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익을 만큼 익었다 싶으니 어떠한 일에도 사심을 버릴 수가 있을 것이란 자신을 향한
확신 같은 것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동안 잊혀졌던 동창들, 친구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쯤 어떻게 나이 들어 가고 있을까? 그들은 인생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을까?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삶의 모습은 내게 어떻게 비춰질까? 과연 그들은 달라져 있을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
성욱일 만난 건 대학 1학년 교정에서다. 그는 나의 초등학교 동기이기도 하다.
나는 성욱이가 참 좋았다.
어느 일요일, 온종일 집에서 뒹굴며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온 마음을 다해 기원하고 있었다.
사전에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요일이면 만나던 사이였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날은 마냥 그렇게 만나고 싶은 온 마음만으로 기원을 했고, 정말 성욱인 내게 전화를 했다.
꿈이 사무치면 끝내 피어난다는 걸 이날 처음 알았을 것이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별다른 추억이랄 것도 없이 손도 잡아보지 못한 성욱인 군입대를 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를 완전히 배제시켜본 적은 없다. 어린 마음에, 순진한 마음에 그건
첫사랑이었다고 오늘까지 말하여 왔으며 이 나이 즈음이면 그를 다시 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가 그렇게 궁금해지더라고.
그러던 차에 대학 동창명부가 새로 출판되었고(가끔은 어떤 일들이 나의 의지와 맞아 떨어져
참으로 신기하다) 가장 먼저 찾아 본 것은 당연 성욱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내 전화를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슨 말부터 가장 먼저 할까? 나를 반겨주기는 할까?
한번 만나 볼 수는 있을까? 내가 참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나의 물음은 끝없이
이어졌다. 설레이고 설레여서 두근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이름을 찾는 눈길이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
그의 이름 옆에 적힌 두 글자를 보자마자 가슴이 내려앉으며 부르르 떨렸다.
'작고'
......
......
......
......
......
......
......
......
......
......
잘못된 건가? 다시 몇 번을 확인해도 그 학번에 그 과가 맞다.
믿을수가 없다는 표현은 이럴때 사용하는 거더라.
성욱인 벌써 십사오년여 전에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었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세월이 많이많이 흐르고 나면 꼭 다시 한번 만나보리라 새겨 두었던 다짐이 이렇게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릴 줄이야!
그저 그냥 그렇게 좋아하기만 했었던 아이가 30대 초반에 작고 하였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가끔
먼 그날을 그려 보아왔다.
또다시 간절하게 이 아이를 만나고 싶은 온 마음으로 기원을 할 수 없다는 것에, 그 어떤 기적
처럼 느껴질 신기한 우연도 더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것에....................한없이 슬프고 슬프다.
故황성욱의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