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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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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9년 11월 17일, 코로나19 첫 감염자가 보고되었다. 새로운 감염병의 등장은 크게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겨울만 잘 견뎌내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코로나의 종식선언은 점차 소원해졌고, 그것은 변이까지 일으키며 위세를 더해가고 있다. 한때 그것을 저승사자의 그림자처럼 여기던 우리도, 이제는 그것과 조금 불편하고 힘든 공존을 이뤄가고 있다.

'다 망했으면 좋겠다.' 생존자가 있다면 그가 고통스러울 테니까, 어느 날 전지구적인 재앙이 닥쳐서 모두가 한 날 한 시에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 감히 바랄 수 있다면 내 평생을 걸고 바라본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등장은, 이 소설의 재앙은 잔인한 현실을 직시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한다고.

눈이 내린다.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 하지만 골목을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도, 집 앞에 쌓인 눈을 청소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어른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스노볼 속의 세상 같다. 아름답지만, 쓰라리게 시린 조형.

눈 아래 세상은 전부 다른 색을 띠고 있지만 눈 덮인 세상은 어디나 비슷한 결로 망해 가고 있다는 것.

스노볼 드라이브 中

눈 유사체가 내린다. 쉬지 않고 내린다. 톡, 토독. 인체에 닿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방부제. 이 녹지 않는 눈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렸다 그치곤 했다. 그리고 결국 정부는 백영시를 '특수 폐기물 매립 지역'으로 선정했다. 그것은 곧 백영시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전국의 가짜 눈이 모이는 곳. 언제 어느 곳을 둘러봐도 하얀 풍경만이 펼쳐지는 곳. 그곳이 백영시였다.

그렇게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원인도 대책도 알 수 없는 이 재앙은 끝없이 이어졌다. 지구도 인류도 멸망하지 않았다. 이들도 우리와 같이 조금씩 재앙에 적응하며 불편하고 힘든 공존을 이뤄냈다.

그 때 즈음이었다. 백모루의 유일한 가족이자 희망이었던 이모가 사라진 것은. 단서는 스노볼 하나와 이모의 마지막 의뢰인이었다던 낯선 전화번호 하나. 전화기는 꺼져있었고, 스노볼은 이모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나타났다. 이이월. 녹지 않는 눈이 내리던 첫 날, 모루를 구해주었던 아이. 스노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백영중학교 이사장의 아들. 친해지고 싶었다. 동시에 의심했다. 그가 이모의 실종과 관련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월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루는 알 수 없었다.

모루와 이월의 밀고 당기는 관계 끝에는 껄끄러운 진실 하나가 파묻혀있었다.

"나는 너도 내 조카도 그냥...... 좀 생각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 생각 많이 해 봤자 뭐 해? 이렇게 이상하게 굴러가는 세상에. 우울하기나 하지. 안 그래?"

스노볼 드라이브 中

스노볼 속 세상 같은 삶을 살아온 이월의 새엄마. 빛바랜 퇴화가 두려워 그녀가 선택한 죽음.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던 이월의 전화. 그렇게 시작된 유진의 마지막 의뢰. 이월은 유진과 달리는 눈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강도의 습격에서 이어진 유진의 실종으로 끝났다. 유진에게 건네받은 '모루의 사진'과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다짐만 남긴 채.

모루가 궁금했던 것, 이월이 말할 수 없었던 것. 유진의 열쇠고리. 이월은 모루의 마지막 원동력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고, 따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작업장에서 방독면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은 맨몸으로 마주섰다. 화를 낼까? 욕을 할까? 실망하고 돌아설까? 수많은 상상을 했던 지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안아주었다. 서로를 이해했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유진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어차피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는 세상, 그럴 바엔 흠집을 무늬로 만들어버리는 모루. 그리고 봄의 시작인 입춘이 든 이월. 두 사람의 드라이브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멈추지 않는 한 멸망은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죽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이므로.

코로나19를 시작으로 우리의 앞에도 어쩌면 수많은 이상 기후 증상과 바이러스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루와 이월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것이다.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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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개
하세 세이슈 지음, 손예리 옮김 / 창심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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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멍이계의 코난이 나타났다!!! ...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었지만, 다몬이 거쳐가는 곳마다 사망자가 발생했으니까.... 옴니버스인듯 아닌 듯, 결국에는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이 '소년과 개'인 이유 자체가 하나의 스포일러일지도 모른다. 다몬(개)가 만나는 여러 사람들. 남자, 도둑, 부부, 매춘부, 노인...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연결하면 나타나는 한 소년.



