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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인간을 유혹하는가
제시 베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제시 베링 | 더퀘스트 | 2021.02.01

(2021.02.21 ~ 2021.03.31)

개들과 아침 산책길에 나무 앞을 지날때마다 마음이 끌렸다.

목을 매기 딱 좋은 자리라고 생각했다.

10대 말 이후 언뜻언뜻 자살 욕구를 느꼈다.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11p

누군가의 진솔한 경험담을 담았을 것만 같은 제목과 달리 이 책의 내용은 훨씬 무겁고 어렵다. 심지어 어떤 문장은 어떤 내용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다. 이 책은 "죽음" 그 중에서도 "일시적이거나 지속적인 정신적 고통으로 촉발된 죽음" 즉, 자살에 대해 매우 구체적이고 과학적이며 다양한 시각에서 쓰여졌다.

일시적이거나 지속적인 정신적 고통이란 단어에서 사람들은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우울증환자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닌 일시적이거나 그러니까 단순히 실패로 인한 절망과 우울로 인한 자살사고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우선 밝히고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자살 : 치명적 결과에 대한 지식이나 기대를 갖고

의도적으로 시작하고 실행하여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행위.

"의도적으로" 그렇다면 동물은 자살충동을 느낄까? 그들도 자살을 할까? 너무 어려운 문제다. 게다가 난 죽음학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단락의 끝에 "그렇다면 자살을 어떻게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인 우리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어떻게 '인간을 죽음의 유혹에 흔들리도록 허락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개체의 생존보다는 개체가 가진 유전자의 생존에 유리한 쪽을 선택한다"며, '생산하지 않고 자원을 소비할 때 그의 생존에 반작용할 수 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유전자가 생존할 가장 큰 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일 수 있다'고 덧붙인다.

목을 베면서 동시에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상태가 전형적인 자살 상태며, 행위의 양면 모두 진짜다.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中

그리고 이때, 시도자는 '착취적 우울증', 즉 '준자살행위'를 보이게 된다. "알겠지? 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겠지?"라며 주변에 협상을 제안하는 것이다. 물론 주변에서는 불안해하고 슬퍼하며 어떻게든 그를 도우려고 노력하겠지. 그런데 사실 이 경우 시도자의 심리는 '이 상황에서만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다른 상황이 주어진다면 당분간은 착취적 우울증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듯 결과를 낫게 만들기 위해서는 '원인'을 바꾸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 내가 현재보다 더 나은 상황, 다른 상황에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눈을 뜨면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날 뿐이고 역시 그렇다면 어느날 잠이 들어 더이상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결과가 아닐까.

책의 뒷편으로 이어지는 모방자살이라든지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난해하기도 하고, 나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이 모든 이야기들을 넘어서 내가 이 책을 예비자살자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이유는 바로 4단원, 계단 때문이다. 저자는 자살사고의 단계를 총 6단계로 나누고 그것을 두단원에 걸쳐 예시까지 들며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예비자살자'의 심리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걸까?



배려 부족은 남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니라, 자살하려는 마음의 특징인 왜곡 현상일 뿐이다. (중략) 이때는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자신의 죽음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믐하지 못한다. (중략) 진짜 목숨을 끊고 싶을 때는..... 문자 그대로 그런 건 안중에 없어요.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158-9p

내가 누군가의 자살을 만류해서 그가 긴 세월 괴롭게 산다면 그건 내 잘못이겠지요.

그에게 고통을 주었으니까.

그러니 남들에게 뭐가 좋은지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中

어쨌든 '자살성향자'인 그는 결국 이렇게 책을 마무리짓는다. 자살이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충동적인 행위고 그것을 타인이 막는 것이 옳은 행위인지는 여전한 논쟁거리지만, 어쨋든 타인과의 연결은 많은 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라고.



