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Ⅲ―2 - 완결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5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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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3-2권까지 읽어 보았다. 자본 1-1권부터 시작하여 1-2권, 그리고 2권과 3-1권. 정말 마르크스 자본을 읽는 동안에 왜 이 책이 유명한 서적인지 왜 마르크스가 현대에서도 사회학, 경제학, 철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많은 내용을 혼자서 (물론 마르크스 사후에는 엥겔스의 작은 원고추가분이 있었으나) 저술했다는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글로 번역하여 도서를 찍어낸 것을 페이지로 계산해도 총 3,000페이지가 넘는다. 이 위대한 업적에서 마르크스는 자본(資本)을 미완(未完)의 도서로 남기며 저 세상으로 갔다.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의 죽음과 함께 멈추었지만, 그 이후의 자본은 멈추지 않았다. 세계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두고 계속 연구하고 논문을 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그의 손에서 나온지가 이제 130년 전후이다. 그러나 그 많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자본은 많은 사람들 손에 잡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읽힌다. 이런 책이 계속되어 우리 인류 역사 속에서 전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하여 만들고 하던 인권이 아직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언제나 약자의 편에 있었다. 그는 분명히 좋은 머리와 우수한 언변으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서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수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 다른 나라로 망명 살이를 해야만 했고, 자기가 사랑하던 가족이 있었지만, 지독한 가난으로 치료도 못했으며, 최후에는 고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10명 남짓한 주변 사람만 모였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의 묘지에서는 10명의 사람만 모였으나 이제는 그 10명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기리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왜 그토록 자본을 쓰고 싶었을까? 마지막 3-2권을 읽기 전까지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자료와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외치던 공산당 선언이 주요한 쟁점이었다. 물론 이 때의 마르크스는 자본을 집필하지 않았다. 당시 마르크스는 현실에서 모진 노동과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인권 선언문을 외쳤다.

만약 20년 전후의 한국에서는 이런 선언문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겠으나, 그것은 정말 금지된 선언문이 아니라 정녕 우리 인간의 가치인 생존을 위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위험하고 모험적인 일이었다. 대다수의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생계수단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속박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본다면 자본은 이런 불합리하고 정의라는 것은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은 그 시절에 진실로 그 사회의 단면을 아주 냉정하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보고 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이었던 것 같았다.

자본주의 체계라는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사회적 지배하는 계기도 있었으나, 거기에 아울러 인간의 힘에만 의존했던 수공업에서 이제는 대규모의 기계 산업으로 변모하면서 인간의 노동력은 대규모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산업에 하나의 부속품으로 되어 버린 것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서술하게 되었다.

자본 3-2권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그런 진행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가장 중요한 자본이 어떻게 경제적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지도 나온다. 3-2권에서는 3-1권에 중간부분 시작하는데, 우선 화폐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소유하고 지불하고 언제나도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폐나 금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숫자를 하나의 종이서약서로도 나타낼 수 있는 어음을 소개했다.

어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 단지 현찰 대신 은행에서 발행한 유가증권이며 그것이 실제 현존하는 화폐가 아니어도 불구하고 화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어음 발행에서 실제 상업적으로 상품을 처분할 수 없거나 혹은 이미 과잉으로 자본이 시장에 들어가 있는데도, 어음 내지 혹은 다양한 자본들이 계속 유입된다는 점이다.

한편 실제 은행에 보관된 금액에 비해 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나 증권들은 더 많다는 것이다. 자기 자본보다 더 많은 부채가 생겨서 시장의 과잉 자본유입으로 인플레이션과 같은 문제나 혹은 자본가들이 이윤을 더 많이 챙기기 위해 생산물을 늘리지만, 결국 시장에서는 공급과 수요의 균형에서 수요의 감소로 인하여 재고가 엄청나게 쌓인다.

그렇다면 자본가들 중에서 산업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순수자본이 아닌 대출받은 자본으로 운영한다면 분명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인해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 그 밑의 노동자 역시 급료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되면 그것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 시킨다. 가령 어느 큰 공장 하나가 문을 닫게 되면 거기에 근무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 공장에 자본을 (사실 그 자본마저도 다른 누군가에게 대여 받았으나) 대여해준 자본가, 그 공장의 주요 생산물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사람, 그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운송 및 판매하는 중간 및 소규모 상인까지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 3-2권을 본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욕망이란 이름을 아주 냉철하게 분석한 것이었다. 분명 산업체에서는 생산물을 늘리고 잉여 생산품을 올려 이윤을 추구하겠지만, 이런 행위에 따른 과다한 자본투하와 계속되는 경쟁으로 결국 자본가 자신이 파산하게 되어 버린다.

자본가의 자본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 자본가 역시 노동자로 전략하게 되어 버린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의해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희생당하는 것을 지적했으나, 어떻게 생각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에서도 즉 산업자본가의 파산 역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문제와 경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보았다.

또한 그런 자본주의 세계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세계를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초적인 착취에 대해 보았다. 지대에 대한 부분에서는 어느 일정한 시세를 가진 토지에서 일정량의 곡식이 나오더라도 그 양이 어느 시세의 최소생산 토지보다 더 많은 생산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지대를 운영하는 차지농에 의해 수탈된다는 점이다.

