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는 고양에 있고 확장은 외연에 있다



롱기누스는 수사학 교과서에는 확장이 주제에 위대성을 부여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런 정의는 명백히 숭고와 감정 그리고 은유적 문체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으므로 부당하다고 말한다. 그는 숭고는 고양에 있고 확장은 외연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숭고는 때로 단 하나의 사상 속에서도 발견되지만 확장은 어느 정도의 양과 여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확장은 주제에 관계되는 부분들과 국면들을 모은 다음 거기에 머묾으로써 논증을 강화하는 것이다. 숭고에는 과장과 격렬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으며 청중을 격동시키지만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 키케로Cicero(기원전 106-43년)의 특징인 확산은 말의 홍수로 청중을 휩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확산은 대체로 일반적인 고찰과 결론 그리고 여담에 적합하며, 모든 서술적 및 과시적 연설과 역사적 및 자연철학적 기술과 그 밖에 수많은 유형의 저술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롱기누스는 플라톤은 ‘소리 없는 강물’처럼 흐르는데도 숭고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숭고에 이르는 다른 길을 보여주었는데, 과거의 위대한 산문 작가들과 시인들을 열심히 모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많은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김에서 영감을 받는데 퓌토Pytho(델포이Delphoi의 옛 이름)의 예언녀에 관한 이야기와 같다면서 예언녀가 신적인 입김이 솟아오른다는 대지의 갈라진 틈 가까이 있는 세발솥에 다가가면 그곳으로부터 신적인 힘을 잉태하게 되는 것처럼 신성한 심연에서처럼 옛 작가들의 수호신으로부터 힘이 솟아나와 그들을 모방하는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흘러든다고 말한다. 그는 플라톤이 호메로스라는 샘으로부터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수많은 실개천을 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경쟁심에서 지나치게 투지에 넘쳐 있었지만 그런 다툼은 결코 무익하지 않다면서 헤시오도스(기원전 8세기 말경의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가 “그런 불화는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한 말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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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를 뺀다는 것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빼앗는 것과도 같다


모든 사물에는 어떤 성분들이 질료 속에 있듯이 숭고의 한 가지 요인도 이들 성분들 중에서 그때그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선택하며, 이것들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결합한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전자는 시상의 선택에 의해서, 후자는 선택된 시상들의 밀도에 의해서 청중을 매혹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기원전 7세기 말 소아시아의 레스보스Lesbos 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의 여류시인 삽포Sappho를 예로 들면서 그녀는 사랑의 광기에 내포된 감정을 항상 그 부수 현상과 실생활에서 취하면서 이런 현상들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고 열렬한 것들을 선택하고 결합하는 솜씨로 그녀의 재능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삽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얼어붙는가 하면 불타고, 제정신이 아닌가 하면 정신이 온전하는 등 상반된 감정을 하나로 결합하여 한 가지의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복합체를 드러낸다고 칭찬한다.

그는 그녀의 탁월한 재능으로 가장 두드러진 부수 현상들을 택하여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는 솜씨를 꼽는다.

호메로스도 폭풍들을 묘사할 때 같은 방법으로 가장 무서운 부수 현상들을 골라낸다면서 『일리아스』(15권 624-628행)의 구절을 예로 들었다.




그가 그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덤비니, 그 모습은 구름 밑에서

바람이 키운 거센 물결이 날랜 배 안을 덮칠 때와도 같았다.

그럴 때면 배는 온통 거품에 싸이고, 바람은 돛을 향해

무시무시하게 울부짖으며, 선원들은 겁이 나서 마음속으로 떤다.

죽음 아래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나아가기 때문이다.




소아시아 킬리키아Kilikia 지방의 솔로이Soloi 시 출신의 아라토스Aratos(기원전 315-240년)는 “널빤지 한 장만큼 저승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라고 했는데, 이런 표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작고 우아하다고 롱기누스는 말한다.

그는 아라토스가 “널빤지 한 장만큼 저승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는 말로 위험을 제한했다고 비판한다.

널빤지가 그것을 막아준다고 했다.

이에 반해 호메로스는 위험을 한순간으로 제한하지 않고 물결이 다가올 때마다 다시 죽음에 직면하는 선원들을 그렸다고 칭찬했다.

게다가 호메로스는 여느 때는 결합하지 않는 전치사들을 억지로 결합시켜(전치사 hypek(‘아래로부터’)는 hypo('아래에'와 ek('...로부터')가 결합된 단어이다) “죽음 아래로부터”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단어들을 순간의 감정과 일치하도록 고문했다면서 그렇게 단어들을 함께 압축함으로써 재앙을 장대하게 표현했다고 칭찬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작가들은 가장 탁월한 것만을 갈고 닦아 함께 이어 붙이되 과장되고 품위 없고 현학적인 것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이런 것들은 전체를 망치기 마련인데, 조화롭고 인상적인 건축물들에 구멍과 틈을 만든다고 했다.




