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월이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에 나는 영화 <군함도>를 보았다. 군함도란 이름을 이전에 몇 번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3~4년 전 조선의 근대사를 공부하면서 일제침략 시절 강제징용 역사에서 군함도에서 일어난 일들이 엄청난 만행이란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 것일까? 류승완 감독이 영화 <군함도>를 제작한다는 말에 군함도에 대한 역사학자의 도서 내지 소설가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아마 이전에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군함도가 소개된 것이 있을 것이다. 군함도 이야기가 20177월 한국을 강타하기 전 시골에 있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99세이다. 조만간 100세를 향해 가는데,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시점은 일제강점기가 한참이던 시절이다. 외할아버지가 예전에 징용을 끌려간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만나보면서 일본에 징용을 갔는지 물어보니 끌려갔다고 했으며, 징용피해자에겐 1년마다 소정의 보상금이 나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징용을 가면서 엄청나게 많이 맞았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계신 노인복지센터에서 나온 후 이제는 아버지가 태어난 시골집으로 갔다.

 

본래 친할아버지가 살던 곳이나 친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으나, 작은 아버지가 시골에서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징용과 관련하여 이래저래 이야기하니, 우리 할아버지는 4형제 중 3번째인데, 4형제 중 제일 큰형과 막내가 징용에 끌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잠시 봤을 정도로 어느 정도 천수를 누렸지만, 제일 큰형이던 큰할아버지는 징용을 다녀온 후 병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집안에 일제에 의한 징용피해자가 3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이란 나라에 그렇게 적대심은 없고, 일본인에게 그래 나쁜 감정은 없지만, 일본정부와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강하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일제 앞잡이들이 다시 광복 후 권력을 잡았는데, 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군사정권 시대의 기득권에게 상당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재정권 시절, 독재정부에 이익을 보던 자들 대부분이 친일파들이었고, 친일파들은 남성들은 강제징용으로 여성들은 위안부로 강제로 보내는데 일조를 했다.

 

가끔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대해 과거 징용 내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이고, 피해 받은 자들이 겪었던 슬픔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앙금이기 때문이다. 영화 <군함도>를 보기 전에 집안 상황을 다시 확인한 나로서는 군함도가 가진 의미가 단순히 지나간 일보단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형이란 사실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영화 <군함도>를 보면서 고증의 절차를 다시 생각했는데, 광부들이 지하 1,100m 정도 내려가면 더위도 문제지만, 산소도 부족하고, 게다가 석탄가루가 내려오니 폐병에 잘 걸렸고, 음식이나 휴식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으니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사람들이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으면 그들에겐 별 의미는 없다. 다시 새로운 조선인을 데리고 와서 죽음의 섬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영화 <군함도>를 그런 시점에서 보고 나니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이 다시 스크린 위로 올라왔다. 영화 속에서도 비참함이 그대로 전해지지만, 실제 상황은 더욱 참혹하고 비참했다. 누구는 이 영화를 두고 너무 국뽕에 취해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드나, 영화로서 재미보단 이런 일이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슬픈 영화라는 점은 분명했다. 영화에서는 그동안 짓눌린 억압에 대해 다시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군함도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자, 광복군 소속 장교가 군함도에 잠입하여 친일파를 제거하고, 모두 탈출하려 했다.

 

일본 입장에서 군함도에서 고생하던 조선인이 탈출하면 모든 만행이 드러나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되어 끝내 전쟁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자료를 모두 없애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증인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일본은 징용을 끌려간 조선인을 살해하거나,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했다. 역사에 가려진 조선인들의 원한은 21세기에 되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어질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대한민국은 징용피해자들의 원한을 대중에게 노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만일 일본이 그랬고, 그런 자들이 고생했다면, 중간에서 누가 그들을 죽음의 절망으로 떠밀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그 사실을 드러내기 싫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영화 <군함도>가 많은 논란에서 시작된 원인도 그렇고, 또한 영화 내용조차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상당히 어두운데도 나름 유머를 잃지 않고 있다. 배우 황정민 씨의 연기력이 발휘하는 것은 아무리 절망의 나락에서도 어떻게든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자신의 딸과 같이 탈출하기 바라는 아버지로 나오나, 뒤에는 자신이 죽더라도 딸의 미래를 걱정하며 눈을 감는 아버지가 된다.

 

조선인들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기에 처음에 어려울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 아래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증거와 증인을 없애려는 그 마지막에도 일본의 인텔리적 요소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옳다. 단지 그 선택의 조건과 상황이 어느 정도 부합되어야 성립된다. 영화 <군함도>에서 그런 상황이 주어진 게 특징이고, 그 상황을 맞추어 살아남았다는 게 특징이다.

