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커넥션 -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
로이 W. 스펜서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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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가 많이 녹아 배가 지나다닐 수 있는 항로가 생겨버렸다며 부산이 아시아의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뉴스보도를 불과 몇 시간 전에 들었다. 그럼 북극 빙하가 사라져 걱정이 태산인 기후학자들과 반대로 우리(대한민국 국민들)는 즐거워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빙하가 사라져 서식지를 잃어가는 북극곰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얼마 전의 마음은 접어야하는 건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니 조금도 모르겠다.

지금껏 지구 온난화는 전 지구인이 힘을 합쳐 헤쳐 나가야 할 무엇이였고, 우리는 후손에게 잘 물려줘야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고갈되어가는 자원.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자연이며 자연은 우리의 소유가 아닌 잠시 빌려 쓰는 것 뿐이라던 교육. 그것에 일말의 의심도 반항도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하는 줄 알았고, 그래야 맞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란다. 이 무슨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란 말인가..

저자는 말한다.

정치인들이 맹목적으로 유권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정보로 무장한 대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중략- 대중은 환경과 관련된 온갖 으름장을 하나도 빠짐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대중이 꿈꾸는 가상의 세계는 환경 관련 규제가 어떤 부정적인 영향도 끼치지 않고 위험은 전혀 없이 편익만이 제공하는 세계이다. p21

나 역시 그랬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앨 고어의 활동을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에 물러나서도 선거철만 되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짓 말고, 전 지구적인 활동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이다.

나는 환경을 배척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오랜 연륜을 가진 삼림을 보존하고, 물의 오염을 최소화하고, 에너지를 보존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러나 자연의 이런 요소들이 가치를 갖는 것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을 기본권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에게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p147

그 옛날 할어버지께선 6시에 저녁을 드시곤 전깃불을 끄고, tv만 틀어놓으셨다고 한다. 행여 엄마가 방에 불을 켜놓으면 헛기침을 하시며 ‘애미, 불꺼라~’라고 하셨단다. 대발이 아버지만큼이나 절약에 철저하셨던 할아버지. 나 역시 그 영향인가? 집에서 뿐만 아니라 목욕탕에서도 수돗물을 콸콸 틀어 놓치 못한다. 조금만 넘치려 해도 잠그고, 물이 넘치면 내 자리가 아니라도 신경 쓰이고, 돌아다니면서 스위치를 내리고.. 난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물 부족 국가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도요금이 저렴하단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전기요금이 누진제로 바뀐 후론 부쩍 전기요금에 신경을 쓴다. 이 역시 그 가치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인가?

사회의 욕구는 무한하지만 사회가 가진 재정적 자원은 유한하므로,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른 문제들에 들어가는 비용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p179

가장 중요한 것은 편익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극소화하는 방향으로 환경 규제가 구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p182

그는 환경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몇 십년 안에 빙하가 녹아 지대가 낮은 나라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미리 불안감을 조성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환경에만 올인 할 수는 없다는 의견. 그건 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이였다. 어느 곳에서도 ‘지금 아니면 늦고 만다’라고만 말해줬을 뿐이였다.

우리는 전기를 지속적으로 이용하기를 바라면서도 발전소가 더 세워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풍력 발전을 더 많이 이용하기를 바라면서도, 풍력탑이 풍경을 망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쓰레기와 폐물을 내다버리기를 바라면서도 더 많은 매립지가 들어서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원자력이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좋아하면서도, 원자력 폐기물과 안전성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p210-211

현대 세계에 기근이 존재하는 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물론 가뭄 때문에 식량 사정이 악화될 수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근의 해법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이 도달할 수 없게 하는 정치적, 경제적 장벽을 제거하는 데 있다. p219

휘발류 대용의 식물성 에탄올의 생산이 증가하면, 식량 가격이 상승하는 예상치 않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수용에 비례하여 공급이 증가하지 않으면 곡물 가격은 상승하고 결국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다. p245

정말 그렇다. 지구의 허파 아마존 밀림의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잘려나가는 것은 가난한 그들에겐 밀가루와 맞바꿀 것이 나무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밀림을 보존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선진국에서 썩어나는 음식물 쓰레기는 줄어들지 않으며 수요와 공급은 언제나 불일치 한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은 평균 온도가 올라가면 에어컨의 설정온도 다이얼을 낮추고, 황사가 불어오면 공기청정기를 돌리며 수돗물이 의심스러워 정수기를 사용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들에겐 물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야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도 황사로 인해 고향을 버려야하는 중국 내몽고인들도 먼 나라 이야기 일 뿐일 것이다.

