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Movie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영화는 천연색 세계와 흑백 세계의 대비가 가장 예민하게 느껴지는 예술 분야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는 서구문화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출현한 것으로, 고대나 중세사회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미 초기 단계부터 영화는 색채화를 시도했는데, 당시는 양화 필름(film positives)에 스텐실을 사용하거나 손으로 착색했다.
이 착색 방식은 시간이나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약간의 색을 띠게 하기 위해(녹색 계통이나 갈색 계통의 단색 또는 담채화풍) 조색제와 매염제25의 화학이 응용되었고, 곧 이어 고도의 염색기술이 사용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에는 연구가 진전되어 이른바 ‘3원색’(노랑 jaune, 시안 cyan, 마젠타 magenta)의 중첩 원리에 근거한 새로운 방식이 생겨났다.
이리하여 본격적인 ‘천연색’ 영화는 1930년대에 들어와 서서히 성립되었다.

1938년 마이클 커티즈(Michael Curtiz) 감독의 작품 ‘로빈후드의 모험’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얼마간은 이 영화가 채용한 테크니컬러(technicolor)26 방식이 우위를 차지했다.
당시는 현실의 색과 상관없이 강렬한 색채 대조와 선명한 색채가 추구되었던 것이다.
그 후 천연색 영화의 제작편수가 흑백영화의 편수를 능가하게 되자 영화의 영상에서 ‘그림엽서’같은 바랜 색조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는데, 그리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미학자와 영화제작자들도 천연색이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비현실적임을 비난했다.
오늘날의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와 같이, 사실 영화에서의 천연색 영상은 실제로 자연 풍경 속의 색처럼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흑백 영화로의 회귀(진정한 영화애호가들이 특정한 장르의 작품을 위하여 추구한)를 거부했다.
최근에는 일찍이 흑백으로 촬영된(그렇게 구상되었던) 작품을 ‘채색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일반 대중이 얼마나 천연색을 추구하고 있는가 ― 확실히 이러한 수요는 상업주의에 의한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문화적 욕구도 있다 ― 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그리고 얼마 안 있어 유럽까지도) 텔레비전 시청자에게 옛날 영화를 흑백으로 보여주는 일은 매우 드물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영화작품은 ‘착색’(이 자체가 교활한 말이다)되어야 한다.
1980년대 이후로 착색이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 많은 법적, 도덕적, 예술적 논의가 야기되었다.

오늘날에는 천연색 영화보다 흑백 영화를 촬영하는 데 더 큰 비용이 든다(사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래서 복고주의 성향이 만연하여 보다 아름답고, 보다 진실하게 보이고, 보다 분위기 있고, 보다 ‘영화적’인 흑백 영화가 재평가되고 있다.
영화애호가들 가운데는 모종의 속물근성으로 영화관에서 천연색 영화를 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나는 이러한 속물주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들의 신념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영화가 역사적으로 문장학(紋章學)적으로, 또 신화적으로 흑백의 세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은 설령 옛 영화 모두를 ‘착색했다’ 하더라도 금명간에 쉽사리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 「공해」, 「세피아」, 「프로테스탄티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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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Cloth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1) 색과 섬유는 특별한 관계다.
섬유는 언제 어디서나 색의 ‘최초의’ 매체였으며, 어떤 사회 안에서 색의 지위와 기능을 파악하려는 연구자들에게 풍부하고 다양한 자료를 제공했다.
옷과 옷감의 세계는 물질과 이데올로기의 문제, 경제와 미의 문제가 매우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색에 관한 문제는 모두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즉 안료의 화학, 염색기술, 경제적 한계, 상업적 의도, 미의 탐구, 상징적 의미에 대한 배려, 모든 성질의 사회규범의 메커니즘에 관한 문제이다.
옷과 옷감은 색에 대한 다양한 학제간의 연구가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필요한 경우이다.

