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자본』 탄생의 역사 - 마르크스 40년 경제 이론 작업의 전모를 밝히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3
비탈리 비고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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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늘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친구하고 오랜만에 만나거나, 심지어 식당에 식사하는 도중 옆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경제이다. 그들이 말하는 경제는 Economics가 아니라 Business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경제적 관심은 국가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개인적 영역의 경제와 공적인 영역의 경제는 다르다. 게다가 어떤 사업을 하면서 수행하는 경제성 평가가 공공기관이 한다면 모르나. 일반 민간사업자가 하는 것이라면 그건 경제성이 아니라 경영성이라 말하는 것이 바르다.

 

주변에서 재테크나 혹은 돈을 어떻게 벌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대개 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판도와 가치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들이 나보다 우월하게 알고 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내가 가진 지식의 단 1%도 존재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요새같이 자기계발서 중에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책들이 넘치고,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이익을 보는 이는 소수라는 점이고, 대부분 주식에서 큰 손해를 보거나, 부동산의 경우 내 집값이 오르면 옆 동네 집값도 오른다.

 

이런 부분에서 조금 걱정을 지나 많은 인간들의 가면을 보게 된다. 겉으론 나라와 경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나, 막상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위로 이어진다. 물론 나도 내 인생하고 내 가족이 소중하다. 그러나 나라면 그렇게 자기 주변의 밭에만 물을 대기를 바라는 것보다, 밭의 물이 알아서 잘 내려갈 수 있는 형태를 원한다. 한국사회에선 아직도 낙수효과 Trickle Down 신화를 믿는 모양이다. 최근 불경기와 실업률 증가, 물가 상승은 어디에서 왔을까?

 

전에 어느 책에서 일본의 경제문제를 위한 정책에서 일하는 사람의 임금을 올리려 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의 디플레이션 경제는 소비위축과 더불어 일본의 인구가 축소됨에 따라 일본정부가 새롭게 시도하는 정책이다. 인구가 감소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비율에서 전반적으로 입이 큰 도자기 병처럼 20~40대 인구가 제일 많고, 10대나 영유아가 계속 유입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그 나라의 생산력과 그리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진다. 그러나 요새는 입구가 좁고 가는 도자기 병처럼 되고 있다.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추세고, 노령인구가 할 수 있는 노동력의 한계가 온 것이고, 게다가 그들을 부양할 수 있는 정책이 날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노년의 빈곤에 따라 노년의 실업은 양날의 검이 된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과거에 할 수 없으나, 단순노무나 사무실의 문서정리, 일반적인 서비스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건강이나 신체적 능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청년실업과 관련하여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친구의 통화에서 아쉬운 부분은 어느 부분에서 친구의 말을 옳을지도 모르나, 친구는 장사를 한다. 판매하는 물건들이 사치품은 아니나, 살 수 있는 부류가 일반 서민들이고, 비싸지 않은 기호식품 내지 건강식품이다. 따라서 서민층의 경제적 기반이 되지 않으면 전혀 팔리지 않을 물건이다.

 

경제적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고, 국가정책과 국민적 정서가 따르기 마련이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친구는 주식시장에 관심이 많고, 금리나 코스닥에 관심이 많다. 난 다소 관심이 없고(나중에 거시경제학을 따로 공부할 생각이나), 사회적 구조에서 접근한다. 내가 결론내린 부분은 항상 부동산 문제다. 회사에서나 친구나, 오랜만에 만난 과거 직장동료나 식사 중에 들리는 이야기는 바로 부동산이다. 부동산의 문제에서 돈을 버는 것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벌어도 그것은 벌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소소한 것으로 번다면 그것을 노리는 사람은 더 많이 번다. 그럼에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현명함이다.

 

어느 순간 집값이 폭등하고, 그 지역이 어느 정도 과밀화되면, 도심지 사람들은 변두리에 가격이 저렴한 곳에 가고, 다시 사람들이 모여 부동산을 활성화시킨다. 그러면 결국 그 지역 토박이 주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이 오기 시작한다. 처음에 집값이 오르면 좋으나, 자신이 살던 집을 팔아도 같은 지역 아파트에 갈 돈이 나오지 않고, 주변에 아파트가 모이면 물가가 급격히 상승한다. 치킨 가격 비밀에서 요새 치킨이 조금 저렴하면 15,000원, 보통 2만원 정도한다. 치킨의 비밀에서 닭의 가격, 즉 생닭의 가격이 최근 오르지 않았고, 치킨에 필요한 식용유와 전분 그 외의 식재료가 오른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임시로 일하는 직원 급료가 올랐는가? 불과 5년 전 치킨 값은 15,000원도 비싸다고 여겼다. 그런데 5년 후에 최저 급료가 1,500원 올랐다. 그러나 집값은 2배 정도 올랐다. 알바르바이트생의 시간당 급료가 5년 전에 비해 1,500원이 올랐다고, 치킨 값이 5,000원이 올랐다면 말이 안 맞다. 나머지 3,500원에서 소득세나 각종 세금, 사장의 수익이 그렇게 오를 리가 없다. 문제는 임대료다. 지방에서 삼겹살 1인분이 4,000원이 현재 7,000원까지 오르고, 수도권에서 1인분이 10,000원 이상은 기본이다.

 

임금의 상승폭이 정말 크다면 저렇게 올라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문제는 임대료다. 내가 이런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수익을 3가지로 나눈다. 임금, 이윤, 지대라고 말이다. 이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자본>에도 나오나, 사실 이미 그 전부터 존재한 개념이다. <국부론>이 18세기에 저술된 책이나, 현대 자본주의에서 거의 대부분 일치할 정도로 시장경제학을 연구한 도서다. 바로 사람들은 자신의 딜레마, 즉 이익의 모순이 지대라는 점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 강하게 지적하고 싶은 이유는 사람들은 현재의 이익에 충실하기도 하나, 자신의 미래에도 관심을 가진다. 내 직장동료나 친구도 자기의 수중에 돈이 오르는 것을 바라지만, 마지막은 자기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다. 자기 자녀들은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말로 끝낸다. 문제는 본인들의 자녀를 계속 몰고 가는 사람은 다른 이도 아닌 바로 자신이란 사실이다. 물가의 상승, 최저임금의 상승해도 결국 1일 8시간 주5일의 근로기준법을 지켜도 세금을 공제해도 100만원도 안 된다. 요새 100만원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나?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세상이다. 우연히 알게 된 한 분이 서울 유명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왔지만, <자본>을 읽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솔직히 <자본>을 돈 벌라고 보는 책이 아니라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 보는 책이다(물론 이 책을 보고 경영적으로 연구한 자도 있다고 한다). <자본>의 탄생에서 당시의 자본주의와 현재의 자본주의는 다르나, 21세기에도 <국부론>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고 하면, <자본> 역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세계 4대 경제학으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그리고 케인즈와 하이에크가 있다. 우리의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걸어가고 있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나온 경제학 도서가 이미 현대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고 있다. 문제는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수요의 공급이 제대로 되는가에서 현재 수요의 대상이 점차 적어지고 있다. 인구가 축소하여 거품처럼 올라오는 부동산은 어느 일정지역을 제외하면 유령의 마을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임금의 문제, 지나친 노동 강도 그리고 현실의 경제적 조건들은 인간들의 미래를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미래라는 담보로 현대 자본주의 시장은 돌아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기보단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에 대해 지적했다. 당시 다른 사회주의자와 달리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시장체계인 점을 알았다.

