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앤 존 Martin & Jhon 7
박희정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는 게 바쁘다보니 소소한 취미는 일상에 묻히기가 쉽다. <마틴앤존> 7권이 나오길 그렇게 기다렸는데 가을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다보니 출간일을 챙기지 못했다. 뒤늦게 7권이 나왔다는 소식에 후다닥 주문을 하고, 책을 받았지만 이번엔 읽을 시간이 없어 삼일만인 오늘 새벽에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새벽 난 다시 또 삶과 사랑에 대해 컴컴한 벽을 바라보며 생각해봤다. '그냥 지나가 버리는 바람이 아닌 그 사랑에 대해 말이다..'


사실 동성애, 야오이에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조금 고지식한 인간이라 틀 밖의 일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다보니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다 옳지만은 않다는 사실을(더 부패되고, 썩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알게 되었고,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종교도 피부색도 상관없다는데 왜 동성애만 다른 시각으로 봐야하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지금 사랑하지 않은 자 모두 유죄'이니 그들은 무죄이지 않은가.


박희정. 그녀는 만화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 또한 깨뜨려주었다. 80년에 초등학교를 다닌 아이라면 만화책과 오락실이 얼마나 나쁜 이미지였는지 기억할 것이다. 난 어른들이 하지 말라면 무조건 안해야하는 건줄 아는 아이였던지라 TV 만화는 보면서 만화책은 읽지 않았고, 집에 있는 오락기를 갖고 놀면서 오락실은 절대로 안갔다. 그래야만 하는지 알았다. 그런데 수능을 치고, 무료함에 하루하루를 못견뎌하던 우리 반 아이들이 단체로 만화책을 빌려 돌려가면서 읽을 때 원수연, 이은혜, 이미라 등등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만화가들의 만화책을 만났고, 수줍던 사춘기소녀는 마음에 불이 붙었다. 주인공의 사랑과 이별에 동화되는 느낌은 드라마와 영화와는 또 다른 무엇이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우리의 심장을 파고들었던 <호텔 아프리카> 다들 정신없이 읽다 선생님에게 틀겨 난리가 나기도 했지만 몰래 읽는 그때의 그 재미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박희정이란 이름은 내 십대의 마지막을 수놓았다.


스무살이 되었다. 세상이 달라질꺼라 생각했지만 조금의 변화도 없었고, 내 단짝은 지독한 만화광이였다. 공강이 되거나 강의실이 답답할 때 우린 자연스레 학교 앞 만화방으로 갔고, 친구가 추천해준 수많은 만화책을 읽었지만 기억나는 게 없는 걸 보면 그저 시간 때우기 정도였나 보다. 만화방의 90%를 차지하던 무협만화와 일본만화. 그 거리감을 좁힐 수 없었던 나는 다시 만화를 잊고 살았다.


그리고 서른이 된 난 다시 그녀를 만났다. <마틴 앤 존> 동명의 소설을 참고했다는 소리에 절판된 책을 찾아 인터넷을 수없이 돌아다녔지만 결국 구할 수 없다 몇 달 전 재출판 된 책을 구입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책에도 만화에도 수없이 등장하는 마틴과 존은 저마다의 개성이 있었지만 그들은 첫 번째도 사랑이였고, 마지막도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1세기 아직도 이런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 떠날 수 밖에 없었지만 한쪽의 날개를 남겨주는 사랑,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할 수 없는 사랑.. 진부하다 못해 말하기도 쑥스러워지는 그런 사랑을 그들은 한다. 지금 사랑하지 않아 유죄인 내가 보기에 너무 아련해서 가슴 아픈 그런 사랑을 그들은 하고 있다.

컴컴한 벽이 스크린으로 변한다. 한국으로 오겠다는 그 멋진 수트의 청년이 통화를 끝내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곧 이야기가 시작하려다 멈추어버리고 만다. 다시 8권을 기다릴 수 밖에.. 사랑하고 있는 그들은 무죄지만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작가는 유죄가 되지 않게 하루 빨리 8권을 출간하기를 바란다. (희정쌤!! 앙탈인거 아시죠?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명한 그녀는 거절하는 것도 다르다 - 우물쭈물 Yes하고 뒤돌아 후회하는 헛똑똑이들을 위한 야무진 거절법
내넷 가트렐 지음, 권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크게 욕심이 없었던 것 같다. 여자아이가 예쁜 옷을 사준다고해도 시큰둥하고, 장난감을 갖고 싶어도 며칠 조르다 안 되면 그냥 넘어가버리는 등.. (그래서 아직도 미니어쳐 집이나 가구를 보면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의 욕구(?)가 무의식중에 남아서 말이다.) 그에 비하면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은 옷 입는 것도 까탈스러웠고, 갖고 싶은 장난감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져야 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동생의 성격은 부드러워지는데 반해 내 성격은 까칠해져만 갔다. 그야말로 독불장군에 제멋대로. 집에 있을 땐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부리며 할 말 다하는데 왜 문밖만 나오면 ‘좋은게 좋은거지..’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난 거절하기가 너무 힘들다.


