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2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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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쪽이 넘는 한권치곤 지나치게 두꺼운 책이었지만 하루 만에 읽을만큼 흥미로운 소설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를 소설로 만나는 것은 처음인데, 이렇게 신나게 읽을 수 있다면 더 기대해도 좋겠다.
많은 페이지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오해와 사랑, 화해와 용서, 회피와 회복, 존재와 믿음, 가족과 상처 등등 어떤 필터든 적용할 수 있다. 그만큼 다양한 해석, 다양한 공감, 다양한 즐거움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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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사라진 이유였다.’ 본질적으론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고독과 상처의 이유, 적대와 회피의 이유 그것이 그저 오해(아니 오해 말고 더 적절한 표현이 필요하다-)였을 수도 있다. 누구도 먼저 적대하지 않았고 누구도 외면한 것이 아니고 누구도 괴롭히지 않았지만 팽배한 자의식이 그 모든 것을 왜곡시켰는지도 모른다. 생각을 몰아가다보면 기인한 장소에 다다른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누가 나를 여기에 이르게 했는가, 무엇이 나를 내몰았는가를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저 지금 자리의 황폐함이 공포와 분노로 이어질 뿐이다. 다시 눈을 감고 내달리면 이전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안전한 것처럼 스스로를 속인다. 그랬나? 아니었나?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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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이 아쉬운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다. 그래도 그래야지. 그렇게 되어야지. 그래야지 하며 오래오래 더 깊이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하고 간절한가. 사랑이 없이 사람이 살 수 있는가, 삶을 견딜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어느 것도 그 위에 놓을 수가 없다. 연인의 사랑이든, 가족의 사랑이든, 절대자의 사랑이든 그것없이 우리는 온전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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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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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우리의 믿음엔 근거가 없었다. 근거가 있다고 분명하다 굳게 믿고 팔과 다리를 자르면서 고통스러워 했던 것이다. 이 사기꾼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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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게 된 계기부터가 이건 딱 내 생각인데? 평소 내 주장인데? 덕분에 매번 이상한 취급을 당하고 부적응자라는 둥, 헛꿈을 꾼다는 둥, 세상을 모른다는 둥 하는 소리들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물론 내 생각과 주장의 근거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검증된 것이라기 보다는(전혀 그런 것은 아니고*_*) 좀 있어보이기 위해선 개인적 체험에 근거한 소신이고 단순하게는 ‘감’이다. 제멋대로 논리와 엉뚱한 근거는 댈 수 있으나 전혀 신빙성이 없는 그런? 이 책을 통해 좀 후련하고 억울함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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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말이 필요없이, 이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 다행히 아주 쉽다. 아, 쉽다는 말을 오해하면 곤란하고 누구라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의 사례와 근거를 들어 친절하게 씌여있다.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부모, 교육자, 정제계 인사들, 위정자들을 비롯해 미래가 두려운 누군가, 자꾸 위축되는 누군가, 자신이 초라한 누군가, 세상이 어려운 누군가, 불안에 시달리는 누군가, 지쳐가는 누군가에게 이 책을 쥐어주고 우리 좀 다시 생각해봅시다. 찬찬히 다시 생각해봅시다. 어쩌면 다른 방법이 당신에게 꼭 맞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무수한 공식 말고 당신에게 꼭 들어맞는 공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천천히 찾아봅시다. 그러려면 일단 우리 거울 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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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말을 거두는 이유는 한가지다. 지나치게 길어져서 상으로 들로 바다로 가다가 어딘지 모를 곳에 당도해서 모두를 오해하게(혹은 당황하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간에 ‘나따위(비하가 아닌 타인의 주관)’를 끼워넣지 말고 다들 직접 만나고 확인하면 좋겠다. 쉽게 읽히지만 충격적이고 반갑기까지 하다. 이래도 안 읽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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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 삶의 세밀화를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 클래식 클라우드 13
고영범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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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예술 특히 작가와 문학을 완전히 구별할 수 있을까? 결과 중심이냐 과정중심이냐- 속죄나 반성이 완료될 수야 없더라도 최소한 노력했는가- 아니 그 전에 사람이 사람을 단죄하거나 평가해도 되는가- 늘 혼란스럽지만 그것은 부여잡은 이성이고 감정은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다. 싫고 불편하다. 레이먼드 카버는 내게 좀 이상한 존재다. 글 속에서 누구도 판단하지 않았기에 좋았고 위로 받기도 했다. ‘대성당’은 3번이나 읽은 몇 안되는 책이기도 하다. 그 중 한 이야기는 자주 생각난다. 내 아픔이 극심해서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때, 뭐라도 해주고 싶은(혹은 받고) 마음이 될 때, 서로를 비난하고 괴롭힌 것이 어쩌면 오해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기어이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될 때 종종 그 단편을 떠올린다. 