롱기누스는 장점으로 확장을 꼽았다. 확장은 주제와 쟁점들이 매 부분마다 수많은 출발과 휴지를 허용하고 장대한 구절들이 잇달아 굴러와 효과를 증대할 때를 말한다.

확장은 상식의 전개, 과장, 사실 혹은 논증의 강조, 행위 또는 감정의 세심한 배분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확장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이 방법들 가운데 어느 것도 숭고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동정과 경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밖에 다른 형태의 확장에 있어서 숭고를 뺀다는 것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빼앗는 것과도 같다.

그것의 효력은 숭고의 힘에 의해 강화되지 않으면 당장 느슨해지고 유명무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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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는 비극과 동일해야 한다




무대에서의 행동 없이 단지 운문으로 모방하는 시는 비극과 공통점이 있다.
그 스토리의 구성은 드라마의 그것과 같아야 한다.
즉 스토리가 시초, 중간, 종말을 가진 하나의 전체적이며 완결된 행위를 취급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유한 쾌감을 산출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서사시는 비극과 동일해야 한다.
서사시에도 급전, 발견, 파토스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상과 조사도 나름대로 훌륭해야 한다.
이런 모든 요소를 최초로 그리고 적절하게 사용한 시인이 호메로스이다.
그의 두 시는 각각 그 구성이 상이한데, 『일리아스』는 단순하고 파토스적이며, 『오뒷세이아』는 복잡하고 성격적이다.
이 두 시는 조사와 사상에 있어서 다른 작품들을 모두 능가한다.

그러나 서사시는 길이와 운율에서 비극과 상이하다.
1. 서시사의 길이는 시초와 종말을 통관할 수 있는 정도라야 한다.
한 번의 관람에 제공되는 분량의 비극만큼 길면 충족될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비극은 여러 부분이 동시에 진행되는 사건을 모방할 수 없고, 오로지 무대에서 배우에 의해 연출될 수 있는 부분에만 국한되는 데 반해 서사시는 서술 형식이므로 동시에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그릴 수 있다.

2. 운율과 관련하여 영웅시의 운율(장단단격 육절운율daktylic hexameter)이 서사시에 적합하다.
영웅시의 운율은 모든 운율 중에서 가장 안정성이 있고 무게 있는 운율이기 때문에 서사시는 다른 시들을 능가한다.
이에 비해 단장격 운율과 장단격 운율은 동적 운율로서 전자는 행동에, 후자는 무용에 적합하다.

서사시에는 경이로운 것이 더 많이 허용되는데, 그 까닭은 서사시에는 행위자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헥토르를 추격하는 장면이 무대에서 연출된다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경이로운 것은 쾌감을 준다.