사회생활 10년. 초창기엔 지금껏 내가 알던 세상과 너무나 다른 세상에 던져진 것 같아 아침 출근길이 죽으러가는 것처럼 슬프고, 힘들었었다. ‘왜 저 사람은 나에게 함부로 해도 되고, 난 왜 이렇게 주눅들어야하는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땐 내가 너무 순진했었던 것이다. 그들과 나는 공적인 관계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첫 직장의 후유증 때문인지 직장이 바뀌어도 난 상사들에게 계속 주눅든 상태를 이어갔고,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시켜도 그냥 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엔 미안한 듯 부탁하던 그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한 듯 일을 시켰고, 거절했을 땐 불쾌한 기분을 마구 표출하며 공적인 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였다. 어찌 다 그렇게 같을 수가 있는지 그들처럼 살지 말자고 다짐을 하며 직장을 다녔다. 허나 사사건건 그러니깐 계속 하자니 속이 뒤집어지고, 안하자니 불편한 악순환의 연속. 직장 생활은 괴로움의 연속이였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친구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난 의견을 내기보단 친구들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편이였다. 좋은 게 좋다고,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는 것이 친구에 대한 나의 우정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너도 의견을 좀 내봐!! 넌 만날 이래도 응, 저래도 응이냐.. 정말 그런 우유부단함 싫어!!’라는 것이다. 세상이 뒤집어질 만큼의 충격. 게다가 의례 부탁하면 다 들어준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 그런지 필요할 때만 부탁하는 일이 해를 거듭할수록 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를 막 대하는듯해 혼자 상처받고, 추스르고 그러다 지쳐 ‘고작 이런 것이 친구인가?’란 회의까지 들고 말이다. 정말 나의 우유부단함이 그들에게 그렇게 싫은 모습이였을까.. 하지만 지금도 난 친구들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혼자 10가지 답을 만들어 놓고, 거절을 하던지 아니면 그냥 들어준다. 과연 이렇게 우정이 계속될 수 있을까 불안해질 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거절하지 못했던 제일 큰 이유가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직장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착한 누구누구’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착한 것만이 최선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실 사람이 어떻게 100% 좋은 이미지만 갖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런 게 다중인격, 이중인격이라면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제일 친한 친구, 직장 상사, 가족들, 주기적으로 보는 은행직원이 갖고 있는 나의 이미지가 똑같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들은 내가 거절하는 그 몇 초를 위해 몇 시간을 고민하고, 수십 가지의 답을 준비했는지 알지 못한다. 거절의 이유가 이유를 낳고, 때론 거짓말까지 해야 할 때 내가 느끼는 괴로움을 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넌 누나니깐 참아야지..’ ‘넌 여자니깐 해야지..’ 어릴 적부터 들었던 이런 말들이 내가 거절하지 못하는 데 영향을 미친것은 아닐까?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아직 ‘여자는..’이라는 말 앞에서 완전히 당당하진 못한 것 같다. 그래 ‘현명한 그녀(머지않은 미래의 엄마)’가 되기 위해선 ‘NO'라고 말할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처럼 좀 더 중요한 일에 'YES'라고 말할 수 있게 ‘NO'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많은 여성들이 길렀으면 좋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르헨 2008-10-2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절...저는 거절은 그럭저럭 가능한데 말이죠.
그뒤가 문제랍니다.
왕따 될까봐 두려워하는 유전자가 있어서 말이죠.^^
서재 제목이 확~끌립니다.^^
 
입큰 끌라뮤 애플 진저티 클렌징 오일 - 195ml
알라딘
평점 :
단종


지복합 민감성 트러블피부. 정말 안좋은건 다 갖고있는 30대 초반 직장인이랍니다~ 스물셋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해 지금은 심각한 상태. ㅠ 그러다보니 정말 클렌징에 온갖 신경을 다 쓰는데 여드름에 오일은 극악!!이기에 클렌징 오일은 곁눈으로도 쳐다보질 않았는데 친구가 어느날 '야!! 오일도 오일프리제품 나오잖아. 그걸 쓰면 되는걸~ 게다가 오일이 로션이나 크림보다 자극이 덜할껄..'이라더군요. 후다닥 검색들어가 <이니스프리 오일프리 클렌징 리퀴드>를 발견하곤 후다닥 주문해서 사용했답니다. 3통 정도 사용했는데 정말 좋더군요. 따로 닦지않고, 바로 물로 세안할 수 있으니 편했구요. 근데 어느날 저 제품이 품절인지 생산중단인지 구할 수 없어 다시 로션쓰다 집에 있는  모회사의 클렌징오일을 사용했는데 오일프리가 아닌지 도대체가 줄줄 흘러내리기만 하고, 여드름이 더 심해져 어떤걸로 바꿀까 고민중이였는데 운좋게 체험단에 뽑혔답니다.