다몬은 떠돌이 개다. 힘든 삶을 이어가는 누군가의, 그러니까 우리의 앞에 불쑥 나타나 그의 마지막을 위로해주는 개. 클린트, 톰바, 레오, 노리쓰네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참 듬직하고 영리한 개. 그렇게 문득 다가와 떠날때가 되면 또 다시 남쪽으로 서쪽으로,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개. 모두의 친구, 형제, 가족이지만 동시에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자신의 무리를 찾아가는 개.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위로를 받았고, 많은 영혼들이 떠나갔다.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인간에게 개의 존재란 무엇일까. 지금 나는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이전에 참 많은 개들이 내 삶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 것 같은데도, 언제나 나를 사랑해주고 내 곁을 지켜주는 충성스러운 존재.


그리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 주인을 지켜내는 존재. 다몬은 계속 한 곳을 바라보았다. 계속 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때로는 누군가의 곁에 머물며, 그 사람의 힘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결국은 단 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히카루. 그리고 히카루를 지키기위해 그 모든 시련과 시간을 견뎌왔다는 듯 히카루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눈을 감았다. 다소 지루하게 책장을 넘기다가 히카루와의 이야기에 다다랐을때 울컥 눈물이 났다. 히카루를 생각하는 다몬의 마음도, 다몬을 생각하는 히카루의 마음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누아르를 찍으며 범죄와 피투성이로 시작했던 소실이 이렇게 아름답게 끝을 맺을 것이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다몬과 함께 걸은 시간들은 정말 놀라운 시간이었다. 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그런 시간이었다.


컬처블룸 리뷰단

​본 포스팅은 '창심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도서만 무료로 제공받았을 뿐, 이후의 활동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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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얼지 않게끔 새소설 8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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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얼지 않게끔

강민영 | 자음과 모음 | 2020.11.16

(2020.12.02 ~ 2020.12.08)


 


 책은 여럿이서 읽을 때, 새로운 재미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아마 이 책이 그런 책으로 굉장히 좋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공감을 얻어낼 것이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내가 이 책의 "변온성"을 '우울'에 빗대서 읽어왔던 것 처럼.

 

 

 

​ 인간. 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 "변온동물". 이 책은 이 단어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인공이 갑자기 변온동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그리고 유일하게 그 사실을 아는 회사 동료 (평소에는 말 한마디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는) 희진과 함께 '부디, 얼지 않게끔' 인경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 프로젝트가 된다.

 변온성. 주변의 온도에 맞춰서 몸의 온도가 변하는 것. 그리하여 변온 동물들은 여름의 따뜻함을 즐기고, 겨울에는 겨울잠을 잔다. 나에게 변온동물로 변한 '인경'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었고, 변온동물은 아니지만 유독 더위에 약해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던 희진은 '우울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가. 얼마나 쉽게 말을 보태고,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가. 그렇기에 단순히 더위에 약한 희진은 그것이 약간의 흉으로 끝날 일이었지만, 겨울이 오면 겨울잠을 자야할 이상한 질병(?)에 걸린 인경에겐 그것은 결코 밝혀져서는 안될 금기었다.

 문득, 카프카의 변신이 생각났다. 하루 아침에 괴물로 변해, 결국 가족들에게까지 버림받게 된 그레고르. 그레고르에겐 자신이 괴물로 변한 것이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흉이었다. 하지만 인경에겐 누구보다 담담하게 현실을 직시해줄 희진이 있었고, 그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일 용기가 있었다.


​그래도 겨울은 추운 게 좋겠어요. 겨울에만 살아 있는 동물들도 있을 텐데.

나는... 겨울에 이렇게 자도 되니까요.