저자의 모든 주장에 대해 찬성하진 않지만 그의 용기 있는 선택엔 힘을 실어주고 싶다. 지금껏 그 누구도 어느 곳에서도 이런 의견을 내놓치 못했던 것 같다. 모든 지구인들을 포용할 수 있는 환경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란 걱정부터 앞서지만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진실’을 찾도록 우리 모두 좀더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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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가는 길 황석영 중단편전집 2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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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인간에게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회귀 본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들떠서 떠난 며칠간의 여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오다 드디어 ‘우리 집’이 있는 도시의 이정표를 봤을 때 반가움과 안도감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내가 속한 삶의 테두리가 답답하지만 벗어날 용기가 없는 내겐 그래서 여행은 좋은 휴식이며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그렇기에 떠나고, 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해도 매번 설레는 것일까?

‘삼포 가는 길’은 어릴 적 ‘TV 문학관’에서 스치듯 본 것도 같은데 기억나는 거라곤 드넓은 눈밭밖에 없다. 사회상, 주인공들의 아픔 그런 것들을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수십 년이 흘러 드디어 책을 마주했다. 솔직히 책 읽는 내내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끊이질 않으면서 말이다.

 

물론 70년대 태어났지만 그 시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풍요하진 않았지만 부모님의 보호속에 행복하게 자랐고, 내 주위의 삶은 한없이 평온했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난 우리나라가 모두 ‘행복한 대한민국’인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의 삶은 평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시대의 문턱마다 그는 한가운데 있었고, 애써 피하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런 살아있는 글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겠지..

단편의 호흡을 못 따라가는 편이라 읽기 버거워하는데 의외로 금방 글 속에 들어갔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도 수월했다. 그 속엔 내 아버지가 어머니가 할머니가 있고, 어쩌면 시대는 다를지 몰라도 내가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산다는 게 다 그렇고 그렇듯 아직도 시대는 흉흉하고, 힘들고, 벅찬 일들로 가득하다. 하나가 해결됐나 싶으면 다른 하나가 터지는 삶의 순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삼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잊어버릴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으며 꼭 가야할 곳. 그 의미는 저마다 다를지 몰라도 그것에 대한 열망은 한결같으리라. 그렇기에 아직도 ‘삼포 가는 길’은 존속되는 것 같다. 제발 대한민국도 더 이상 ‘삼천포’로 빠지지 말고, ‘삼포’로 곧바로 가는 고속도로가 뚫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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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밀사 - 일본 막부 잠입 사건
허수정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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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몇 달간 한국사 공부하느라 머리에 쥐가 났었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그 방대한 양에 기가 눌리기도 했었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조선시대 붕당정치였다. 도대체가 외우고 돌아서면 까먹고, 또 까먹고..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서 머리 아프게 만드냐고 원망하고도 싶었지만 새삼 <왕의 밀사>를 읽는다고 붙잡고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더 신기한건 공부할 땐 그리 머리 아프던 사실들이 드라마나 영화, 책을 읽을 때 자연스레 연결되어 앞뒤 상황파악이 되고, 활자로만 봤던 인물들의 움직임이 너무 재밌다는 것이다. 역시 ‘아는 것이 힘일까?’

 

서인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후 정권을 잡고 (얼마 전 끝난 일지매의 시대배경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효종이 왕위에 오른 시점이 바로 <왕의 밀사>에 배경이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무대는 조선이 아닌 일본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도무지 헷갈리는 인물들의 이름에서부터 아는바 전혀 없는 일본의 막부라니.. 한동안 헤매다가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추리해나가는 박명준의 활약이 벌어질 때부터 속도가 붙었다. (중간 중간 앞 페이지의 인물설명을 뒤적거려가면서 말이다.)


