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 삶의 세밀화를 그린 아메리칸 체호프 클래식 클라우드 13
고영범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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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가와 예술 특히 작가와 문학을 완전히 구별할 수 있을까? 결과 중심이냐 과정중심이냐- 속죄나 반성이 완료될 수야 없더라도 최소한 노력했는가- 아니 그 전에 사람이 사람을 단죄하거나 평가해도 되는가- 늘 혼란스럽지만 그것은 부여잡은 이성이고 감정은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다. 싫고 불편하다. 레이먼드 카버는 내게 좀 이상한 존재다. 글 속에서 누구도 판단하지 않았기에 좋았고 위로 받기도 했다. ‘대성당’은 3번이나 읽은 몇 안되는 책이기도 하다. 그 중 한 이야기는 자주 생각난다. 내 아픔이 극심해서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때, 뭐라도 해주고 싶은(혹은 받고) 마음이 될 때, 서로를 비난하고 괴롭힌 것이 어쩌면 오해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기어이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될 때 종종 그 단편을 떠올린다. 일단은 가보자고 용기를 내보자고 쭈뼛거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시선을 맞춰보자고 다짐하곤 한다. 아마 그 때문에 더 실망하고 혼란스럽고 화가 나는 것일지 모른다. 여전히 그와 화해할 수 없다. 그의 삶을 작품으로 덮고 싶지도 않다. 다행인 것은 현명한 매리앤이 그 뒤를 잘 살아냈다는 점이다. 잘못된 정보인가? 카버가 망친 사람이 카버 자신의 한 때와 매리앤의 한 때뿐이라면 화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자녀들까지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곤한다. 모두가 견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나도 카버를 안타깝게 여길지도 모른다. 카버는 자신의 상황과 환경이 불행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를 지탱하고 유지시키고 성장케 한 것은 카버 자신보다 외부요인(많은 사람들)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억울한지 미안한지 똑바로 말해보쇼, 어디! 라고 물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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