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 Like You Know I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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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약속 시간 전에 시간이 남아 중앙극장으로 무작정 갔다. 홍상수 감독 영화는 다시는 안 볼 것을 결심한 적이 있다. 결심이란 얇은 유리 같아서 기회만 생기면 깨지기 마련이다. 시간에 맞는다는 이유로 가볍게 내 결심을 깼다.  

다시는 안 보겠다고 거품물게 했던 진부함은 조금 줄어들었고 더불어 낄낄거리게 하는 장면도 줄었다. 인물이 여전히 술을 마시지만 술마시는 장면보다는 술을 마신 후 인물의 숨겨진 본능에 초점을 맞춘다. 초기작들에서 느꼈던 예리한 시선은 아니어도 적어도 인물들이 질척거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홍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간 스트레스를 나름 많이 받은건 아닐까. -감독님은 왜 이런 영화만 만들어요?  -감독님은 왜 자신의 이야기를 하세요? -나 자신도 모르는데 다른 이야기를 어떻게 해. 인터뷰에서나 만날 것 같은 대사들이다. 인터뷰 혹은 기자회견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극중 구 감독은 별 뜻 없이 한 행동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파렴치하다고 몰아붙인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당하는 순수한 예술가다. 이런 극중 구 감독의 심리가 감독의 고백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분명한 건 명민했던 그의 초기작들과 달리 이 영화는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감독이 길을 잃었기 때문일 거다. 다시 예리한 시선을 회복하기에는 술은 이제 자극제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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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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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케이블에서 때 맞춰 봉준호 감독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틀어줬다. 몇 번 볼 기회가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비슷한 부분만 반복해서 보게 된다. 사소한 에피소드로 긴장감을 만는 방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유머까지.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코엔 형제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도 이런 감독이 있다구..하고 으스대고 싶은 영화다. <괴물>같은 블록 버스터 말고 봉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같은 작품을 만들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뭐 내 바람을 알 턱 없겠지만-.-) 

 
<마더>는 전작들에 비해 유머가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세계관은 비관적이기까지 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계속 보는 건 그의 유머 때문인 것도 같은 데...유머가 없으니 재미는 사실 없다. 영화 속 공간이 주는 비일상적 풍경과 비가 오는 골목길 같은 미장센은 익숙하다. 일상적 풍경을 공포 분위기로 낯설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괴물>이 집단 폭력을 희화화 했다면 <마더>는 집단 폭력이 생기는 과정 쯤 되겠다. <괴물>은 정의를 구현하는 법 집행 집단이 허점과 모순 투성이라는 걸 봤다. 진실을 말하자 격리되고 처음부터 진실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 <마더>의 전반부는 다시 한번 이런 집단 폭력을 환기시키다. 중반이 되면서 반전된다. 집단 폭력에 대한 불신과 개인의 확신이 자리를 바꾼다. 

 이제 엄마는 집단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투사처럼 보인다. 투사가 된 엄마는 자신의 경험과 직감만을 신뢰한다. 경험과 직감의 지지를 받는 믿음은 폭력의 변주다. 다른 사람이 보고 들은 게 순수하다고 믿는 자신의 신념을 훼손한다면 제거할 수도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가치판단 기준은 오로지 자신으로 회귀한다. 타인의 진정성은 의심스럽다. 불신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은 모든 걸 제자리로 잡아주는 것 같지만 결국 무능력한 금치산자로 이를 뿐이다. 진실을 보고도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갈대밭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춤을 추는 엄마로 영화는 시작을 한다. 엄마는 지독히 현실적인 폭력의 순환과정을 겪고 사람들 틈에 끼에 다시 춤을 추면서 영화가 끝난다. 엄마는 처음처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같다. 집단 폭력은 개인 폭력의 집합이다. 엄마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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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 - Kamome D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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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없던 어린 시절에는 친구란 어때야 한다는 기준란게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쉽게 친구가 된다. 집 방향이 같으면 집에 함께 오면서 친구가 되었고 영화를 좋아하면 함께 보러가서 친구가 되었다. 또 같은 라디오 채널을 들으면 친구가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다. 집 방향이 같거나 취향이 같다고 친구가 되지 않는다. 이따금씩 여행을 함께 하는 이도 있지만 친구라고 선뜻 안 부른다. 직장 동료라고 하거나 다른 좀 더 구체적인 호칭으로 말하게 된다.  

세상물정을 알면 알수록 사람에 대한 예의없는 사람이 싫다. 적어도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난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되도록이면 묻지말자주의다. (이런 게 예의라면) 누구나 언급 안 하고 싶은 부분이 있기마련이다. 이런 적절한 거리는 둥글둥글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참 편한 면이 있다. 그리고 서로의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다. 잡다한 찌질한 이야기를 생략한 결과다.  

<카모메 식당>은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어른이 어떻게 친구가 되는가를 보여준다. 사치에는 차려놓은 식당에 손님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미도리는 지도를 찍어 날아온 곳이 핀란드고, 짐을 잃어버린 여자는 집에 안 돌아갈 구실을 찾고 있다. 세 일본인이 핀란드에서 만나 친구가 된다. 그들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즐거움과 고통을 고쳐 핀란드에 왔는지 묻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헬싱키에서 만났고 언어 장벽이 없는 같은 국적 사람이라는 것이다.  카모메 식당에 일손이 필요하고 이들은 시간이 있지만 딱히 할 일은 없으니 잘 됐다.  