얼마 전 <뿌리 깊은 나무>를 뒤늦게 읽으면서 오밤중에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빗서면서 가슴이 벅차오른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기에 그 정도의 감동을 무의식중 기대해서 그그랬는지 조금 실망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평가받아야할 중요한 점은 작가가 한국과 일본역사에 일정수준이상의 지식이 있다는 사실(없다면 소설을 쓸 수 없었겠지)과 일본을 배경으로 그 당시 시대상황을 살인사건과 잘 버물려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뿌리 깊은 나무>는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면 <왕의 밀사>는 수많은 대립을 겪어온 한국(조선)과 일본의 관계, 동북아의 정세까지 포함한 좀더 넓은 시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를 공부하다보면 안타까운 점이 수없이 많다. 위에서 내려오고, 아래에서 올라오고.. 반도의 숙명일까? 저 드넓은 만주벌판은 우리 땅일 것이며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지 않고, 일본보다 먼저 아니 비슷한 시점에서 개항을 했더라면 역사는 조금 더 달라졌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강대국들에 의한 회담으로 38선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한국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생각 할수록 안타깝다.

 

역사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거라고 한다. 그렇기에 역사를 우습게 알고 넘겨버리는 민족에겐 반드시 역사 속 아픔들이 재생된다고 한다. 당장 지금도 그렇치 않은가? 일본은 오래전부터 독도에 수많은 인력과 자본을 써가며 힘을 기르고 있는 동안 우리 정부는 모른 척 손놓고 있었으며 미친소를 미국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 생각하는 협상자의 말 한마디에 국민은 광분하지 않았는가. 또한 동북공정을 준비하는 중국의 치밀한 전략 앞에 고구려의 역사가 사장될 지경인데 정부는 문제없다고만 한다. 차 떼고, 포 뗀 다음 뭘로 이 나라를 지켜나가려는지 걱정이 앞선다.

역사가 증명하듯 누구도 완전한 적도 동지도 아닌 것 같다. 그렇기에 정신 차리고 중심을 잡아야하는데 부시와 연신 어깨동무하며 미소 짓는 2MB의 모습이 씁쓸했던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비해 ‘밀사’를 준비해 두는 것이 좋지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영웅이 없는 시대 세종과 이순신, 안중근과 김구(존칭은 생략했어요)가 그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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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PD의 뮤지컬 쇼쇼쇼
이지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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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게으르고, 귀찮아하길 잘하는 사람이다. 또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가 너무나도 분명해 가족들에게 욕도 엄청 먹는다. 하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고, 이젠 성격이려니 생각하며 산다. 그런 ‘똥고집의 대마왕’에게 3가지 사건이 있었으니 그 만남은 불현듯 찾아와 나를 지배해 버렸다.

 

그 첫 번째는 열다섯의 봄 가수 T군과의 만남.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열과 성을 다해 이어지고 있다. 이젠 가수가 아니라 친오빠 같고,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 같은 사이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그의 음악 속에 담긴 내 열정과 청춘을 곱씹으며 밥벌이의 힘겨움을 버텨가고 있다.  안보면 죽을 것 같고,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는데 이젠 기다림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내 반평생을 함께한 시간의 위력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부디 앞으로도 나의 멘토로 남아 주시길..

 

두 번째는 스무 살의 초여름 B작가(현재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책을 구입하고, 읽는 건 ‘의리’라 생각된다. 그게 고마움을 표하는 최소한의 자세가 아닐까싶다.)와의 만남. 무료하고, 답답하기만 하던 대학생활에 책읽기는 유일한 돌파구였고, 난 강의시간마다 책읽기로 지겨움을 달랬다. 물론 그 후 수많은 작가를 만나고, 책을 읽지만 그 때만큼의 간절함은 없는 것 같다. 이제 책읽기=생활이 되어버려서 그런가?


마지막으로 스물여덟의 가을 뮤지컬 헤드윅 관람. 생활이 된 팬질로 공연장은 생소하지 않았다. 음악이 나오면(클럽에선 죽어도 안 되는 댄스가 공연장에선 자유자제로 되는 건 정말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ㅠ) 다이렉트로 심장박동부터 빨라지며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걸 어디 한 두번 경험했단 말인가? 더 이상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으며 원초적인 나만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 나는 그걸 기대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방변두리에서 <뮤지컬>을 한다니 공연활성화 측면에서 보는 건 당연한 일. 그렇게 나는 뮤지컬과 만났다. 생소한 분위기에 이끌려가는 것도 잠시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 모습. 아~ 이토록 강렬한 첫 만남이라니.. 세 번째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2008년 여름. 난 T의 컴백을 기다리며 방안 가득 널려있는 책 더미와 함께 하루하루를 지낸다. 하지만 3년 동안 뮤지컬은 1편도 보질 못했다. 왜냐면 나는 참 게으르고, 귀찮아하길 잘하는 사람이니깐..

