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도 접속사와 다른 군더더기에 의해 방해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롱기누스Longinus의 『숭고에 관하여 Peri hypsous』 중에서

롱기누스는 달리는 사람이 몸이 묶이면 속력을 빼앗기듯이 감정도 접속사와 다른 군더더기에 의해 방해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럴 경우 운동의 자유를 잃게 되어 나는 무기(화상, 투창, 돌 등)가 발사된 듯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치법轉置法은 말과 사상을 자연스런 순서와 다르게 배열하는 것으로 절박한 감정의 가장 참된 특징이다. 가장 뛰어난 작가들은 전치법에 의해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자연스런 효과를 얻는다. 예술은 자연처럼 보일 때만 완전하고, 자연은 은연중에 예술을 내포하고 있을 때만 성공한다. 롱기누스는 헤로도토스에서 포카이아Phokaia 사람 디오뉘시오스Dionysios가 한 말을 예로 든다.




우리의 운명은 면도날 위에 서 있소.

이오니아인들이여, 우리가 자유인이 되느냐 아니면 노예, 그것도 도망친 노예가 되느냐 하는 것은.

따라서 여러분이 고생을 참고 견디겠다면 지금 당장은 여러분에게 노고가 닥칠 것이나 여러분은 적군을 이길 수 있소.




롱기누스는 여기서 자연스런 순서는 “이오니아인들이여, 지금은 노고를 참고 견뎌야 할 때요. 우리의 운명이 면도날 위에 서 있기 때문이오”가 될 것이라면서 “이오니아인들이여”를 전치하고는 청중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도 없을 만큼 위험이 절박한 양 두려움의 원인부터 말한다고 한다. 그는 디오뉘시오스가 생각의 순서도 바꾸어놓았다면서 격려의 핵심이 되는 그들이 노고를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이유부터 진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운명은”이라고 말한 뒤 “면도날 위에 서 있소”라고 말하여 그의 말이 미리 생각해두었던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강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데모스테네스는 전치법을 사용하여 그 본성에 있어 불가분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떼어놓는 데 한층 더 노련한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가 투퀴디데스(기원전 465년경-400년경)처럼 그렇게 대담하지는 않지만 전치법을 사용함으로써 매우 절박한 느낌과 즉흥적인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긴 전치법의 모험 속으로 청중을 끌어들인다. 데모스테네스는 종종 자신이 말하기 시작한 생각을 결말짓지 않은 채 중간에서 이질적인 생각을 생소하고 있음직하지 않은 순서로 차례차례 소개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문장 구조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만드는가 하면 청중이 흥분하여 연설가의 모함에 참가하게 만들다가 오랫동안 헤맨 끝에 마지막에 가서 적절한 순간에 뜻밖에도 고대하던 결론을 내림으로써 다름 아닌 전치법의 대담성과 무모성에 의해 청중을 더욱더 놀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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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채의 특징은 말의 현실성과 긴장감을 훨씬 높여준다

 

롱기누스Longinus의 『숭고에 관하여 Peri hypsous』 중에서

문채의 특징은 말의 현실성과 긴장감을 훨씬 높여준다. 말이 직설적으로 진술되면 전혀 효과가 없다. 감정은 말하는 사람에 의해 미리 생각된 것이 아니라 기회에 의해 태어난 것처럼 보일 때 더 매력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하듯 자기 자신에게 대꾸하는 방법은 그의 말을 더 숭고하고 더 설득력 있게 해주는데, 이런 자문자답은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를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질문 받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극되어 열심히 그리고 솔직히 대답하게 되듯, 그와 마찬가지로 질문과 대답의 문채도 청중을 속여 계획적으로 미리 생각해둔 논거들이 모두 순간적으로 태어나 말로 옮겨졌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서로 결합되지 않은 발빠른 문구들은 우리의 발언을 방해하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내모는 성동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런 효과를 호메로스는 접속사 생략에 의해 얻었다.

롱기누스는 한 문장에서 몇 가지 문채가 결합하면 청중을 움직이는 데 특히 효과적이라면서 두세 가지가 결합하여 함께 힘과 설득력 그리고 아름다움에 기여할 때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데모스테네스가 그의 정적 메이디아스Meidias가 디오뉘소스 제전에서 코로스choros의 의상과 훈련 비용을 부담하는 코레고스Choregos가 된 데모스테네스 자신의 따귀를 때리고 예복을 찢어 벌금을 문 적이 있는 사건에 관해 한 『메이디아스 탄핵 연설 Kata Meidiou』에서 접속사 생략이 첫머리 어구의 반복anaphora 및 생생한 묘사diatyposis와 결합되어 있는 구절을 예로 들었다.