 

어느 정도 사회가 발전하려면 물적 토대가 되어야 가능한데, 현재를 보고 그때를 봐도 물적인 토대인 상품은 넘치나 그것을 소모할 수 있는 시장수요는 줄고, 그것에 의해 공황이 닥치고, 치명적인 위기로 이어진다.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부동산이 끼여 있고, 한국의 지금 부동산 열기는 식을 생각이 없다. 최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시대에서 주택문제는 그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단지 마르크스가 보던 시기는 주요 대상이 상품에 투하되는 되는 노동력이고, 현재는 노동력보단 금융시장이다. 그러나 결국 금융시장에서 얻어지는 돈은 그냥 땅에서 솟아난 돈이 아니라 누군가의 돈을 당겨오는 것이어야 가능하다.

 

임금의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빚을 내어 통화량을 증폭시켜 인플레이션 되는 현실에서 사실상 가장 현실적으로 문제를 파고든 것은 마르크스의 <자본>이다. 신자유주의 역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보이지 않은 손을 다시 찬양하며 따라가나, 문제는 신자유주의 역시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 소비하지 못하면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내 친구의 장사불경기와 마트에 살 것 없다고 말하는 회사동료의 말을 들으면 어디서부터 단추가 어긋났는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자본>에선 지대에 부분은 현실의 이런 미친 임대료까지 예상하지 않으나, 지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광기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의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 게 사실인가? <자본>의 탄생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본질적 문제가 당시에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고, 여기서 마르크스는 새롭게 경제학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생각하면 아직도 21세기에 1970~80년대 산업재해가 다시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사실 <자본>을 읽다보면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통계적으로 조사한 내용이 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 아직까지 농촌에 많은 인구가 상주하고 있으나 21세기는 농촌보단 도시에 인구가 치중하고 있다. 산업예비군들이 언제라도 보충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일자리 부족한 것도 있지만, 미래에 일자리가 넘쳐도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악몽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자본>의 탄생이 그냥 한 사람의 광기 내지 오만이 아니라 현실적 모순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내기까지 그도 역시 현실적으로 깨닫지 못한 부분도 있었고, 예전부터 존재한 경제학 도서를 참조하면서 경제학에 대한 역사와 통계 그리고 철학과 문학까지 반영했다. 딱히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말대로 하란 것은 아니나, 적어도 현실의 문제를 생각하려면 카드를 다른 방식으로 돌려볼 수밖에 없다. 2010년대 도래하자 한국의 키워드 중에 하나가 경제민주화이다.

 

사실 이런 정책은 케인즈의 사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나, 케인즈 역시 자본주의 거시경제학 개념에 마르크스의 사회구조 분석을 상당히 참고했다고 하니, 경제정책이 국가의 조율과 조정이란 통제 아래 진행되면 신자유주의적으로 문제지만, 한편으로 현 상태를 보자면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제민주화에서 먼저 정리할 부분은 물가와 임금일 것이다. 국민들이 일자리만 얻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곳의 임금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소비 없는 생산품들이 넘치면 결국 경제적으로 부도와 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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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18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시바! 닭들이 왜 비싼가 했어! 생닭은 가격이 안 오르는데....임대료였구나 임대료...

만화애니비평님 대단하십니다.... 전 마르크스는 항상 읽어보고 싶고, 관심이 많이 가는데 아직도 제대로 이 분의 책을 읽지를 못 했어요.. ㅠ.ㅠ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하여 경제학의 전혀 기초지식이 없는 저 같은 우매한 자가 읽기 좋은 책이 있을까요? 전 이사야 벌린인가 그 사람이 쓴 `마르크스 평전`만 읽었어요 ㅠ

만화애니비평 2016-06-19 11:37   좋아요 0 | URL
사실 임대료가 저렴한 시골에서 고기를 먹으면 비싼 이유는 임대료 대신 노동력이죠. 시골촌닭은 닭사육장이 아닌 시골집터 안에서 소량으로 키우니 그만큼 인력이 드는 것이고요. 닭에 대해 생각해보면 제가 맡은 업무 중에 가축분뇨관리기본계획이 있습니다. 저희 지역에 닭의 사육두수가 급증한 것은 치킨의 위력이죠.

저도 처음에 마르크스 잘 몰랐지만, 읽어도 참으로 어렵지만, 덕심으로 밀어붙였죠. 오덕오덕!! 마르크스는 한번 강신준 교수님의 서적을 읽어보세요.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라던지 혹은 다른 마르크스 서적이 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석좌교수님이신 김수행 교수님이 별세하여 자본번역가로는 강신준 교수님만 남았지만, 볼만할 겁니다. 사실 이분은 직접 강연을 들으면 재미있습니다.

루쉰P 2016-06-19 22:07   좋아요 0 | URL
흠 대체 뭐하시는 분인지...가축분뇨관리기본계획이라니...제 상상속에는 뿔테 안경을 쓰고 양 손을 턱에 괴고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에반게리온의 신지 아버지 모습이 잠깐 훅 지나가네요...ㅋ
전 차라리 노동력에 값을 지불하고 싶어요. 임대료 따위에 치킨값을 내야 하다니 니미럴...치느님에 대한 모욕이라구요!!!!

강신주 ㅠ.ㅠ 그거 책 샀었는데, 경제적 고난의 파도에 헌책방에 팔았던 기억이 납니다. 흐흐흑

다시 사야지 헤헷, 마르크스 참 매력적인 이름이에요. 왠지 친해지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한다고 할까요? 흠 노무사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를 읽어보지도 못한다면 그건 노동에 대한 모독이에요 훗

추천 감사합니다잉 ㅋ

만화애니비평 2016-06-19 22:28   좋아요 0 | URL
저요? 환경공학을 전공했고, 환경 대관협의하고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 된 일인지 오덕이 되어 이상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ㅎㅎㅎ

뿔태안경은 안끼고 애니나 영화볼때나 안경끼지만, 덩치는 좋은 편입니다.ㅎㅎㅎ

강신준 교수님 경제학 서적들이 쉬운 편은 아니나 그나마 쉽게 만든 편이죠. 처음부터 새로 구매하지 마시고 도서관에서 천천히 들여본 뒤에 결정을 하십시오..ㅎㅎ
 

영화 <Hunger>를 보면서 2가지 영화가 생각났다. 하나는 <남영동 1985>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2가지 영화 모두 흥행성보단 작품성 그리고, 작품 안에서 보여주는 예술적인 감각으로 인정받았다. 예술이라 것은 보이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여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끔찍하고 두렵고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큰 전달력을 전해줘야 한다. 아직도 한국 대중사회는 이런 예술적인 요소보단 대중성에 두고 “예술이야!”라고 말한다. 예술은 입맛을 맞추기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입맛의 다양한 선택을 늘려주는 천연 향신료다.

