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좋은 날 - 그날, 그 詩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김경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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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 10월 31일. 무슨 규칙처럼 종일 어딜 가도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계속 들려오는 날에, 누군가와 헤어진 적이 있다.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경험해본바, 원래 대부분의 일에는 전조가 있다. 어떤 연인이 오늘 싸우고 헤어졌다고 해서 그게 충동적인 이별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 싸움이 이별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일 뿐. 그날, 그렇게 헤어지기까지 쌓아놓은 이별의 조각들이 있었을 거다.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겠지. 생각보다 담담할 것 같았는데, 온종일 서늘한 노래가 들려와서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마음을 부추겼던 듯하다. 뭔가 출렁이기 전에 잠재워야겠다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학교 근처의 작은 서점. 일반도서보다는 수험서나 전공서적이 서가를 가득 채우며 특별 분야를 편애하던 서점이다. 그 안, 한구석에 마련된 문학 코너에 꽂혀 있던 몇 권 안 되는 시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잠깐 서서 읽기에는 소설보다 시집이 낫겠다 싶어 한 권 꺼내 들어 펼쳤다. 뭔가 잔뜩 사랑의 말, 이별의 언어로 채워진 시였는데, 누구의 시였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기억만 있다. 오히려 서점 안 스피커를 타고 흐르던 노래가 더 귀에 들어왔다. 어찌 되었든 이별은 슬픈 일인데, 어떻게 그 순간에도 슬픈 노랫말 같은 시 구절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있던 건지. 시에 대한 불편함은 실연한 여자 코스프레도 못하게 했던 거다. 안타깝게도...

 

시를 얘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시가 어렵다고 말한다. 시가 정말 어려운가? 시가 어렵다는 생각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중 · 고교 시절, 시험을 치기 위해 시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상징이니, 은유니, 직유니, 주제니, 구성인, 감정이입이니, 시적화자니, 이런 것들로 시를 괴롭히고 시 읽는 사람들을 괴롭혀 놓았으니 시가 쉽고 친숙할 수 있겠는가? (5페이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 정호승 외)”

시를 불편해하고 다 이해하지 못했던 짜증으로 멀리했던, 차마 내 입으로 대지 못할 핑계를 이렇게 콕 찍어준다. 『시 읽기 좋은 날』의 저자 김경민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를 시로 대하지 못하고 시험문제로만 대했다. 군데군데 중요한 부분 밑줄 쫙, 구절의 숨은 의미를 찾아서 별표 팍팍, 참고서에서 알려준 대로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외워야만 했다. 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뭔가 공감하고 싶은 과정이 모조리 생략된 채로 시를 대했으니 시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그때보다 몇 살 더 먹고 이십 대가 되었다고 해서 시를 대하는 마음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더군다나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시를 더 접할 일이 뭐가 있었겠나. 전공이 아닌 다음에야...

 

김경민은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붙였다. 교과서에 실린 시로 ‘감성과 통찰을 느끼기에 중고등학생들이 그 나이에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직접 시를 가르친 교사였으니 현장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일 터다. 무슨 말인지 알 듯하다. 똑같은 경험을 하거나, 시간이 흘러야만 알 수 있는 게 있다. 좀 더 세상을 보고 배우면서 겪은 굳은살이 알게 해주는 것. 그 나이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강요하니 공감하기는 더 힘들었을 거다. ‘아이 때 읽은 고전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그때와 다른 시선이 생기더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권한다. 어른이 되어 시를 다시 읽어보면 좋겠다고. ‘詩가 이렇게 따뜻한 것’임을 알게 될 거라고, 그 아름다움에 반할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저자가 들려주는 시 50편이 담겨 있다. 그중 절반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시다. 그 시를 다시 만나볼 좋은 기회, 삶의 결정적 순간에 시가 우리와 함께 한 찰나를 포착해 글로 전한다. 울고 웃는 일상 속에서, 배우고 알게 되는 성장 속에서, 세상을 향해 몸부림치는 부대낌 속에서 함께 하는 시를 건넨다. 저자만의 사유다. 고정되고 강요되는 해석이 아니다. 그 시를 만났던 그 순간의 느낌이나 단상이 채워졌다. 그게 전부다. 자신만의 감정이 그 시에 찍히는 타이밍을 고스란히 들려준다. 이 시와 저자의 사유가 그대로 건너와 뭔가 한 마디 더 건네고 싶다면, 내 안의 감정이 동요되고 있다면, 그거면 된 거다. 그때부터 나만의 이야기를 쓰면 되니까.

