 것이며, 후자에서는 내면의 욕구를 감소시키는 방법을 익히고 수행하는 일이 해당될 것이다.


 인간의 기능이 무엇인지 안다면 최고의 좋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디어다. 마치 의학에서의 좋음과 조각에서의 좋음이 각각 있듯, 인간의 기능이 있다면 그에도 역시 좋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기능을 이성과 관련된 영혼의 활동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기능이라는 말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용도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이 행복, 인간의 기능은 이성적 사고라는 말은 타당한 것 같다. 우리가 생각을 해서 상황에 적절한 판단을 했을 때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항상 현실에서의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행복을 얻기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수학에서야 누구에게나 이성적 사고가 동일한 결론을 낼 지는 모르겠으나, 실제 삶의 맥락 속에서의 인간의 행동은 사람마다 상황에 대한 탁월함이 다르다. 따라서 자신의 조건에서 가장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판단의 순간은 훈련 과정이라고 해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이는 예측할 수 없기에 개인적 관점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훈련의 과정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하여, 훈련이 짧아 품성상태가 아직 완전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판단을 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멈춰 있지 않고 계속 흐르므로 이미 일어난 사건이 치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면 그 결과는 바꿀 수 없다. 요컨대 좋은 경험었다고 받아들이고 넘어가지 못할 만한 나쁜 일도 있으며 그런 일이 훈련 중이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얻지는 못한다.


 결국 인간의 기능이 이성적 사고이며 목적은 행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디어는 타당하지만, 우연 즉 일어날 줄 몰랐던 사건이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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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지는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윤리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이 물음은 인간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전제한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자유가 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자유가 없다면 행위의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어떻게 논할 수 있을까? 자유 의지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내놓는 뇌과학의 연구 성과가 계속해서 발표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전제한 칸트의 윤리학은 여전히 유의미한 이론이다. 특히 인간에게 선의지(의지의 자율성)가 있고, 그 선의지가 ‘절대적으로’까지 선하다고 말하는 칸트의 주장은 놀랍다. 한편, 이론은 세상이 어떠한 원리로 돌아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좋은 이론이라면 그 이론이 속하는 학문의 물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생전 선의지를 포함한 여러 윤리학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도덕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등의 저술을 통해 자신의 윤리학 이론을 전개하였다.
칸트는 ‘세계 안에서나 세계 밖 어디에서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다.(『정초』393 면)’라고 하였다. 이는 선의지의 선함은 어떤 조건에서도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선의지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선의지가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이해하기에, 선의지는 절대적으로 선할 수 있다. 먼저 도덕 명령은 법칙의 형태를 취하는데, 법칙은 보편성과 필연성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이성에 근거한다. 이성은 보편성과 필연성을 요구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º’라는 명제를 보자. 이는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º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며, ‘삼각형이라면 반드시’ 내각의 합이 180º라는 점에서 필연적이다. 이 명제는 이성이 요구하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충족하기 때문에 이성에 있어서 참이다. 이와 유사하게, 옳은 행위가 선하기 때문에, 의지가 무조건적으로 선하자면 항상 옳은 행위를 산출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의지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충족하는 도덕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항상 옳은 행위를 낳는 도덕 법칙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칸트의 고민의 결과가 ‘정언명법’이다. 즉 정언명법을 따라 행동하는 의지는 무조건적으로 선하다.
선의지가 무조건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스스로가 동기의 도덕성과 이에 근거한 준칙의 보편화 가능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행위를 이성을 통해 인식함으로써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이처럼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향하는 이성을 통하여 도덕 법칙을 거쳐 절대적으로 선한 선의지에 도달할 수 있다. 가령, 이는 의무에 따라 자기 집 앞의 눈을 치우는 사람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곧 그는 옳은 일을 하겠다는 동기를 가지고 있고, 눈 치우는 일을 정언명법에 적용해 보편화 가능성을 얻었고(정언명법이 논리적으로 올바르게 적용되었음을 전제함), 그 결과 ‘눈을 치우는 것은 옳은 일’임을 스스로 인식하고서 행위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이때 선의지의 절대적 선함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선의지는 의무에 따라 행위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러나 선의지는 물자체의 영역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느끼는 뿌듯함으로는 알 수 없다. 선의지는 다만 드러날 뿐이다. 칸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다만 위의 모든 조건을 거친 행위가 이루어졌을 때 그 행위에서 드러나는 선의지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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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1-15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질문이네요. 절대적 선이 아니더라도 선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면 좋은 세상이 되는 건 확실할 듯합니다.