 

단지 영화연출 요소에서 지나친 슈퍼히어로 요소가 가미되었기에 아쉬웠다. 광복군 장교라면 분명 뛰어난 두뇌와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다. 총을 관통하고 며칠도 되지 않은 상태에 과감한 전투장면, 부소장이 불에 타고 있을 때 한 손에 일본도를 가지고 목을 잘라 내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친 설정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점이 국뽕적인 요소로 보일 수 있으며, 연애적인 요소에선 억지로 맞추어 넣는 신파적 요소 역시 없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영화 <군함도>1번을 봐야 하는 이유는 그때 살아가던 조선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어갔는지, 또한 거기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군상과 다양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마지막에서 일본이 군함도를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했고, 거기에 있었던 잔인한 만행을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근대라는 역사적 유산에서 우리 인류는 발전이란 이름을 전쟁과 착취 그리고 파괴를 일삼아왔다. 근대와 현대는 연결되나, 근대에 새겨진 상처의 얼룩을 지우려 하면, 그 겉은 보이지 않아도, 속은 곪아 썩어가게 된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상해임시정부로 통해 광복 후에 정식으로 가진 이름이지만, 광복 전에 우리 한국인은 여전히 조선인이다. 군함도에 끌려가거나 그밖에 많은 죽음의 땅으로 끌려간 사람 모두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한국인이라고 말해도 조선인이라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인이란 이름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의 상처 입은 과거를 망각하고,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화 <군함도> 작품보다 그 영화를 통한 수입배급 체계나 혹은 작품 내 지나친 설정은 문제가 있지만, 영화 소재로 본다면 반드시 보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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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잠깨어 - 한시로 읽는 다산의 유배일기
정약용 지음, 정민 엮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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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에 잠이 들어 아침까지 일어나는 것도 참 행복이다. 늦은 밤까지 잠을 청해도 오지 않고, 눈을 감아 잠이 들었다고 여기다 갑자기 눈을 뜨면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도 컴컴하기만 하다. 인간의 잠자리에서 보통사람도 그러하나, 가끔 집에 우환이 있으면 어떠하랴? 한밤중에 잠을 깨면 이렇게 할 것도 없이 잡념만 무성하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상황이 제법 길지 않아도 답답한데, 만약 집에 우환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한 지경에 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

 

20177월 초반에 나는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에 위치한 다산초당에 다녀왔다. 다산초당이라고 하면 한국 대표 실학자이면서도 유학자, 그리고 민족의 등불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기거하신 곳이다. 다산초당이 문화관광지로 유명하나, 막상 가면 화려하지 않은 곳이다. 시골에 한적한 만덕산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산초당의 주인이던 윤단의 후손은 아직도 거기서 선조의 땅을 지키고 있다. 정약용 선생이 여기 유배오면서 많은 혜택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혜택을 입어도 하더라도 그런 일들은 차라리 겪지 않을 것이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인해 장기현으로 유배가고, 형님의 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다시 의금부로 끌려와서 모진 형을 받아야 했다. 백서사건에서 둘째 형인 정약전을 마지막으로 보고 그는 먼 강진 땅으로 다시 유배를 가야했다. 신유사옥에서는 셋째 형과 매형을 잃고, 자신의 친구와 동지들을 잃어야 했다. 조선사에서 천주교박해사건인 신해사옥은 단순히 가톨릭 교회사로 보는 게 아니라 조선 붕당정치에서 상대진영을 몰살시키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다.

 

장기와 강진이란 곳에 가면서 땅과 물이 몸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강진은 농촌과 어촌이 같이 있지만, 장기현은 전형적인 동해바다가 인접한 마을이다. 장독이 언제나 밀려오고 음식 맛도 맞지 않았다. 찾아온 이도 없고, 찾아갈 이도 없이 하랄 것 없이 방안에서 슬픔에 젖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간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온다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미치고 만다. 가족과 친구들이 몰살당하고, 자신 역시 고문에 지쳐 폐인이 되었다.

 

먼 길을 떠날 때 가족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으며, 늙으신 집안어른들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하는 슬픔으로 눈물을 훔친다. 유배가기 전에 떠오른 풍경에서 정약용 선생이 느낄 앞날이란 어떤 것일까? 조선시대 유배에 대해 생각하면 한양에서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죄가 크다. 게다가 유배는 사형의 아래 단계에 위치한 형벌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 앞에서 겨우 명줄만 보존했다. 게다가 천주학쟁이란 오명을 받아 시골오지로 내려가니 동네주민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괴물 1마리가 마을을 덮치는 것과 같았다.

 

슬픈 일에 힘든데, 외로운 시간은 더욱 괴롭다. 마재에 있는 집안에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니 그 슬픔 어찌 하면 좋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를 머물면서 잠들지 못해 남긴 시들을 모아 만든 <한밤중에 잠깨어>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아오면서 느낀 감정과 회한을 엿볼 수 있는 서적이다. 개인의 심정을 바라보면 그 안타까움 마음과 슬픔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사람들은 민족의 위대한 인물이라 하나, 그가 겪은 아픔과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한밤중에 잠깨어>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유배생활을 할 때 남긴 시들이다. 다산초당에 기거하게 되면서 그나마 힘든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강진에 오면서 바로 다산초당으로 가지 않았다. 사의재에 머물면서 초라한 주막에 외로움을 달랬다. 우연히 아버지 친구인 윤광택이 자신의 조카 윤시유에게 명을 내려 은근히 찾아와 위로해주었다. 강진에 머물면서 외가의 친척이 다산초당 주인이기에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하고, 도암면에서 서측으로 가면 해남군이 위치해 있다.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는 녹우당이 있고, 거긴 다산의 외갓집이다.