 

천연 향신료는 내가 직접 따서 먹지 않은 이상 맛을 볼 수 없다. 인스턴트식으로 가공한 조미료는 당장의 입맛에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좋은 게 없다. 오히려 그 입맛에 물들여 최후에 감각이 둔화하여 감성을 메마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가? 어떤 만화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에서 대답은 욕심이었다. 욕심을 생각하면 사랑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인간에 대한 무한애정 역시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욕심의 대상의 자신이냐? 타인이냐 혹은 그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욕심은 어떻게 보면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은 그래서인지 용납될 수 있거나 또는 되지 않을 있으며, 그것이 정당할 수도 아니라면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욕심이란 단어가 과연 나쁜지 아닌지는 도덕적인 사회상과 윤리적인 보편성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영화 <Hunger> 역시 그런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남영동 1985>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마주쳐서 보는 이유는 2가지의 이유다. 하나는 <남영동 1985>의 교도소 내에서 이뤄지는 잔혹한 행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아일랜드의 비극을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일랜드라고 하면 그런 나라가 있지만,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어느 한 기타리스트였다. 영원한 기타 키드의 우상이자 미친 듯이 기타를 연주하는 Mr. Guitar Crazy 게리 무어(Gary Moore, 1952.4.4~2011.2.6)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에 하나이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쳤던 사나이”다. 그의 기타소리는 그의 감성이 탁월한 것도 있으나,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란 점이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20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했지만, 완벽한 독립을 하지 않았다.

 

영국의 세력이 닿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에서 벌여진 비극은 한국으로 따지자면 한국전쟁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만큼이나 잔혹한 비극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원했다. 영국은 겉으로 아일랜드라는 나라만 인정했지, 영국여왕에게 충성하고 정치적으로 많은 간섭을 하였다. 아일랜드는 독립을 하기 위해 영국과 투쟁했으며, 영국은 아일랜드 사람끼리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독립 아닌 독립을 해준 것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인들이 가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아일랜드 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난은 조선이 일제 강점기 일본에게 당한 것을 생각나게 만들 정도로 잔인했다.

 

아일랜드 전통게임을 하는 것을 금지했고, 하는 것을 적발하면 무참한 폭력이 일어났고, 폭력의 잔인함은 결국 사망으로 이어졌다.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이런 국가적 민족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항쟁하기 위해 투쟁하고, 그 역사의 기간은 조선독립운동사 만큼이나 처절했다. 실제 영국 첩보기관은 죄 없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과 각종 불법행위를 일삼았고, 아일랜드 인들은 영국인들의 폭압에 분노를 넘어 증오로서 대했다. IRA은 매우 거칠고 과격하며, 테러를 일으켜 폭행과 살인까지 저지른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을 보여준 비극이라면, <Hunger>는 1980년 전후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 수상 집권 시기에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 영화를 감상하면 대처의 연설이 나온다. 대처는 1970년대 경제위기에서 새로운 내각으로 등장한 철의 여인이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적 위기를 타진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의 자본주의국가에서 이른바 케인즈의 이론, 거시경제학으로 돌입한다.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통화량이 증가하고 임금이 올라가면 인플레이션이 닥치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고 물가가 계속 오르게 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한다.

 

이때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경제정책은 거시경제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환된다. 그때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대표적인 정치인이었고, 영국은 대처의 집권으로 초반에 안정화되었던 것처럼 보이나, 추후 큰 문제를 일으킨다. 대처의 노동탄압도 큰 문제였지만, 그와 더불어 아일랜드 인권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개인적으로 대처는 노동문제의 갈등을 외교문제로 국민의 눈을 돌리려 했는지 않을까 싶다). IRA가 급격한 테러를 하면 그들을 정치범으로 수용했다. 정치범은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위험이 될 수 있으며, 반국가적 세력으로 국가체제에 대한 위협하는 인물로 보겠지만, 대처는 IRA 요원들을 그저 흉악범으로 취급했다.

 

흉악범은 정치범과 다르게 정치적 성향이나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타인을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희생시키는 반윤리적 인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다르다. 도덕은 권력의 힘이 작용하나, 윤리는 권력의 힘으로 볼 수 없다. 도덕적 권력이 IRA를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이다. 아일랜드 죄수를 수용하는 감옥은 열악하고, 비정상적인 공간이다. 물론 여기에 반항하는 IRA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벽에다 똥칠하고, 샤워도 하지 않고 최대한 영국 간수에 대해 반항한다.

 

영화 처음 나오는 인물은 IRA 요원이 아니라 영국인 간수다. 그는 조심스레 현관을 나서고, 차 밑에 혹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다. 게다가 아내는 창문 너머로 남편의 출근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그는 감옥 밖에서 담배를 피며 눈 내리는 모습을 아무런 느낌도 없이 바라본다. 손가락 윗면 관절은 어디에 부딪혔는지 상처가 나있다. 그의 임무는 샤워를 거부하는 아일랜드 사람을 목욕탕 욕조에 집어넣어 비누를 몸에 바른 후 긴 빗자루로 몸을 씻어내는 것이다. 이때 저항하는 죄수를 저지하기 위해 매우 심각한 폭행을 휘두른다.

 

그런다고 IRA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면회를 가정하여 서로 간의 정보를 교환하고, 면회자들과 물품을 교환하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입안에 메모지를 넣어 어느 여인과 키스를 하여 건네거나, 라디오를 받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면회객으로 온 여성은 자신의 손을 치마 안에 집어넣어 남의 손이 함부로 가서는 안 될 곳에서 용기를 꺼내어 죄수에게 건네준다. 목숨을 거는 투쟁은 잊을 수 없다. 영화 <남영동 1985>가 생각나는 이유는 故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로부터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을 당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에서 끌려온 주인공은 갖은 고문을 당할 때 자신만 울고 절규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고문을 지켜보던 형사들도 칼로 마음을 도려내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고문은 당하는 사람이나 가하는 사람 모두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처럼 <Hunger> 역시 그렇다. 영화에서 IRA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IRA 요원이 영국정부의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 인간 최후의 저항인 단식투쟁을 한다. 이때 시작한 주인공이 66일 동안 단식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 뒤로 9인이 추가로 사망한다. 이때 IRA은 그 감옥의 영국인 간수 26명을 살해하는 일이 벌여진다.