 우울증은 불치병이다.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자신의 우울을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진다. '안녕, 이번엔 살살 부탁할게'하고 우울에게 부탁하고, 그와 함께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인경은 결국 자신의 변온성을 받아들였다. 희진의 도움을 받아 겨울잠을 자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다음 봄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함께 제주바다를 거닐 수 있을까. 부디, 얼지 않게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때는 그렇게 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부디, 얼지 않게끔

작가
강민영
출판
자음과모음
발매
202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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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자음과 모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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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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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12세 관람가의 한 영화를 보러갔다가 처음 알게되었다. 추석연휴라 영화관을 찾은 손님들의 대부분이 가족단위였는데, 이 작품의 제목이 화면에 뜨는 순간 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관람관이 '헉'하는 소리로 가득 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고는.. 책 표지에서도 느껴지지 않는가, 제목과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달콤하고 풋풋한 무엇인가가(이 작품도 12세 관람가였다). 제목이 너무 충격적이라, 일본연애소설이 궁금해 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아니지, 연애소설이 아니었다면 표지도 못 들여다봤을 제목이라는 쪽이 더 맞는말인가?] 그와는 별개로 굉장히 오래 읽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 혹시 스포일러에 예민한 분이라면, 스크롤을 그만 내리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럼 문제의 제목부터 풀이해볼까(??). 일단 '췌장'은 '이자'의 다른 이름이다. 소화효소와 혈당조절과 관련한 호르몬을 분비하는 기관(으로 기억하고 있는​)인데, 이런건 어차피 이 작품과 별 관련있는 내용은 아니고,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사쿠라'가 췌장에 병이 있어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과, 어느날 그녀가 '나(남주인공)'에게 던진 '이상한 고백'이 이 책의 제목이 되어버렸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봤거든. 옛 사람들은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다른 동물의 그 부분을 먹었대."

"근데 그게 뭐?"

"간이 안 좋으면 간을 먹고, 위가 안 좋으면 위를 먹고, 그러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는거야. 그래서 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라고 이야기하니까, '뭐야 별 것 아니었잖아'라는 느낌의 글이 되어버렸는데, 사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문장은 이 작품을 접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가벼운 의미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음, 요컨데 '사랑해.' 아니, 그보다 더 깊고 농밀한,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을 것 같은 절절한 감정(..은 내가 잘 모르겠어서 실패.)을 오직 두 사람의 언어로 표현해 낸, 두 사람만의 '유일한'....으음..(에잇, 관두자.) 뭐, 여하건 그렇다. 대체 리뷰를 왜 시작했지, 나.


​"누군가 나를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산다는 신앙도 외국에는 있다던데."

 이 문장이 조금 도움이 될까. 나는 마지막 순간, 간절함으로 전해진 그들의 진심(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을 꽤 초반에 언급된 이 문장의 힘을 빌려 이해했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접점이 없는, 완전히 반대의 존재였다. 활달하고 누구에게나 인기있는 소녀인 '사쿠라'와, 차분하고 혼자 있길 즐기는 문학소년 '하루키'. 하루키가 병원에서 우연히 사쿠라의 '공병문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둘의 관계는 대화 한 마디 없이 끝을 맺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키가 사쿠라의 공병문고를 집어들기로 결정한 순간, 모든 것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이좋은 클레스메이트, 너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너는 분명 나에게 진실과 일상을 부여해줄 단 한 사람일 거야. 의사 선생님은 내게 진실밖에 주지 않아. 가족은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과잉반응하면서 일상을 보상해주는 데 필사적이지. 아마 친구들도 사실을 알고 나면 그렇게 될 거야. 너만은 진실을 알면서도 나와 일상을 함께해주니까 나는 너하고 지내는 게 재미있어."

 하루키는 사쿠라에게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좀더 의미있는 일을 해야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하루키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매번 "선택"했다. 그녀의 말을 빌려 '길지 않은 그녀의 남은 인생을 의미있는 것에 사용하는 일을 도울 기회'를 그에게 부여한 것이다.


​"..(중략).. 비밀을 알고 있는 클레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없지는 않다, 라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틀림없이.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의 가치는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괜찮다니까, 신경 쓰지 마. 내가 낼 거야. 얼마 전까지 아르바이트도 했고 저금해둔 게 많아서 다 써버려야 하거든."

 죽기 전까지, 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런 뜻일 터였다.

"그건 더 안 되지.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써야 해."

"이것도 의미가 있어. 나 혼자 숯불구이 먹어봤자 별로 재미없잖아? 나의 즐거움을 위해 돈을 쓰는 거야."