컬처블룸 리뷰단

​본 포스팅은 '더퀘스트'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도서만 무료로 제공받았을 뿐, 이후의 활동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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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박장애입니다
쓰쓰미 료지로 지음, 장은정 옮김 / 시그마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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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년만에 가져온 서평으로는 뭔가 엄한 주제인 느낌이지만, 2019년 첫 완독 책이 그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교보 sam서비스로 두 번이나 대여하고도 안 읽고(..) 내팽겨쳐 두었다가, sam구독 해지를 하면서 밀리에는 해당 책이 없어서(...?) 이제서야 이걸 3일만에 완독했다. 강박증과 관련한 책들을 이전에도 몇 권 읽었지만, 보통 '전문가'느낌 풀풀 나는 '지루하기만 하고, 그다지 도움은 안되는 책'이 대다수였기에 별로 기대감이 없어서 더 그랬다.

 하마터면 아쉬울뻔 했다. 이 책은 강박장애를 직접 겪고 그것을 극복해 온 누군가의 기록이다. 하나의 정신질환을 학문적, 의학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함께 해 온 누군가의 이야기. 강박증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병부터, 인식, 극복과정까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나는 강박장애입니까?


 내가 강박증과 관련한 책들을 찾아 읽었던 것에는, 내가 (개인적으로만 좀 불편한) 강박증세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도 드문드문 기록되어 있듯, 나는 그것을 위해 명상을 배웠었고, 수차례의 좌절도 겪어오고 있다. 외부적으로 보이는 특별한 이상행동이 없고, 병원을 통해 진찰받은 결과도 아니기에, 스스로도 '그냥 핑계처럼 휘두르고 있는 합리화'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종종 하지만, 강박장애 판정을 받은 적이 있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고 '병원을 가보라'고 진지하게 권한다는 것은 역시 완전 남 일은 아닌 것 같다.

​ 이처럼 '나중에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을 걱정하고 연연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시 그런 상황에 놓이면 어찌할 바 모르는 심리 상태에 빠져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강박장애 증상의 특징이다. (32쪽.)

 사실 누구나 '강박'을 조금씩은 가지고 살아간다. 덕분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장시키며, 때로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한다. 오히려 강박이 없는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대다수 정신적 장애가 그러하듯, 그것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것은 병이 된다.

 나는 강박장애일까? 나는 어릴적부터 무의식적으로 '강박을 끊어내는 단어'들을 사용해왔다. 이 문장을 여기다 집어넣으니 '태생 강박장애'같아졌지만, 오히려 반대다. 비효율적인 시간낭비를 칼 같이 끊어내는 기계같은 아이라는 소리로 해석해주면 좋겠다. 이미 끝난 일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사전에 없는 문장이었고, 모든 걸 쏟아부어 결과물을 내었으니 내 손을 떠난 결과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확인,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 싫은 무의식이 모든 것을 눈 앞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고, 통제를 벗어날 것들은 처분하는 월래행사를 치르게 하고 있다.) 철저하고 완벽에 가까운 통제아래 마땅히 기뻐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나의 강박관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상행동(강박행위)으로 거의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역시 요즘의 나는 강박관념에 고통받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 강박관념의 원인이 되는 '선행자극'이 삶 그 자체라서, 인 것 같다. 손을 반복적으로 씻는다면 세면대에서 벗어나면 된다, 문이 잘 잠겼는지를 수십번씩 확인하는게 문제라면 문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하지만 나의 선행자극은 어느 곳에서 시간의 간격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내가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물리적인 어떤 것이 아닌, '생각' 그 자체이다.


​확인강박은 한마디로 말해서 '무엇이든지 엄밀하고 정확하게 확인하고 행동하려는 것을 지향하며, 그것을 나중에 자신의 기억으로 확인할 수 없으면 불안을 느끼는 상태'다. (127쪽.)


누구나 다방면의 일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강박관념 때문에 괴롭더라도 일단 시작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언가에 집착하는 병적인 사람의 사고법을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이론적으로 독단한다는 특징이 있다. (128쪽.)

"한 번 신경이 쓰이면 그것에 속박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생각한다."라고 털어놨더니 "그러니까 생각의 전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군요."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76쪽.)

 나에게 생각이란 '내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길잡이'이다. 그러니 적당히 타일러서, 간격을 만들어두는 걸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가 어렵다. 아무리 간격을 두고, 전환을 일으켜도 물리적인 증거도 없고 평생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살았기에 결국은 되돌아가고 만다.