 

분명 어느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죽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원해서 그런 더럽고 위험하고 잔인한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영화 <Hunger>는 피해자가 아일랜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아일랜드 사람을 감시하고 폭행하는 영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죄수를 목욕시킬 때 그들은 철저하게 반항한다. 진압부대가 곤봉을 들고 와서 아일랜드 죄수들을 가차 없이 봉을 휘두른다. 이때 처음 온 한 영국인이 광기어린 진압장면에 슬퍼하며 벽 뒤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영화는 꿈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듯이 신임 경찰대원은 파란색이 보이는 복도 쪽이었고, 진압하는 자들은 어둡고 컴컴한 감옥 복도에서 미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옥에 와서 12년을 선고받은 IRA, 손등에서 피가 나는 간수, 단식으로 생명을 포기하는 IRA, IRA에 의해 살해당하는 간수들을 보면 이 모두가 피해자였다. 역사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은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을 쇠사슬처럼 옭아맨다. IRA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공화주의였다. 공화주의란 인간이 생명의 위기나 고통에 고통 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지 않은가? 공화국이란 자신들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할 최종목표다. 아일랜드 죄수들이 선택한 것은 삶의 의지가 없는 평온함이 아니라 큰 위기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를 자유를 원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의 죽음으로 큰 여론을 형성해도 정치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미래를 위한 길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이의 곁을 떠나고 싶을까?

 

하지만 그 아이가 살아갈 미래가 비참하고 노예와 같은 삶이라면 그들은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다면 삶의 목표와 희망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Hunger>는 매우 불편하고 끔찍한 영화다.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영화 <Hunger> 감독은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식을 시도한 아일랜드 죄수 한 명이 가톨릭 신부님을 모시고, 대화를 나누는 롱 테이크(Long take)이다. 영화 카메라에서 일정한 화면을 맞추고 거기서 계속 쇼트(화면의 전환) 없이 계속 촬영하는 모습이 대략 15분 정도 아닐까 싶었다(그 모든 대사를 외웠고 완벽하게 소화했으니!). IRA 요원은 단식투쟁을 하기 앞서 신부님에게 자신의 결의를 밝힌다. 신부님은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한다. 결국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IRA 요원은 자신이 그렇게 죽어도 그 일을 할 것이라 말한다. 어린 시절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자신이 모든 책을 졌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말이다.

 

우리는 가끔 이길 수도 없는 거대한 운명의 적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다. 뻔히 질 것을 알면서도 아니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을 알면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은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가라고 하면서 뒤에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뒤쫓는 부류가 많다. 개인적으로 타인의 고통과 약자의 슬픔을 알아주지 않은 자들이 사회의 정의나 국가의 정치를 논하는 것만큼 가식적이고 멍청한 인간이 없다고 여긴다. 과연 그들은 이때까지 진심으로 자신의 이기심과 편안함을 버리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짊으려 했을까?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희생을 만들게 했는지 우리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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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2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 놓은 책 <슬픈 아일랜드>를 빨리 읽어보고 싶게 하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3-21 21:50   좋아요 0 | URL
하하
여러모로 제가 다이제스터 님의 책소화를 촉진하는 모양입니다..ㅎㅎ

yureka01 2016-03-22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의 역사를 보면 저항의 역사가 참 치열했구나 싶어요..잘 읽었습니다.
 
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베스트셀러로 출판되었던 <책은 도끼다>의 박웅현 카피가 다시 인문학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도서를 출판했다. 카피라이터, 광고와 혹은 어떤 문구로 통해 고객 내지 수용자에게 어떤 마음이나 감동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본 카피라이터로는 정철이란 분이 있었고, 정철 카피와 박웅현 카피는 국내에서 일류로 활동하는 분이다. 그러나 각각의 책을 보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정철 카피 역시 인문학적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분의 책을 보면 조금 더 쉽고도 강한 메시지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웅현 카피의 책이 인문학적 감성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카피라이터 각자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과 공감대가 다르겠지만, 그 방향성과 의미성은 분명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웅현 카피의 <여덟 단어>를 읽을 때, 조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박웅현 카피의 사고방식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만, 한편으로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얼마 전에 알라딘 서재에서 어느 분과 페미니즘 담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류 페미니즘 사상과 나하고 맞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하다가 결론부에 어떤 인간이든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조건에 따라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문구가 나올 때 인간은 결론적으로 자신의 위치와 상황 그리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 사고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여덟 단어>에서 의미하는 가치관은 매우 좋을 수도 있고, 박웅현 작가 역시 다변적인 현실인간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례에서 삶을 설계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괴리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피곤하고 따분하고 지루한 사회를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유는 없이 한가로운 맛도 없이 게다가 팍팍한 일상에서 매일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전투적인 인생에서 새로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각의 전환이다. 카피라이터의 사고는 곧 생각의 전환이고, 그것이 광고로 기획되어 자신의 생계벌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여덟 단어>는 사고의 전환이나 생각의 확장은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에서 모두가 동일하지 않다.


물론 작가 역시 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의 사례에서 말해주는 부분은 일반인들에게 너무 머나먼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감상보다 먼저 작가의 담론을 심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여덟 단어>가 나쁜 책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나쁜 책은 아니지만, 그렇게 좋은 책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작가 본인이 카피라이터 때문에 책 본문을 읽을 때마다 발상의 전개가 참 대단하나, 그 발상에 독자가 심취하면 책으로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허사가 된다는 점이다.


책의 주제 여덟의 주제는 “자존(自尊), 본질(本質), 고전(古典), 견(見), 현재(現在), 권위(權威), 소통(疏通), 인생(人生)”이다. 만일 이 책을 아직 책에 대해 잘 접하지 않았거나 혹은 이제 입문하는 분에게 추천할 수 있겠지만, 정작 깊은 내용을 찾는 분에게 추천 드리지 않을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철학이나 인문학 서적에서 플라톤, 칸트, 니체, 스피노자 등의 원전 번역서를 읽지 않더라도 이런 철학자를 소개하는 도서에서 충분히 저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철학은 모든 사유의 시작이고, 정치학과 사회학의 시초이다. 작가 역시 인생에서 철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하나, 모든 것에는 철학이 있다고 한다. 만일 이미 어느 정도 인문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박웅현 작가의 말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의 인문학적인 견해보다는 그런 견해를 상당히 잘 포장된 문구로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에 놀라워할 것이다. 작가는 본질적으로 매체는 다르게 변해가더라도 콘텐츠의 질과 소재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없으나 변하지 않을 것도 있다.”라는 방식은 이미 오래된 문구이며, 하나의 진리이기도 하다.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란 한계점이 있고, 그 한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놓여있다. 운명이란 자신이 헤쳐 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주어지는 것인가? 어느 것이든 둘 다 정답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어진 조건과 환경 안에서 앞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모르나 제일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자신이 찾아가는 길이 자신의 의도하고 무관하게 흘러가 거기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으나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어떻게든 자신의 조건 아래에서 모든 상황을 정리하여 길을 여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조건과 상황이 무척 다변적이다. 저자도 알고 있지만, 그 사례로 들어보는 것들이 너무 좋은 것만을 보여준 것이다. 나와 내 주변은 이렇게 그물에 걸려도 잘 풀고 다르게 가는데, 이런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남의 성공담을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열린 생각으로 가고자하는 것도 틀린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답답한 세상의 기변에 깔린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제대로 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거기에 맞추어 개인이 알아서 잘 해야 한다는 논조가 다소 스며있다.


