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숙의 만화를 좋아하지만 작가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요즘 우리나라 출판 만화계의 불황이 심각하다는 말을 듣는데, 작가들의 스스로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가 부족한 것도 불황의 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매체든 뛰어들어 자기를 알리고 작품을 알리려는 노력, 언젠가 독자들이 알아서 찾아와 주겠지 라는 안일한 사고는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 심각하긴 심각하다. 재미있는 만화를 꼽으라면 일본만화가 먼저 떠오른다. 재미있는 일본만화를 읽지 않는다고 우리만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까? 개성있는 신인만화가의 발굴에도 출판사가 발벗고 나서야한다. 공모전을 자주 열어야한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은 투자인가? 정부 혹은 법인의 투자. 만화책 자체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가 먹힐리가 없지.

신일숙의 만화는 가벼운 소일거리의 해피엔딩 만화가 절대 아니다. 길건 짧건 그녀의 만화는 적당한 무게감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것이 마치 비현실적인 듯 낯설고,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얘기들이 꿈처럼 펼쳐진다. 부정하지도 않지만 긍정도 아닌 무엇이 있다.

루딘 나이츠, 현재를 살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남자의 휴식처. 어느 날 비처럼 천사가 내리고 남자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녀와의 필연적인 결혼, 그리고 짧은 안식과도 같던 행복한 시간이 흐른 후 예고된 이별이 조용히 찾아든다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는 극히 짧지만 절대 단숨에 읽어치우고 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원래 오로지 행복을 원하면서도 비극에 매혹되는 경향이 있다. 영화도 책도 슬픈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쓴다. 입으로는 싫다 싫다 되뇌면서도 눈과 귀와 가슴은 그곳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 찍힌다. 신일숙이란 작가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심리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지금 작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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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대전기, 소델리니교수의 사고수첩 등의 작가 이정애는 한국 만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영역에는 근접도 모방도 불가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나 쉽게 건드리지 않는 주제와 익숙하지 않으나 감칠맛 나는 글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마약과도 같은 효과가 있다.

그녀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아테르타 연대기'는 초기작에 속하고 그림도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자유분방한 펜선과 비쩍 마른 몸들, 여자보다는 남자를 능숙하게 잘 그리고 유쾌한 유머감각으로 무거운 주제를 아주 가볍게 희석시킨다.

때는 BC 481년 그리스의 아테르타, 남자보다 힘이 센 여전사 디오클리온은 여인보다 수려한 자태의 소유자인 청년 이니아스에게 첫눈에 반하고만다. 그들은 실상 서로가 극점에 있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애제자였으나 금지된 사랑에 빠져 지상에 유배되었던 것. 사랑스런 여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야만적인 디오클리온의 저돌적인 사랑에 혐오를 느끼며 달아나던 이니아스는 어느날 문득 그토록 혐오하던 이에게서 연민과 동정이 어우러진 운명적 사랑의 실체를 만난다.

디오클리온이 자신을 혐오하는 이니아스에게 '맹세하지만 이제 그대를 사랑하지 않아, 정말이야 나도 그대를 미워해! 미워해! 미워해!'라고 울며 소리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아닌 웃음이 터져나온다.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갈구하는 디오클리온의 방식은 안타까움보다는 그렇게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절대성과 순수성이 결국 이니아스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여는 것이다.

'아무 것도 이뤄질 수 없는지도 모르오. 그대에게나 나에게나 결국 파멸을 가져올 테지.. 틀림없이' '그대를 신뢰하지 못하듯 사랑을 믿지도 않소. 지리멸렬하고 지긋지긋해. 나의 넋은 먼지로 가득 차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니아스는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오, 그대를 사랑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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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2-13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이해가 잘... 그러니까 외모가 좀 그래도 순수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건가요?

겨울 2004-02-13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모나 성격에서 양 극점에 선 남녀라도 그들의 만남이 신에 의해서 맺어진 운명이라면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거죠. 단정, 엄격, 질서, 조화의 아폴론적 인간과 역동, 열정, 광포,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일지라도요. 인간사에 개입하는 고대 신들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 읽더라도 흥미진진합니다. 대표적인 만화에 신일숙의 불후의 명작 '아르미안의 네딸들'이라는 만화가 있지요.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몇 년 전의 일이다. 대여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먼지 쌓인 구석 모퉁이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당시 나는 기형도의 시집이며 산문이며 무엇이든 자료가 되는 것이라면 모으는 중이었다. 일단은 그 책을 빌려서 집으로 와서 꼼꼼히 읽은 뒤, 집에 있는 책꽂이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외국소설 중 스릴러물로 한 권을 골랐다.

물론 교환하기 위해서다. 썩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고 기형도에 관한 책이 대여점에서 인기가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담뿍 미소를 짓고 제안을 했다. 또한 가져간 책이 당시에 인기있던 베스트셀러라서 주인이 거절할 이유가 전혀없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기형도의 순진한 얼굴이 큼직하게 박힌 얇은 이 책을 아직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물론 돈을 주고 새 책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지만 대여점에서 찬밥덩이로 취급될 것을 뻔히 알면서 버려두기 싫다는 당시로서는 절실한 이유였다. 누군가에게는 하찮지만 내게는 귀한 것들이 어딘가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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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2-1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기형도님을 돌아가신 후에 알았어요. 알고 나니까 그의 죽음이 너무도 안타깝더군요. 그런 사람이...존 레논, 커트 코베인, 김현....등등이랍니다.