 재미있게도 이 책에 소개된 극복방법에는 내가 명상에서 배웠던 기술들이 많이 등장했다. 특히나 시간의 간격을 만든다는 말은 정말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다. 결국 "무시하는 능력"이 답이라는 것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명상을 그만두기로 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끼고 있다. 명상이라는 행위자체가 오히려 나를 '강박'이라는 단어에 묶어두었고, 그것을 계속 떠오르게 함으로써 무시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 명상을 시작하는 분이 있다면 [뜬금없지만] 나는 말리고 싶다.

​실제로 곤란한 상황이 닥치지 않는 한 이치에 맞지 않는 일, 잘 생각나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넘겨버린다. (178쪽.)

 재미있다. 요즘 내가 일상에서 품고 살아가려고 하는 문장이 이 책에 정확한 활자의 모습을 하고 누워있었다. 강박이란 싸우려들수록 더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힌다. 그냥 조금 성가신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른다는 느낌으로, 적당히 알은 채 해주고 적당히 무시해주면 의외로 조용하다. 가끔씩 자주 우냥냥거리며 뛰어다니면, 아마 이미 익숙해져있을 이 상황을 감내하는 수 밖에. 불안도 굳은 살이 생기나보다.

 이 문장이 주는 무력함과 멍함만으로 충분히 불안하지만, 그 불안마저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강박이 아니라도 내 머릿속은 항상 온갖 생각들로 넘쳐났기에, 종종 궁금하다. 타인들도 이렇게 많은 생각들과 함께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적당한 멍함과 무력함이 대다수 일반인의 기본값인걸까.

​결국 강박이란, 싸워 이겨야할 대상이 아닌, 타협하고 협의하여 함께 살아가야할 존재이다.

물론 사라져준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이정도 마음가짐으로도 한결 편안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가 아직은 '정신건강'에 대해서 쉬쉬하는 분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덕분에 그만큼 자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안내자는 되어줄 수 있지만, 실험해볼만한 솔루션을 제공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참고도서나 검색어를 첨부하고 있는데, 모든 책은 한국어 번역이 안되어 있고, 검색어도 우리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듯 하다. (전혀 딴내용이거나 전혀 아닌 것 같은 검색결과만 나온다.) 이 책만 달랑 추천해주기에는 다음으로 나아가기가 너무 어렵다고 할까.

 [슬픈일이지만] 이젠 누구에게나 더이상 '정신건강'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이 와버렸다. 좀더 개방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좀더 다양한 정보들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 날이 오면,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 책을 선물해 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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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 - 화를 참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타다 다마미 지음, 이소담 엮음 / 라이프맵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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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꼭 폭력 또는 공격이란 단어로 표현했어야 했나...

​ 최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단어 중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가 있다. '혐오'. 단어의 발음 자체만으로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나쁘게 바꾸어버릴 것 같은 소름끼치는 이 단어가 어떻게 일상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걸까. 혐오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는 느낌은 그렇게나 극단적이고, 아주 극소수의 상황에서나 쓰일 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의 '혐오'는 생각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그래서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까지도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사실 정신적 폭력은 가해자도 폭력에 당하는 피해자도 '이것이 정신적 폭력'이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 이 책에서 이야기하길 정신적 폭력에서는 가해자조차도 자신이 상대에게 공격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가해자의 다섯유형인 부인형(자신의 결점을 부인), 이득형(불쾌함을 표현함으로서 챙김받고 싶은 마음), 치환형(엉뚱한 곳으로 불쾌감 표출), 선망형(부러운 마음을 비아냥으로 표출), 자기애형(타인을 깍아내림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을 살펴보면 더 그 사실이 극명해진다. 결국 정신적 폭력이라는 것은 '의도'를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내면의 어떤 욕구불만이 겉으로 표출된 것,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은 화를 입힌 것이란 소리이다.