베텔게우스 2020-11-16 13:0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의 정리가 완전히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페크님 댓글 감사합니다. 요즘 미세먼지가 심한데 창문 열 때 유의하시구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2020-11-24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년 새해 목표>


1. 매일 일기쓰기

2. 매일 3KM 달리기

3. 금연


<단상: 2019년을 마무리하며>


#1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감을 잡은 것 같은 한 해였다. 왜 합리론과 경험론, 실재론과 관념론 간의 논쟁이 발생하는지. 그리고 왜 그러한 논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지.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은 사실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 지금으로서 내가 내린 결론은, 철학은 '자기 합리화의 기술'이라는 생각이다.


#2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일이 왜 그렇게 힘겨웠는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왜 그리 또 두려웠는지,

그런데도 어떻게 그 벽들을 뚫고 우리가 만날 수 있었는지.


-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3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옛날에 새옹이 기르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서 노인이 낙심하였는데 후에 달아났던 말이 준마를   끌고 와서  덕분에 훌륭한 말을 얻게 되었으나 아들이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으므로 노인이 다시 낙심하였는데그로 인하여 아들이 전쟁에 끌려 나가지 아니하고 죽음을 면할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중국 ≪회남자 ‘인간훈()’ 나오는 말이다. ≒ 새옹마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4


주희는 40세에 이발과 미발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 

나흠순은 젊은 시절 불학에 탐닉하였으나 60세에 비로소 자신의 학문 종지를 건립했다. 

유종주는 전 생애에서 시기별로 심학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 
만물은 계속 변화한다. 
나도 변하지만, 나 외부의 사물들도 계속 변한다.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 역시 계속 변할 것이다. 
​ 
지금의 내가 가진 나에 대한 생각, 
지금 남들이 가진 나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순간순간마다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 
영원한 것은, 
결코 없다. 
아니, 영원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뿐이다. 


#5


 뚜레쥬르 알바 1년 3개월차..


#6 창의성


 창의성이 화두다사실 창의성은 타인과의 교류에서 오기는 어렵다창의성은 독창성에서 온다과거에는 생각 많던 사람들이 놀림을 받고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이유는 바쁘니까노동력으로 여겨지는 인간에게 사색은 사치였던 것이다그러나 기계가 점차 발달하면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각광받기 시작한다생각이 많은 것은 창의성의 원천으로 인식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때문에 예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비슷해지려고 했다면요즘에는 누구나 남들과 달라지려고 애를 쓴다이에 대해서 어떤 철학자는 도시가 사람들을 지적으로 만든다고 했다(강신주-상처받지 않을 권리 참조).  일이 많아 전통적으로 공동 생활이 필수적이었던 농경 사회와는 달리기계가 대부분의 일을  주고아파트처럼 개인들이 파편화되어 거주하고 있는 현대에는 혼자 있을 시간이 많고정과 같은 감성보다는 이성적 사고에 익숙해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시대에 인문학이 새롭게 주목받는 까닭은 서구 문명의 객관적 인식의 확산 속에서오직 물질에만 가치를 두고 인간 자체의 존재적 측면을 경시하던 풍조에 대한 반동으로 새롭게 인간의 가치와 생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현대인은 어디에서 갑자기  하고 떨어진 인간이 아니다인류는 유사 이래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문화를 형성해 왔고그러한 문화를 익힘으로써 인간을 더욱 깊이 이해할  있다.