 

다산초당, 녹우당, 그리고 친구 겸 사돈인 윤서유의 도움으로 다산은 적막한 외로움과 슬픔에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밤중에 잠깨어>를 읽은 후 다른 시집을 읽으면 기분이 다르다. 특히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남긴 시들은 그나마 낙천적 요소를 읽을 수 있다. <한밤중에 잠깨어>는 오히려 그가 제일 힘든 시기에 남긴 글들이다. 가장 찐한 글은 집에 하인이 찾아와 물품을 전달할 때, 정약용 선생의 어린 아들이 밤을 넣어 보낸 것이다. 많은 자녀를 낳았지만, 남은 자식은 31, 그나마 막내아이조차 유배지에서 부고를 접한다.

 

먼 지역에 있으면 가장 그리운 것은 가족과 친구들이다. 나도 군대 훈련소에서 밤늦게 혼자 보초를 서면서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해도 그리운데, 18년 동안 강진에 머문 정약용 선생은 오죽할까? 자신을 아껴주던 학자군주 정조대왕, 그리고 많은 동지들까지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한탄만 더해간다. 자신이 원한 이상적 유학이란 백성들이 배고픔에 괴로워하지 않고, 세금이 무서워 가난에 찌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이 가렴주구한 관리로 인해 고통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며 다산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그냥 잠을 청해도 오지 않으니 나그네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자신의 불평을 시로 옮기는 일밖에 없다. 당시에 남긴 시조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마음이나, 후대에 내려온 이 글귀들은 아주 훌륭한 한국 문학 자취들이다. 내년 2018년이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해배되신지 200년이 된다. 다산이 떠난 지 200년이 넘은 강진을 돌아보면 여전히 다산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지키려고 한다. 그런 아픔을 겪은 다산이기에 <한밤중에 잠깨어>에서 보인 그분의 마음은 아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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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조선사 -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1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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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초반에 재미있는 2명의 유학자가 나왔다. 하나는 우암 송시열이고, 다른 하나는 백호 윤휴이다. 윤휴는 그가 죽은지 350년 넘게 세상에 나와서 안될 인물이었다. 주자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조선, 그 조선이란 국가에서 윤휴는 주자학의 절대적 관점을 다르게 보는 학문적 자율성과 개방성을 추구했다. 그 덕분에 주자의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송시열에게 공격당했고, 윤휴는 서인들의 집권전략에 따라 사약을 받들고 그 운명을 달리했다. 윤휴가 왜 이렇게나 안타까운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시작은 기축옥사부터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부터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활약한 인물은 바다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육상에서는 권율 장군이었다. 이순신의 평가는 지금에 따지면 국가를 살린 성웅으로 묘사되나, 조선시대 중 선조 때는 그야말로 최악의 무관이었다. 그가 최악인 이유는 다른 것은 없다. 임금인 선조보다 백성들에게 더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고문을 당하고 3군 통제사 신분을 잃은 채 백의종군할 적에 많은 군인들과 백성들이 이순신의 귀환을 보면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백성들에게 나라를 버리고 간 선조보다 같이 옆에서 같이 싸워준 이순신이 더 높은 인물이었다. 역사적 자료에서 이순신은 회의를 할 때 무관직 참모 외에도 일반 사병과 백성들조차 발언권을 주면서 전략을 짰다고 한다. 이순신을 인재로 발탁한 인물로 대부분 이순신의 친구 서애 유성룡만을 생각하나, 그 이전에 영의정 동고 이준경의 안목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준경은 남인의 영수로 있었고, 명종시기 을묘왜변 때 직접 해남일원을 방문하여 왜적을 격파했다. 그때 그가 추천한 전략을 현직 무관보다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을 받았다.

 

남인의 활약은 바로 붕당정치에서 다른 당파에게 눈에 거슬린 행위였다. 이준경은 율곡 이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이 죽기 전 율곡 이이 때문에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 예견했다. 이이와 많은 조정대신들은 유언을 남기는 이준경을 탓했으나, 후에 진짜 붕당정치로 고역을 치룰 때 이이는 이준경의 교훈을 뼈저리게 새기고 붕당의 폐단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왜 붕당정치가 문제이고? 임진왜란이 어떤 발화점이 되었고, 윤휴의 죽음은 왜 다시 재조명된 것인가?

 

조선의 사대부는 진실한 유학자가 있다면 거짓으로 물든 유학자가 있다. 유학자(儒學者)는 정치인 이전에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다. 철학사상에서 정치적 판단은 곡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연마하고, 그것은 곧 백성의 생활이 안락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의 유학정신은 그랬다. 하지만 양반이란 계급, 사대부란 이름을 가진 자들은 백성에게 좋은 선정을 베풀기보다 오히려 폭력을 합법화하여 통치했다. 유학이란 시스템은 충효가 중요하고, 이 모든 것은 정치적 맥락에서 연계된다.

 

물론 충효는 중요하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경우 지난 일제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부모를 업신여기면 그 당사자의 자녀 역시 그 이상으로 업신여기게 될 것이다. 인간의 도리와 가치관에서 충효는 중요하나, 그 근본은 인간의 도리로서 여길 것이지 그 자체로 모든 이데올로기를 결정한 순간 나라는 망하고 만다. 양반 사대부 통치이념은 충효사상이고, 그것은 조선의 명나라 숭배사상이다. 사대주의는 강자에게 약자는 머리 숙이고, 그 약자에 속한 약자는 또 다시 머리를 숙이어야 한다.