그렇지만 의복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역사가와 사회학자가 색에 대해 논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 원인은 우선 자료의 문제(그들은 몇 십 년 동안이나 흑백사진을 기초로 연구하는 버릇이 들어버렸다)가 있다.
다음은 ‘인식론(과장된 표현을 두려움 없이 사용해버리는)’의 문제이다.
의복에 대한 연구는 종종 양태적 고고학으로 귀결되어 버리며, 의복의 기초를 제공하는 사회적인 제도와 문제점은 무시하든가 은폐해버린다.
그러나 색은 의복에 관한 모든 체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질적 요소이다.
심리적, 미적 요소 이전에 색에는 분류의 기능과 상표의 기능이 있다.
(개인을 가지각색의 다른 그룹으로 분류하고, 이 그룹을 다시 사회 전체 속에 위치시킨다.)
의복은 결코 개인적인 현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의복은 규범에 따르고, 계급적 구조에 복종하며, 분류의 원칙을 감수하고 넓히는, 제도적 현실인 것이다.
의복은 모든 사회학적 연구를 위한 훌륭한 관찰의 장을 제공한다.

옛날의 의복에서는 옷감(재료, 직조방식, 제조지, 무늬), 여러 부속품과 형태, 바느질과 재단의 방식, 장식(액세서리), 옷을 입는 방식, 그리고 당연히 색까지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각각의 시대에 따라 많든 적든 관습적인 표시방식에 따라 의복이 자신의 출신지라든가 사회 환경, 무엇인가의 가치를 표현하며, 그것에 상응하는 규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처지 또는 지위에 맞는 의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현대의 의복에서도 거의 마찬가지다.
어느 곳에서든 의복의 분류 기능은 실용성이라는 역할이나 감정적, 미적 배려보다도 상위에 있다.
의복은 계층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우선 색에 의해서 행해진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기호 따위는 전적으로 이차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학자에게든 역사가에게든 순수하게 심리학적 또는 현상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거의 아무런 근거도 없다.
사춘기의 아이들이나 사회의 비주류 사람들, 문제아 등은 자신의 나이, 환경, 시대, 국가의 모든 습관, 유행, 규칙(특히 색에 대한)에 반발하여 도발적인 옷을 입는다.
그런데 의복의 유행과 관습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구속력을 갖는 제도로서, 이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이 유행과 관습에 사로잡힌 셈이다.
다른 사람과 다르고 싶다고 생각하고, 유행 따위는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과 전연 다르지 않고, 전적으로 유행의 노예임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2) 유행과 관습은 옛 사회에도 역시 있었다.
14세기부터 서유럽에서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많든 적든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18세기 말까지?)은 사회적으로 혜택 받은 특권계급에 한정되어 나타났다.
의복사학자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은 유행이라는 현상에 대한 현대의 우리들의 개념이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과거에는 투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유행은 가치, 규범, 새로움, 차별성, 변화 등의 개념에 기초하여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과 특히 색을 포함한 의복의 모든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색의 개념은 그 모든 영역에서 받아들여야 하며, 색상부터 명도, 채도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같은 색조라도 낮은 채도의 파랑이 승리하는 순간에 짙은 파랑은 시대에서 밀려나고 만다.