박웅현 카피의 마인드는 좋다. 특히 외국의 CEO가 회사를 오고가는데 쓸데없이 허례허식도 필요하고, 서로의 자존감을 건들지 않는 것도 좋다. 한국이 그게 용인될 사회가 아닌 것도 안다고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기존의 한국 기성세대가 가진 관료주의식 내지 군대문화는 우리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식으로 살 필요가 없지 않으냐 말은 무리수가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답답한 사회에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겠고, 이를 위해 우리 모두 조금씩 여유를 찾아 변화해야 하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위의 페미니즘 담론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고 일하고 존재하는 공간적 기반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공간적 주박을 부정하기 보단 그 주박에 대한 문제점을 생각하고 조금씩 고치기 위해 생각의 전환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는 아니나 인문학적으로 자기계발서 같은 도서다. 단지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와 다를 뿐이다.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 대해 상당히 꺼리는 편인데, 그 이유는 자신의 롤 모델은 자신의 롤 모델이지 그 이상으로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거의 희박하다. 단순히 가능성으로 제시하면 모르나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방식만큼 더 멍청한 조언과 조언자는 없다.


<여덟 단어>의 “자존(自尊), 본질(本質), 고전(古典), 견(見), 현재(現在), 권위(權威), 소통(疏通), 인생(人生)”을 보고 우리는 당장 우리 삶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다고 조금 삶의 저편에 작은 바람은 분다고 생각한다. <여덟 단어>는 저자와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예로 들었지, 저자의 삶을 롤 모델까지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예가 너무 일반적인 사람들과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내가 이 책을 비판한 점이다. 작가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들어볼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작가의 말을 듣고 그것에 대해 분명히 판단해야 할 필요성은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현실적으로 무리수가 있다면 결코 그것은 좋은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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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경제를 다른 애니메이션으로 "C(COLLAPSE)"란 작품이 있다. The Money of Soul and Possibility Control, 돈 그것은 영혼과 가능성을 결정짓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중요한 점은 돈의 그 가치를 나타내는 화폐에 본 작품은 경영학이 아니라 경제학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요가 키미마로는 일본 대학교 경제학부에 다니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경제학과 경영학의 차이점은 경영학은 사업적인 관리, 즉 개인이나 기업의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경영학과 달리 국가 전반적인 생산과 소비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C"의 주인공이 보는 경제적인 관점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에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의 영역으로 이어간다. 일단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현재 조건을 보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릴 적부터 친척집에 자란 가난한 대학생이고, 학비는 장학금으로 견뎌내더라도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주인공 키미마로는 헤이세이대학(도쿄대학) 경제학과를 다닌 점에서 일본 내 최고의 경제학도이다.

 

그런대도 현실적으로 자신의 경제 상황을 정리할 수 없다. 경제학으로 경제를 아는 것과 자신의 경제적인 여건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경제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C"의 1화 첫 장면에서는 요가가 수업시간에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더라도 교수의 강의는 충분히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경제사(經濟史), 즉 경제의 역사이다. 경제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보통 일반인들은 경제라는 단어에 민감해도 경제라는 그 거대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경제학의 명칭이나 개념은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했으며, 정치철학 영역에서 경제가 등장한 사례로 플라톤의 <국가>이다. 어느 장소에 5명이 살고 있는데, 각자가 구두를 만들고, 집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혹은 어떤 특정 업무를 한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맡은 특기분야 대신 다른 것을 한다면 제대로 생산품을 만들 수 없으므로, 각자가 맡은 분야의 일을 맡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적 가치관이 그 당시와 비교하여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우선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익의 목적이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더 넓게 보자면 사회 시스템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다시 “C"로 돌아가면 경제사에 대해 교수강의를 들어보면 경제의 시작은 물물교환에서 시작한다. 어느 누군가가 자신이 가진 재화나 혹은 상품이 넘친다. 하지만 다른 누구는 그 재화나 상품이 부족하다. 넘치는 상품은 내구력이 견고한 것도 아니고, 많이 있어도 보관하기가 귀찮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합리적으로 대안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건네주고, 대신 다른 것을 받아오는 것이다. 만약 그 사회의 부족사회 내지 가족단위의 사회라면, 친목과 평화 그리고 서로 간의 사랑이 통하므로 증여로서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부족 안에서 생산되는 다량의 재화는 그 부족 어디라도 충분하므로 그 부족이 아닌 다른 부족 혹은 사회그룹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진다. 그곳부터 경제가 시작되고, 경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화를 넘겨주고 자신이 필요한 재화를 받아온다. 흔히 경제적인 관점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주로 금융, 화폐와 신용에 대해 생각한다. 신용은 화폐를 움직일 수 있는 가치나 척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화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화폐는 상품의 이동에서 물물교환이 비효율적인 부분에 따라 새롭게 개편된 시스템에서 등장한 도구다. 화폐가 어느 순간 모든 가치를 액수로 정하는 가치가 척도가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경제구조에서는 화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하지만 경제라는 것은 모든 것을 화폐로 통해 보는 것만이 아니라 화폐라는 척도로써 바라보는 게 정당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의 시작점은 필요한 재화의 이동에서 시작한 것이다. 경제학과 경영학이 복잡다양하게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지만, 사회전반적인 변화과정에서 경제라는 것은 생산과 소비에 대한 관계이다. 결국 돈을 투자하여 얼마나 이익을 얻고, 부의 창조를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이익을 위한 경영이란 business Management, 사업에 대한 관리이다. 경제적인 부분은 경영적인 부분과 추구하는 목표는 다르나, 경영인들의 경영관리와 경제활동이 엮인다.