 

만일 나라가 잘 운영되면 무슨 문제인가? 그러나 그게 되지 않아 문제이다. 윤휴의 죽음은 바로 여기서 부터이다. 효종임금은 아버지 인조가 겪은 수모, 자신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 간 것에 원한을 새기며 평생 무력을 연마하고, 여색을 멀리했다. 먹는 것도 검소하고, 평소 양반이란 것은 문무의 일치를 몸소 실천한 임금이다. 효종의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지 않으나 적으나 다른 임금에 비해 총명하고 의지가 있던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30대 되는 나이게 병으로 죽고 만다. 그가 평생 걸쳐 하고픈 업무란 청나라를 치는 것이다.

 

북벌론, 명나라는 이미 기운 달이나, 그래도 매달리는 모습은 다소 한심하더라도, 지금과 당시 국가적 가치관이 달랐다. 효종의 북벌론에 우암 송시열이 집중적으로 헌신했다고 하나, 다시 사관의 실록과 당시 기록들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백호 윤휴가 북벌에 목숨을 걸었고, 그가 북벌을 완수하기 위해 문과에 충실한 조선에 무관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백호 윤휴는 무관을 당상관으로 당겨오고, 무관을 많이 뽑기 원했다. 여기까지 다소 당파의 소음이 있으나, 결정적인 문제는 병사와 하급무관의 발탁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많이 재산을 불린 방법은 농지를 수탈하고, 주변 양민이나 농민을 종으로 삼아 곡식을 불려가고, 게다가 환곡을 빌려주면 2배 가까운 이자를 붙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반 사대부도 아닌 왕족의 후예까지 그러니 그 폐단이 얼마나 심각했을까? 윤휴는 평민을 늘리야 하고, 세금의 납부를 농민이 아니라 양반까지 늘려야 한다고 했다. 평민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군역을 한다. 만일 군복무를 하지 않으면 군포를 내야 하나, 노비가 늘어나는 평민이 줄면 국고가 부족하다.

 

무관을 임용하기 위해 국고를 채워야 하나, 양반들은 군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집안의 족보를 보니 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군역과 관련하여 실제 무관직을 수행하여 변방에서 수명이 다해 순국했다. 나이가 70중순을 넘겨 변방을 지킨 것도 있지만 군역과 관련하여 보인(保人)까지 맡았다. 군정의 의무에서 이미 무관직을 맡았고, 거기에 군정의 병역에 필요한 군포도 제공한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도 군포를 낸 기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 군포를 내는 자는 농민이고, 농민 대부분이 수탈로 인해 노비로 되자, 국고를 거두어야 할 재원이 부족하게 되었다.

 

윤휴는 바로 저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문제는 저기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이익을 얻는 자들도 있다. 이익을 받는 자들은 산림에 거주하는 사대부들이고, 그들은 거대한 벌열세력으로 권력과 재력을 누렸다. 그들에게 노비 숫자를 줄이고, 평민을 늘리며, 농민이 내던 군포를 줄이는 대신 양반에게 전가시킬 경우 많은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윤휴는 사문난적이란 이름 아래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이순신 역시 남인이란 점에서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날은 친구 유성룡이 탄핵을 받아 실각할 때이다. 자신을 구원할 친구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그 친구는 임진왜란 그렇게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정치적 당략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남인의 대착점에 서인과 북인이 있었고, 서인들은 대부분 선조와 함께 갔다면, 북인들은 주로 의병활동, 남인들은 무관으로 전장에서 많이 싸웠다. 이순신의 공을 올리기보단 선조는 오히려 명나라의 구원군에게 더 큰 공로를 치하했다. 이여송 장군이나 진린 장군에게 더 큰 치적을 남기고, 살아있는 사람을 배향하는 사당까지 만드니 그 어리석음을 어디 말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책임지어야 할 왕과 사대부들은 모두 피신하고, 대부분 백성들이 당했다. 그나마 백성과 같이 싸우던 사대부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전쟁 후에는 유성룡의 실각으로 남인들은 소외되었다. <두 얼굴의 조선사>에서는 이런 역사적 형태를 사대부의 관점보단 일반 민중, 백성들의 시각에서 봤다. 조선의 역사를 우리가 버릴 수는 없지만, 그런다고 무조건 옳다고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권력층이 피지배계급에게 향한 폭력과 억압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종이란 이유로 때려죽여도 죄가 없고, 종이 상전에 욕을 했다고 교수형에 처했다.

 

조선 최고의 명군주인 세종대왕 집권 당시 능지처사가 가장 많았다고 한 것은 충격이다. 능지처사, 능지처참은 말이나 소를 이용하여 억지로 사람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아주 고통스러운 형벌이기에 극단적인 역모가 아닐 경우 실행하지 않는다. 백성들의 양반에게 대들면 참형은 기본이고, 장형으로 몸을 불구로 만든다. 형조에서는 백성의 문제를 다루고, 의금부만이 사대부 관료를 다룬다. 형조와 의금부의 분리로 계급적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한계성은 백성의 고통을 잘 기록하고 연구한 것은 좋으나, 몰락한 양반세력이나, 백성의 고통에 동조한 양반에 대한 관점이 많이 부족한 점이다.

 

의금부에 갇힌 양반이 형조에 갇힌 평민에 비해 대우가 좋은 것은 분명하나, 그것은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일 경우이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한 지식인은 옥중에서 사망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사화나 옥사의 경우 그 피해는 말로 할 수 없다. 책에서 소개한 정개청의 서원철거 문제가 나오는데, 정여립 모반사건이 사실이 아닌 조작에 의한 옥사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1,000명 정도 화를 당해 죽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권력층 비리를 비판하던 많은 선비들이 장형으로 맞아 죽었다.