19세기 말부터 패션은 반년마다 유행하는 색을 변형 또는 변화시켜 왔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의상디자이너는 원단 제조사에 너무 심하게 의존하고 있다.
재단사나 디자이너, 원단 도매상은 3~4년 전부터(때로는 훨씬 전부터) 준비하여 3~4년 후 소비자에게 제공될 색에 대해 원단 제조사와 의견을 교환하는 식이다.
색에 관한 한 유행은 결코 자연발생적 현상이었거나 뜻밖의 현상이었던 적은 없다.
대중의 의견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이 여러 해 전부터 준비되어 왔던 것이다.
구입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하나의 경향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며, 특히 여름철에는 의류 제조사와 원단 제조사가 판매하는 3~4색 가운데서 한 색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자신이 구입하는 옷의 색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 일은 더없이 어리석은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색의 옷을 사려고 생각하며 가게에 들어간다고 하자.
그러면 거의 언제나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나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나, 정해 놓은 예산 내의 옷 중에는 그 색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른 색으로 교체하고, 거기에 있는 색 가운데서 ‘소거법’으로 선택하기에 이른다.
불만이 가장 적은 색을 고르는 것이다.
우리가 자동차를 사거나 자전거, 가구, 욕실 용품 등을 살 때처럼, 재고 부족이라든가 물품 반입이 지연되었다라는 따위의 핑계 때문에 우리는 거의 언제나 차선의 선택, 다른 색보다는 좀 낫다고 하는 색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 사회를 연구할 미래의 역사가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취향이나 기호가 아닌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 「자동차」, 「속옷」, 「심판」, 「스포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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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 Underware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몸에 닿는 옷과 섬유는 모두 흰색이거나 염색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위생과 물리적 이유(삶으면 색이 빠졌다)와 더불어 도덕적 이유(선명한 색은 불순하거나 음침하다고 생각되었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속옷과 몸에 닿는 무명, 이불, 매트리스, 수건, 이불보 등은 처음엔 흰색이었으나 점차 파스텔조의 색이나 체크무늬(어떤 색의 띠와 흰색 띠를 교차시킨 부분은 옅은 파스텔 색조로 표현하는 특수한 줄무늬의 일종)로 옮겨가며 서서히 색이 첨가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1세기 후에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푸른 페티코트와 녹색 와이셔츠를 입는 것, 분홍 속옷을 입는 것, 노란색 타올로 몸을 닦는다든가 줄무늬 이불을 덮는 일 등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흰색은 오히려 드물어져 버렸다.
파스텔조 외에 더 나아가 진한 파랑이나 강렬한 빨강, 짙은 녹색, 검정 등 선명한 색과 흰색의 조합까지 나타났다.

속옷의 새로운 색채는 빠르게 사회적·도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어떤 색은 여성적(또는 남성적)이고, 어떤 색은 얌전하며, 어떤 색은 에로틱하고, 어떤 색은 아주 도발적이다.
종종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광고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치마나 바지 속에 입고 있는 색을 말해보라.
그러면 그대가 어떤 인간인지 말해주리라”(또는 적어도 자신의 이미지나, 어떤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 하는지) 이러한 체계를 연구하는 데 쉽지 않은 이유는 그것들이 감성과 사회계급에 관련되어 있고, 시대나 나라, 사회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남자와 여자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상반신에 어울리는 색이 하반신에도 항상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이 분야에서 가장 세부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는 여성의 속옷을 예로 들어보자.
이전에는 흰색이 점잖고 위생적인 색이었다면, 검은색 속옷은 음란하고 부도덕한 색으로서 직업적인 매춘부나 윤락녀가 사용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약간 “방탕한” 감이 남아 있어서 어린 여자아이에게는 거의 입히지 않지만, 옛날처럼 매춘이라든가 음탕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즘에는 검은 치마나 검은 블라우스를 입을 때 속옷도 검은색을 많이 입는다.
검은색이 자신의 피부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있다.
요즘의 합성 섬유에는 검은색이 빈번한 세탁에 가장 잘 견딘다고 현실적인 이유를 대는 이도 있다.
요즘 여성의 속옷으로는 검은색보다도 빨강색이 훨씬 유혹적이고 도발적이다.
반대로 흰색은 옛날과 같은 순진하고 청순한 느낌이 사라진 것 같다.
남자들에게 여성의 속옷 색 중에서 가장 성욕을 일으키는 색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흰색을 첫 번째로 꼽는다.
순수하지 못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순수 자체가 아닐까….

남자들에게도 역사적·사회적 색체계가 의미를 갖는다.
예전에는 남성 속옷 중에서 흰색이 가장 중립적이고,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신 푸른색(하늘색이나 감청색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만일 남자가 분홍 속옷을 입는다면 추잡하다 못해 무슨 죄를 짓는 것 같을 것이다.
역시 갈색이나 주황색, 또는 겨자색을 입는다면 그의 미적 감각이 끔찍할 지경이고 그의 속옷도 비위생적으로 생각될 것이다.
더 나아가 성적 매력이 있고 분방하게 보인다고 표범무늬 속옷을 입기도 한다.
나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지만.