공격자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소.

그중 어떤 것은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도 없소.

몸짓과 눈초리와 목소리로.




정체는 휴식을 의미하는 반면 감정은 영혼의 격렬한 운동인 까닭에 소요를 의미하므로 다음 순간 말이 한 곳에 정체하지 않도록 데모스테네스는 즉시 또 다른 접속사 생략과 첫머리 어구 반복으로 나아갔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몸짓과 눈초리와 목소리로 그가 모욕할 때,

그가 적처럼 행동할 때,

그가 주먹으로 칠 때,

그가 그대를 노예처럼 때릴 때




롱기누스는 이 구절에서 연설가가 공격자와 똑같은 행동을 하며 배심원들의 마음을 잇달아 가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데모스테네스가 돌풍처럼 다시 공격을 개시한다면서 다음의 구절을 예로 들었다.




그것은 학대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미치게 만드오.

아무도 말만 가지고는 그 순간의 공포를 전할 수 없을 것이오.




이와 같이 데모스테네스는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도 첫머리 어구 반복과 접속사 생략의 본래적 효과를 견지한다. 그리하여 그의 질서는 무질서가 되고 그의 무질서는 어떤 질서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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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숭고는 우리의 마음에 더 가깝다


롱기누스Longinus의 『숭고에 관하여 Peri hypsous』 중에서

롱기누스는 문채가 숭고의 동맹군이더라도 역으로 숭고로부터 놀랄 만큼 도움을 받는다고 말한다. 문채는 교묘하게 사용하면 의심을 받게 된다면서 특히 절대적 권위를 우리는 재판관, 참주僭主, 왕, 지위가 높은 통치자에게 말할 때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노련한 연설가의 문채에 철없는 아이처럼 당하게 되면 발끈 화를 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문채는 그것이 문채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숭고와 감정은 문채의 사용에 수반되는 의심에 놀랍도록 효과가 있는 해독제이지만, 교묘한 계략은 미와 숭고의 광채에 둘러싸이면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의심을 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 롱기누스는 데모스테네스가 헬라스의 영웅들에 걸고 맹세한 말 “천만에, 여러분들이 잘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마라톤에서 앞장서 위험에 맞섰던 분들에 맹세코!”란 구절을 든다. 그는 데모스테네스가 문채를 그것의 광채 속에 숨겼다고 칭찬한다. 희미한 불빛이 햇빛에 둘러싸이게 되면 사라져버리듯이 수사학적 기교도 사방에서 에워싸는 위대성에 의해 빛을 잃게 된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회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데, 빛과 그림자가 색채로 재현되어 같은 화면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도 빛이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빛이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훨씬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도 감정과 숭고는 우리의 마음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타고난 친화력과 광채 때문에 늘 문채에 앞서 우리의 주의를 끌어 문채의 기교를 가림으로써 그것이 눈에 띄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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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채文彩를 제대로 사용하면 숭고에 적잖이 기여한다


롱기누스Longinus의 『숭고에 관하여 Peri hypsous』 중에서

롱기누스는 문채文彩를 제대로 사용하면 숭고에 적잖이 기여한다고 말한다. 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나이의 패전으로 끝난 자신의 공격적 정책을 변호한 데모스테네스의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들이 헬라스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 것은 잘못이 아니었소. 고국에도 그것을 증명해줄 선례들이 있소. 왜냐하면 마라톤과 살리미스와 플라타이아이의 전사들도 잘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갑자기 신적인 힘과 아폴론의 영감이 이끌린 듯 헬라스의 영웅들에 걸고 맹세했다.




천만에, 여러분들이 잘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마라톤에서 앞장서 위험에 맞섰던 분들에 맹세코!




롱기누스는 데모스테네스가 명백히 맹세라는 단 한 가지의 문채로 선조들을 신격화했다고 칭찬한다. 그는 이를 돈호법이라고 불렀다. 데모스테네스는 재판관들에게 그곳에서 앞장서 위험에 맞섰던 사람들의 정신을 주입했다. 그는 그의 논거에 생소하고 놀라운 맹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력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숭고와 감정의 비범한 구절로 변화시킨 동시에 청중의 마음속에 그의 말을 치료제로 주입함으로써 그들이 그 찬사에 고양되어 마라톤과 살라미스의 승리 못지않게 대對 필립포스 전투에 대해서도 긍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문채를 사용함으로써 청중을 매료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맹세를 아테나이 고희극古喜劇 작가 에우폴리스Eupolis(기원전 446-411년경)가 먼저 사용했다고 말한다.