 물론 의도의 여하를 떠나서, 피해자가 이로 인해 화를 입었다면 이것은 일종의 '가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하면 이것을 '폭력', '공격'이라는 날카로운 단어를 선택하여 '의도치않게 가해자가 되어버린 자'들을 몰아세웠어야 했는지가 찝찝한 의문으로 남는다.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려는 것일까.

 현대사회는 '모두 각자의 가치관을 지녔다.'는 의미에서 다양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개인이 다양한 가치관을 이해하거나 타인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어려워졌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관'이라는 껍질 안에 숨은 채로 타인의 가치관에 접촉하거나 이해하려는 행위자체를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 말을 바꾸자면 정신폭력 가해자의 특징인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사실 쉽지 않은 문제이다. 가해자의 의도야 어찌되었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자신이 소진되는 상황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가해자에게 강하게 맞대응하며 몰아세운다면 그것은 결국 전쟁을 벌이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다못해 개구리도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튀어오르는 법이다. 이해없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양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책은 초반부에서 '독자를 피해자로 만드는 실수'를 피했어야 했다. 이미 책의 전반에서 그것을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왜 저자는 글의 순서를 이렇게 정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의문스럽다.

 ​상위층이 하위층의 아픔을 쉽게 이해할 수 없듯, 자신의 고통으로 똘똘 뭉친 하위층 역시 상위층의 입장을 쉽사리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나의 아픔과 억울함이 '타인의 탓'인 이상, 더 이상의 이해란 스스로에게 손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그들을 이해해주어야 하느냐'라고 이야기하지만, 진정 양 계층간의 대화가 없이 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이해를 하고 인정을 해준다는 것은 결코 나와 그들이 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냥 단지 그들을 더이상 매몰차게 밀어내고 미워하지는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소통이다.

 

 만약 당신의 애인이 당신의 말은 들어주지도 않은 채, 자신의 생각만 끊임없이 강한 어조로 강요한다면 당신은 그(녀)의 이야기를 애정어린 마음으로 들어줄 것인가?

나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라는 생각

​ 이런류의 책의 저자들은 '당신은 아픕니다'라는 말보다는 '당신 옆의 그 사람도 아픕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독자도 '나는 아프다'라는 생각보다는 '우리는 모두 아프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악의를 품고 타인을 공격한다면 몹쓸 짓이지만, 정신적폭력은 그럴 마음이 없는데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가해자는 아니었나?', '생각지 못하게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거나 과도한 압박을 주고 있지 않았나?'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신중히 살펴보아야 한다.

​ 정신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주장해야 하는 것' 이외에는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부드럽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 뭔가 찝찝한 시작이었지만, 그래도 이 책은 둥글게 커뮤니케이션 하기를, 서로를 이해하기를 권유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좁혀가고 있다. 실제로 생활중에 소통이 부족하여 서로간에 감정의 폭이 생긴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많은 문제들은 '한마디'의 말로 해결된다. 왜 우리는 서로를 넘겨짚으며 오해하고 미워하는 걸까.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쉽지 않지만, 우리의 하루하루를 한결 풍족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하다.

​정신폭력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먼저 나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에서 정신폭력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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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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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한 사람들의 말에는 정답은 있지만, 공감은 없다. [나는 개천에서 살았다. 하지만 기나긴 노력끝에 이 되었다.] 는 '용'에만 강조한 나랑 상관없는 세상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 책은 독자가 다 얼굴이 벌게질정도로 '개천'과 '노력'을 강조한다. 이 책은 글쓰기책이 아니라 저자의 일기장이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글쓰기에 대한 마음가짐조차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방법'이 아니라 '마음'을 배우고 싶은 사람, 딱딱한 자기계발서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지금은 조금 잠잠해진 느낌이 드는데, 한동안 글쓰기가 붐을 일으키는듯 보였던 시기가 있었다. 대입논술시험을 치는 것도 아니고 글쓰기를 어떻게 책으로 배울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진 나는 쏟아져 나오는 글쓰기 서적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 책 역시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제목부터 심상치않다. <서민적글쓰기>라니, 그당시 서민교수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목만 듣고서 '庶民적글쓰기'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니까 어떠한 권력도 가지지 못한 일반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글로서 유명해질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방법론적인 책을 제법 그럴듯한 제목으로 포장해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책을 읽다보니, 어쩌면 이 제목에는 그런 의도도 조금은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아니 이런 위트를 가진 저자라면, 분명 그 스스로 이런 제목을 출판사에 제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특별한것은 이 책의 저자가 '서민'교수이고, <서민적글쓰기>라는 제목에는 '서민'교수의 글쓰기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나의 추측이다.)

