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몇 년 전의 일이다. 대여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먼지 쌓인 구석 모퉁이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당시 나는 기형도의 시집이며 산문이며 무엇이든 자료가 되는 것이라면 모으는 중이었다. 일단은 그 책을 빌려서 집으로 와서 꼼꼼히 읽은 뒤, 집에 있는 책꽂이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외국소설 중 스릴러물로 한 권을 골랐다.
물론 교환하기 위해서다. 썩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고 기형도에 관한 책이 대여점에서 인기가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담뿍 미소를 짓고 제안을 했다. 또한 가져간 책이 당시에 인기있던 베스트셀러라서 주인이 거절할 이유가 전혀없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기형도의 순진한 얼굴이 큼직하게 박힌 얇은 이 책을 아직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물론 돈을 주고 새 책을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지만 대여점에서 찬밥덩이로 취급될 것을 뻔히 알면서 버려두기 싫다는 당시로서는 절실한 이유였다. 누군가에게는 하찮지만 내게는 귀한 것들이 어딘가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