 

<이PD의 뮤지컬 쇼쇼쇼>를 읽고 싶었던 건 뮤지컬을 보고 싶단 뜬구름 같은 내 욕망을 집약적으로 뭉쳐주지 않을까하는 바람에서였다. 수많은 뮤지컬 광고를 빠짐없이 보고, 다녀온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서 읽고, 장소와 시간까지 알아보면서 매번 쉽게 나서지 못하는 나의 주저함을 떨쳐버릴 수 있게 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책을 쓸 수 있다는 건 왠만한 열정 없이는 못한다. 그것도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런 면에서 이PD의 열정에 제일 먼저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책을 쓰기위해 2년을 보냈고, 뮤지컬까지 다시 관람했다니 오~ 진정한 팬의 자세다.

 

소개된 30편의 뮤지컬은 중 생소한 건 6편. 그 외엔 TV 프로그램을 통해 장면을 보거나 노래를 들어봤거나(유명한 노래가 많으니..) 관심 있는 배우들이 캐스팅 되서 검색해봤거나 해서 하나라도 정보가 있는 것들 이였다. 하지만 ‘헤드윅’을 빼곤 직접 보질 못했으니 내 느낌과 비교해 볼 수 없어 아쉬웠고, ‘이 한곡만은 꼭’에 소개된 노래 중 알고 있는 노래는 따라 불러보지만(‘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성당의 시대’는 그 노래만 TV에서 잠깐 들었는데 정말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익히 들어봤던 멜로디. 하지만 그 노래가 그렇게 온몸으로 전율하게 만들다니 그게 뮤지컬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근데 내가 유일하게 본 ‘헤드윅’의 노래는 왜 ’The Origin of Love'가 아니라 ‘Wig in a Box'였을까?) 들어보지 못한 곡들은 책 읽는 내내 궁금해서(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게 이런 기분이겠지..) 혼났다. 차라리 책 가격을 높이더라도 CD를 첨부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다. 이PD 본인이 전문가가 아닌 팬이기에 팬의 입장에서 써내려가 쉽게 읽을 수 있었고, ‘한번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만큼 그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3년 전 뮤지컬 표를 예매한 후 이곳저곳 검색하며 카페에 가입해서 노래도 들어보고, 영화까지 찾아서 본 나와 아무런 관심 없이 내 성화에 따라간 친구들과 공연 후 감정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였으니깐. 앵콜 무대에서 송드윅이 던진 타월까지 받아 한층 업 된 나는 CD까지 구입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빛의 속도로 오드윅의 사인까지 받는데 성공했었다. 그 후 한동안 CD를 들을 때마다 무대가 그려지고, 오드윅의 흐르는 땀방울까지 떠오르니 매번 감동하고, 감동했던 기억.. 정말 백번 말하느니 한번 보는 게 최고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이PD를 부러워하며 ‘내 생애 두 번째 뮤지컬로 과연 무엇을 볼 것인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겨본다. 그것이 무엇이든 소개된 30편 중에 하나라면 반드시 공연 전 이 책을 읽어보고, 비교하는 재미까지 느껴 보고 싶다. 아~~ 이런 행복한 고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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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바다 건너기
조너선 캐럴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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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나라>로 먼저 만났던 작가. 그리고 두 번째의 만남. 그것만으로 이 작가는 나에게 무언가를 줬다는 뜻일 것이다. 게다가 너무 웃기지 않는가? <나무바다 건너기>라니..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 ‘보여 지는 나’와 ‘진짜 나’사이의 거리감이 생길 때가 있다. 이를테면 ‘밖에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된다.’ 왜냐구? 곧 밖에서의 내 모습이 부모님의 모습이고, 우리 집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지금은 꽉 끼는 옷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화가 날 때도 ‘아니지.. 그냥 내가 참고 말지..’라던가 혹 동네 분을 만나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지나친 후에도 한동안 ‘그냥 해버릴걸..’이라며 찝찝해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난 어느 순간부터 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게 부담이 되어 더 예의를 차리게 되고, 또 부담이 되는 악순환.