잉크냄새 2004-02-1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몇번을 집었다 놓은 시집중에 하나가 기형도님의 시집이었는데, 다시 한번 접해봐야겠군요.
 

우연히 읽은 만화 한 권이 많은 생각을 낳는다. 강도 8.8의 대지진과 후지산의 분화, 해일로 인해 일본이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진다는 미래이야기다.  

이 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마도 읽는 것은 처음인 듯 싶다. 솔직히 제목만으로는 고개가 저어지는데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년이 무척 인상적이라 첫장을 열었다. 소년 켄이치로가 홀로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발견한 상처입은 강아지 한마리,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소년의 행동에는 절도 감탄사가 터진다.

단지 1권 뿐이라 앞으로의 내용은 전혀 모르지만 또 다른 모험과 소년의 활약, 그를 돕는 주변인들이 더 많이 등장하겠지. 분단된 일본을 이끌 대정치가의 탄생과 잠재된 저력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으로 1권은 끝이 났다.

만화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잇권 다툼을 암시한다. 6.25전쟁 이후 우리나라도 구호물자를 싣고 온 강대국의 거친 발자국에 짓밟혔었다. 현실에서 경제강국으로 우뚝 선 일본이 가상의 미래에서 약자로 전락하여 주변국들과 얽히는 과정이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이 작가의 다른 만화도 필히 읽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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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지금 밖에는 엄청 많은 눈이 내린다. 볼 일을 보다 말고 마당으로 나가서 마당과 대문 앞을 쓸고 왔다. 아침 잠이 많아서 일찍 일어나 눈치우기는 불가항력이므로 자기 전에 치우자는 생각이었다. 보다 보다 이렇게 많은 눈은 요 몇 년 동안 처음인 듯 기분이 새롭다. 엎드려 비질을 하는 동안도 한줌은 될 법한 굵은 눈송이가 툭툭 떨어진다. 컴컴한 밤, 골목에 나와 있는 건 혼자다. 눈오는 날 혼자인 것도 그닥 괜찮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새삼스럽게 감상적이 되고 말았다.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도 눈꽃이 그득 피었다. 손가락 마디만큼 아슬아슬하게 쌓인 눈이 금방이라도 우수수 쏟아질 것 같아서 멀찌기 떨어져 섰다. 나무에 눈이 내리며 쌓이는 것이 저렇구나 하면서 열심히 구경하고 섰는데, 그 앞에 밑둥만 남은 목련나무가 괜히 불쌍하다. 옆집에 사는 사람의 이런저런 성화에 올 가을 기어이 베어졌다. 말로는 흉물이라고 무슨 꽃나무가 아름드리 고목이냐고 타박을 주면서 사철 일거리를 만드는 꽃잎이며 낙엽을 구박한 것이 죽도록 후회된다. 하지만 지나치게 커 버린 주택가의 나무는 밀집된 주택가의 이웃에게는 엄청난 민폐였다. 손바닥만한 마당도 시멘트로 발라버리고 풀 한포기 자라는 걸 용인하지 못하는 세상인 탓이다. 조금 멋대로 떨어지고 날라가서 집안을 어지럽힌 들 무슨 큰 해가 된다고 독을 품은 벌레도 아니거니와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도 않는데 말이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꽃봉오리가 주렁주렁 눈송이와 쌍벽을 이루었을 터인데 마냥 아쉽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대보름이다. 지금 시골에서는 잔치가 벌어졌으리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보여 음식을 만들고 하얀 시루떡을 해서 제를 올리고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놀이는 달빛아래 꽹과리며 징을 울리며 흥겹게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이들은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하얀 떡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아래서 동네 어르신들이 하얀 종이를 태우는 것을 구경했다. 마을 앞 공동묘지는 그 밤의 놀이터로 변하여 숨박꼭질이며 미끄럼타기로 웃음꽃을 피웠더랬다. 여자아이들은 나이든 오빠들을 쫓아다니며 쥐불놀이 하는 것을 구경하다 한 번 해 보자고 난리굿을 치곤 했다. 대부분은 겁이 많아서 그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쌩쌩 돌리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유난히 괄괄한 언니 하나가 성공을 시키면 좋아라 손뼉을 치고 우러러 봤던 유년, 이 밤에 몹시도 그립다.

눈이 쌓이길 기다렸다 대문 앞을 다시 쓸었다. 낼 아침 늦잠을 자더라도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시골에 사시는 엄마가 동생 편에 오곡밥과 나물반찬을 만들어 보내셨다. 자식에게 해 먹이는 낙이 없으면 무슨 재미냐며 전화기 너머로 기침을 하신다. 나는 목이 메어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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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삶 2004-02-0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쌓이는 눈처럼 쌓여 가는 추억이 아름답기만 하죠.
글을 나니 저의 유년의 대보름 밤, 기억이 새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