#7 노력과 운


 노력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그러나 노력을 아무리 해도 우리가 원하는  좋은 좋은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예전에는 노력하다 안되면  되는 자신을 탓했다노력해서 목표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지금은노력해서  되면 나를 탓하지 않고 세상을 탓하게 된다오히려세상은 실력이 아니라 운빨이 되었다. SBS에서 작년 11월에 방영된 SBS스페셜 ‘운인가 실력인가:공정성 전쟁 이와 같은 현대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프로에서는 사냥에서 성공한 것을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사냥 성과물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는 풍습을 가진 마을을 소개했는데그렇기 때문에 이를 평등하게 배분할  있는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세상이 노력으로 모든  이룰  있는 공정한 세상이 아니게   이미 오래 전일지도 모른다. ‘노력하면 성공하는 세상이라는 슬로건은 이미 현실 설명 능력을 상실했다.


#8 개인주의


 한국이 개인주의자로 살기에 좋은 나라가  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통계에 의하면, 2017 기준 국내 1 가구의 수는 562 가구로전체 가구   27.2% 달한다고 한다바야흐로 대한민국에 개인주의 사회가 도래하였다고 감히 말할  있겠다.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여 오랫동안 가족 중심의 공동체 생활을 했던 대한민국이 1 가구 천국이  이유가 도대체 뭘까?


 우선 첫째로는 남성들의 경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과거와는 달리 특별히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도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해나갈  있게 됐다지금까지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여성은 생활을 가장인 남편에게 의지해야 했다그래서 과거에는 아버지 홀로 아내와 자녀들을 경제적으로 부양했다그러나 경제 불황으로 말미암아 가장인 남자 혼자서 가족을 책임질만  생활력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고이에 따라 맞벌이의 증가와 함께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었고노동자들에 대한 처우가 점차 개선되면서(최저 임금 인상 의지만 있다면 대부분의 인구가 경제적으로 홀로서기를   있게 되었다.

 

  번째 요인은 사람들이 가족  타인에 대한 책임을 벗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석유  방울 나지 않는 자원 빈국 대한민국에서는 오로지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용할  있는 자본이었다 사람  사람에게 주어지는 책임은 매우 막중한 것이었다사소한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았다 시절근로자는 인간이 아니었다그들은 이제 지쳤다혼자서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한가혼자가 되어 되찾은 자유도 잠시사람들은 외로움에 직면하기 시작했다일회적이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그들은 지치기 시작했다영상통화의 발명누구나  대씩은 소지하는 스마트폰  통신 수단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밀한 소통을 많이 하지 않는다인간 관계를 정리한다는 뜻인 ‘손절이라는 말은 이미 너무 유명해졌다오랜 우정을 나누는 사이는 전보다 많이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전통적 가치관이 사라져가고우리는 당위보다는 마음에  드는 이가 있으면 그저 포기를 한다잘못한 점을 지적하다간 괜히 싸움이 벌어질  있고이는  감정 소모를 불러일으키는바사람들은 이제 그런 감정소모의 쓴맛을 맛볼 여유가 없다 끝에 조금이라도 쓴맛이 느껴지면 즉시 뱉는다.

 