 솔직히, 두 사람의 감정의 변화나 삶의 변화보다도, 나는 이런 구절들이 더 눈에 띄었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인 '사쿠라'의 삶을 대하는 태도일까. 사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증명해 온 사쿠라가, 스스로의 불안을 잊기위해, 또 사람들에게 가여운 아이보다는 밝고 명랑한 아이로 인식되고 싶은 마음에 한 (그러니까, 타인을 의식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그녀의 대사들은 소위 '불행'과 '의미있는 일'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절정을 맞은 것은 '사쿠라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모두가 췌장의 병으로 인한 죽음을 기대했을 테지만, 사쿠라의 끝은... '묻지마 살인마에게 희생'되는 것으로 찾아왔다.


​최소한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내일이 보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었다.

나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그녀에게는 당연히 내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식이었던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명만은 이 세상이 잘 봐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없었다.

세상은 차별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를 향한 '동경'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와 마음을 통하며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사쿠라는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하루키를, 타인의 생각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하루키는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사쿠라를. 나는 네가 되고 싶어. ​그래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것은 오직 두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최고의 사랑고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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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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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까, 처음부터 끝까지 쉼없이 우중충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요조'는 어려서부터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난해한'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사실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들과의 연결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익살'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선택했다. 그것은 꽤 잘 먹혀들었고, 요조는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감추면서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눌러서 감추고 감추었던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하고 혼자 인정했지만 그 그림은 다케이치 외에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

 단 한 사람, 다케이치만 빼고.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요조는 이렇게 서술했다. 다케이치가 자신의 연기를 세상에 폭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이 유일하게 요조의 본성을 볼 수 있는 친구, 다케이치는, 문자 그대로 요조의 유일한 진짜 친구가 되었다. 그의 '도깨비 그림'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친구. 그에게 '위대한 화가'라는 예언을 해 준 유일한 인물. 하지만 아쉽게도 둘의 인연은 요조가 도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끝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요조의 '인간 실격'을 향한 곤두박질이 시작된다.

 시작은 '익살이 더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던 '호리키'라는 한 미술 학도와의 만남으로 가속되었다. 술, 담배, 창녀, 좌익 사상... 솔직한 감상으로 요조의 마지막 수기, 마지막 마침표까지 이어지는 남은 긴 내용을 나는 명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끝없이 굴러떨어졌다. 읽는 사람조차도 한 틈의 빛 조차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가혹할 정도로 이어졌고, 어느 틈엔가 우울감이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다가오는 느낌조차 받았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 순간의 희망도 없이 맞물려갈 수 있을까. 이것은 옳지 못한 선택을 반복한 요조의 책임인가. 정말로, 그렇게 말해야 할까.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에 떠밀린 듯 정신없이 굴러온 요조의 삶은 한 정신병원에서 광인(혹은 폐인) 낙인을 받고, 큰형이 약속한 시골집에서 다시 고요함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삶은 마지막 장에 도달해 있는 것과 다를바 없었고, 그의 인간으로서의 자격조차 말소되어 영원한 정적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으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중략)..만일 이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의 친구였다면 나 역시 정신 병원에 집어넣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극단적이고 자극적일만큼 혼란스럽지만, 또 그만큼 공감되는 소설이었다. 요조가 그리고 싶었던 '도깨비 그림'은 무엇일까. 가식으로 가득 찬 '난해한 인간의 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 그래서 익살로 자신을 감추어야 했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다케이치에게만 보일 수 있었던, 요조의 본성. 가식 아닌 진심.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던 호리키조차 철저한 이 세상의 사람임을 알았을 때 요조가 느꼈을 허탈감. 그가 술과 약물, 여자에 정신없이 취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나는 모르는 것 같지 않다. 죽음이라는 선택지조차 생각보다 멀고 험난한 곳에 존재했기에, 현실에서 찾은 죽음의 대안책. 자신의 유일한 방어책인 익살을 빼앗긴 요조에게 '죽음'외의 선택지는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걸지도.

 인간의 자격이란 뭘까. 계속 해서 이 문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다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을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요조는 정말 '인간 실격자'인가. 정말 그 평가기준은 올바른 것인가. 그를 인간실격자라고 말해야하는 우리는 모두 사실  '다케이치'를 갈망하고 있는 고독한 존재이지는 않은가. 다시 묻는다. 정말 그는 '인간 실격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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