 내가 서민교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서울 모카페에서의 강연에서였다. 다른 이유로 서울을 방문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방문했던 자리였는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강연주제에 혹해서 갔던 자리에서 나는 서민교수님의 매력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교수님의 첫 느낌은 매우 겸손하고 위축되어 계시다는 느낌이었다. 큰 인기를 등에 업고 있는 사람으로는 절대 생각되지 않았기에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도 저분이 오늘이 강연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반전. 기생충학을 전공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지만, 나는 대중과학서를 쓰시는 분들 중에 이렇게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있는 분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특별한 내용을 담은 강연은 아니었지만, 정말 1시간 남짓의 그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정도로 정신없이 빠져들었고, 이 책도 그 강연만큼이나 몰입도가 있었다.

 책은 크게 두파트로 나뉘어져서, 앞에서는 교수님이 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어떻게 글을 써왔는지에 관한 역사(?)를 소개하고 뒤에서는 서민'적' 글쓰기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단정적인 어조로 당연한 소리를 하는 다른 책들과 달리, 자신의 방법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고, 자신도 더 좋은 글들을 보며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다는 한발 물러선 듯한 뉘앙스에서 오히려 더 진정성과 설득력이 묻어난다. 전문가, 선생님이 권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위치에서 같이 걸어주는 느낌에 책의 모든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다.

 대중서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살다 보면 자기 분야 이외에는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분야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분야라면 어느 정도의 이해는 필요하다. 그 분야를 잘 몰라 일반대중이 피해를 볼 수도 있고, 대중의 무지를 틈타 이익을 취하려는 불순한 세력도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대중서로 그 분야에 대한 국민적 이해가 증진된다면, 그 분야에서 겪는 어려움을 타개할 기회가 마련될 수 있다. (88p.)

 책의 한 대목처럼, 그의 글쓰기는 솔직함이며, 간결함, 꾸준함, 비유하기, 돌려까기, 웃기기, 정확함, 비딱함...그리고 지옥훈련이었다. 우리가 삶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특히 전문가집단에게 글쓰기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멋진 글을 쓰는 '정답'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 잘 정리된 요약집은 이 책 말고도 충분히 많이 나와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다소 허무맹랑하고 시간낭비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멋진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정말 좋은 글쓰기 멘토를 얻은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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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부검 - 나는 자살한 것을 후회한다
서종한 지음 / 학고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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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왜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더이상 '자살'을 쉬쉬하며 덮어서는 안된다. 죽음의 앞에 선 당신, 누군가의 안타까운 선택 앞에 괴로워하고 있는 당신. 또 다른 '당신'을 위한 최소한의 시도가 바로 이 <심리부검>이다.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불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심리부검을 해야만 하는 이유. 심리부검의 필요성을 다양한 사례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심리부검이나 자살예방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읽어보기에도 좋을 듯 하다.

 자살문제가 심각하고 이제는 그저 무시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하지만, 역시 책을 펼치기까지는 많은 망설임이 필요했다. 일단 내가 죽음이나 피와 같은 단어들에 너무나 취약하기 때문이었고, 타인의 자살을 접하기에 과연 현재의 내 심리상태가 건강한가 하는 문제도 조금 걱정스러웠다. 역시 처음 몇 페이지는 텅 빈 공간에서 혼자서 읽어내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너무나 오랫동안 무시해왔던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해버렸기 때문에.