 사실개인주의자라는 것은 원래부터 없었던 개념일지도 모른다그저 공동체 사회였던 세계 속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을 뿐일지도여럿이 함께 일해야하는 세상이 무너지고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있는 시대에는 굳이 개인주의자를 폄하할 필요가 없다사실상 이제는 개인주의자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강준만은 저서 『평온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민감한 사람의 모든 행동이  바람직하거나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민감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에 비해  창의적이고세심하며협력적이고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장점이 있지만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인지하다 보니 지나친 자극을 받을  있으며남들의 반응에 무척  영향을 받기 때문에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상처를 받을  있다그러다가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오래전 카를 구스타프 Carl Gustav Jung, 1875-1961  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극도의 민감성은 인격을 풍요롭게 만든다단지 비정상적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만 이러한 장점이 매우 심각한 단점으로 바뀐다그것은 민감한 사람들의 침착하고 신중한 성향이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그러나 극도의 민감성을 본질적으로 병적인 성격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그렇다면 우리는 인류의 4분의 1 병적으로 규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이토록 여유가 없어졌는가그것은 첫째정보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우리가 접하게 되는 정보량이 급증했고그것은 다양한 가치관을 만들어사람들이 화합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단일한 가치관과 문화적 맥락 하에서는 의사소통에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하지만 오늘날에는 각자가 가진 다양한 가치관으로 인해서 우리는 저마다의 맥락에서 대화를 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 쉽고이는 손절로 이어지기도 한다나에게는 배려인 것이 타인에게는 간섭일  있다또한 나와 타인의 정체성 역시 시간에 따라 빠르게 변화한다일정 시점에 동일한 사람을 만나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만또다른 시점에 만났다면무관심한 채로 서로를 지나쳐버릴지 모른다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오늘날에는 통용되지 않는 듯하다사실상 요즘은 ‘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스마트폰의 기술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정보의 유통속도는 너무나도 빨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어떤 가치를 추구하여야 하는가고정된 신념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그때그때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할  같다그러나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존재다변화에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뒤따른다이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직업을 일생동안 여섯 번은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도 곳곳에서 들린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익명 게시판에는 가짜 정보가 난무하고뉴스도 이제는 쉽게 믿기에는 신뢰성이 너무나 떨어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빠른 변화는 하루에도 우리로 하여금 가면을  번씩이나 바꿔 쓰게 한다사실상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고 해도 그에게 서로가 아는 서로가 아닐 확률이 높다지난번 연락했을 때와 오늘 연락했을 때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있다사실정체성이란 사람들끼리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우리는 일관성을  이상 오래도록 유지할  없다.

 시인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 「칵테일 파티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고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안다는 

우리가 그들을 알았던

순간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들은 그때 이후로 변했고

우리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전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거라네.


(강준만의 평온의 기술에서 인용)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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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2-18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일 3km를 달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2020년에 베텔게우스님께서 좋은 성과 거두시길 바랍니다.^^:)

베텔게우스 2019-12-18 15:48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응원 감사드려요ㅜ!! 남은 한 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서니데이 2019-12-18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의 목표 세가지 모두 좋아보여요.
원하시는 것들 잘 이루시고 더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되세요.
베텔게우스님, 편안하고 좋은 하루 되세요.^^

베텔게우스 2019-12-18 19:5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응원에 힘입어 꼭 목표 달성해서 내년 이맘때쯤엔 더욱 보람차게 한 해 마무리하고 싶네요ㅎㅎㅎ 좋은 하루, 따뜻한 연말 되시길 바랄게요!😊
 

Q.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는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평정심(ataraxia)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있는가?

A.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세계가 기계론적으로 설명된다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어떤 사건이 원인이 되어 미래의 어떤 사건이 그 결과 사건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인과적 결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발생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윤리학적 물음이다. 윤리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자 한다. 나는 윤리학의 물음이 성립 가능하려면 반드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이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숙명론적으로 흘러가는 세계에서라면 인간도 정해진 대로 행동할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평정심(ataraxia)‘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표라고 주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피쿠로스가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인 관점을 거부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윤리학을 주장할 때 맞닥뜨린 문제점들 때문이었다. 즉 자유의지의 존재는 에피쿠로스가 평정심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그에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그의 자연학 체계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를 원자의 일탈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여기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스토아학파는 결정론적 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 하에서 이성은 정해진 법칙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활동한다고 하였으나, 동시에 ‘부동심(apatheia)’의 경지를 이상으로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 이는 중국철학사에서 위진현학을 다룰 때 살펴보았던 왕필과 곽상의 이론적 차이와 유사하다. 왕필은 제도는 인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당위와 목적 추구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곽상은 애초부터 제도는 무위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과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하는 것’이라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동시에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스토아학파와 곽상은 결정론적 철학 속에서 이론적 근거 없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주장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정합적이지 못하다.