일단 첫 느낌은 제가 향을 못견뎌해 향수도 못뿌리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사과향이라 좋았습니다. 하지만 오일 좀 묽은 느낌이라 적잖이 불편했어요. 이니스프리 제품에 적응되서 그런지 오일로 이마를 닦을 때 자꾸 흘러내려 온 손바닥이며 눈꺼풀까지 죄다 내려와서 손놀림을 빨리 해야겠더라구요. (다른 제품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적은 양으로도 구석구석 다 닦을 수 있었고, 색조화장은 안해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피부는 정말 잘 닦이더라구요. 그리고 중요한 것!! 역시나 미지근한 물로 세안하니 미끌거림없이 잘 닦여 나갔습니다. 사실 미끌거리면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럼 또 피부에 자극되고 그러는데 말이죠. 근데 오일프린지는 아무리 읽어봐도 보이질 않더군요. 기왕이면 오일프리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만약 오일프리가 아니라면 오일프리로 따로 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클렌징이 깨끗하게 안 되는 것 같으면 두번 세번 끝없이 자꾸하게 되는데 요 며칠은 오일- 클렌징폼으로 간단하게 해도 스킨 바를 때 화장솜에 묻어나는게 없어 안심이 되더라구요. ^^  마지막으로 각질 필링 효과가 제일 궁금했는데 며칠 사용하질 않아서 그런지 효과는 나타나지 않구 있어요~ 여드름으로 인해 가을-겨울이면 아주 각질과의 전쟁인데 제발 효과가 있길.. 만약 있다면 재구매확률 99%랍니다. 

결론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은은한 사과향, 좀 묽어 흘러내리지만 적은 양으로도 잘 닦이며 물세안시 미끌거리지않고, 잘 씻겨나간다. 마지막으로 여드름 피부에도 크게 트러블이 생기지 않아 무난하게 사용가능하다~ 오일프리제품이 나오길 (오일프리 제품이라면 표기누락을 표기해주세요!!) 바라면서 별4개만 드리렵니다.. ^^

좋은 제품 사용할 수 있게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해보면 내가 처음 그림에 대해 생각해봤던 게 초등학교 4학년쯤 인 것 같다. 만화영화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장면에서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림 앞에서 죽음을 맞는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당시 그 그림이 어느 작가의 무슨 그림인지도 몰랐고, 그림이 크게 멋지지도 않았는데 (만화였으니 자세히 표현되지 못했을 뿐더러 내 눈엔 오로지 죽어가는 네로만 보였다~) 왜 그토록 네로는 그림보기를 소망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네로가 죽을 때 난 대성통곡을 했고, 그 기억 때문인지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림’을 볼 때마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기억난다. 하지만 그림은 여전히 어렵고, 먼 존재다.


사실 전시회를 한번도 가본 적 없다보니 과연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직접 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지 무척이나 궁금하긴 하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반고흐전’과 ‘렘브란트와 바로크 거장들’을 비롯한 수많은 전시회는 왜 지방까지 내려오지 않는지 눈물만 삼키면서 말이다. 그러다 미술관련 서적을 읽게 되었다. 당장 가볼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지식을 쌓아두면 훗날 도움이 될 것 같단 생각에서 말이다.


오주석님의 책부터 시작해 내가 좋아하는 고흐관련 서적과 서양미술사까지.. 너무 재미있었다. 이를테면 그림을 볼 때 한국화는 시선을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 어찌 보면 너무나 기초적인 지식이지만 난 미술시간에 배운 기억이 없다. 아무리 김홍도와 정선의 위대한 그림을 본다 해도 책 읽듯 반대의 시선으로 감상한다면 감동은 줄어들 것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림을 펴놓고 한참을 꼼꼼히 살펴봐도 절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설명을 읽으면서 보면 그제서야 보인다는 것이다. 있다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사라졌다 생긴 것도 아닐텐데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무서운 그림’ 역시 그림에 대한 욕구 충족을 위해 읽고 싶었다. 게다가 ‘무서움’이 있는 그림이라지 않는가.. 하지만 결론은 무섭지 않았다. 단지 그림을 그린 작가들이 살았던 시대가 안타깝다는 생각뿐이였다.


