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의 기억>..

뭔가 도회적이고, 몽롱하며 고건물이 담겨진 흑백사진이 떠오르는 동시에 이내 향긋한 커피라도 한잔 마셔야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주는 단어의 조합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도시’란 도쿄나 뉴욕처럼 너무도 정신없는 풍경으로도 떠오른다. 그렇다면 도시의 본질은 무언인가?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곳. 할어버지께서 손수 짓고, 아버지가 태어났으며 한번도 이사를 다녀본 적 없는 우리 집이 있는 이 곳 또한 도시인데 말이다.


4월의 세 번째 휴일. mp3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쏟아지는 햇살, 기분 좋은 무궁화호의 떨림 속에 마주한 책은 혼자만의 여행에 외롭지 않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여행이란 자유로움이다. 설렘이고, 도전이며 새로움이다. 또한 지겹던 방의 휴지통까지 문득 그립게 느껴지는 것 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거창한 여행의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 한나절의 갑작스런 여행도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먼 훗날 이 책을 펼쳐들 때 서른, 무궁화호, 4월의 햇살이 연산 작용으로 기억될 테니깐.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저자는 자신의 기억에 담겨진 ‘도시’들을 말한다. 그곳엔 스무 해 전 자신이 있고, 함께한 친구들이 있으며 도시의 풍경과 역사가 있다. 아울러 ‘도시’는 ‘도시(都市)’란 단순한 의미가 아닌 그 곳에 살았던 인물들로 인해 대변되고, 기억되며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한다. 가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브뤼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루벤스 그림이 내 기억 속에 네로와 파트라슈와 함께 존재하는 것(며칠전 엄마랑 수다 떨면서 만화 이야기를 했었는데 책에서 또 만나니 너무 신기했다~)처럼 말이다. 뭔가 어렴풋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생각해 보면 여행에서 남는 건 물질적인 ‘사진’이 아니라 추상적인 ‘기억(추억)’이 아닐까 싶다. 같은 곳을 걷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풍경을 바라봐도 같은 수 없는 것. 그 다름의 이유를 일상 속에서 쉬이 발견하지 못하는 건 삶과 생각의 차이가 무채색의 도시 속에 함몰되어버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 같은 무채색의 ‘도시’인데 어째서 이런 모순이 생긴단 말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생활공간)’가 누군가에겐 자신의 다름을 찾을 수 있는 ‘도시(여행지)’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 익숙한 거리의 가로수조차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정답인 것도 같은 이런 생각들이 바로 ‘도시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래된 사진 속에 담겨진 집이 모습이 지금과는 너무도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때론 삶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때가 있나보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읽으면서 줄곧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깐 말이다. 공산주의, 소비에트 국제학교,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마리와 그녀의 세 친구 리차, 아냐, 야스나의 소녀시절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이런 시절이 있었나싶게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난 지금도 일본에 존재하는 조선학교가 있음을 알면서 마리의 아버지가 공산당원이였다는 사실이 왜 그리 놀라웠을까? 괜히 책을 읽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역시 뉴스에서 건성으로 듣는 이야기는 백날 들어봐야 효과가 없는가보다. 이렇듯 사전지식으로 연결이 안되니깐 말이다.


소비에트 국제학교는 공산주의라는 같은 사상을 가진 다양한 나라와 인종의 아이들이 다닌 학교였다. 하지만 아무리 사상이 같더라도 수많은 나라에서 온 어린 아이들이 느끼는 문화적 차이며 신분의 차이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마리 역시 그런 차이와 다름을 친구들과의 관계속에서 때론 무너트리고, 때론 인정하면서 그렇게 우정을 쌓아간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느꼈던 감동은 그녀들의 소녀시대가 아니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마리가 다시 세 친구를 찾으면서의 이야기였다. 1년의 공백이 있어도 어색해질 수 있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인데 어찌 30년도 더 지나버린.. 그리하여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친구들을 찾으러 다닐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그리워만 할 뿐 막상 찾을 용기는 없을꺼라 생각한다. 그런 뜻에서 마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친구 찾기의 험난한(?) 여정을 따라가면서 혹 친구를 만나지 못하거나 불행한 소식이 들리면 어쩌나 진심으로 마음 졸였고, 재회를 했을 땐 진심으로 함께 행복했다.