 

 

내게서 나가는 시선. 사랑, 이별, 관계.

내게서 나가는 타인을 향한 시선으로 공감하는 시어. 사랑을 말하고, 이별을 공감하며, 사람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우리의 일상을 이룬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다가오는 발자국에 쿵쿵거리는 가슴을 기억한다.(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약속시각이 다 되어가는 그 똑딱임은 단순히 시계 초침 소리가 아니라 심장이 뛰는 소리다. 사랑의 순간만큼은 시계 초침 소리가 ‘똑딱똑딱’이 아니라 ‘두근두근’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사람의 자세는 희생이 아니라 자존심일 수도 있다.(진달래꽃 / 김소월) 사랑이 끝난 사람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기억해야 할 자신의 역사 같은 것. 사랑은 끝났으나, 그 사랑의 기억은 고결할 것이기에.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이의 의미를 생각해본다.(꽃 / 김춘수)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한다. 가족, 친구, 동료, 또 그 이상의 여러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 그 말들이 가진 공통점은 관계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타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필요 없는 단어들일지도 모르지만, 관계로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소통이 고민과 노력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말하는 강은교의 시(사랑법 / 강은교)는 집착이 아닌 침묵의 시간을 허용하는 듯하다. 사랑의 범위가 다양하다는 전제하에 이 말은 여러 관계에서 적용되는 말이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관심, 타인의 고통에 관해 함부로 단정하지 말 것. 그건 우리가 이루는 가장 기본적 관계인 가족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게로 들어오는 시선. 나, 내 마음, 나를 이루는 것.

누군가를 얼마나, 잘 알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위험하다. 그 위험에 가장 크게 적용되는 건 나 자신이다. 남이 보는 나, 누군가가 말하는 나. 여러 말을 들을 수 있지만 정작 나에게서 듣고 싶은 나에 대한 말은 들을 수 없다. 내 뒷모습도 나는 볼 수 없다. 거울이 비추는 나도 온전한 내가 아니다. 단지 어느 순간, 가끔, 조금씩,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느낄 뿐이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실제와 반대지만 꽤 닮았다고 인정하는, 제대로 보고 싶으나 그럴 수 없음이 섭섭하다고 말하는 의미를 알 것도 같다.(거울 / 이상) 나를 들여다봐야 할 것은 나 자신인데,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아무런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고통스럽다. 내가 나를 안아주고 보살펴주고 싶은데 잘되지 않음을 느낄 때마다 답답하다. 거울로 마주한 모습이 그래도 나와 가장 닮은 모습일진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그 섭섭함은 더해지겠지. 누군가는 열등감으로 버티고 서 있는 힘을 가지는 듯하고(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누군가는 먼저 가진 웃음으로 눈물의 힘을 누르는 듯하다.(눈물 / 김현승) 무너지는 꿈으로 삶을 버티면서도, 아직 다하지 않은 꿈 때문에 오늘도 버티는 삶이 되어버리는 청춘(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을 떠올린다. 치열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건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온전히 봐야 하는 이유가 아직 내 것이 되지 못한 꿈을 꺼내야 하기 때문인지도... 신분증에 들어가지 못한 그 꿈이 때로는 삶 전부가 되기도 하며 나를 지탱해주기도 한다는 것. 오늘을 버티는 이유가 된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한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내게서 나가는 세상의 소리. 눈물, 다름, 표현의 용기.