거짓말을 제대로 조작하는 방법을 다른 시인들에게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호메로스였다.
거짓말을 조작한다함은 오류 추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것보다는 불가능하지만 있음직한 것을 택하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스토리는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으로 구성되어서는 안 되고 그와 같은 사건은 되도록 하나도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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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작시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은 화가와 그 밖의 모상模像 작가와 마찬가지로 모방자이므로 사물을 항상 세 가지 국면 중 하나에서 모방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사물이 과거나 현재에 처해 있다고 말해지거나 생각되는 상태를 모방하거나 또는 사물이 마땅히 처해야 할 상태를 모방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런 모든 것을 시인은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방언이나 은유 등 여러 가지 변화된 형태의 말을 혼용할 수 있다.
시인이 사물을 올바르게 모방하려고 했으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실패했다면 그것은 그의 작시술 자체에 관련된 과오이다.
그러나 시인이 말을 그리는데 동시에 두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게 그림으로써 사물을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그리는 기술상의 과오를 범했거나 혹은 여하한 종류의 것이든 불가능한 것을 그렸다면 그가 범한 과오는 작시술 자체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시인이 불가능한 것을 그렸다면 과오를 범한 것이지만, 그 과오가 시의 목적에 기여한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언어와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려면 언어와 행동만을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행동자나, 말하는 자, 그 상대자, 때, 수단, 동기 등을 고찰한 뒤에 판단해야 한다.
어떤 말이 모순을 내포했다고 생각될 경우 문제의 구절에서 그 말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시의 목적에 이바지하거나 이상 상태를 말하거나 혹은 세인들의 견해일 경우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믿어지지 않는 가능사보다는 믿어지는 불가능사를 택해야 하는데, 예술가는 모델보다 더 나은 것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것도 때로는 정당화될 수 있는데,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도 있음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인의 언어에서 모순점을 검토할 때는 그가 동일한 사물을 동일한 관계에서 동일한 의미로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비평가들의 비판은 다섯 가지 과오에 기인하는데,
1) 불가능하거나,
2) 불합리하거나,
3) 유해하거나,
4) 모순을 내포하고 있거나,
5) 기술상의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해하다’는 것은 플롯이 요구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기술상의 과오’란 작시술상의 과오가 아닌 말 그대로 기술상의 과오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시사와 비극의 우수성과 관련하여 덜 저속한 모방이 더 우수한 모방이고 더 훌륭한 관객을 상대하는 모방이 덜 저속한 모방이라고 말한다. 배우들은 자신이 무엇을 보태지 않으면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할 줄 알고 별의별 동작을 다 하는데, 이는 시인의 작시술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교양 없는 사람들의 동작만을 배척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찬양하면서 비극은 서사시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시사의 운율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극은 음악과 장경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는 드라마의 쾌감을 가장 생생하게 산출한다.
비극은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동작 없이도, 즉 읽을 때에도 무대에서 연출되는 것을 관람할 때와 마찬가지로 생생하게 실감된다.
비극적 모방은 더 짧은 시간에 그 목적을 달성한다.
보다 압축된 효과는 많은 시간에 걸쳐 분산된 효과보다 더 큰 쾌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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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자연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동물과 식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보고 만물이 변화의 형상 안에서 굴복하지 않고 견디어낸다고 보았다.
이런 활동적인 원리가 변화의 생산물의 본질을 규정한다.
우리는 자연에 관한 그의 견해를 먼저 이해한 후 예술이 자연의 명백한 순환적 본성을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불확실하고 혼돈된 감성을 따르는 것인지 알아봐야 한다.

자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자연학>과 <천체에 대하여 On the Heavens>에 상세히 적혀 있는데
후자는 전자가 논의하다가 남긴 대목에서 시작된다.
이 두 권의 책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1564-1642)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과학을 지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자연에 대해 보편적인 정의를 내렸는데
자연의 본성에 속하는 것들은 그 자체 운동과 정지의 원리들을 갖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자연은 그리스인이 퓌시스phusis(physis)라고 부른 것에 관한 학문으로 퓌시스는 우리가 번역하는 자연의 의미와는 다르다.
이 말은 생성becoming의 개념으로 봐야 하는데
예를 들면 참나무 씨앗의 본성nature이 참나무가 되고 뽕나무 씨앗의 본성이 뽕나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낟알의 성장뿐 아니라 낟알 자체도 자연에 포함시키면서 "자연이란 표현은 어떤 자연적 과정 및 그 과정의 산물 양자를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본성 혹은 자연은 사물이 나서 자라 최종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며 이는 그 사물의 존재 목적의 본성 혹은 자연이 최종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연에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은 사물이 지닌 본질로 존재하고 어떤 사물은 외적인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동,식물과 순수 질료(원소)는 그 성질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그에게 자연은 사물의 질료를 지칭하는 동시에 형상, 즉 사물의 본질, 자연을 이끄는 힘이었다.
따라서 사물들은 동작이나 운동의 내적 원리를 지니는데 그가 말한 운동이란 오늘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운동보다 더 넓은 의미로 물리적 운동에 특성의 변화와 크기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연에 대해 이원적 개념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자연을 끊임없는 변화 중에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조건 하에서도 일정하게 지속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같은 이원적 개념은 중세에까지 통용되었으며 현재도 이처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자연과 정신적으로만 알 수 있는 자연에 대한 두 종류의 개념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미학의 기본 개념사>의 저자 타타르키비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 혹은 타타르키비츠의 말로 "그리스적 표현의 애매모호성"이 로마인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를 12세기에 아베뢰즈Averroes(1126-98)가 퓌시스phusis를 나투라natura로 번역했기 때문인 것으로 꼽았다.
"그리하여 나투라는 가시적 사물들 전부summa rerum를,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을 의미했다.
중세 때는 그 애매모호성을 무해하게 만들기 위해 각각 다른 형용사를 붙여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을 구별지움으로써 자연이란 표현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보유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 뱅상 드 보베Vincent de Beauvais(?-1264)의 <사면경 Speculum quadruplex>에서 확인된다면서 아퀴나스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들 및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1260-1327?)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개념을 받아들였고,
또한 브루노Giordano Bruno(1548-1600)와 스피노자Benedict (Baruch) Spinoza(1632-77) 등과 같은 몇몇 근대 철학자들도 이를 수용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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