다시 찾은 친구들은 소녀시절 모습에 비추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어 마리를 놀라게도 하고, 그와 반대로 변함없는 모습도 간직하고 있어 그녀를 감회에 젖게도 한다. 하지만 친구들의 변한 모습이나 그렇치않은 모습이나 모두들 시대의 영향이 컸기에 이 이야기의 힘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공산주의는 무너지고, 소비에트는 붕괴되었다. 만약 소비에트가 붕괴되지 않고, 공산주의가 아직까지 존재한다면 그녀들의 삶은 많은 부분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혹 프라하에서 소녀시절을 지나 처녀시절과 중년을 맞으면서 이웃사촌으로 오순도순 살았을지도.. 하지만 그녀들의 삶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변화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녀들은 그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 만족한다고 한다. 그 만족한 삶이 최선의 삶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으리라.


다만 더 이상 마리는 없고, (그녀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리와의 만남 이후 친구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삶에 자신을 대입시켜본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글쎄.. 난 나와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 생각할 수 없지만 그저 슬프다는 느낌만 들었다. 소비에트 국제학교에서 만난 그녀들의 첫 만남조차 그녀들의 선택은 아니였으니깐 말이다. 물론 우리네 삶도 처음부터 자신의 선택으로 시작되는건 없다. 단지 자신이 100%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그 선택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진실만을 알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보다 시대의 물결에 더 큰 영향을 받은듯한 그녀들이 조금 많이 안타까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이야기
박형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변산바다에 가보고싶다. 가서 구수한 전라도사투리들으며 맛깔나는 남도음식먹는다면 이 책의 내용을 1/100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한번도 경상도를 떠나본적없는 경상도 토박이가 어설픈 전라도 사투리를 중얼거리며 혼자 비실비실 웃고, 또 웃다. 침꼴깍 삼키며 생소한 음식이 뭔가 검색해 눈도장찍어보고, 가보지못한 변산반도를 찾아보며 서해바다의 짠내가 어찌 다를지, 일몰은 어떨지 상상예찬해보는 이 순간 영호남의 갈등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 그건 괜한 어른들의 편견이지 이 좁은 땅덩어리에 그 딴에 어디있단 말인가? 지금껏 난 무의식적으로 세뇌당했었단 말인가? 흠..

책읽는내내 난 너무 행복했다. 발문을 쓰신 윤구병님의 말씀처럼 글이 찰떡처럼 붙어 착착 감기는 그 맛도 맛이지만 잊었던 내 어릴적추억들이 생각나서 말이다. 그러고보면 이 땅에 산다는건 나이(그가 58년 생이니 딱 나보다 스무살이 많다), 지역(위에서도 말했듯 그는 전라도, 난 경상도)을 뛰어넘는 무한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우리는 한민족이 맞는가보다.

나역시 어릴적 할배, 할매랑 같이 살았던 덕에 재미있는 기억이 많다. 특히 설날이 다가올즈음엔 항상 제사 준비로 온 집안이 들썩거렸다. 쌀씻어 불렸다 방앗간가서 가레떡 뽑아오던일. 이땐 동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므로 색색깔 대야가 사람대신 줄을섰고, 혹 쌀이 뒤바낄까 사탕물며 엄마가 올때까지 그 앞에앉아 기다리며 따스한 떡을 얻어먹던 일이며 요즘엔 있어도 안먹어지는 오꼬시가 그땐 왜 그리 맛있었던지.. 날마다 한줌씩 할매가주면 아껴가며 오물거리며 먹던 기억. 어디 그것뿐일까? 고만고만한 친척동생들 데리고, 온동네다니면서 세배하고, 세뱃돈 두둑하게얻어 문방구로 달려가 먹고싶던 불량식품이며 장난감사서 마냥 행복해했던.. 그렇게 명절며칠은 몸이 피곤할정도로 즐겁고, 신났었다.

여름이면 집앞 바닷가로 달려가 힘빠지도록 물놀이하고, 발뒷꿈치로 디스코를추며 조개잡던 기억. 그땐 물도 맑고, 깨끗해 조개가 넘쳐났는데.. 바다 안가본지가 오래된것 같다.

