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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 MIT 경제학자들이 밝혀낸 빈곤의 비밀
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 이순희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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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카스 스와루프의 대표작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빈민가 출신의 주인공 소년은 종교 싸움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을 살게 되지만, 수많은 역경을 딛고 결국 퀴즈쇼의 영웅이 된다. '고진감래' 식의 줄거리만 들으면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 같지만 찬찬히 보면 생각해 볼 거리가 많다. (원작 소설을 읽으면 더 도움이 된다.) 영화 속에서 빈민가 사람들은 오늘 당장 먹을 밥도 없으면서 영화는 죽어라고 열심히 본다. 조금이라도 더 일해서 돈을 벌면 좋으련만, 종교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싸움을 벌이기에 더 급급하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기껏해야 얻을 수 있는 일자리라고는 선진국 대기업이 아웃소싱하는 회사의 저임금 일자리뿐. 고개를 들면 (부자들의 소유임이 분명한) 고층 빌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세워지고 있다.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열광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퀴즈쇼. 그들의 눈에는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퀴즈쇼의 우승자가 되는 것이, 열심히 일해서 제 힘으로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승산이 있고 이치에 맞게, 즉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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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는 이같은 빈민들의 생활양식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라니?'. 제목만 보고 사실 처음엔 의아했다. 원제를 찾아보니 'Poor Economics'. 우리말로 풀이하면 '빈곤 경제학,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학' 정도가 되는데,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라는 다소 파격적이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제목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 왜 더 합리적일까?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자 그대로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학자나 정책가, 넓게는 부자들과 다른, 나름의 판단 기준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빈민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기준에 맞는, 그들의 판단을 고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가령 책에 제시된 의료 문제를 보자. 선진국 출신의 학자, 정책가 대부분은 빈국의 의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품을 제공하거나 예방접종을 하는 식의 안일하고 막연한 대안을 내놓는다. 하지만 빈민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신념과 문화가 있고, 또한 사람마다 심리적인 반응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대안은 한계가 있다. 그보다는 행동경제학에서 나온 그 유명한 '넛지(nudge)', 즉 '찔러넣기' 개념을 활용하여 아주 기초적인 의료 활동은 따로 선택할 수 없는, 주어진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낫다. 

 

 

학교를 중퇴하거나 학교에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한 아이들 가운데 태반은 누군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희생된 것이다. 부모가 너무 일찍 포기했거나 교사가 가르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경우 혹은 학생 자신이 자신감을 잃은 경우다. 이들 중에는 경제학 교수나 대기업 대표가 될 잠재력이 있는 아이도 있지만 결국에는 일용직 노동자나 소매점 주인, 약간 운이 좋은 경우 하급 사무직원이 된다. 그들이 잃어버린 빈자리는 대개 입신의 기회를 제공할 여력이 있는 부모의 평범한 아이들로 채워진다. (p.140)

 

 

교육 문제를 보면, 대부분의 빈국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타국의 식민지였던 역사적인 경험이 있다. 이로 인해 교육 제도가 제국의 상층부를 위한 엘리트를 양성하는 엘리트 위주의 교육, 그리고 필연적으로 입시와 결과 위주의 교육으로 변질되었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이로 인해 선진국 교육이 당장 잘 하지 못해도 장기간 아이의 잠재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는 것과 달리, 빈국의 교육은 소수의 - 집이 부자이거나, 비록 집은 가난하지만 똑똑한 - 아이들만 혜택을 보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교육은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결코 웃을 수 없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역사는 언젠가 과거의 일이 되고, 경제는 나아질 수 있지만 제도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고치지 않는 한 계속 남는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 빈국이 아니지만, 빈국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백년지대계라는 교육 시스템을 고치지 않느다면 언젠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체현상을 겪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미국에는 자식이나 손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노인이 많다. 그러나 사회보장연금이나 노인의료보험처럼 자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갈 방도를 갖추는 것은 노인이 존엄성과 자신감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노후를 대비하는 사람은 자신을 부양해줄 것을 기대하며 자녀를 많이 낳을 필요가 없다. 자신을 부양할 의사나 능력이 있는 자식이 없어도 의지할 수 있는 공적 대비책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효율적인 인구 억제책은 자녀(그중에서도 특히 아들)를 많이 둘 필요가 없게 하는 것이다. 건강보험, 노령연금 같은 효율적인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거나 수익성 높은 노후 대비 금융상품을 개발하면, 출산율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딸을 차별하는 의식도 사라지게 된다. (pp.182-3)

 

 

인구 문제도 있다. 6,70년대에 유행한 산아제한 구호 중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자녀수와 경제력은 반비례 관계라는 인식이 높다. 인구가 줄면 경제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사실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그로 인해 여아 살해 같은 인권 차원의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또한 자녀수와 경제력이 반드시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정책은 전통적인 사회적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잘 운영되도록 서포트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각국의 사회 문화를 (선진국의 그것으로) 획일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문화는 유지하면서 나쁜 점은 개선하고 좋은 점은 살릴 수 있도록 정책가들이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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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층, 또는 빈국을 어떻게 지원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 이전에 왜 지원해야 하느냐, 지원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는 원조의 이유와 효과에 대한 논란도 있다. 더 나아가면 '과연 빈곤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라는, 빈곤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 학자들도 있다. 이 책 초반에도 그러한 논의가 나온다. 어쩌면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격일 수도 있고, 빈곤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이 스스로 헤집고 나올 수 없는 덫과 같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눈을 감고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빈곤 문제에 관해 의료, 교육, 인구, 금융 등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하여 보다 심도있게 빈곤문제를 고민할 수 있게 한 점이 좋았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의 사례가 등장하여 읽는 재미도 있었고, 담비사 모요나 아마르티아 센 같은 유명 학자들의 빈곤에 관한 입장과 이론들을 자세하게 정리한 점도 좋았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통념을 뒤집고 비판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경제학의 최근 경향과도 맞아떨어지고, 행동경제학과 심리학에 관한 논의까지 들어있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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