미도리가 사치에한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혹시 섭섭해할 건가요? -글쎄요. 난 원래 혼자였어요. 사치에의 대답에 미도리는 살짝 살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치에는 헬싱키에서 만난 친구들이 없어도 잘 살 것이다. 퓨전보다는 전통 오니기리가 더 승부수를 가진 메뉴라고 믿는 사람이니. 카모메 식당이 구질구질한 사연을 늘어놓지 않아서 좋기도 했지만 또 그래서 이프로 부족한 어른을 위한 동화로만 받아들여진다.  

어른-나-이란 참 상황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성찰한다고 착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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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부르는 파리 -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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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 서울신문사 앞. 버스는 길가에 종대로 서 있는 전경버스 틈사이에서 멈춰섰다. 전경버스 틈새를 비집고 인도로 나오자 거리에 깔린 전경들이 행인보다 더 많았다. 익숙하고 낯설었다. 이십대 초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에 내가 전경들 또래였다는 것.  횡단보도를 찾느라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시야에는 온통 닭장차. 하늘도 길도 모두 닭장차가 조각내고 있었다. 코리아나 호텔 뒤에 있는 광화문 스폰지까지 걸어가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대로변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했다. 내 마음 속 동요도 가라앉고 대로변의 풍경을 멀리 밀어낼 수 있었다.  

영화는 파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방인에게는 파리는, 특별한 소풍지이지만 그 공간에서 일상에 부딪치는 사람한테는 서울과 다름없다.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교통사고가 나서 죽는 사람도 있고 하룻밤 즐겨볼 생각으로 이성에게 추근대는 사람도 있다. 또 혼자 아이 셋을 키우며 직장생활하느라 건조해져버린 사람도 있고 구조조정에 일자리를 잃어서 고민하는 사람, 어린 제자를 사랑하게 된 나이 든 교수도 있다. 그 누구의 삶도 녹록해보이지 않는다.  

밤마다 에펠탑은 반짝이며 시선을 끌고 사크뢰 쾨르 성당 앞은 햇살로 넘쳐나고 곳곳에 있는 카페는 낭만적 삶까지는 아니어도 낭만적 이야기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엽서나 사진에 담긴 사진이나 스크린을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는 환상의 씨앗이다. 사진이나 이미지 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없으니까. 서울이란 도시가 환상을 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들어와있어서다. 사진이 아니라 내 눈과 귀가 서울을 신문이나 잡지가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축복이면서도 악몽같다. 성공률이 사십 퍼센트, 즉 실패률이 육십 퍼센트인 심장수술을 받으러 가는 한 젊은 남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어찌됐건 살아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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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 - Ca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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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케이블 채널 번호는 어떤 예고도 없이 바뀌기 일쑤다. 오락 채널 찾느라 한참 버튼을 누르고 즐겨 찾는 채널 번호를 암기할 만하면 또 번호가 홀딱 바뀐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참 공급자 중심적 발상이다. 이번에 화면 상단에 뜬 안내 문구에는 디지털 작업 어쩌구 저쩌구 적혀 있었는데 용서가 되는 게 안 나오던 채널이 몇 개 더 나온다.ㅋ 그 중 하나가 screen이란 채널이다. CGV나 OCN 같은 영화 전문 채널이라고 선전하는데 자정만 넘으면 영화라고 볼 수 없는 19세용 성인 영화를 줄기차게 내보낸다. 주로 자정 이후에 TV를 보는 내게는 CGV나 OCN은 쓰레기 채널이다. 새로 추가 된 SCREEN 채널은 그 보다는 조금 낫길 바라며 실제로 그런 거 같다.-광고도 딱 한 번만 했다-어제 <캔디>를 틀어줬다.  

극장 상영할 때도 찾아가서 볼 만큼의 흥미는 아니지만 누워서 볼 정도의 관심은 지니고 있었다. 영화 내용은 간단하다. 마약에 빠진 커플의 마약과 같은 사랑이다. 사랑도 마약도 빠져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랑은 일단 빠져 나오면 추억으로 남지만 마약은 빠져 나와도 유혹으로 남는다.  마약이 철저히 규제되는 한국에서 마약에 관한 영화에 감정을 이입하는 건 쉽지 않다. 서구에서 마약은 더 보편적 사회문제이니 종종 마약의 험난함을 다룬 영화가 나온다.  

영화는 단촐하면서도 환각 상태에 빠질 때 삽입 된 몽타주는 강력하고 아름답다. 몸은 축 늘어져 침대에 있는 데 정신은 천국을 훨훨 날아다니는 표현 방법. 아마도 저런가보다, 하고 미루어 짐작한다. 마약에 빠지는 이들은 보통 사람보다 의지가 약하고 그 이유는 영혼이 더 가녀리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영화를 보면서 저자 미상인 <Go Ask Alice>란 책이 떠올랐다. 실제 있었던 열 다섯 살 소녀의 슬픈 일기다. 사춘기에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산층에 속하는 부모와도 소통하지 못해 우연히 마약에 손을 대고 가출을 하고 마약과 갱생을 반복한다. 소녀는 결국 중독이란 고리에 질식당한다. 이런 줄거리보다 소녀의 내면 고백을 통해 얼마나 겁을 먹는지 일반인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늘 마약의 달콤함에 노출에 두려워하고 달콤함을 뿌리치지 못하는 데 절망하는 소녀의 일기는 어둡고 처절하다. 표지를 넘기면, 이 책이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지만 삶에 대한 통찰력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는 편집자의 말이 쓰여있다. <캔디>란 영화 역시 어떤 해결책이나 섬세한 내면을 보여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이미지를 통해  지옥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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