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대전기, 소델리니교수의 사고수첩 등의 작가 이정애는 한국 만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영역에는 근접도 모방도 불가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나 쉽게 건드리지 않는 주제와 익숙하지 않으나 감칠맛 나는 글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마약과도 같은 효과가 있다.

그녀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아테르타 연대기'는 초기작에 속하고 그림도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자유분방한 펜선과 비쩍 마른 몸들, 여자보다는 남자를 능숙하게 잘 그리고 유쾌한 유머감각으로 무거운 주제를 아주 가볍게 희석시킨다.

때는 BC 481년 그리스의 아테르타, 남자보다 힘이 센 여전사 디오클리온은 여인보다 수려한 자태의 소유자인 청년 이니아스에게 첫눈에 반하고만다. 그들은 실상 서로가 극점에 있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애제자였으나 금지된 사랑에 빠져 지상에 유배되었던 것. 사랑스런 여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야만적인 디오클리온의 저돌적인 사랑에 혐오를 느끼며 달아나던 이니아스는 어느날 문득 그토록 혐오하던 이에게서 연민과 동정이 어우러진 운명적 사랑의 실체를 만난다.

디오클리온이 자신을 혐오하는 이니아스에게 '맹세하지만 이제 그대를 사랑하지 않아, 정말이야 나도 그대를 미워해! 미워해! 미워해!'라고 울며 소리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아닌 웃음이 터져나온다.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갈구하는 디오클리온의 방식은 안타까움보다는 그렇게 웃음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절대성과 순수성이 결국 이니아스의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여는 것이다.

'아무 것도 이뤄질 수 없는지도 모르오. 그대에게나 나에게나 결국 파멸을 가져올 테지.. 틀림없이' '그대를 신뢰하지 못하듯 사랑을 믿지도 않소. 지리멸렬하고 지긋지긋해. 나의 넋은 먼지로 가득 차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니아스는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오, 그대를 사랑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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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2-13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이해가 잘... 그러니까 외모가 좀 그래도 순수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건가요?

겨울 2004-02-13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모나 성격에서 양 극점에 선 남녀라도 그들의 만남이 신에 의해서 맺어진 운명이라면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거죠. 단정, 엄격, 질서, 조화의 아폴론적 인간과 역동, 열정, 광포,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일지라도요. 인간사에 개입하는 고대 신들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 읽더라도 흥미진진합니다. 대표적인 만화에 신일숙의 불후의 명작 '아르미안의 네딸들'이라는 만화가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