 

유학자의 이름 아래 통치하던 예절의 나라 조선은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폭력을 정당화한 국가였다. 부정과 부패가 들끓었고,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귀양을 가거나 보복을 당했다. 국가의 문제를 비판하는 자들의 상소가 사라지면,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은 늘어만 갔다. 여성의 인권에서도 조선 초기 딸도 부모의 재산에 대해 공평하게 받을 수 있었고, 그들도 부모의 제사에 관여하여 재산권을 실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을 후 장자중심으로 이끌어갔고, 장남 이외 아들은 그나마 유산을 받을 수 있지만, 딸은 출가외인이 되어야 했다.

 

한명기 교수의 서적에서도 환향녀의 운명은 더욱 가혹하다. 열녀문화에 미친 듯이 집착하여 죄 없는 여성이 스스로 자결하고, 때로는 집안에서 죽음을 재촉하니 그 폐단이 얼마나 골수에 미친 것인가? 책 후반에 갈수록 조선사회 문제점을 거론하기보단 조선시대 향촌문화를 중심으로 말하는 부분은 아쉬운 것 같으나, 서원의 설립과 운영은 폐단 중에서도 심각했다. 중앙권력층과 지방 세력의 가교 점은 서원이고, 특히 제일 심한 곳은 우암 송시열을 기리는 화양서원이었다.

 

이 책의 읽을 때부터 내가 서평을 적을 시점부터 우암 송시열을 언급하나, 그는 성리학자로 보자면 매우 탁월하고 훌륭한 인물이나,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나쁘고, 폐단 그 자체를 종속을 시킨 인물이다. 송시열의 정치적 입지는 노론과 소론의 붕당세력으로 나뉘게 만들고, 송시열 사후에 송시열의 이름을 들먹이며 지주사대부들의 횡포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사적이익 당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물론 노론만 아니고 남인과 북인 세력들도 백성에 대해 횡포를 부린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신하의 권력이 왕권을 넘어 가면서 왕도정치는 이미 기울여졌다.

 

왕권강화는 곧 정치적 개혁시도이고, 백성에게 유일한 소망은 암행어사가 출도 하여 탐관오리를 붙잡아 형벌을 처하는 것이다. 왕권이 약하고, 그 암행어사조차 비리에 눈을 감는다면 답이 없다. 심지어 그 비리를 고발한 암행어사가 후에 정치적 보복까지 당하니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찌 풀어나갈 길이 없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시대 이야기라고 하나,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일부 잘 나가는 사대부집안은 친일파세력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해방 후에는 재산을 모아둔 자본으로 쌓아 이윤을 챙겼다. 돌아보자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작가는 조선이란 나라 자체를 모두 부정할 생각이 없으나 이렇게도 적나라하게 양반을 비판한 이유는 그 시대의 오류가 아직도 한국을 지배한다. 한국사회에서 말대꾸는 용서되지 않으며, 이른바 답정너(답을 이미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는 방식의 기원은 조선 사대부들의 권위의식에서 시작된다. 공장에서 일하거나 농사짓는 것을 하잖게 보는 것도 사농공상의 시점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법의 집행은 위에서부터 가장 엄하게 해야 하나, 조선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으니 왜 이리 씁쓸한가?

 

인터넷 유머게시판을 운영하는 한 블로거의 게시물을 보았다. 거기에 절도죄를 한 사람의 징역형량이 나와 있는데, 배고픔에 견딜 수 없어 몇 만 원과 라면을 훔친 자는 4, 사기를 친 자는 나중에 특사로 2년 반 정도 복역에서 나왔다. 가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훔친 자에게 가해진 형벌의 참혹함이 왠지 비수가 내 가슴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를 보며 현실을 돌아보고 미래를 찾아보는 것은 현명한 인간의 선택이다. 지금 현명한 인간이란 그런 역사적 인식보다 내 수중에 돈이 얼마나 오는지만 본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파멸을 주더라도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조선시대 양반의 두 얼굴이 있다면, 오늘날 자유민주의 대한민국에서도 두 얼굴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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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3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4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7-24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조선의 원류가 5백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책으로 보이네요.
독서와 구매를 자극하는 리뷰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던
근왕병/의병이 44년 뒤에 벌어진 병자호란 때는
거의 없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
합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조국은 나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최악의 신분제 국가였던 조선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가 아닐까 추론해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7-24 09:13   좋아요 0 | URL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제가 쓰는 조선사들은 현재의 헬조선 기원을 찾아가는 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에 이덕일 작가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보며, 저 망할놈의 사대부들이 펼친 행동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X나게 백성걱정하여 정책을 펼친 자는 사약 극딜시키고, 유배를 보내도 최악의 장소로 보내고, 몽둥이로 사람패서 그냥 보내고,

병자호란 시기 의병이 없는 이유는 임진 시기에 기껏 나와 싸웠더니 본인 내지 순국자 후손에게 대해준 일말들은 안봐도 비디오이죠

유성룡이 원래 훈련도감을 별도로 설치해 평민이라도 왜적을 일정수준 처리하면 무관으로 기용하고, 그 공이 높으면 높은 직까지 주자고 하니, 결국 후에 탄핵당해버리죠.