 필자가 실시한 심리부검을 기준으로, 자살자 200명 중 83%는 정신 질환 경험을 했으나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병원 가기를 꺼려했다. (중략)

 여기서 "아직 한국적인 정서상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의 생명이 문화적인 풍토보다 우선순위가 낮다는 말인가? (65p.)​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잔인하다거나 심약자들은 보지 말아야할 책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이성적이고 담담한 문체로 서술된 이 책은 누구라도 한번쯤은 진지하게 읽어볼 필요성이 있었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반드시 느껴야만 한다. '한국적인 정서', 그것은 '자살'이라는 단어를 우리와는 거리가 먼, 썩 불쾌한 단어로 인식하도록 만들어버린다. 그런 생각은 자살자들을 현실에서 유리시키고, 이상한 사람 혹은 비난받을 사람들로 만들어버린다. 과연 자살이란 개인적인 문제인걸까.

​ 자살 사망자는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죽음과 관련된 문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그들만의 확연한 특성이 자살 현장에서 발견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현장에 가 볼수록 그 생각은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살 사망자가 살고 있는 공간은 바로 필자가 살고 있는 공간의 구조와 요소들 면에서 아주 비슷했다. ...점차 나는 그들이 살아왔던 삶의 공간들이 지금 필자가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공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49,50p.)

​ 언젠가 이러한 내용의 연극을 본 적이 있다. 4명의 시신, '그들의 사인은 모두 자살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장으로 시작된 연극은 '그들의 사인은 모두 '타살'이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막을 내렸다. 자살자들의 인생과 그 자살자의 사인을 읽어내는 의사의 인생은 다르지 않았고, 이것은 우리가 곧 자살자 그들이며 또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용의자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살은 우리와 멀지 않다.

 

 이런 생각에서 <심리부검>은 중요해진다. 심리부검은 죽음의 자의성과 타의성을 구분하고,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것에 첫번째 목적을 둔다. 때로 이것은 법정에서 중요한 증거로 제출되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가에 대한 의문은 떨치기가 힘들다.

 오히려 나는 법적 증거로서의 심리부검보다 '자살 예방'에서의 심리부검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죽음의 원인,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자살자가 보인 여러가지 징후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정리해둔다면, 그리고 그런 자료들에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자살들을 조기에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부검은 부분적으로는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망자의 자살 원인이 무엇인지 그냥 묻어 두고 이루어지는 심리 치료는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 유족들은 내심 자신의 관심과 주의가 부족해서 그들을 놓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살의 책임을 병리적인 수준에서 자신들에게서 찾으려 애를 쓰며 집착한다. (중략) 우울과 낮은 자존감, 죄책감으로 이들이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부 실제로 자살로 나아가기도 한다. (239p.)

​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우리가 멋대로 막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선택 역시 그들의 존엄성의 문제가 아닌가?'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살시도에 의한 죽음의 문턱에서 구출된 사람들의 대다수가 '재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강으로 뛰어는 사람들이 바로 그 순간 자살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가 않다. 평균적으로 한 명이 자살하면 그 주위 사람 5명이 심한 우울증에 걸린다고 한다. 자살의 원인 중 하나인 '살아있는 자들에게 자신이 짐이 되는 것 같아'는 결국 자살을 택함으로서 남은 자들에게 더 큰 짐이 되어버리고 마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과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고,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은 어쩌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관계 속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많은 자살사례들이 실려있고, 그들의 자살 원인은 각기 달랐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자살 원인이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이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보이기 위한 자살 방지 대책은 오히려 자살시도자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뿐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도 단시간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리적 아픔을 겪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던 누군가가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린적이 있다. 모든 연락수단을 없애버렸고, 지금의 나는 그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언제나 그 친구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내가 좀더 단단히 손을 잡아주었더라면면, 내가 더 자주 말 걸어주었더라면하고. 지금은 그저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났길, 그래서 더 나아졌길 바랄수 밖에...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갖고 지내고 있으며, 우리 개개인은 생각보다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다만 스스로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끈이 되어주자. 힘든 사회를 살아가는데 희망이 되어주자. 사회를 바꿀 수는 없어도,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작은 힘으로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작은 시도에 심리부검의 존재는 더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살이라는 단어에 죽음이라는 단어에 더이상 무심해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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