⊙ 「육류」, 「이불보」, 「화장지」, 「욕조」, 「프로테스탄티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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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Wedding dress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비교적 최근까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젊은 여성들에게 결혼 전의 행실이 순결했음을 선언하는 수단이었다.
하얀 드레스는 순결한 처녀로 결혼식에 이른 여성에 대한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칭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칭찬이 의미가 없을 만큼, 도덕이 땅에 떨어졌지만 하얀 드레스의 사회적인 이미지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웨딩드레스의 흰 빛은 신부가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소녀라는 것이 아니라 순결하고 청초하고 희생적인 백합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젊은 여성이 옛날부터 항상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것은 아니다.
이 유행은 18세기 말 이후에야 출현한 현상으로, 이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세기에 이르러 개혁적인 프로테스탄트와 반개혁적인 가톨릭의 두 고전적 가치체계가 결합하여 이른바 ‘부르주아적 가치관’ ― 기묘한 가치관의 탄생이지만 ― 이 탄생했을 때부터였다.
이 풍습이 비교적 늦게 침투한 농촌사회를 포함해서 모든 사회계급에게 널리 확산되었다 하더라도, 신부의 하얀 웨딩드레스는 여전히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나타내고 있다.

그 옛날 농촌지역에서는 몇 세기 동안 흰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빨간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흰색은 확실히 순결과 처녀성의 상징이었다(이것은 성경적 문화와 일반적인 고대인의 감각에 기인한다).
그러나 결혼식 날 젊은 신부는 자신이 처녀임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가장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가장 예쁜 웨딩드레스라는 것이 염료와 염색의 기술의 한계 때문에 대부분 빨간색이었다.
사실 19세기까지 염색공장에서는 대부분 식물성 염료를 사용했는데, 직물의 섬유 속에까지 색을 침투시키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매우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래서 그 색이 ‘선명한 염색’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물(비와 세탁), 공기, 태양광선의 작용 때문에 곧 퇴색되었다.
그래서 서유럽 농민은 오랫동안 색이 흐리고, 낡고, ‘누렇게 바랜’ 옷을 입어야 했다. 파랑, 녹색, 노랑, 검정, 하양, 갈색도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빨강만은 달랐다. 당시는 대청28에서 추출한 염료(파랑), 물푸레나무 또는 금작화에서 추출한 염료(노랑), 쐐기풀과 자작나무에서 추출한 염료(녹색), 호두나무에서 추출한 염료(검정), 오리나무에서 추출한 염료(회색) 등으로 다양한 색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빨강 색조 중에서 꼭두서니 ― 키가 큰 풀로 그 뿌리에서 추출한 염료는 상고시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 로 물들인 빨강만은 위에 열거한 염료로 얻어진 색보다 몇 배나 결과가 좋았다.
가장 초보적인 매염제(주석산, 오줌, 식초)를 포함하여 동일한 매염제와 동일한 기술을 사용했어도 다른 어떤 식물성 염료보다 깊이 침투했다.
그리고 물, 공기, 빛에 대한 저항성도 강했다. 이것이 농촌에서 잘 차려입은 여성의 옷이 대부분 빨간색이었던 이유이다.
가장 색이 진하고 선명하고 안정된 색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빨강은 항상 축제와 쾌락과 기쁨의 색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신부라고 하면 으레 빨간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그것이 다음에는 빨강과 흰색이 함께 사용되다가, 그 후에는 흰색만이 사용되었다. 오늘날 결혼율은 옛날에 비해 낮아졌다.
그러나 지금도 결혼한다고 하면 여전히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으려고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처녀가 드물어진 지금은 옛날처럼 신부가 처녀임을 공표하기 위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은 아니다.
단지 1세기 반 동안 흰색이 전형적인 결혼의 색이 된 것뿐이다.