또 가을엔 빨간 고무대야에 큰 나무주걱 휘휘저어가며 고추장 만드시던 할매랑 엄마옆에서 맛감정(?)하던 일이며, 6학년 운동회날 손님찾기시작전 신발이며 오자마며 언제 준비하셨는지 두 손을 번쩍들며 이름을 부르던 엄마의 그 목소리, 1년 365일 뒷골목 공터에 항상 우릴 기다리시던 국자(뽑기)할머니의 간이 좌판에 매일 서너시면 약속이나한듯 단짝 친구랑 찾아가 국자 한번 해먹고, 존뜨기 구워먹고, 50원짜리 쥐포에다 엿까지 코스로 배불릴 먹어도 단돈 500원이면 충분했던 우리의 아지트.

불과 몇십년전일뿐인데.. 마치 한 세기도 더 된듯한 옛 기억을 더듬으며 밤늦게까지 학원을 뺑뺑돌기만하는 요즘 아이들에비해 얼마나 행복한 유년을 보냈는지 새삼 고마웠다. 허름하던 학교도 새 건물로 바껴버렸고, 조용하던 바닷가도 이젠 네온사인 화려한 술집들이 들어찼지만 내 기억속 그곳은 영원히 그대로일터니 아쉬워하지 말지어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산다는데 잠깐 들추어본 추억에 얼마나 배불러했는가?

한동안 우울했었는데..
가을하늘쳐다보며 오랫만에 웃어본것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참 오랜만인것같다. 휴일의 여유를 한껏 즐기다 불현 듯 리뷰를 써야한다는 생각에 후다닥 컴퓨터를 키곤 습관처럼 인터넷 바로가기 버튼을 누르고 앉은 것이 말이다. 자취하다 내려온 동생방으로 인터넷이 연결된지 한 달이 훌쩍 넘었것만 내 몸은 그 오랜 습관을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그래 그런 것 같다. 머리로 기억하는 것 보다 몸에 밴 행동이 더 오래간다는 것. 공선옥 그녀의 글속에서 그녀의 지나온 삶이 묻어나는것처럼. 그래서 난 조금의 부담감으로 흐릿한 화면에 시선을 집중한다.

공선옥이란 생소한 이름. 실은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 이 책을 접하기전 작년 어느 이벤트에서 받은 서른여권의 책중에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란 책을 봤기에 ‘아~ 그 사람..’이라며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하지만 이름만 기억날뿐 듣도보도 못한 작가의 책은 이내 내 책장으로 들어갔기에 이 책이 그녀와의 첫만남인 셈이였다. 들뜰만한 첫 만남인데.. 대뜸 사는게 거짓말 같을때란다. 무엇이 어떻길래 사는게 거짓말 같을까란 궁금증 증폭. 하지만 서른해도 살지않은 젊디젊은 나도 뉴스나 신문에 거짓말같은, 거짓말이였으면 좋을 수없이 많은 사건사고를 마주할 때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험한 세상에 괜한 욕도 해보고, 내 맘대로 안되는 내 삶에도 부쩍 짜증나고, 무기력해져 힘든데 내가 모르는 거짓말같은 세상사를 더 알게되어 좋을것이 뭐있나싶어 조금 망설여진것도 사실이다. 애써 살만한 세상일꺼라고, 좋은 날이 올꺼라고 희망을 가지려 노력하는 요즘의 나에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싶었던 이유는 보기 힘들다고 무작정 안볼 수도없고, 문제가 있다고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 뭐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해 관심은 가져야할 것 아닌가.

책은 비교적 쉽게 잘 읽혔다. 굳이 말하지않아도 될 자신의 상황까지(이 역시 사회의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협한 시선일지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뭐랄까? 송두리째 자신을 까발려 놓은 후 편안하게 탁 털 듯 이야기하는 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할까그랬다. 그녀의 글엔 멋진 표현도 화려한 기교도 없지만 그래서 더 사람을 끄는 매력있는 것 같다. 코드가 맞아서인가? 책은 생각보다 재밌었고, 빨리 읽혀서 그녀의 다름 책들도 궁금해졌고, 마침 <마흔에 길을 나서다>가 있어 곧바로 읽어버렸다.