 

지금이야 식료품이 다양하게 넘치나, 과거에 기술이 발전하지 못할 시기는 식량을 수익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파나 홍수 또는 전쟁과 전염병 등과 같은 재난재해는 농지를 황폐화시키거나 노동인력을 크게 손실시켜 식량 생산력을 급격히 감소시킨다. 식량이 제때 공급되지 않을 경우 그 나라의 국민들은 생존하기가 어려우며, 그 나라는 최후에 자멸하거나 타국의 침공에 의해 멸망한다. 식량에서 밀의 생산력은 곧 국민들의 배를 채울 수 있게 하고, 이에 따른 필요한 재화를 추가로 발생시켜 국민들에게 주어지게 하여 나라의 생산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바로 국가의 경쟁력이란 국민이 얼마나 건강한 육체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척도가 정치경제의 첫 걸음이고, 정치철학의 근본이다. 정치학에서 공공경제의 목적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국가의 모든 시작은 인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을 수입하고 파는 것은 상인들이고, 그들은 자기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타국의 상인과 농민조차 그런 자본에 의해 움직인다. 화폐가 지금처럼 달러나 위안화 등과 같이 세계의 무역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이었다. 상인들이 상품을 팔아 수익을 얻으면, 수익 일부를 국가세금으로 낸다. 상인들은 흉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위한 것도 아니고(어떻게 보면 통상적 가격보다 훨씬 높은 이윤으로 판다), 그들의 국가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자신의 이익, 경영관리로써 이윤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런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흉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과거 상인을 현대사회에서 대상인물과 대조해보면 자신(들)의 이윤을 목표로 활동하는 기업이 된다. 기업이 제때 물건을 시장에 내놓지 않으면 국민생활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기업에 일하는 사람들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기에 기업의 존속은 그 사회의 안정까지 이어진다. 경제학과 경영학의 시작에서 목표, 가치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어떻게든 서로가 연결되는 구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맹점이 발견된다. “C"에서 요가는 가난하나, 국가인 일본은 매우 부유하다. 국가는 부유한데, 왜 국민은 가난해지고 있는가이다?

 

우선 공공경제와 개인경제는 다르다는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경제에서 기업의 경영과 관련이 있다는 점, 기업의 이윤이 올라가도 그것은 세금으로 충당되어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지만, 기업이 버는 돈 그 자체가 국가가 버는 돈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에서 얻는 이윤은 기업을 위한 이윤이고, 기업에서 고용한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이 생계수단으로 소비세로 지출되는 편이 더 많은 세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기업이 돈을 잘 버는 것이 국가의 공공경제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어느 기업에 속하거나 혹은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가족들의 생계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비가 더 높은 경제활동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라는 것은 기업이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필요한 재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이든 경영이든 모든 것을 화폐로서 이루어지고 이른바 금융에 의해 일어난다. 은행에서 화폐를 생산하여 시중 은행에 넘기어 시중은행은 필요한 사람에게 대여하고, 그 사람은 화폐를 이용하여 투자와 구매를 한다. "C"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화폐에 대한 부분이다. Midas 은행, 신화에서 어느 누구라도 그의 손에 닿는 순간 황금이 된다는 마이다스의 손, 작품에서 일본에서 발행된 화폐와 Midas bank에서 나온 화폐는 서로 다르다.

 

모르는 사람에게 같은 화폐로 보이나, 막상 금융가의 길에서 결투를 하는 사람에게 검은 돈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Midas Bank에서 나온 화폐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Midas Bank는 일본만 아니라 세계 금융가가 있다면 어디든 존재한다. 그들의 돈은 어디서 나오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다. 단지 그 돈이 들어온 나라에는 무한정적으로 유통되는 화폐단위가 증가한다는 점이고, 어느 순간 화폐의 액수가 0이 되는 순간 "C(COLLAPSE)"가 일어나고, 그 나라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심각한 경우 작품에서 세계지도에서 사라지는 비극이 탄생된다.

 

경제구조가 파탄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는 점이다. 그런데 왜 망하는 것인가? “C"는 인간의 자본에 대한 욕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딜레마라고 보여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모든 것을 화폐로써 가치를 정한다. 그런데 그 화폐가 의도적으로 흘려보낸 뒤 마지막에 빼앗는 것이라면? ”C"는 바로 그런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을 고발한다. 요가가 마지막으로 일본의 국가를 "C(COLLAPSE)"에서 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금력과 투자할 수 있는 금전적인 규모가 작품에서 캐릭터로 등장한다. 요가의 캐릭터 에셋은 마슈이다. 마슈는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거느린 에셋과 비슷했다고 한다.

 

에셋의 주인 앙트러가 다른 앙트러와 대결해서 패배하면 에셋은 사라지고, 그의 신변에 큰 악몽이 탄생한다. 그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 자본력을 많이 가지거나 혹은 공공 경제에서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일수록 그 피해정도는 심각해진다. 만일 대기업이 파산할 경우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해고되고, 금융권은 크게 요동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 대처하는 방법이다. 무너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무너지는 것을 받치기 위해 다른 자본을 동원하는 점이다.

 

빚을 갚기 위해 다른 누군가 빚을 갚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돈이 순전히 구매자의 자금력이 아니라 그 사람조차 빚으로 갚았던 돈이다. 미쿠니의 행동은 결국 자신이 보유한 순수금액이 아니라 Midas Bank의 대출금이다. 대출을 받으면 나중에 되갚는 문제가 있다. 대갚는 것을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국가예산이 빈약해지고, 혹은 빚을 억지로 내어 대출을 갚으려면 또 다른 빚이 늘어난다. 일본에서 만든 화폐는 1000엔인데 다수의 은행을 통해 억지로 돈을 불리고 불려 10000엔으로 된다면, 빚은 9000엔이다. 문제는 갚아야 할 돈은 9000엔이 아니라 9000엔의 이자까지 포함이다.

 

사회적으로 본래의 화폐가 아닌 빚으로 만들어진 화폐가 유입되면 실제 존재하는 돈은 소규모라도 유통되고 있는 화폐액수는 계속 증가한다. “C" 마지막에 보면 미쿠니와 싸우는 요가는 개인 또는 국가의 미래를 담보로 돈을 움직이는 Midas Bank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화폐가치를 모두 종이로 만들어버린다. 즉 슈퍼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화폐가 시중 금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퍼뜨린 것이다. 미쿠니의 부하가 가로채려는 돈 액수만으로 충분히 인플레이션의 효과를 일으켰고, 결국 일본 화폐경제는 붕괴한다.