성웅 이순신도 선조시대 봉헌 된 게 아니라 한참 뒤에 봉헌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죠.
 


적당히 인터넷과 뉴스기사를 보고 경제를 말하는 사람과 진짜 경제학 도서를 보고 경제를 말하는 사람의 생각은 너무 다르다.

친구와 통화하면서 임금 최저1000원 넘게 올랐는데, 하루 8시간 1달 24일 1년이면, 일인당 받을 금액은 대략 200만원, 전국 비정규직 내지 알바생 중에서도 최저임금보다 더 받는 분을 제외해도 100만명을 안 될 것이다.

2백만 × 1백만 = 2조 정도 된다.


이런 돈이 화폐로 시중에 나가면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오른다고 보나,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임대료와 부동산이다. 아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마르크스 <자본론>까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 자본주의에서 케인즈 이론에서도 임금뿐만 아니라 지대도 중요한 화폐공급원으로 본다.

부동산이 미친듯이 상승할 때 몇 년 사이 최고 200~300% 증가했다. 아파트 세대 1당 2억이 오르고, 아파트도 대기입 아파트라도 최소 전국이 몇 십만 세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만 세대로 하여 2억이 상승했다고 가장하면

2억 × 10만 = 20조 정도 된다.

화폐의 시중유통에서 사람들은 현금 즉 동산의 개념으로 물가를 판단하나, 중요한 것은 부동산 역시 화폐의 기능에 따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최근 임금상승율과 원자재 비용이 크게 오른 것은 없는데도 물가는 계속 올랐다. 그러면 나머지 비용은 무엇인가? 알바비도 5000원 내외에 통닭원가도 마리당 1500원이면, 통닭 1마리당 2만원까지 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학적 구조로 사람들에게 설명하면 나에게 오는 눈빛은 이상한 녀석이라 하거나 너는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냐는 것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단지 경영학을 경제학으로 여기는 형태일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을 읽으면 경제학에 대한 전반적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인구와 산업의 관계, 빈곤과 국력의 문제 등등이다. 애덤 스미스가 빵을 파는 상인은 돈을 벌기 위해 빵을 팔아 국가경제가 잘 돌아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지만, 그 빵을 사람들이 제대로 사먹을 수 있어야 가능하지 그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한국의 1980년대 과소비가 문제지만, 지금은 과소소비가 문제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에 물건을 팔면 그것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본을 회수하여 재생산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적는 내가 바보인지, 국가경제가 어렵다고 하며 서민이 죽겠다고 말하면서 정작하는 행동은 정 반대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가 바보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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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7-21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금의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서 보수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관련되어, 자영업자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식의 아전인수식 해석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기득권층의 저항은 대단하네요 정말.

만화애니비평 2017-07-21 16:04   좋아요 1 | URL
임대료와 관련하여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웃깁니다.
소상공인들이 그렇게 힘들면 자기 옆에 일하는 알바생은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지 않은 이중성을 가지고 노는거죠.

자영업 입장에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임대료가 시냐에서 500만원에서 1000만원을 오른 상황에서
알바 1명당 일일(6시간 기준) 3만6천원에서 4만원2천 정도 받으면
알바 4명을 고용하는 식당이라면 70만원이 부담되겠죠.

그러나 막상 임대료 500만원에 대한 부분을 누락하고 인건비만 운운하죠.
알바생들도 교통비나 생활비 문제가 있는데 고려하지 않고
서민의 생계를 말한다면 자승자박이겠죠.


루쉰P 2017-07-2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좋은 글 쓰고 계시네요 ㅎ 너무 오랜만이죠 ㅋㅋ

만화애니비평 2017-07-21 17:03   좋아요 0 | URL
더운날 더위는 잘 피하고 계시는지요..ㅎㅎ
 
성호사설 한길그레이트북스 39
이익 지음 / 한길사 / 199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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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월 나는 해남에 위치한 고산 윤선도 고택과 그의 후손인 공재 윤두서의 고택을 찾아갔다. 윤선도의 고택은 현재 직계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박물관을 관람했다. 그러나 윤두서의 집은 개방이 되어 건축물 내부에 들어가지 못해도 마루 끝에 앉아 여름비가 하염없니 내리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 시골에 가면 기와지붕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소리는 참으로 경쾌했다. 하지만 이 곳에 오니 그 어린 시절의 빗물소리보다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전통 사대부 기와집 아래 떨어지는 빗물은 마치 거대한 음악이 되어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집에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집의 후손이 찾아와 가끔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 방안에 옷걸이가 있었고, 마루 끝에 이런저런 간단히 책이나 신문들이 놓여있었다. 해남 백포마을에 위치한 윤두서의 고택, 그의 이름은 잘은 몰라도, 그의 그림은 잘 알 것이다. 최근 외국게임 블라자드에서 제작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한국판 영상광고에서 이른바 시공조아라는 단어가 나올 때, 시공의 폭풍을 탐구하던 한 사람이 어느 초상화 이마 부분을 떼니 게임 로고가 나왔다. 그 초상화 주인공이면서 그린 사람이 바로 공재 윤두서이다.

