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노동, 목소리 -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11인의 출판노동 이야기 숨쉬는책공장 일과 삶 시리즈 1
고아영 외 10인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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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환상을 품게 한다. 뭐라고 할까, 고유의 반듯함이나 고귀함이라고 해야할까. 지식산업을 이끌어가는 매체인 만큼 어떤 것에도 침범되지 않은 순수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마치 하나의 학문처럼, 또 다른 영역 속의 산물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치열하게 생산되고 판매되어지는 상품의 하나이다. 그것이 담고 있는 성질이 일반적인 경제원리와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결코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출판수업을 들으러다니면서,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현재 출판계는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애서가들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이야기 되는 '전자책의 등장으로 종이책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라는 말. 처음에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1,2년 사이에 등장한 말이 아니며 어쩌면 출판계 사람들의 말습관의 하나라는 사실을 안다.

 

 요즈음은 출판계를 두고 누가 '섹시'하고 '힙'하게 출판계의 망함을 이야기하는가 경쟁하는 구도가 펼쳐진 것 같다. 이 구도에서 책을 열심히 찾아 읽고 사 모으는 애서가들도 한마디씩 던지고 있다. 매우 건설적인 전망이 펼쳐지면서도 그 안에는 '우린 결국 안 될거야'라는 비관이 은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49p.)

 물론 그렇다고 출판계가 힘들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힘들지 않고, 어렵지 않은 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자연과학자들도 늘 '국가에서 지원을 안해주고...'로 시작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 역시 거짓말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생존의 핑계를 대지만 결국 자신이 그 일을 어느정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시장이 가진 경제원리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직업의식이 부딧히면서 발생한 듯하다.​

 

 그런데 당시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과 소통 부재는 비판적 성찰이나 대화 같은 것을 추구하는,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인문학 정신 혹은 자세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나는 그 괴리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출판사가 내는 책은 출판사의 얼굴이자 정신일 것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 회사에서는 점점 더 매출과 출간 종수만이 중요하게 이야기됐고, 회사는 얼굴도 정신도 흐릿해진 것만 같았다. (24p.)​

 책에 강요된 숭고한 자세를 버리자, 머리는 가볍고 일이 즐거웠다. 내가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며, 어떤 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해야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을 멈추자 대부분의 문제들이 담백해졌다. 책 만드는 일이란 숭고한 지식 산업의 사명을 재현해 내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고 유연하게 일이 진행되게 만드는 정신노동이란 생각을 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나는 책의 위대한 가치를 극대화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주어진 시간과 자원안에서 최상급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였다. (129p.)​

​ 애서가들도 종종 하는 착각이다. 이 책이 담은 사상과 생각이 이 책을 만든 출판사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 출판 공부를 하고 있는 나역시 아직까지도 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책과 그 출판사를 떨어트려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출판사와 관련된 뉴스보도에 깜짝깜짝 놀라고 마는 것 같다.

 사실 출판 수업들에서 들은 이야기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출판계 사람들은 어딘가 순수하고 인문학적인 사람들이라는 뉘앙스. ​무한 경쟁의 세계에서 그래도 아직은 경쟁보다는 공존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위안.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기본적 성질이라는 그 환상에 빠져 '그저 힘들다'는 말 이상의 현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 책에 담긴 11명의 목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그 현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했지만, 결국 문제는 시장원리에 따라 운영될 수 밖에 없는 회사와 일반적인 회사원들과는 조금 다른 의무와 환상을 가진 출판인들간의 갈등이었다. 책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상품'을 만드는 것에 불과할 수 밖에 없는 걸까.

 나도 예전에는 베스트셀러위주의 독서를 했지만,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오히려 '좋은 책​≠베스트셀러'라는 딜레마에 빠졌고, 지금은 베스트셀러에 있는 책을 오히려 피하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것은 출판계 사람들 역시 하는 이야기로, 늘 좋은 책과 팔리는 책 사이의 괴리에 빠져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출판을 꿈꾸지 말라는 이야기가 조금은 와닿는 순간이다.

 나는 아직 그 현실의 바깥에 있고, 이리 저리 다양한 분야를 방황하던 과정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평가를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출판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한 사람의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내가 출판계에서 일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책이 만들어지는 환경이 ​조금은 아름다웠으면, 그 환상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결국 출판사도 시작은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라는 믿음과, 적어도 많은 출판계의 사람들이 책이 가진 특이한 성질을 사랑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끊임없는 괴리와 부딧히고 있기에, 그런 세상이 언젠가는 열리지 않을까 기대도 해본다. 지금의 나는 그 꿈을 지키며, 앞서 달리고 있는 그들의 이름을 한번 더 마음에 새겨주는 것이 할 일인 것 같다. 책 표지의 판권장이 그 어떤 책의 표지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지식산업을 위한 희생은 언제나 아름답다.

(뜬금없지만 지 버릇 개 못준다고 떠난 인간주제에 항상 수고하는 과학자들에게도 화이팅을 건낸다.)

 늘 해 오듯 책을 사고 읽으면 된다. 대신 평소와는 달리 책을 펼쳐 판권장이라고 하는 면을 하나하나 유심히 읽어봐줬으면 한다. 거기엔 사실 재미있는 내용은 없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힘을 보탠 사람들의 이름이 건조하게 적혀 있을 뿐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체력으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다. (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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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 - 가상다큐 동아시아 2017
강희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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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멘토링과 관련해서 두 달간 신문을 읽게 되었다. 7월 말부터 구독을 했으니 벌써 1달 반이 다 되가는데, 사실 안 읽고 버린 것이 반 이상인 듯하다. 신문을 읽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전지식과 인내가 필요한 것인지 깨달아가는 한 달이었다. 특히 정치, 경제, 사회면은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당장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 신문을 읽고 있는 행위자체가 낭비처럼 느껴졌다. 결국 읽다 팽개치다가를 반복하다보니, 그다지 의미없이 한달 반의 구독기간이 흘렀다. (희생해준 나무들에게 사과.)

  사실 늘 생각을 하는 것이, 정치나 사회, 경제를 알아야겠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해야겠다. 하는 것들이지만, 맘 먹고 시작을 하려고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어려운 단어, 복잡한 관계도,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는 인과관계에 지루한 서술까지...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러다가 발견한 책이 바로 이 '크레바스'라는 책이었다. 물론 이 책 역시 마냥 쉽지만은 않다. 여러나라, 다양한 직책과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지나간 과거들로부터 미래를 예측해서 쓰여진 책인만큼 아무런 사전지식없이 친근하게 느끼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최근의 이슈조차도 모른채 이 책을 읽어도 큰 거부감이 없을정도로 친절하고, 쉽게 쓰여진 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TV와 신문은 수시로 씨끌벅적 하지만, 사실 지금 한국,북한,미국,중국,일본간의 관계가 어떤 상황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각 국의 정치체계나, 대표의 이름같은 것은 완전히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2017년의 동아시아사를 예측하여 쓴 이 소설 한 권을 읽는 것 만으로도, 우리나라를 둘러싼 여러 나라들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각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라는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잔인하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말로서 쉽게 판단하고 결정해버릴지도 모르는 사소한 것들이 단지 그 나라를 넘어, 주변국에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하는 부분도 놀라웠다.

 가볍게 읽었던 책 한 권이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었다. 아마 내일부터는 신문지면의 한 글자도 허투루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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