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 - be동사에서 주저앉은 당신에게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다른 건 몰라도 영어만큼은 곧잘 하는 편이라서 살면서 영어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스트레스를 느낀 적은 없다. 비결은 없다. 학교 수업 충실히 받고 예습, 복습 열심히 한 게 전부다(초등학교 때부터 팝가수에 열광하고 미국 드라마를 열심히 본 건 있다). 그래서 마스다 미리의 신작 <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를 읽기 시작했을 때 주어, 술어가 뭐고 be동사가 뭔지도 모르는 미치코 씨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영어를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십 년 이상 배운 사람인데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책을 덮지 않고 계속 읽은 건, 미치코 씨가 영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마흔 살의 아오야마 미치코는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있으며 낮에는 쇼핑센터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살림하는 주부다. 영어에서 손 놓은 지 10년 이상 지났고, 입문만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뉴욕 여행을 목표로 영어 공부에 도전한 미치코 씨. 남편과 딸은 그녀가 늘 그랬듯 처음에만 열심히 하고 금방 식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주어, 술어부터 시작해 명사, 동사, be동사 등 영어의 기초를 하나씩 하나씩 섭렵하며 '영어 입문의 입문'을 훌륭하게 마친다.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든 '알려고' 했지만 어딘가에 '걸리는' 부분이 생기고 그래서 '알려고 하지 않는' 척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사에키 유타카 <'안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p.23)



미치코 씨와 가정 교사가 함께 하는 수업은 진도가 잘 안 나간다. 남이 보기엔 미치코 씨가 주어, 술어도 모르고 am, are, is의 차이도 모르기 때문이지만, 사실은 미치코 씨가 모르는데 아는 척하지 않고 모르는 게 있으면 숨김 없이 물어보기 때문이다. 영어 공부가 어렵고 지겨운 것도 영어가 어렵고 공부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실은 가르치고 배우는 자세의 문제가 아닐까.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쳐 줬으니 알리라 지레짐작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모르는 게 있는지 신경쓰고 배려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은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묻고 제대로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건 영어뿐만이 아니라 모든 공부, 모든 세상살이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 일본어 공부가 그렇다. 중학교 때 일본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게 되면서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독학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일본어를 하루도 놓지 않았다. 정식으로 배운 건 대학교 때 교양 일본어 강의를 듣고 언어 교육원에 2개월 다닌 게 전부이지만 일본어 방송을 알아 듣는 데 어려움은 별로 없다. 일본어를 영어보다 훨씬 쉽게 배우고 더 잘하게 된 비결이 뭘까 생각해 보니 어차피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언어라 틀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공부한 게 아닐까 싶다. 모르는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찾아보고, 나보다 일본어 잘하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는 게 습관이 되었으니 실력이 늘 수밖에. 걸린다고 포기하지 않고 걸리는 데서 다시 출발하기. 이건 영어뿐만이 아니라 모든 공부, 모든 세상살이에 해당되는 덕목이다.



미치코 씨가 영어를 배우면서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언어의 재미, 학습의 즐거움을 깨달아가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같은 뜻을 우리말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외국어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아가고 비교하면서 우리말과 외국어의 특징을 알 수 있으니 외국어 공부는 모국어를 다시 공부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모국어뿐 아니라 언어의 아름다움, 말의 편리함, 공부의 재미를 깨닫고 궁극적으로는 삶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까지 되찾은 미치코 씨의 영어 공부. 이런 공부라면 안 해도 괜찮... 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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