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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영국을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집 <To Room Nineteen: Collected Stories Volume One>(1994)에 실린 11편의 단편을 묶었다. 남은 9편은 <사랑하는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대부분 레싱의 초기 단편으로, 가부장제와 이성중심 등 전통적 사회질서와 사상 등에 담긴 편견과 위선 그리고 그 편견과 사상에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60년대 유럽,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하고 결혼, 가정, 남성에 의해 객체로 머무는 여성들의 일상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표제작 '19호실로 가다'는 모두 부러워하는 가정을 꾸리던 한 주부가 강요되는 역할들 속에서 점차 무력을 느끼고, 혼자만의 공간을 절실히 찾는 모습을 그린다. 한 여성이 실연으로 미쳐버린 다른 여성에게 자신의 심장을 건네는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한 남자의 정부였다는 것을 깨닫지만 결국 서로를 위로하며 연대하는 여성들을 다룬 '남자와 남자 사이'를 비롯한 11편의 단편을 모았다.
레싱이 한 인터뷰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한 것처럼 이 단편들은 사회로부터 억압받는 개인의 일상과 욕망, 때로는 저항을 가감 없이 묘사하여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레싱의 작품들은 전통과 권위에 억압받아 개인의 자유를 잃어버린 여성이 얼마나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레싱의 소설에서 모호한 세계와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다. 아마도 레싱은 이른바 ‘여성적인 것’으로 폄하되던 비현실적이고 불완전한 감성이 실은 여성, 혹은 감성적인 남성(〈영국 대 영국〉의 찰리)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본 듯하다. 그들은 고독을 느낄 수 있고 자아를 마주할 수 있으며, 내면의 적(敵)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히고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즉, 레싱은 그동안 불완전하다고 무시되었던 비이성, 비합리, 감성, 무의식과 상상의 세계가 현실세계에서 발생한 문제의 해법일 수 있으며,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다다른 사람이야말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작품해설을 참고해 기재하자면.. 이 책을 아우르는 이 글의 부제는 '성, 자유, 그리고 불안'이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성에 대한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행복하기보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의 그레이엄 스펜스는 성공한 작가가 되지 못하고 비평가로 일하는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처지를, 성공한 무대디자이너 바버라 콜스와의 인터뷰 기회를 이용하여 동침을 강행함을써 보상받으려 한다. 반면 자신의 실패를 성공한 여자와의 성행위로 보상받으려는 남자에 대해, 일에 전념하는 여자인 바버라 콜스는 성행위 따위는 빨리 해줘버리고, 그다음 날 할일을 위해 일찍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레싱은 이처럼 바버라 콜스를 성보다는 일을 더 중요시하는 여자로 설정해 남녀관계와 성, 일에 대한 기존 관념을 전복시키고 있다.
'19호실로 가다'에서는 남편 매슈의 ㅂ람은 수전이 방황하고 자살까지 이르도록 하는데 일조하는데, 이는 '성의 자유'는 결호닝라는 제도를 위협하고 여성의 본질이라고 간두되던 모성에 대해서도 제고하도록 한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처럼 자신의 일도 버린 채 가정을 가꾸고 아이들의 교육에 온 힘을 쏟다 보면, 여성은 어느새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게 된다. 직장을 그만두는 희생을 감수하며 완벽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는 남편에 대한 경제적 의존뿐이다.
본문 시작 전 서문 페이지에서 각 단편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설명해 주어서, 책에 조금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아울러 본문에 이어 작품 해설 페이지와 작가의 일대기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서 더 좋았다..
이 분의 작품을 이제라도 접할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19호실로 가다'를 읽으며, 마치... 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놀라곤 했다.
내면의 심리를 정말 잘 묘사해서 마치 내 마음 속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분명 그만큼... 번역도 수준급이라는 반증인지도...
특이한 건... 19호실로 가다가... 이 책의 마지막 단편으로 실린 것이다.. 보통은 맨 앞.. 아니면 중간에 실리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은데...
무튼..
2007년 마침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레싱은 영국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명일 뿐 아니라 아프리카, 제1,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 성(性)의 전쟁, 붕괴되는 결혼제도, 가정,모성, 계급사회,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등 20세기의 사회, 정치, 문화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가장 장 형상화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는만큼.. 미처 접하지 못했던 작품을... 하나씩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최소한의 의무와 바람이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19호실에 가다'가 제일 인상깊었다... 다만, 표지 디자인은...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거나 관심을 끌기엔 살짝 아쉬운 듯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행이겠지만...
@ 목차
서문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옥상 위의 여자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한 남자와 두 여자
방
영국 대 영국
두 도공
남자와 남자 사이
목격자
20년
19호실로 가다
작품 해설: 도리스 레싱의 1960년대 단편소설(민경숙)
도리스 레싱 연보
@ 책 속에서
-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몇 년 전 바버라 콜스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순전히 누군가가 "저 여자가 존슨의 세 여자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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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고, 몸매는 호리호리하지 않고 풍성했다. 하지만 얼굴 생김새는 그럭저럭 예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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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혼생활 20년째였다. 처음에는 폭풍처럼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었다. 헤어짐, 배신, 그리고 달콤한 화해로 가득했다. 적어도 10년이 흐른 뒤에야 그는 마음과 오감으로 그토록 많은 놀라운 일들을 겪으며 살아낸 이 결혼생활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어떤 청년이 바버라 콜스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그녀와 위대한 사랑을 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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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바버라, 아직 두 시간이 남았어요. 술을 한두 잔 더 마신 다음에 내가 당신에게 두어 개쯤 질문을 던질 겁니다. 그러고 나서 스튜디오로 가서 방송을 마치면 돼요. 그 다음에는 편안하게 저녁을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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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아까 극장에 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까 했던 얘기를 다시 해봐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젠장, 이제 저 여자가 성실하고 지적인 여자처럼 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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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버라의 맞은편에 놓인 작은 의자를 들고, 커피 탁자를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아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바바라 양, 날 그렇게 너무 빨리 보내려고 하지 말아요. 부탁이오." 문제는 저녁 내내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지금 이런 어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뜬금없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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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된 일은, 그가 나중에 생각해 보았을 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창피한 일이 되었따.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를 그녀에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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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에 드러난 경멸과 피로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제 다시 그녀에 대한 증오심이 엄청나게 커져서, 그녀를 원하는 마음이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과 비슷해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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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은 무대 인부들 옆을 지나갔다.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틀림없었다. 그때 마침내 바버라에게 말하는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였다. "이건 아니야, 뱁스. 당신이 저런 색조의 파란색을 사랑하는 건 알지만, 한번 더 자세히 봐, 그래. 착하자...'
그레이엄은 무대에서 나와 사무실 앞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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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은 택시를 잡으러 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뭔가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낸 뒤에 집에 전화를 걸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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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날 집에 가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있었다. 신작 소설을 발표한 젊은 남자를 저녁에 인터뷰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