 

빚을 빚으로 갚는 것에서 이미 국가경제는 망하는 징조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을 잘 보여주는 점이 미쿠니는 Midas Bank에서 엄청난 대출을 받아 첫 번째 "C(COLLAPSE)"에서 일본의 피해를 피한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인구 출산이 한 해 3명이란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그 와중에 계속 Midas Bank의 화폐가 유입되면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활기가 사라지고, 의욕이 사라져 희망조차 잃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

 

미쿠니는 지금의 위기를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요가는 미래의 존속을 걸고 싸운다. 미쿠니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여도 되는 것이고, 요가는 그 희생으로 인해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할 수 없다는 것에서 대립된다. “C"에서 미쿠니와 요가의 모습은 사실 현실의 우리 사회하고 많은 연계성이 보인다. Midas Bank의 화폐가 계속 시중에 유입되고, 그 화폐는 실재하지 않은 화폐, 즉 빚에 의해 만들어진 화폐이다. 우리는 빚으로 만들어진 경제구조 위에서 놀아나는 점이다.

 

마지막에 엔화가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달러를 이용하여 경제구조가 다시 시작된다. 일본의 화폐가 없어졌는데도 왜 경제활동은 가능한가?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라는 것은 어느 재화가 필요한 사람이 있고, 재화를 팔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경제시장이 존재할 수 있다. 일본에서 없어진 것은 엔화라는 화폐이지, 화폐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경제라는 것은 인간의 생활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사람이 경제에 얽매인 노예가 되었다는 점이다.

 

경제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늑대와 향신료>와 <용사마왕 마오유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확실히 말하자면 나는 경제학과 경영학 전공자가 아니고, 경제적인 관점이라 해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 많이 의존했다. 경제가 현재는 화폐를 중심으로 생각하나, 화폐의 입수보단 인간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생필품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늑대와 향신료>를 보면 그것은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경영자의 마인드고, <용사마왕 마오유우>가 더 경제적인 요소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용사마왕 마오유우>에서 감자를 악마의 열매라고 하나, 막상 감자는 식량으로 가치가 매우 높고,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한다.

 

그것을 전해준 사람은 악마의 종복이라 하고, 마왕은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한 악의 절대자로 묘사한 시대가 있다. 작품에서 항해술이나 망원경 등 각종 기술과 지식들은 그 나라의 부를 성장시키는 것도 있지만, 권력자들의 이익 즉 국가의 무력과 지배력을 확장시키며, 필요한 물품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이어진다. 경제라는 것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진행하여 결국 어떤 식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어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경제학은 어떤 방향을 추구하는지 모르나. 경제학의 시작인 <국부론>에서는 경제라는 것은 수요자의 보다 나은 생활을 만들기 위해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늑대와 향신료>에서 생산품의 가격이 저렴한 곳에 가서 대량으로 물품을 구매하여 그것을 비싸게 팔리는 곳에 가서 금화와 은화를 받으려 하는 것은 경제시장구조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의 경영관리 방법이다. <늑대와 향신료>의 주인공 로렌스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등장하는 빵을 굽는 제빵사와 같은 사람이다. <국부론>에서 빵을 파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동정심에 의해 물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활동이 재화가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주고,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늑대와 향신료>를 보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상회나 상인들은 어느 상품에 대하여 독점이나 과다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모습이 나온다. 만약 독점이 일어나면 재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비싼 가격으로 구매해야 하고, 만일 그 재화를 구매할 수 없는 경우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분명 말하지만 경제의 목적은 필요한 사람에게 적재적소의 물품을 합리적으로 입수하게 하여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 조건, 기업과 정부의 정책과 시장논리는 이상하게 만들어낸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은 손”은 분명 그런 말이 아닌데, 혼용하는 경우가 다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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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07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컬랩스를 꼭 보겠어요! 불끈~~!

최근 알드노아 제로..보고 눈 베려서 안구 정화할 작품이 필요했는데, 정말 괜찮은 작품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당~!

만화애니비평 2016-03-07 19:1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님도 은근 덕후라니 좋습니다. 우후후
 

어찌 보면 괜히 폼을 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나, 개인적으로 영화는 대중영화보단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대중영화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흥행만 바라보는 점에서 이야기는 재미만 넣었지만, 막상 보고나면 무슨 내용인지 기억해내기가 귀찮아진다. 잊어버리는 것보단 이미 영화를 보기 전부터 자신의 무의식 공간에서 스토리의 흐름을 계산하고, 거기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영화의 서사에서 등장인물, 스토리, 배경이나 소재만 다르지 그 작품에서 의미하는 주제성은 거의 동일하게 흘러간다. 아슬아슬한 갈등관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로맨스나 신화적 영웅을 추구하는 게 보편적인 관객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솔직히 말해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상으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세계가 친절하지 못하다. 박찬욱 박찬경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이란 30분 넘는 영화를 보면 정말 불친절한 영상미를 보여준다. 아이폰4로 촬영해서 만든 영화이니 관객에 대한 친절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작품 그 자체이기에 영화는 진짜 영화로 제작될 수 있었다. 문화예술을 찾아가는 정체성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나는 3‧1절을 맞이하여 새로운 형태의 예술영화를 보았다. 아는 동생 녀석에 추천받은 <사울의 아들>을 말이다. 박감독 형제가 만든 <파란만장>은 <사울의 아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사울의 아들>을 보는 순간,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추천할 수 없는 영화다. 내용이 정말 비참하고 끔찍하며, 화면에서 나타내는 카메라연출까지도 상당히 불편하다. 감독은 일부러 그런 요소를 노렸다. 그렇게 불편한 장면과 서사들이 결국 예술이란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가장 큰 사건이란 바로 전쟁이다. 전쟁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는 지에서 예술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전쟁영화를 많이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인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를 하나의 쇼라는 블록버스터 장르로써 전쟁 그 자체를 하나의 스펙타클로 구축한다.

 

전쟁이란 공간은 영웅의 등장만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보단 차라리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전쟁은 전혀 친절한 얼굴을 하지 않으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나머지 상황들을 버린다. 그러나 전쟁에서 언제나 카메라 중심은 우리 아군이라는 점, 아군의 승리와 패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군이 보여주는 활약이다. 살아남으면 승리의 영웅이고, 죽으면 고귀한 희생으로 추앙된다. 이기나 지나, 살아남으나 죽으나 어차피 영화는 주제성을 명확히 전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주제성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의미를 생각하여 만약 그 대상이 우리가 일반적인 범주에서 다가가기 어려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울의 아들>은 진짜 그런 영화다. 전쟁은 인류가 만든 가장 멍청한 행위이면서 인류문명을 가속화시킨 원인 중에 하나다. 더 많은 적을 빨리 치명적으로 죽이기 위해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면서 과학과 기술은 발전한다. 인류가 100세를 바라보는 이유도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시체, 그리고 비인도적으로 자행된 생체실험의 결과물이다. 생체실험이 이루어진 국가로 일본 731부대, 그리고 독일의 나치수용소이다. 독일에 의해 점령된 헝가리, 일본에 의해 정렴된 조선이란 국가는 전쟁에 의해 엄청난 수탈과 억압을 받은 나라다.