처음에 나오는 드가의 ‘에투알’을 보면 이 책을 보기 전까지 드가하면 단순히 발레리나를 많이 그린 인상주의 화가라고만 생각했을 뿐인데 그 아름답기만 한 발레리나들이 그 시대엔 그리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들이였다니.. 앞쪽의 아름다운 발레리나만 눈에 들어올 뿐 뒤의 검은 양복 신사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홀바인의 ‘헨리 8세의 초상’을 보면서 ‘이 사람이 정말 헨리 8세야??’라는 말부터 먼저 튀어 나왔다. <튜더스 : 천년의 스캔들>의 영향이겠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지만 외모는 놔두고, 그림을 보자!! 그림을 보면 의상표현이 정말 세밀하다. 그 당시엔 큰 체격으로 지위의 높음을 과시했다니 비정상적인 어깨며 튀어나온 가슴, 종아리까지 삽입물 때문에 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부인을 죽이기까지 한 그의 잔악함이 눈빛에서도 보이니 그의 바로 앞에서 그림을 그린 홀바인이 대단하게 생각된다.


다비드의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초상’을 보면서는 아름다움과 사치를 대표하는 앙투아네트가 마지막엔 이런 모습이였구나.. 생각되어 조금 씁쓸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랐던 건 <나는 나를 파괴한 권리가 있다>의 책표지로 익숙한 ‘마라의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다비드가 권력의 이동에 따라 변절을 일삼는 사람이였다니 격동하는 시대를 탓해야 하는지, 살기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가야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았고, 작품을 그렸으니 지금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제리코의 ‘메뒤즈 호의 뗏목’은 작가의 표현대로 어느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게 전율이 느껴지고, 표지로도 사용된 라투르의 ‘사기꾼’은 눈빛으로 통하는 베터랑 사기꾼들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해서 재밌었고, 조르조네의 ‘노파의 초상’과 쿠엔틴 마시스의 ‘추한 공작부인’을 보면서는 여자는 젊고, 예뻐야 한다는 외모로만 판단된다는 사실이 그 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정녕 남자들은 완숙한 여자의 아름다움을 모른단 말인가..


이렇듯 소개된 20편의 그림은 아주 유명한 (물론 그림을 잘 모르는 나의 기준에서)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수많은 그림 중에 이 20편의 그림을 선택했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작가가 느낀 고통과 행복, 절망과 환희를 오래도록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담고 있는 그림. 그것이 그림이 가진 힘이고, 매력이며 그래서 ‘무서운 그림’이 아닐까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이 어떤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행복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는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책 읽는 내내 난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이 질문만 해대고 있었다.


사실 ‘무중력 증후군’이래서 난 지구에 중력이 없어져서 온갖 것들이 둥둥 떠다니는 도시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래서 벌어지는 상황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두개의 달’로부터 시작된다. 아~ 내가 좋아하는 노래에 나오는 그 ‘두 개의 달’ 말이다. 근데 ‘두개의 달이 떠오르는 날’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이였다. 노래 속 ‘달’은 새로운 세상, 기존의 관념을 무너뜨리는 희망의 의미였다면 책 속의 ‘달’은 기존 질서와는 반대되는 혼란과 충격을 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 즉각 반응한다. 노래가 나오면 180도 바뀌어 음악에 빠져버리는 내 모습처럼 반쯤 정신 놓은(?) 상태로 말이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습이 안타깝고, 애달팠다.

달은 복제를 거듭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하지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달의 복제로 인해 무중력증후군에 빠진 사람들(무언가에 빠지기를 기다린 듯한 사람들 혹은 플라시보 효과로 인해 무중력증후군 일꺼라 자기체면을 걸어버린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새로운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바뀐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달의 복제와 소멸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 원인인 것인가?

 

귀차니즘은 내 생활에서 가장 큰 적이다. 귀찮아서 주말에 약속을 안 잡고, 운동도 안하며  끼니도 가끔 거른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매일 아침 출근을 하기 위해 일어나고, 인간관계를 위해 친구들을 만나며 굶어죽지 않기 위해 밥을 먹는다. 삶은 그런 것이다. 온전한 내 선택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선택엔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이 참아왔던 욕구와 불만을 달의 복제와 함께 나타난 ‘무중력증후군’으로 해소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았고, 다시 일상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너무나 짧았기에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꿈같던 일. 과연 몇 년후 다시 달이 복제되고, ‘무중력증후군’이 나타난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내성이 생겨 좀더 너그럽게 대처할까 망각 속에 사라져버린 기억을 고마워하며 우왕좌왕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해소시키려 할까 책을 덮으며 그것이 궁금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