잡지에 연재된 글을 묶어 펴낸 책 역시 밥벌이를 위해 썼다고는하지만 그녀의 냉철함이 묻어난 책이였다. 눈은 냉철하지만 가슴은 따뜻한 그녀의 시선은 그녀의 말처럼 글을 써 먹고살기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그 때부턴 순수한 즐거움이 사라진다고들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밥벌이의 수단이되면 그때부턴 즐거움을위한 취미가 아닌 그야말로 나와 가족의 생명이 달려있으니깐 말이다. 그녀는 그랬단다 내 어머니시대 딸들이 그랬듯 어려운 환경에서 마음껏 공부하지 못했고, 먹고살기위해 공장에 다녔으며 지금도 밥먹고살아갈 걱정을 해야하는 평범하디 평범한 소시민. 하지만 소시민이 살아가기엔 이 나라 이땅엔 너무나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그래서 그녀는 그런 일들을 기록해나가기로 결심한 듯하다. 글을 써 먹고살지만 그 글속에 자신의 양심을 담아 그 밥앞에서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것. 얼렁뚱땅 밥을 먹지않겠다는 의지같은 것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잘먹고 잘살자는 웰빙이 사회의 화두로 집중을 받지만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나가야할 사람들에겐 남의 나라 이야기일뿐이며 탁상공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높은 분들의 결정으로 돌아가는 세상엔 가난한 자의 자리는 갈수록 줄어든다고..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 출산장려를 한다지만 어미젖먹을 장소조차 마땅치않고, 월드컵에 온나라가 하나처럼 뭉쳤던 그 순간에 힘없이 세상을 떠난 미순이효순이의 억울한 죽음앞에 뭐하나 제대로된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한 힘없는 나라.. 제 나라 말보다 외국말배우기에 온신경을 집중해 연간 몇천억의 돈을 쓰고, 백인앞에선 의기소침하지만 정작 누구도 하기싫은 일을 하러온 가난한 사람들에겐 아무렇게나 대하는 사회.. 내가 그러지 않았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 내 잘못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말한다. ‘당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실은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책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부끄러웠다. 나 역시 좀더 넓은 시선으로 많은 것을 보려 노력하지만 언제나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방관자의 입장일 뿐이였다. 그렇다지않는가? 산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니 죽은 사람이 제일 불쌍하다고.. 아무리 안타깝고, 아무리 슬퍼도 자신의 일이 아니면 곧 멀어지고, 잊혀져버린니 당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넘어가버리는 세상. 그렇게 얼마나 많은 일들이 묻혀지고, 잊혀져 버렸을까?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렸다고 과연 사라져버린것일까? 아직도 한 쪽 어디가에선 여전히 아파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의 아픔이 어느 순간 우리의 아픔이 될 수도 있을텐데 우린 무시하려고만 한건 아닐까? 어느새 우린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버린건 아닌지 겁이난다.

더 잃을것이 없기에 자유롭고, 가진 것이 없기에 편안한듯한 그녀에겐 팽팽하게 부풀어 터질듯한 공을 터지지않게 유지시켜주는 숨구멍이 존재하는 듯 하다. 그 시선과 마주할 때 한없이 부끄러운 내 모습 또한 한동안 머릿속에 남아있을듯. 하지만 밥벌이가 힘겹더라도 밥앞에서 부끄럽지않을 그녀의 시선이 오래도록 남아 내 부끄러움을 잊혀지지않게 해줬으면 좋겠다. 책 한권 사는 값으로 너무 많은걸 바라는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국어사전을 옆에낀채 책을 읽은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지나가던 동생마저 "한글로 된 책읽는데 국어사전이 왜 필요하냐?'며 의야해했으니깐~ 하지만 어쩌랴? 줄기차게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들중 많은 것이 낯설고, 뜻을 몰라 문장을 이해할 수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더 중요한것은 사전을 찾아봐도 안나온게 많아 그냥 넘어간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지만 말이다. 어찌되어던 그렇게 며칠간 소용돌이같던 책읽기를 마치고, 가만히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려고하니 생각할수록 정리는 커녕 더 엉켜버릴것 같아서 부랴부랴 서둘러 리뷰를 적으러 왔다. 책읽으면서부터 리뷰적을 생각에 조바심치긴 처음인것 같다. 그만큼 책 내용은 흥미롭고, 신기했다. 제목부터 그렇치 않은가? <적대적 공범자들>이라니..