 

일본은 되도 않은 황국신민화 논리로 조선인을 제2의 일본인으로 만들어서 전쟁에 보내나, 독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총알받이보단 신속히 가스실에 보낸다. 대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챈다.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시작한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밥과 음식을 제공 전, 먼저 샤워를 하라면서 옷을 모두 벗긴 채 어느 방 안으로 보내고, 잠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독가스를 마신 사람들은 질식으로 모두 사망하고, 가스실은 피가 바닥에 스며들고,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다.

 

나치독일의 만행, 가스실의 제노사이드다. 하지만 이 잔혹한 계획은 나치가 수행했으나, 모든 일처리를 “존더커맨더”라고 불리는 포로였다. 이들은 몇 개월 동안 나치 감시 속에 업무를 맡다가 어느 일정기간이 지나면 처형된다. 죽기 전에 실컷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더러운 일에 동원된다. 그들의 얼굴에 그 어떤 희망의 눈빛을 찾아볼 수 없고, 굳어버린 표정과 타성에 젖은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 더 심각한 절망과 증오가 불타오른다. 영화 <사울의 아들> 주인공 사울 역시 절망의 세계에 살아가는 한 남자다. 그는 평소대로 나치의 업무를 수행 중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독가스를 마시면 일반적으로 호흡곤란으로 모두 죽는 반면, 어느 포로들은 살아남은 경우가 있다. 어느 한 소년이 가스실에서 생존하여 침대 위에 올려지고, 군의관 1명이 와서 생존여부를 확인 후 소년의 목을 눌러 교살시킨다. 결국 소년은 차가운 주검으로 변하고, 사울의 눈빛은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행동들을 일으킨다. 그 소년은 영화제목처럼 <사울의 아들>이었고, 사울은 눈앞에서 아들이 죽어가도 아비로서 아무것도 못한 채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은 다른 시체처럼 토막으로 취급되어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했다.

 

아들을 구할 수 없는 아버지, 그래도 그는 아들의 마지막을 불이 아니라 땅에 매장해주고 싶었다. 매장을 하려면 물론 땅을 파고 거기에 묻어야 하나, 문제는 랍비 즉 성직자가 필요했다. 종교는 구시대에서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던 권력이었으나, 20세기 유럽에서는 정치보단 그 종교의 문화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담당하던 문화적 역할이 컸다. 아이가 죽으니 랍비의 장례절차가 필요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죽은 아이에게 신의 은총이 내려지길 원한 것이다. 인간의 생에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어가나, 죽은 이후의 세계에선 영혼의 구원을 바란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랍비를 찾기 위해 사울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찾아보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가 되지 않고, 언제나 벽이 막힌 현실은 카메라의 연출에서 잘 볼 수 있다. 영화의 영상미가 참으로 불편한데, 보총 영화는 16:9나, 여기는 4:3이란 점, 더욱 놀라운 점은 보통 영화는 롱샷, 풀샷, 미디엄샷, 클로즈업 등이 골고루 배치하도록 연출하나, <사울의 아들>은 거의 모든 화면이 클로즈업으로 처리하려 한다. 사울의 얼굴을 중심으로 다른 피사체는 아주 흐릿하게 보인다.

 

사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주변 인물과 대화하고, 상황과 장소 정도만 풀샷 정도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은 거의 2인칭으로 사울의 행동에 집중적으로 따라가며, 배경과 상황정도만 3인칭 정도로 보여준다. 사울은 언제나 주변의 눈치를 보고, 늘 위기와 감시 속에서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행동한다. 랍비를 찾기 위해 다른 반장의 작업장에 찾아가고,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려는 사람의 일을 도와준다. 나치수용소 내부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어느 수용자는 사진기로 촬영할 때 망을 봐주거나, 나치가 “존더커맨더” 작업인부 70명 정도 죽이려고 할 때 봉기를 위한 화약을 구하는 일도 맡는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되지만, 사울은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고, 랍비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하필 그 날이 수용소 감독관이 전쟁포로 처리인원을 갑자기 늘리던 때였다. 도착한 포로들을 15분에 1번씩 가스실에 넣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며, 가스실의 사체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소각로가 모두 차게 되었다. 그러자 나치는 포로를 야외에 끌고 나와 그 자리에서 바로 옷을 벗기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사격한다. 그리고 야외에 만든 임시 소각장에 시체를 불태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만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래도 사울은 랍비라고 말하는 남자를 찾아내나, 그것도 마지막에 허사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에 나치는 작업반장을 죽이는 것을 시작하여 “존더커맨더”를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사태의 위험에서 사울은 아들의 시체를 매장하려 하나, 결국 그것도 되지 못한다. 나치에 봉기 도중 도망쳐야 했으며, 마지막에 나치가 보낸 염탐꾼의 첩보로 모두 죽는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로 유명한 작품으로 <쉰들러 리스트>가 있다. 이 영화는 암울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간 것이라 말한다면, <사울의 아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울의 아들>이란 영화는 매우 불편하고, 친절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다. 시체의 알몸, 해부실의 시체, 즉결총살, 불타는 시체 등등 피비린내와 죽음의 공간이 인간의 운명을 옆에서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로테스크한 세계와 냉소적인 인간, 이런 잔인한 영화가 왜 계속 나와야 하는 것일까? 불편한 시선과 달리 보기에만 좋은 작품들은 현실에서 금방 잊어버리고, 그저 흘러가는 것들로 공중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같은 작품은 인류가 저지른 악몽과 지옥을 되새기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영화에서 본 지옥 같은 수용소, 악몽이 현실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삶과 세상을 오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길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경우 비극은 또 다시 반복된다. 역사의 교훈은 바로 지나간 일들이 다시 미래에 똑같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왜냐하면 그 당시 인간들은 모두 죽었으니) 똑같은 방식과 형식으로 되풀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미래조차 열어갈 수 없으며, 자신의 눈앞에서 미래가 파괴되는 절망을 사울처럼 겪을 것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아들은 바로 미래와 희망이다.

 

사울은 바로 그 미래와 희망을 잃을 자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얻었으나) 다른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아우슈비츠에 끌려왔고, 거기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미래와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고 되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겠지만, 지나간 것을 무시하면 앞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간다. 그리고 그 앞은 절벽이란 사실은 마치 무언의 약속처럼 등장하여 우리를 절망으로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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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01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사울과 스포트라이트 둘 중 하나 고민하다 결국 후자 보았는데, 주말에는 사울도 봐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3-01 21:45   좋아요 2 | URL
오오~!
역시 주말은 이런 영화를 혼자 보는 재미가 있지요...

yureka01 2016-03-0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젤만 ㄷㄷㄷㄷㄷㄷ그러게요 ....ㅠㅠ

만화애니비평 2016-03-02 08:56   좋아요 1 | URL
주말과 휴일은 잘 보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