어느 골목길의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내는 목소리는 아니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곧 그것들은 내 것이 된다. 내가 내는 고통의 소리이며, 내가 흘린 눈물이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의 소리인 것이다. 시인은 시로 그 소리를 낸다. 당연의 세계를 당연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아이러니를 꼬집고(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 / 김승희), 시선의 변화를 유도한다. 영화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자리에 앉는 것(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이 좌절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지적한다. 무고함을 알면서도 나서지 못하는 것, 차마 날아갈 수도 없는 존재가 자신임을 절망한다. 그저 주저앉는 것이 그때 할 수 있는 일 전부인 것처럼 여길 수밖에... 어쩌면 당연한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름을 시도하지 않았을 때 오는 고정관념이다. 세상 속에서 그 당연함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 당연함을 만든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일 테다. 그래서 그 당연함을 거부할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 거부의 목소리를 내야 할 때 필요한 건, 용기.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지는(폭포 / 김수영) 물줄기'는 삶을 조금씩 갉아먹는, 에스키모가 늑대를 잡으려 심어놓은 칼날과 같다는 사냥 방식. 자신이 맛보는 피가 자신의 것인 줄도 모르고 계속 핥아대는 순간을 맞닥뜨릴 거라는 경고 같은 거다. 시들이 우리에게 누군가의 울음소리, 누군가의 슬픔을 공유할 자세로 세상에 부대껴야 한다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하나 듣고 보면, 별 의미 없이 들릴 수도 있다. 그저 은유로 가득한 문장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시를 접하고 보니, 시인이 할 수 있는 말을 시로 전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의 감정을 적고, 세상에 소리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때로는 감정을 추스르는 역할을 시가 하고 있다. 궁핍한 삶을 얘기하고, 혼란한 세상을 한탄한다. 사랑과 이별을 다독이고, 추억을 꺼내 읊조린다. 눈물과 상처에 시가 온기를 불어넣고 있는 거였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가슴을 열어 보여 답답하고 힘든 속내를 풀어놓는 것처럼, 시가 말을 하고 있다. 저자는 그런 시 구절에 자신의 사유를 담았다. 시의 배경이 되는 시간에 했을 법한 고민을 들려주며 역사의 한 때를 설명한다. 그 시간에 그런 시를 읊고 있는 이의 고뇌를 공유한다. 상처와 아픔을 말하는 마음을 토닥거리며 위로를 건넨다. 그때 우리가, 처음 이 시들을 대하고 미처 다 알아채지 못했던 가슴의 울림을 위해서라도 꼭 한 번은 시와 재회해보라고 말한다. 혹시 또 모르지. 사라진 줄 알았던 추억이 떠오를지도, 급하기만 했던 마음이 속도를 조금 늦출지도, 참았던 눈물이 흘러버릴지도...

 

저자는, 시가 진실하고, 필요하며, 친절한 말이라고 했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시를 저자의 사유가 함께한 글이 담담하게 만나게 한다. 시의 재해석이 아니라, 시에 각자의 의미를 담으면 그만인 거다. 똑같은 시라도 들려오는 타이밍에 따라 나만의 감정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한 편의 시가 내 사랑을 기뻐해 주고, 이별을 위로해주며, 답답한 마음을 세상에 뿜어주고,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준다면,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상상에 빠지는 것처럼 시를 읽고 자유롭게 사고'하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가 우리에게 여유를 주었으면 좋겠다. 자유로운 사고로 정답 없는 삶의 문제들을 잘 건너갈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갑자기 찾아드는 외로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그리움, 삶의 고단함에 고개 숙일 때, 일상처럼 다가오는 슬픔에도 기죽지 않게 마음 온도를 높여주었으면 좋겠다.

 

 

병원 -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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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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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화장대 위에 신용카드와 200만 원 정도 나온 청구서를 놓고 나갔다고 했다. 어떤 말도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대학교 1학년 때였던가? 친구의 엄마가 다른 이와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자기 딸이 이렇게 해놓고 나갔는데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된다고, 딸의 이런 씀씀이도 물론 화가 난다고 했다. 자식이니까 더 큰 일 생길까 봐 그 돈을 다 갚아주고 났더니, 다음 날 딸이 집으로 들어왔다고. 그녀의 씀씀이를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넉넉한 형편에 ‘공부’만을 외치던 그녀의 엄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치장에 그런 배경이 있는 줄 몰랐고, 그게 한번이 아니라 몇 번 계속된 일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녀의 엄마 또한 답답한 마음을 지인에게 토로했는데 말하고 나니 내 얼굴에 침 뱉기라 그랬는지, 얼굴이 벌게져서 집으로 들어가는 걸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랬구나.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아이였는데도 마냥 편하게 다가갈 수 없었던 미적지근함의 기저에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사고를 갖지 못했는데 이해하고 싶었던, 하지만 그 거리가 상당했던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디자인의 카디건을 무슨 색을 골라야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다 갖고 싶어서 선택을 못하겠다며 두세 벌 구매해서 옷장에 걸어놓는 그녀를, 아마 계속 알고 지냈어도 나는 더 가깝게 다가가기 어려웠으리라.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 (297~298페이지)