이 책의 가장 큰 핵심은 임지현 교수의 조금의 삐딱하게 보자와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모든걸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보자인것 같다. 물론 나에겐 두가지다 받아들이기 만만치않았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나를 비롯해 내 주위에서만 봐도 대화의 주된 화제는 '앞으로 뭘 먹으며 어떻게 살것인가?'던가 아니면 소소한 연예계 뒷담화뿐이다. 누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고구려사가 어떻고, 대북공정에 대한 생각이 어떠하며, 부시정부와 북한의 행보에 관해 토론을 하겠냐 말이다. 물론 뉴스보도나 신문에서 보고, 들은 세상사에 관해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토론이 아닌 1차원적 정보공유의 의미가 더 크기때문에 몇 마디이상 대화를 끌어가기 힘든게 사실이다. 그러기에 개개인의 의견을 궁금해하기보단 항상 같은 시선의 정보더라도 놓치지않으려 노력하는것조차 벅찰 뿐이였다. 그렇기에 이 책의 내용은 특별했다.

우린 아주 어릴때부터 영화나 만화를 볼때도, 친구들이랑 놀이를 할때도 우리편=착한편, 상대편=나쁜편으로 편을나누는것에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져 있었던것 같다. 그러다보니 커서도 그 습관이 사라지지 않는것인가? 뭐든 먼저 이분법으로 가르고본니 말이다. 자본/민주주의와 진보/보수주의, 미국, 탈레반/후세인과 미국,아프간/이라크의 힘없는 국민들, 한국과 일본등등 그렇다보니 그 나뉨과는 상관없는 주변화된 소수자는 언제나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크게 나눠 와닿지 않는다면 아주 작은 예로 들었던 노동자 운동에서 노동자는 언제나 정규직/남성/한국인 노동자가 주가 되었고, 비정규직/여성/외국인 노동자처럼 주변화된 소수자의 권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역시 여성으로 사회에서 느끼는 차별이 많았지만 노사갈등이 보도되면 어느새 노동자의 입장에 가깝기에 그들을 지지했던게 사실이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이분법이 소수자를 흡수함으로인해 더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하고있는것이다. 여지껏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아주 다른 시선이였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또한 크게 화두가 되었던 <고구려사 왜곡문제> 역시 미디어의 보도와는 조금 다른 의견이였다. 물론 나역시 역사란 시대상황에따라 달리 해석되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역사의식을 고구려사 왜곡에 대입해본적은 없었다. 그저 연일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나와 침을 토하며 고구려가 왜 우리의 조상일 수밖에 없는지 이유와 그런 역사를 중국이 뺏어가려하니 정신차리고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이며 국가차원에서 기필코 막아야하는 중대한 과제라는 보도를 보니 정말 중국 나쁜놈들이고, 가만두면 안될일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비틀어보기보단 받아들이기 급급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렇게 모든 뉴스와 신문에서 약속이나 한듯 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딱지가 않도록 하는데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또 딴지를 건다. 고구려를 주(主)로 놓고보면 중국과 한국의 편가르기에 희생자가 아니냐고? 과거 고구려인들은 몇 세기후 자기들의 역사가 두 나라간 싸움의 도마위에 오를줄 생각이냐 했겠냐고.. 그저 고구려는 고구려일 뿐인데 왜 수백년이 흐른 지금에와서 땅을 가르고, 자기편을 만드려하느냐고 말이다. 이 역시 생각지도못한 입장이 아닐 수 없다. 왜 어느 한곳에서도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일까 궁금증이 생긴다.

현대 사회와 체제, 집단들은 갈수록 적대적 관계로 모든 사안을 놓은채 개개인 생각하기보단 편을갈라 힘없는자의 희생을 실은채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하려고만 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를 내듯 더 큰 소리를 내기위해 개인의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우를 범하기전에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반박을 하고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그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섣불리 옹호할 수도 없다. 그저 내가 생각치 못했던 관점외의 부분에 대해 눈돌리게 해주었고, 모두 '예'라고 대답할때 '아니오'는 커녕 가만히 있어도 혼나기 일쑤인 이 나라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그의 용기만을 높이 사고싶을 뿐이다. 앞으로 예의 주시할 사람이 더 늘어났다는 반가움과 함께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