 주제로 돌아와서, 이제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은 성립 가능하다. 에피쿠로스적 삶의 목적(Telos)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에서 벗어나서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리는 일종의 평정심을 찾는 것이다. 이들에게 평정심이란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서, 불쾌감으로부터 해방된 일종의 정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러한 평정심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자연과 인간의 정신 작용에 목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쾌를 좋아하고 불쾌를 싫어하는 특성상 쾌감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한 쾌락 추구로서의 방탕함은 역효과를 낳는다. 또 한편으로 인간은 오로지 쾌감만 경험할 수는 없으며,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도, 살면서 불쾌감 역시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령, 현실적으로 즉시 실현될 수 없는 욕구는 불쾌감을 낳는다. 이 때 에피쿠로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보다는, 내면적인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고통 앞에서도 침착할 수 있게 하며, 과도한 욕구 앞에서도 안정적일 수 있게 하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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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9월부터 시작한 뚜레쥬르 아르바이트가 9개월차에 접어든다. 처음엔 이렇게 오래 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다만 그만둘 때는 그만두더라도 최대한, 무조건 오래 버티자고 마음을 먹었다. 손님을 직접 응대하는 식음료 제공 서비스직에서 맡은 바를 잘 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스무살 때 처음 했던 3개월간의 아웃백 아르바이트 경험과 연관이 있다. 당시 사회생활 근력과 신체적 근력 모두가 부족했던 나는, 강도 높은 업무량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일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껏 아웃백 알바 경험은 나로서는 꼭 극복하고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뚜레쥬르에서 일을 하는 것은 여러 장점이 있다. 우선 케이크와 빵을 많이 먹을 수 있다. 시간 지난 빵이나 케이크가 있으면 매니저님들이 나누어 주신다. 둘째로 스케쥴 조정이 자유로운 편이다. 나 말고도 일하는 직원이 많은 매장이기 때문에 급한 사정이 생기면 서로 협의하여 근무시간 조정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또래 알바생들 및 매니저님들, 사장님과 사모님 모두 참 괜찮은 사람들이라,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근무 시간동안 내가 일 인분의 업무를 원만하게 처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9개월차인 현재 웬만한 빵 이름은 숙지하게 됐다. 음료는 모두 제조 가능하다. 매장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많이 길렀다. '아웃백 트라우마'가 극복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곳에서 일을 하면서 나의 일상도 다소 변화되었다. 이제까지는 커피를 한 잔만 마셔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에 카페와는 통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는 친구들과 카페에 가서 곧잘 시간을 보내고, 혼자 밀린 일을 처리하러 노트북을 들고 찾아가기도 한다. 아마 카페라는 공간이 내게 많이 친숙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카페에 가서 주방을 관찰하는 버릇도 생겼다. 이 매장은 어떤 원두 기계를 쓰나, 우리 매장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등을 잠깐이나마 생각해보게 되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커피도 더 자주 마시게 되었다. 또한 커피 자체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어졌다. 아래와 같은 책들에도 요즘엔 관심이 간다.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인데...







 


 본래 책과 무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을 생각이 없었는데, 9개월간 지속한 뚜레쥬르 알바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 정리해보고 싶어서 적어보았다! 어... 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ㅅ^(사진은 마감 끝난 어느 날 사장님이 챙겨주신 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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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르바이트를 9개월동안 지속해서 하기가 쉽지 않은데 베텔게우스님 대단하세요!^^:)

베텔게우스 2019-06-05 21:37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읽어주시고 칭찬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는데 인간은 역시 적응의 존재인가 봅니다ㅎㅎㅎ 경제적으로 스스로 자립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앞으론 소비도 지혜롭게 잘 하게 되었음 좋겠습니다ㅋ :)

서니데이 2019-06-06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로 위의 겨울호랑이님이 하신 말씀과 이하동문입니다.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들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일이라면 여러가지 힘든 점도 많을테니까요.
트라우마를 극복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현충일 휴일은 잘 보내셨나요. 밖에 비가 오고 있어요.
베텔게우스님, 편안한 밤 되세요.^^

베텔게우스 2019-06-07 00:0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알바랑 보강 수업 마치고, 집에서 푹 쉬었습니다.^^
두 분께서 마음 써 주신 덕택에 댓글로 큰 위로를 받았어요. 자신감이 생기네요! 감사드려요.
빗소리가 좋네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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