 

무슨 근거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고객의 돈을 횡령하고 도주했다는 여자의 결말이 궁금하진 않았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결말이야 그녀가 붙잡히거나 영원히 잡히지 않은 채로 살아가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일 터이니 뻔하겠지만, 인간의 묘한 심리와 불안함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추측을 확인받고 싶었던 거다. 아주 오래전 고속도로 휴게소 편의점에서 처음 만났던 가쿠다 미쓰요의 작품을 떠올리면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그녀의 작품에 빠져들고 싶기도 했고. 이 소설이 한 페이지씩 넘어갈 때마다 뭔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밖에 흐를 수 없는 걸까 싶은 의문이 들면서도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 당황했다.

 

은행에서 고객 영업을 하는 우메자와 리카. 성실한 남편과 평범한 삶을 이어간다. 넉넉하진 않지만, 가끔 외식하고, 작은 행운에 기쁨이 이는 일상에 불만은 없다. 편안하다. 그러던 그녀에게 작은 틈이 생기고 뭔가 자꾸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정직원이 아니어도, 많은 월급이 아니어도 만족스러웠는데,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은 크기는 점점 커진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싫다. 변하고 싶다. 달라지고 싶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그래서 변하고자 한다. 비일상이 일상이 되는 삶으로 녹아든다. 그게 비록 고객의 돈, 범죄로 이루어진 돈일지라도.

 

돈이라는 게 어떻게 나에게 흘러오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모르지 않을 거다. 성장하면서 배워온 돈의 가치와 쓰임을 생각하게 되는 게 사람이고, 무엇이 범죄인지 당연히 알 거고, 그게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 역시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을 터이니.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야 마는, 그렇게 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던 인간의 심리를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게 했다. 한 번, 두 번, 범죄의 일상이 무감각해진다. 두려움에 떨면서 손을 대던 불안함이 점점 무뎌진다. 내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더 큰 갈망이니 일단 내 마음 먼저 채워놓고, 횡령한 돈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된다. 잊지 않기 위해 꼼꼼하게 다 적어놓았다. 리카는, 그 돈을 훔친 게 아니고 '빌린' 거다. 아주 잠깐.

 

이렇게만 보면, 리카가 정말 나쁜 사람 같지? (횡령은 범죄이니 리카가 잘못한 건 맞다) 하지만 처음 그녀가 고객의 돈을 조금씩 손댄 것부터 차근차근 보게 된다면, 그녀가 저지른 게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안쓰러워진다. 마음의 공간에 채워야 할 게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온기나 삶의 만족이 아니라 물질적인, 눈에 보이는 순간적인 것들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게 자꾸 눈에 보인다. 시쳇말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그녀와 한집에서 살 맞대고 사는 남편의 태도에 나는 절망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기본에 대해 생각하곤 했는데, 결코 동등하다고 여길 수 없는 말들에, 행복이 빠져버린 그녀의 결혼생활을 그려본다. 아, 사람의 마음이 하얗게 비워질 수 있는 건 순간적인 한 마디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모습을, 당당함을 잃어가는 그녀가 변하고 싶었던 이유가 정해진다.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해야 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하고 멋진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렇게 돈을 좇는다. 자기에게 채워져야 할 자신감을 위해서.