⊙ 「빨강」, 「아기」, 「약」, 「이불보」, 「속옷」, 「하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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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Referee

<미셀파스투로의 색의 비밀>(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스포츠 경기장에서 눈에 띄는 색과 복장으로 선수들과는 구분되어 특별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축구에서는 공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대단한 특전을 가진 두 사람, 즉 골키퍼와 권위를 가진 심판이다.
골키퍼가 상대팀 선수와 다른 색의 유니폼을 착용하는 관습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것이 일반화된 것은 20세기 초인 것 같다.
골키퍼가 먼저 경기장 선수 전체의 칙칙하고도 어두운 유니폼 색조에 화려한 색을 가했다.
축구 경기장에서 골키퍼에 의해 처음으로 에로틱하면서도 도발적인 색이 도입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에게 금지된 단 한 가지 색은 주심과 선심이 착용했던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축구 심판들이 검은 셔츠를 입게 된 시기는 정확히 측정하기 어렵다.
아마도 1925년경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주심이 흑백의 세로로 된 줄무늬 옷을 주로 입었기 때문이다.
줄무늬는 지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스포츠(복싱,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의 경우, 특히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오늘날에도 심판이 줄무늬 옷을 입는다.
그러나 다른 스포츠, 예컨대 럭비에서는 검은 심판복 대신 화려한 색의 옷을 착용하고 있다.

그러나 축구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검정이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서구사회에서 검정은 오랫동안 관리와 법정, 즉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색이었다.
심판은 판사나 헌병과 같이 검은 복장을 입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서 심판은 선수나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가 없었다.
검은색을 몸에 걸친 사람은 공포심이나 존경심을 갖게 한다.
(지금도 그럴까?)
심판은 검은 복장 외에도 호루라기(도시지역을 순회하는 경찰관이 반드시 소지하는 물품)를 가지고 있거나 고도로 규격화된 행동을 한다.
경기장에 점점 많아진 헌병이나, 경찰관들의 검은 유니폼이 군청색으로 바뀌었지만 경기 심판은 검정을 고집하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서 경찰관, 군인, 소방원, 해병, 그리고 성직자의 세계에서 검정이 군청으로 바뀐 변화가 재판소나 축구경기장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재판관과 심판은 아직도 검은 복장이다. 왜 그럴까?

최근에는 선명한 두 장의 컬러카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경기에서 두 가지 중대한 벌칙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다.
노란 카드는 경고를, 빨간 카드는 퇴장 명령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에는 몸짓과 말로 충분했으나 현재는 색을 이용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축구를 통해 운동과 언어, 음향과 색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예식화된 볼거리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역사가는 경고와 퇴장이라는 특정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카드에 따뜻한 색이 선택된 것에 관심을 갖고 다음과 같이 지적할 것이다.
잘못(여기서는 중대한 잘못을 의미)을 나타내는 색으로 빨강을 선택한 것은 오랜 역사의 산물이다.
빨강이 중세에서는 범죄와 죄를 나타내는 색이었고, 앙시앙 레짐이나 19세기에는 죄수나 노 젓는 죄수를 나타내는 색이었다.
피의 색이라는 이유로 빨강은 점점 유죄의 영역에서 금지의 영역으로 확대된 것이다.
최초로 빨간 깃발을 사용한 예로 해양철도와 도로의 신호표지 체계를 들 수 있다.
“적신호”라는 말처럼 일반적으로 빨간 색의 금지 기능은 모든 영역, 나아가서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축구경기장 또한 이러한 빨간색의 관념이 적용되었다.

노랑을 빨강의 하위, 말하자면 빨강의 부차 색으로 보아 노란 신호를 이해할 수 있다.
오랫동안 노랑은 경멸의 대상, 특히 배반이나 배신행위 혹은 허위를 뜻하는 색이었다.
그러나 스펙트럼의 발견으로 사회 규범에서 노랑은 점차 빨강의 아래 계단에 자리 잡았다.
이 두 색을 단계적으로 보았을 때 빨강이 심한 처벌의 색이면 노랑은 자연스레 낮은 처벌, 혹은 처벌에 앞서서 경고를 의미하는 색이 된 것이다.
축구가 새로운 체제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규범을 광범위하게 넓히는 데 공헌하고, 일상적인 말에서 “빨간 카드”라든가 “노란 카드”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기여했다.

⊙ 「검정」, 「신호등」, 「스포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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