일단은 가보자고 용기를 내보자고 쭈뼛거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시선을 맞춰보자고 다짐하곤 한다. 아마 그 때문에 더 실망하고 혼란스럽고 화가 나는 것일지 모른다. 여전히 그와 화해할 수 없다. 그의 삶을 작품으로 덮고 싶지도 않다. 다행인 것은 현명한 매리앤이 그 뒤를 잘 살아냈다는 점이다. 잘못된 정보인가? 카버가 망친 사람이 카버 자신의 한 때와 매리앤의 한 때뿐이라면 화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자녀들까지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곤한다. 모두가 견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나도 카버를 안타깝게 여길지도 모른다. 카버는 자신의 상황과 환경이 불행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를 지탱하고 유지시키고 성장케 한 것은 카버 자신보다 외부요인(많은 사람들)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억울한지 미안한지 똑바로 말해보쇼, 어디! 라고 물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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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반대하며 - 타자를 향한 시선
프리모 레비 지음, 심하은.채세진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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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알아야 궁금해진다. 궁금해지면 더 알게 되고 그만큼 더 궁금한 것이 생겨난다. 프리모 레비의 방대한 세계에 대해 놀랄 수 밖에 없다. 잡학사전 아니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급이라 전혀 모르는 분야와 지극히 익숙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시킨다. 여실히 깨닫고 말았다. 기본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고,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다고 많은 지식을 가지면 그만큼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늘 열등감으로 다가오는 그 부분을 건드린다. 너무 방대해서 감탄하며 아쉬워할 뿐 시기할만한 거리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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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대한 세계가 호기심으로 시작되었다면 그 끝은 한결같다. 현재와 미래의 우리, 우리는 인간에 그 치지 않고 생명과 우주까지 아우른다. 단호하지만 다정하고 섬세하지만 도전적이다. 몰라도 아름답게 느낄 수 있고 몰라도 감탄할 수 있고 몰라도 즐거울 수 있다. 뭘 더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 방대한 세계를 통해 호기심의 영역이 넓어졌다고는 할 수 있겠다.
지식에 매몰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것이 지적 즐거움이라면 이미 매몰된 사람에겐 그 즐거움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면에서 너무 알아서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보단 많이 모르고 여전히 궁금할 것이 많은 쪽이 더 즐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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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정치적, 세계사적 증언을 만나고 싶다. 삶을 버티게 하고 또 놓아버리게 존재의 부채감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하나씩 놓아가면서도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존재를 대하는 글에서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고마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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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즈 -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 젊은 날의 자화상
패티 스미스 지음, 박소울 옮김 / 아트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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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 스미스의 다른 책인 ‘M트레인’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아니 깊게 공감하며 그녀처럼 살아도 좋겠다며 감탄했었다. 이 책은 패티 스미스의 그 이전과 서로의 뮤즈였던 로버트 메이플소프에 대한 글이다. 성질급한 나는 본론부터 말하자면 불편했다. 비트세대는 내게 어떤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들의 결과물만 보자면 얼마간 감탄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엔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다. 물론 그 시간을 통한 성장에는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 극단과 처절함을 통해 그런 성장을 해낸 것이 충격적이고 놀랍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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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내게 이 이야기(삶)는 그들만의 세계로 다가왔다. 모르는(그닥 궁금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고 예술적이지도 않다-) 채로 두어도 좋을 아니 몰랐으면 차라리 편했을 세계기도 하다. 어쩌면 내 기억과 한 때에 대한 반발심일 수도 있겠다. 그 시기가 존재했고 통과했고 출발점이었다 해도 그것을 포장하고 싶은 마음도 그리운 마음도 없다. 지금을 전시하고픈 마음도 없고 과거를 전시할 마음도 없는 내게 그 포장은 지나치게 과도한 인상이다. 너무 개인적이고 너무 지엽적인 지나치게 내밀한 이야기여서인지 그저 터부와 편견인진 모르겠다. 면죄부처럼 여겨져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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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과 가치관의 문제일수도 있겠다. 다른 삶, 다른 세계를 부정하겠다는 마음은 아니길 바라지만 자신의 편협함을 너무 잘 알기에 의심하게 된다. 읽기 버거운 부분들도 많았다. 그래도 결국 읽었고 덕분에 나를 좀 더 생각해야 했다. 그런가? 아닌가? 아직 준비가 안되었나? 최근 내 편협함이 자주 들통난다. 경직되고 보수적인 성향에 많은 것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을 지향하고 추구한다는 것이 다른 것을 부정할 권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 자라야 하고 아직 남은 날들이 있으니 오래 생각하고 들여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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