 

리카는 전철을 타고 문 옆에 서서 조금 전에 산 화장품을 떠올렸다. 침실 화장대에 그걸 늘어놓고 새로운 기초화장품을 바르는 상상을 한다. 기분이 밝아졌다. (130페이지)

 

리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교차로 들려주는 돈 때문에 흐트러지는 생활도 리카의 행동에 공감은 얹는다. 고교 동창 유코는 절약이 몸에 밴 억척 주부로 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땀을 흘리면서도 절약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찾아다닌다. 그게 옳다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남편과 딸은 그런 생활태도에 궁상의 눈빛을 보낸다. 한때 리카와 사귀었던 남자 가즈키는 아내의 우울증을 치료해줄 것은 사치스러운 쇼핑뿐이라는 것을 알고 고민한다. 부유하게 살았던 아내는 과거의 생활을 자꾸 떠올리며 현재와 비교한다. '그땐 그랬는데...' 하면서 과거 속에서만 산다. 그 시간을 동경하며 현실과의 괴리감만 키우는 아내를 계속 지켜봐야 하는 걸까. 리카가 요리학원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아키는 이혼했다. 가끔 만나는 딸에게 행복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치장을 한다. 엄마는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겉모습으로 말한다. 딸과의 관계가 더 좋아질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의 방향으로 변하는 딸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다. 가난한 학생으로 살아가지만 꿈이 있어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곤 했던 고타. 리카와의 시간이 고타를 꿈속에 살게 했지만, 깨어나면 사라질 꿈이었던 걸 알게 된다. 이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돈이다. 돈으로 웃고, 병이 낫고, 망가지고, 사랑이라 착각하고, 돈의 노예가 되면서도 결국은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고타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리카 역시 그 구렁텅이를 빠져나가고 싶어 했던 간절함으로 마지막 진심을 표현했으니까.

 

그것은, 꿈이었을까. 깨어나면 사라질 꿈. 현실을 벗어난 행동에 따라올 처벌, 허무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몸부림의 말로, 마음에 억지로 채워 넣으려 했던 불가능한 욕심을 부린 대가. 불만족스러운 삶이 불러온 결말은 끔찍했지만, 그런 결말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처음 리카가 고객의 돈을 착복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마음이 더 뇌리에 남는 소설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아닐까 생각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몸에 스며든다. 그게 비록 남의 돈을 훔치는 일일지라도, 가짜 행복의 시간일지라도. 사진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일본의 사진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놓고 그 아래서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종이달'은 거기에서 비롯된 말이란다. 가족이나 연인과 보낸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는데, 이 소설과 잘 어울린다. 자기의 불안을 가리기 위해 포장한 돈으로 무너질 시간, 진짜가 아닌 만들어놓은 달이 새겨진 사진, 가짜였지만 행복했던 한때를 그대로 그린 이야기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 게 우리 인생사겠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이성으로 취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각인시키는 소설이지만, 여전히 그런 선택이 나를 비켜갈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아서 씁쓸해지기도 한다.

 

엄마 화장대 위에 200만 원짜리 청구서를 놓고 나갔던 친구는 선을 보고 두 달 만에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혼했다.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남자의 배경을 보고 결혼했다는데, 몇 달 살아보니 그게 모두 거품이었다는 뒷얘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그 친구가 이혼한 이유가 그거 한 가지만은 아닐 수 있겠지만, 그녀를 아는 대부분 사람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그 이유를 기억에서 쉽게 지우진 못했다고 했다. 살면서 돈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겠고, 가끔은 돈을 좇아야 된다는 것도 알겠지만, 그게 인생의 1순위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배워가는 요즘이다. '가짜 행복'이라는 건 말 그대로, 가짜로 끝날 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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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 에세이, 10월에 읽어보고 싶은 도서를 골라본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이석원의 산문집이다.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당장에 펼쳐봐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미루다 10월에 읽고 싶은 책이 되어버렸다.

내가 느낀 이석원의 글은 살짝 시크한 느낌이었는데,

이번 도서는 어떨지 궁금하다.

가끔은 냉정해 보이는 말들이 좋은데,

이 책에서는 그런 느낌이 약했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읽고 싶은 글은, 조금은 약한 말들인데...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몇 번을 들었다가 놓은 책이 줌파 라히리다.

막상 들고서도 완독한 적이 없어서인지 이번 신간이 더 반갑다.

이번에는 정말 완독하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으니까.

 

<수거물 폐기물>

처음에 제목을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쓰레기 분리 수거 얘기인 줄 알았다.