 

게임 영상광고에 나온 이 그림은 국내 미술학계 내지 세계 미술학계에서도 큰 연구소재거리이다. 한국의 전통화풍에서 사실주의적으로 인물을 표현한 그림이 18세기 초반에 나온 점이 큰 반향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소치 허련 같은 조선화가는 공재 윤두서의 화풍을 따라 그렸다. 양반사대부 집안인 윤두서는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지배계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많이 멀어진 자이다. 윤두서는 친구의 형님이 장살(杖殺)당한 사건이 있었다. 장살이란 곤장을 죄인에게 수십 수백 차례 가격하여 죽게 만드는 잔인한 형벌이다.

 

윤두서의 친구 형님이란 누구인가? 우선 윤두서는 해남 백포마을에 고택이 있지만, 자신의 직계조상은 고산 윤선도이다. 윤선도는 효종이 하사한 집을 다 해체하여 해남 연동마을 종택으로 사용했다. 녹우당(綠雨堂)이라 불리는 이 집의 현판을 누가 멋지게 획을 그려넣었다. 그 글을 넣은 사람은 옥동 이서이고, 옥동 이서의 큰형인 이잠은 숙종 당시 노론당파의 부패와 모순을 지적하고 상소하다 미움을 받아 장살을 받아 죽었다. 이잠의 죽음에서 이미 조선사대부들의 정신은 소진 중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말했다고 하지만,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린 이유로 선비 하나가 매를 맞아 죽었다. 바른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이잠에게 동생인 옥동 이서, 그리고 막내 동생인 이익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벼슬의 길을 포기하고, 평생 재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했고, 그 학문은 당시 빛을 보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의 유교를 말하자면 과거에 민중을 탄압한 썩은 물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조선의 유학을 다시 눈을 뜨고 있고, 중국에서 공자의 정신이 움을 트고 있다.

 

한국이 세계화가 되어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란 나라는 무엇이고, 그들의 정체성을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때까지 버려온 성리학유학은 그야말로 폐단 중에 폐단이었다. 그런다고 어디서부터 다시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할지 몰랐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은 한국 전통사상만 아니라 성리학유학, 심지어 천주교회사가까지 관여되고 있는 인물이다. 다산이 한국의 전통사상의 그 끝이고, 조선의 문을 이룩한 인물이라면, 그가 어디서 자신만의 문을 쌓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는가?

 

정약용과 친한 유학자 중에 이가환이란 인물이 있다. 신유사옥 시 천주교박해와 관련하여 죽음을 당한 학자이다. 그는 이익 선생의 후손이다. 이익이란 인물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 중 하나가 이익이었고, 그가 저술한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이익 선생이 살아생전 적은 글들은 그분의 후손이 모아 집필한 도서이다. 이익이 왜 중요한가? 이익은 노론과 대치되던 남인들에게 큰 정신적 지주였고, 그의 가르침은 조선 명재상 채제공, 불세출의 천재 정약용, 조선 역사학의 지평 순암 안정복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남인 그리고 세도세자의 죽음을 슬프게 여기는 시파 무리에게 성호사설은 중요한 책이다. 사도세자는 당시 집권당인 노론보다 소론하고 친하고, 남인의 영수가 되던 번암 채제공에게 큰 신임을 주었다. 노론과 반대되는 정치세력은 전통적 봉건제도가 아니라 개혁적인 정책을 원했다. 조선시대 가장 심한 정치적 폐단은 군정폐단이다. 양반과 양반이 소유한 노비는 군에 가지 않으나 일반 농민 같은 양민들은 16세에 군적에 올라 60세까지 병역을 이행해야 한다. 군역을 이행하지 않을 시 이에 따른 군포를 납부해야 하나, 그 폐단이 너무 심했다.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이란 시조를 보면 강진 갈대밭 아내가 방에 들어가니 남편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 남편이 칼로 자신의 성기를 잘랐고, 피가 온방을 젖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계기는 죽은 시아버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내아이가 군적에 올라 군역을 내야 하나, 낼 수 없어 농민의 재산인 소를 끌고 가서 남편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일을 저지른 것이다. 자신의 성기가 결국 이렇게 만들었다는 그 분노와 절규에서 말이다.

 

군적의 문제는 성호 이익이 늘 지적한 부분이다. 양반은 높은 자리에 올라 폼만 부리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을 해야 하며, 글을 쓸데없이 과거만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농민이나 백성을 위한 실학적 요소를 강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호사설을 보면 공자의 논어(論語)가 계속 나온다. 공자는 그 당시 기준으로 2200년 이전 사람인데도 왜 공자인가? 공자는 실제적인 유학정신을 백성을 위한 정치적 제도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의 성리학은 지배이데올로기만을 강조했고, 백성들은 거기에 시름을 앓아가고 있었다.

 

백성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쓰러져 가는데도, 그들은 늘 풍악을 올리고 술잔치를 올린다. 그리고 백성의 쌀을 빼앗아가고, 그들이 빚을 지면 노비로 부려 평생 짐승처럼 부린다. 이익의 그런 현실이 너무 싫어했다. 자신의 형인 이잠이 이런 현실에 분노하여 강개 굳은 의지를 표출했지만, 그도 역시 희생되었다. 조선의 엘리트들은 약자를 늘 착취했고, 약자의 슬픔을 동조하는 엘리트들은 그 최후가 매우 끔찍했다. 성호사설을 보면 이런 부분을 지적하고, 다양한 현상을 연구하고, 경전을 다시 재해석했다.