나도 때론 진한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고 구두소리가 요란하게 걸어보고 싶고, 밤늦게 술 취한 체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큰 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쳐 보고 싶다. 나도 가끔은 펑펑 울면서 가슴속에 담긴 말을 쏟아내고 싶고, 기분 나쁜 상사에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그래서 당신은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라며 미련 없이 뛰쳐나와 버리고도 싶다. 하지만 좀처럼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안다. 내가 활동하는 이 바닥은 워낙 좁아서 3사람쯤 거쳐 가면 다 친구에 친척이고, 동창에다 선배고, 후배며 동네 사람이고, 모임 회원이니깐..


‘보여지는 나’가 ‘진짜 나’를 지배해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할 때 ‘프래니’가 찾아왔다. ‘내 이야기를 들어볼래?’라며 말이다. 나는 이 사람이 반항으로 똘똘 뭉친 10대의 프래니인지 경찰서장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40대의 프래니인지 흰 머리에 늘어진 살가죽을 가진 60대의 프래니인지 판단할 수 없다. 나조차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단정 지을 수 없는데 어찌 타인을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냐는 지극히 스탠다드한 생각에서 말이다.


어머니는 항상 ‘그 나이를 먹도록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려고 하느냐’며 나를 꾸중하시곤 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다면 ‘하고 싶은 것만’하고 사는 게 진정한 삶의 방식이라 생각하는 나는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고, 그럼 이내 ‘아직 철들려면 멀었나보다..’란 말이 한숨과 함께 스프링처럼 되돌아오곤 했다. 난 아직도 모르겠다. 철이 덜 든 건지 철드는 게 그런 거라면 철이 들고 싶지 않은 건지..


그리자 다시 프래니 말한다. 인간수명이 100세를 향해가는 이 시대에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건 당연한 게 아니냐고. 100년을 살아가야할 인간이 처음 태어나 ’응애응애~‘울지 않고, ’어머니 나오느라 힘드니깐 잡곡밥과 오징어국을 놓은 5첩 반상을 준비해 주세요‘라면 너무 징그럽지 않느냐는 것이다. 깨지고, 넘어지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삶의 과정.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삶이 아니냐고 말이다. 주체할 수 없이 튕겨 오르기만 하던 공도 어느 순간 스스로 적정량의 기압을 맞추게 되고, 바람 빠진 최후의 순간이 오더라도 하늘을 날아오르던 순간을 떠올리며 행복해 하는 게 우리네 인생사가 아니냐고 말이다. 


순간 가슴이 찡해왔다. 부질없다 생각했던 과거의 내 모습도 쉼 없이 흔들리는 지금의 내 모습도 조금 더 괜찮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학습의 시간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다. 너무 멀리 와버려 출발선은 보이지도 않고, 이 길이 맞는 건지 멈칫하는 사이 어두운 숲길에 홀로 서있는 꿈을 참 많이도 꿨는데 이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생긴 것 같다. 그래 어차피 인생에서 비교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행복지수만 존재한다고 믿어 왔으니깐 용기 내보자.


그리고 어느 날 불현듯 아장아장 걷는 세살의 나를 보더라도, 가수에 열광하며 팬레터를 쓰는 열여섯의 나를 보더라도 늘어진 뱃살과 기미로 고민하는 마흔다섯의 나를 보더라도 부정하지 말자. 난 이미 프래니를 만났으니깐~ 

<<우리 모두는 잃는다. 사라지고, 증발해 버린다. 젊은 날의 용기와 격렬함, 무작정의 격노와 방종. 순간에 일백 퍼센트를 사는 강렬함. 그것은 틈새로 새어나가는 물처럼 우리로부터 빠져나간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의 틈새다. 생명 보험과 주택 담보 대출이 시작되는 순간, 혹은 정기 검진에서 문제가 드러나는 순간, 그 과정이 시작된다. 따뜻한 목욕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아닌,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생겨날 때 그 과정이 시작된다. 충동보다 안전을. 흥분보다 안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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