본래의 토지소유자에겐 일정양의 금액 부분만 제공하고, 그리고 이 일정한 토지에 농노로 통해 생산되면 일정 부분의 인건비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이득으로 가는 점이다. 물론 지대의 운영에서 그가 받은 이익은 토지의 우량함과 농노의 노동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그런 수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노동이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은 불변적인 상태에 있는 (인공적인)자연물을 생산물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깐 그 만큼의 수익에서 노동력만큼의 대가를 주기 보다는 일반적인 시세에 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당하다고 하기에는 틀리다. 자본 3-2권 앞의 책들을 읽다보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나 농노에게 주는 임금에서 시간제도 있었지만, 이에 반해 성과제도 있었다는 점이다. 성과제는 일정양이나 혹은 할당량을 채우게 되면 그만큼의 임금이 나오는 임금지급방식이다.

만약 일정한 노동량을 채우고 시간을 만족했으나 성과부분이 부족하면 임금삭감하거나 과다노동(가령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을 하여도 주어진 양에 미치지 못해 임금을 삭감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고찰했으며, 그런 문제로 노동자의 수명단축, 질병으로 인한 장애현상, 어린아이들에 대한 착취를 고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왜 발생하는가에 대해 깊숙하게 들어 가보면 그런 이유가 존재할 만 것을 생각하는 것이 자본 3-2권이다. 우선 자본가는 산업자본가와 화폐자본가로 있는데, 문제는 산업자본가는 자신의 순수자본이 아닌 화폐대여로 통해 자본을 얻어 그 자본에 대한 이윤을 남겨 자신의 자본으로 재생산하거나 그 자본대여를 한 화폐자본가에게 자신이 대여 받은 자본의 일정 비율을 다시 반납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대여에서 100만 파운드를 대여 받았는데, 은행이나 혹은 합법적인 금융기관에서 원금에 대한 이자율이 5~10% 사이라면 모르겠지만, 합법적인 금융이 아닌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고리대금업자에게는 100% 전후의 터문 없는 이자로서 대여 받아야 했다. 따라서 이런 비윤리적인 상업행위를 하는 고리대금업자는 산업자본가뿐만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는 노동자까지 고리대금의 늪으로 끌고 갔으며,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킴으로서 부를 축적해갔다.

이런 비정상적인 경제 활동하는 부류는 아직까지 이 현대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가 집필 당시 현대이겠지만, 내가 보는 마르크스의 자본은 근대사회다. 그러나 그런 근대사회의 이야기와 담론들이 아직도 현대에서 존재하고, 설사 마르크스의 자본에서도 그런 부분은 고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은 정말인지도 끝이 없는 굴레 인 듯하다.

그런 굴레는 자꾸 사회에 부익부 빈익빈을 증가시킨다. 그런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불평등 내지 거기에 의한 각종 사회적 문제가 일어난다. 하지만 당시 근대사회나 그 이전의 중세 고대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들이 가난하게 되거나 혹은 노예가 된다면 자유농민 내지 자유시민이 감소하여 국가에 대한 각종 의무사항을 수행할 수 없다. 가령 노예인 자들은 국가방위인 군역에 동원될 수 없고, 가난한자들은 국가에 세금을 낼 수 없다. 또한 자본이 계속 한 곳에 축적됨에 따라 당시 국가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어느 특정 부류의 자본을 빌려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국민의 가난함, 그리고 그 국민의 대부분인 농노와 노동자의 가난은 결국 국가의 존립 자체에도 큰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유럽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조선 중후기로 들어서면서 농민들의 세금은 과다해지는데, 이에 반해 중간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관리들은 부정축재를 하여 자신이 거두어들인 세금보다 더 적게 국고에 출납했다.

그리고 계속 부족한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계속 농민을 수탈했다. 누군가 이런 자본이 되어야 하는 화폐를 어디서 누출 시키면 결국 그 화폐 즉 세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조선 말기에는 관리들은 군역에 대해 직접 농민들에게 군역하기 보다는 군역면제를 위한 군포를 내기를 원했다. 농민이 실시하는 군역 그 자체에는 자신들의 이익은 생기지 않았고, 단순히 농민들이 내는 군포세로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방법이나 수단 그리고 시대나 사회적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누군가 계속 가난하게 되어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가 힘들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긋난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내고 그런 구조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한 탐색은 그 사회의 오류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저술한 자본은 당시 유럽사회의 자본주의에 대한 그 자체를 알아내려 했던 것이고, 결국 그것이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체계를 밝혀낸 것이다.

마르크스가 죽은지가 130년이 되어 간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은 아직도 세상을 떠돌고 있다. 그가 유령이라 함은 정말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악령으로써의 유령이 아니라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죽었는데도, 그가 미치는 영향이 아직도 크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하고 주장한 이야기는 후세 많은 철학자, 사회학자, 인문학자, 경제학자의 담론 속에서 꽃을 피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직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한 채 절망의 고통에서 울부짖고 있어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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