천만에, 마라톤에서의 나의 전투에 맹세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상하게 해놓고 무시하지는 못하리라.




롱기누스는 맹세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장소와 방법 그리고 상황과 목적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에우폴리스의 경우 그것은 맹세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에우폴리스는 아테나이인들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므로 위로가 필요 없을 때 말을 건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에우폴리스는 맹세를 통해 전사들을 신격화함으로써 청중의 마음속에 그들의 용기에 걸 맞는 평가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위험에 맞섰던 사람들로부터 생명 없는 대상인 전투로 길을 잘못 들고 있다고 말한다. 그와는 달리 데모스테네스의 경우, 아테나이인들이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더 이상 재앙으로 여기지 않도록 패배자들 앞에서 맹세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게다가 데모스테네스는 “그대는 자신의 정책으로 인한 패배에 관해 말하면서도 승리에 걸고 맹세하는구려!”라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는 까닭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안전한 쪽을 택하고 어휘를 일일이 잼으로써 도취되었을 때도 맑은 정신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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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청중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고 연설은 생생한 서술이다


롱기누스Longinus의 『숭고에 관하여 Peri hypsous』 중에서

롱기누스는 말에 위엄과 장대함 그리고 긴장감을 가장 많이 부여하는 것이 상상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상상이란 어떤 원천에서든 마음속에 들어와 말을 낳는 생각이다. 연설가에게 있어 상상이란 시인에게 있어 그것과는 다르다. 시의 목표는 놀라게 만드는 것이고 연설의 목표는 생생한 서술이다. 그러나 청중을 자극하고 감동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둘 모두 같다. 롱기누스는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 중 하나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BC 484?-406?)의 『오레스테스 Orestes』(255-257행)를 예로 든다.




어머니, 제발 부탁이에요. 날 부추기지 마세요.

피투성이의 눈에 뱀을 닮은 이 처녀들을!

그들이 여기에 와 있어요. 그들이 내게 덤벼들고 있어요!




‘처녀들’이란 복수의 여신들Erinyes을 말한다. 그들은 결혼한 적이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복수의 여신들을 직접 보았고, 또 자신이 상상한 것을 관객이 보도록 강요하다시피 했다. 그는 광기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비극적으로 표현하려고 최대의 노력을 경주했으며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장대함을 전혀 타고나지 못했지만 가끔 자신의 본성을 비극적 높이에 억지로 맞춘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그가 숭고에 이르게 되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20권 170행의 부상당한 사자를 묘사한 것처럼




다음 순간 고리로 양쪽 갈빗대와 옆구리를 치며

자기 자신을 싸우도록 격려한다.




소포클레스도 오이디푸스가 죽어가며 하늘에 전조가 나타나는 가운데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장면(『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586-1666행)과 헬라스인들이 출범할 때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무덤 위에 나타나는 장면(『폴뤽세네 Polyxene』)에서 탁월한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롱기누스는 결론으로 시인들은 우화에 속하고 믿기 어려운 과장을 보여주는 반면 연설가들은 현실성과 진실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연설가가 시적이고 우화적이며 온갖 종류의 불가능으로 빠져든다면 그것은 기이하고 지나치다는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상상의 연설은 말에 활력과 감정이 듬뿍 부여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논증과 결합하게 되면 청중을 설득할 뿐만 아니라 예속시킨다. 아테나이의 걸출한 웅변가 휘페레이데스Hypereides(기원전 389-322년)가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Chaironeia 전투에서 아테나이가 필립포스 2세에게 참패하자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킬 것을 요구하다 불법적인 제의라는 이유로 고소되었을 때 “그것을 제안한 것은 제안자 자신이 아니라 카이로네이아요” 하고 말했다. 휘페레이데스는 사실에 입각하여 논증하는 동시에 상상을 활용했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그 결과 그의 생각은 단순한 설득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말한다. 이럴 경우 청중의 귀는 본성적으로 더 강한 것을 듣게 되어 청중은 증명으로부터 상상의 매혹적인 효과에 끌리게 되며, 현실은 그것의 찬란한 광채에 가리게 되는데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그는 말한다. 두 물체가 하나로 결합되면 더 강한 것이 언제나 더 약한 것의 힘을 자기에게 끌어당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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