 

만일 100년 전에 이익이 이 책을 썼다면 위험했을지 모른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는 주자의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했고, 만일 거기서 글자 하나라도 잘못 인식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여 버렸다. 학문은 늘 자유롭게 연구하고, 기존의 것을 다시 작금의 현실에 따라 새로이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 학문의 정신이 이미 조선에게 없었다. 벼슬을 위한 학문하는 자만큼 가장 백성에게 해로운 존재는 없었다. 이익은 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고 책에 기록했다. 나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글귀 한 편을 적고 있을 때, 이익은 30년 일을 떠올렸다. 아주 추운 겨울 어느 거지가 어떤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거지의 옷은 모두 헤져 있었고, 앞을 볼 수 없던 맹인이었다. 그 거지가 문을 두드리며 하던 말은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라고 했다. 이익은 그 일이 본지 30년이 지났는데도, 그 일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복이 죽고, 그 노복의 아들이 아버지 묘 관리를 하지 않자, 종복의 외손자를 불러 묘 앞에 참배할 수 있도록 재물을 주고, 제문까지 지어 올려주었다. 그것도 자신의 농지를 잘 돌봐주어 자신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아무리 몰락한 사대부라도, 상민보다 높은 계급이었다. 그런데도 양반도 일을 해야 하고, 피지배계급이라도 그들의 인권과 삶을 존중했다. 노복이라도 하나의 생명이었고, 그들의 고단함을 알아주고, 고마워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위에 있는 강자들은 자신보다 약한 자들의 고단함을 고마워하기보다 오히려 더 착취하려고 한다. 성호사설이 개혁적 지식인에게 귀감이 된 이유는 성호 이익이 제시하고 있던 인간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깊은 학문이라도 그것이 백성의 입에서 환호성이 아닌 탄성이 나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

 

백포마을의 윤두서 고택을 방문하면서 윤두서가 한 업적이 생각났다. 그가 어느 날 집에서 어떤 문서를 들고 농민이 사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에 간 후 그 문서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 문서는 돈이나 곡식을 대출해준 것을 기록한 장부였다. 세금도 제대로 못 내고, 군포에 시달린 그들을 본 윤두서는 결국 장부를 소각했다. 성호사설을 읽은 후 고산 윤선도가 가족에게 남긴 유후을 보면 비슷한 내용이 많다. 노복의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복이 가족이 있으면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점이다.

 

이런 점을 보면 윤선도나 윤선도의 후예 윤두서, 윤두서와 친구이던 이익은 아주 탁월한 정치경제학자이다. 만일 노복에게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조치하고, 일을 할 때 아무리 종이라도 그 일한만큼의 노임단가를 준다면 그들은 계속 그 지역에서 생활을 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 일을 열심히 한다면 자기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그것이 다시 고용주에게 이익이 된다면 서로 간 의지할 수 있는 형상이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립되는 현실 속에서 상생의 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물론 있는 자는 고용되어 일하는 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나, 그들의 노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성호사설에도 그런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다. 경세치용, 농상중심 경제구조에서 농민이 잘 살아야 국고가 부유하고, 국고가 부유해지면 국력이 상승해서 외적의 침입을 대비할 수 있다. 또한 국력의 상승과 인구가 불어나면 그만큼 나라가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대의가 있어도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면 얼마나 아쉬운가? 성호의 가르침은 조선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않고, 단지 그들의 후학들로 하여금 그의 정신이 옳다는 점만 증명했다.

 

21세기 조선의 역사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영화 <대립군>은 광해군과 같이 사지를 헤쳐 나온 이름 없는 조선의 민중이 곧 조선의 주인이라 보여주었고, 앞으로 개봉할 <군함도>에는 일제에게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이 죽음의 섬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되찾고자 했다.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조선의 아나키스트 청년과 일본의 가난한 여성의 혁명과 사랑을 다루었다. 조선은 패망해도 우리에게 조선인이라 꼬리표는 조선인의 후예가 살아있는 그 순간까지 같이 갈 것이다. 조선의 망해도 조선인을 살아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대한민국 역사는 자랑스럽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수가 있다. 대다수 백성들이 권력자에 의해 핍박과 억압을 당했고, 그런 부조리를 느낀 왕족과 선비들은 독살당하거나 참수당하거나 유배 살이 등을 당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자들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자랑스럽다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몰라도 우리 역사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희망이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성호(星湖) 이익의 호처럼 성호는 태호(太湖)처럼 크고 넓은 호수이다.

 

호수의 물은 우리에게 식수를 주고, 생물에게 생명을 주며, 농부에게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원천이 된다. 모든 생명과 시작의 중심이 물은 우리 인간만 아니라 지구전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호 이익은 우리 민족에게 그 크기와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호수이다. 거대한 호수이기에 머나먼 존재가 아니라 그 거대한 호수의 물이 모두의 오아시스가 되기를 바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은 언제나 가려진 존재였다.

 

당시 권력자들은 역사의 이름아래 역적 내지 간신이 되어있고, 아니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익 선생의 이름과 성호사설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가 가진 사상은 옳았음을 입증되었다. 시대에 따라 살아있는 자와 그에 따른 환경은 달라도,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그 세상에는 항상 모순과 부조리가 살아있다. 그리고 모순과 부조리에 의해 고통 받는 인간 역시 계속 존재한다. 그런 사회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호 이익 선생의 안목에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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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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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9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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