막상 소개글을 봤을 때는 전혀 다른 분위기여서 좀 놀라기도 했고...

저자가 전하는 그림 에세이다.

이 책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감정의 소모에 대해 잠깐 생각했는데,

추스르고, 챙기고, 버려야 할 인간의 감정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기회가 될 듯하다.

 

<뭉클하면 안 되나요?>

아, 마스다 미리...

선뜻 내가 먼저 선택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한 페이지의 짧은 몇 문장 때문에 그녀의 글에 빠져들 때가 있다.

어쩌면 한 단어 때문인 경우도 있고...

제목에 뭉클해진다. 뭉클하면 안 되냐고요?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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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망머리앤 2015-10-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추천을 할까 말까 했던 책들이 여기 다 있네요~
이석원 작가의 책은 벌써 읽은 책이라... ^-^

10월은 어떤 책으로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게 될지 궁금하네요~^^
페이퍼 잘 보고 갑니닷!

구단씨 2015-10-06 10:20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
이석원의 글은 관심 있었는데, 게으름 피우다 읽을 시기를 놓쳐서 여기에 넣어봤어요.

아침 저녁 제법 서늘한데, 에세이 읽기에 좋은 게절이네요.
저도 어떤 책이 선정될지 궁금합니다. ^^

일교차 심해요. 감기 조심하세요~
 

 

울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그런 경우 자주 당황한다. 위로가 서툰 내가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어느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울지 말라고,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이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다는 독자(관객)들에게, 그 순간 꼭 손발이 오그라들지만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손발이 아니라 심장이 오그라들 수도 있다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한 그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의 애매함 같은 게 있다. 어설픈 위로는 아무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다 안다고 ‘척’하기에는 거짓말이니까 싫고, 부정적인 답이 나왔는데 무한긍정으로 잘 될 거라고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사람인지라, 그 마음이 어느 하나로 정확하게 꽂히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어려운 거다. 어깨를 다독이며 뭔가 기운을 실어주고 싶은데 너무 막연해서 할 말이 없고, 어느 순간부터 말을 아끼고 닫아버리는 습관이 쓸데없는 토닥임마저 멈추게 하는 순간들...

 

‘그렇더라.’는 한 마디에 기어코 눈물을 흘리는 사람 앞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눈물이 나고야 말았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괜한 말을 꺼내서 미안해지려고 한다고, 눈물도 아까우니 울지 말라고 말하면서, 지금 너에게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고 있는 나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괜찮다고, 지금은 그게 어울린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나를 다독이는 너에게, 그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머릿속 말들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메일 주소록을 뒤졌다. 남아 있다. 아직. 몇 년 전에 저장해둔, 그 짧은 주소 하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힘든데, 힘들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면서 표정으로 많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말보다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그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아서. 그 밝음에 항상 내가 웃곤 했는데, 아닐 것 같은 사람이 어느 순간 전해져온 쓸쓸함이 몇 배로 몸을 불리고 있다. 왜 이런 것은 쓸데없이, 쉽게도 덩치를 부풀리는지 모르겠다. 허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아무리 바빠도 허무해지고 멍 때리는 시간은 생기더라는 내 말에 피식 웃더니 울음을 멈춘다. 그러게 말이야. 그러더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이런 순간이 참 잘도 찾아오더라고, 라면서...

 

복잡한 일이 좀 정리되면 만나러 갈 테니, 맛있는 걸 사달라고 했다. 내가 뭔가를 사달라고 하는 말, 특히 그게 음식이라면 더더욱 어렵게 꺼낸 말이라는 것을 아는 이에게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상대는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안다. 겨우, 뭔가를 같이 먹자는 말 한 마디에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는 게 우습지만, 그런 사람인 걸 어쩌나. 정말로 찾아가 맛있는 것을 같이 먹자고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귀찮아서, 게을러서, 마음이 어지러워서 주저하던 발걸음을 기어코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해본다. 가야지. 가서 얼굴 보고. 몸에 해롭지만 혀끝에서 행복을 주는 맛이더라도. 나잇살까지 보태진다며 겁내하던 것들을. 위장 속에 잔뜩 집어넣어봐야지. 그게 이 순간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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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두번째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제목,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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