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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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화장대 위에 신용카드와 200만 원 정도 나온 청구서를 놓고 나갔다고 했다. 어떤 말도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대학교 1학년 때였던가? 친구의 엄마가 다른 이와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자기 딸이 이렇게 해놓고 나갔는데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된다고, 딸의 이런 씀씀이도 물론 화가 난다고 했다. 자식이니까 더 큰 일 생길까 봐 그 돈을 다 갚아주고 났더니, 다음 날 딸이 집으로 들어왔다고. 그녀의 씀씀이를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넉넉한 형편에 ‘공부’만을 외치던 그녀의 엄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치장에 그런 배경이 있는 줄 몰랐고, 그게 한번이 아니라 몇 번 계속된 일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녀의 엄마 또한 답답한 마음을 지인에게 토로했는데 말하고 나니 내 얼굴에 침 뱉기라 그랬는지, 얼굴이 벌게져서 집으로 들어가는 걸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랬구나.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아이였는데도 마냥 편하게 다가갈 수 없었던 미적지근함의 기저에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사고를 갖지 못했는데 이해하고 싶었던, 하지만 그 거리가 상당했던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디자인의 카디건을 무슨 색을 골라야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다 갖고 싶어서 선택을 못하겠다며 두세 벌 구매해서 옷장에 걸어놓는 그녀를, 아마 계속 알고 지냈어도 나는 더 가깝게 다가가기 어려웠으리라.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 (297~298페이지)

 

무슨 근거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고객의 돈을 횡령하고 도주했다는 여자의 결말이 궁금하진 않았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결말이야 그녀가 붙잡히거나 영원히 잡히지 않은 채로 살아가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일 터이니 뻔하겠지만, 인간의 묘한 심리와 불안함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추측을 확인받고 싶었던 거다. 아주 오래전 고속도로 휴게소 편의점에서 처음 만났던 가쿠다 미쓰요의 작품을 떠올리면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그녀의 작품에 빠져들고 싶기도 했고. 이 소설이 한 페이지씩 넘어갈 때마다 뭔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밖에 흐를 수 없는 걸까 싶은 의문이 들면서도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 당황했다.

 

은행에서 고객 영업을 하는 우메자와 리카. 성실한 남편과 평범한 삶을 이어간다. 넉넉하진 않지만, 가끔 외식하고, 작은 행운에 기쁨이 이는 일상에 불만은 없다. 편안하다. 그러던 그녀에게 작은 틈이 생기고 뭔가 자꾸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정직원이 아니어도, 많은 월급이 아니어도 만족스러웠는데,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은 크기는 점점 커진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싫다. 변하고 싶다. 달라지고 싶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그래서 변하고자 한다. 비일상이 일상이 되는 삶으로 녹아든다. 그게 비록 고객의 돈, 범죄로 이루어진 돈일지라도.

 

돈이라는 게 어떻게 나에게 흘러오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모르지 않을 거다. 성장하면서 배워온 돈의 가치와 쓰임을 생각하게 되는 게 사람이고, 무엇이 범죄인지 당연히 알 거고, 그게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 역시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을 터이니.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야 마는, 그렇게 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던 인간의 심리를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게 했다. 한 번, 두 번, 범죄의 일상이 무감각해진다. 두려움에 떨면서 손을 대던 불안함이 점점 무뎌진다. 내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더 큰 갈망이니 일단 내 마음 먼저 채워놓고, 횡령한 돈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된다. 잊지 않기 위해 꼼꼼하게 다 적어놓았다. 리카는, 그 돈을 훔친 게 아니고 '빌린' 거다. 아주 잠깐.

 

이렇게만 보면, 리카가 정말 나쁜 사람 같지? (횡령은 범죄이니 리카가 잘못한 건 맞다) 하지만 처음 그녀가 고객의 돈을 조금씩 손댄 것부터 차근차근 보게 된다면, 그녀가 저지른 게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안쓰러워진다. 마음의 공간에 채워야 할 게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온기나 삶의 만족이 아니라 물질적인, 눈에 보이는 순간적인 것들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게 자꾸 눈에 보인다. 시쳇말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그녀와 한집에서 살 맞대고 사는 남편의 태도에 나는 절망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기본에 대해 생각하곤 했는데, 결코 동등하다고 여길 수 없는 말들에, 행복이 빠져버린 그녀의 결혼생활을 그려본다. 아, 사람의 마음이 하얗게 비워질 수 있는 건 순간적인 한 마디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모습을, 당당함을 잃어가는 그녀가 변하고 싶었던 이유가 정해진다.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해야 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하고 멋진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렇게 돈을 좇는다. 자기에게 채워져야 할 자신감을 위해서.

 

리카는 전철을 타고 문 옆에 서서 조금 전에 산 화장품을 떠올렸다. 침실 화장대에 그걸 늘어놓고 새로운 기초화장품을 바르는 상상을 한다. 기분이 밝아졌다. (130페이지)

 

리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교차로 들려주는 돈 때문에 흐트러지는 생활도 리카의 행동에 공감은 얹는다. 고교 동창 유코는 절약이 몸에 밴 억척 주부로 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땀을 흘리면서도 절약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찾아다닌다. 그게 옳다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남편과 딸은 그런 생활태도에 궁상의 눈빛을 보낸다. 한때 리카와 사귀었던 남자 가즈키는 아내의 우울증을 치료해줄 것은 사치스러운 쇼핑뿐이라는 것을 알고 고민한다. 부유하게 살았던 아내는 과거의 생활을 자꾸 떠올리며 현재와 비교한다. '그땐 그랬는데...' 하면서 과거 속에서만 산다. 그 시간을 동경하며 현실과의 괴리감만 키우는 아내를 계속 지켜봐야 하는 걸까. 리카가 요리학원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아키는 이혼했다. 가끔 만나는 딸에게 행복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치장을 한다. 엄마는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겉모습으로 말한다. 딸과의 관계가 더 좋아질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의 방향으로 변하는 딸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다. 가난한 학생으로 살아가지만 꿈이 있어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곤 했던 고타. 리카와의 시간이 고타를 꿈속에 살게 했지만, 깨어나면 사라질 꿈이었던 걸 알게 된다. 이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돈이다. 돈으로 웃고, 병이 낫고, 망가지고, 사랑이라 착각하고, 돈의 노예가 되면서도 결국은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고타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리카 역시 그 구렁텅이를 빠져나가고 싶어 했던 간절함으로 마지막 진심을 표현했으니까.

 

그것은, 꿈이었을까. 깨어나면 사라질 꿈. 현실을 벗어난 행동에 따라올 처벌, 허무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몸부림의 말로, 마음에 억지로 채워 넣으려 했던 불가능한 욕심을 부린 대가. 불만족스러운 삶이 불러온 결말은 끔찍했지만, 그런 결말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처음 리카가 고객의 돈을 착복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마음이 더 뇌리에 남는 소설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아닐까 생각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몸에 스며든다. 그게 비록 남의 돈을 훔치는 일일지라도, 가짜 행복의 시간일지라도. 사진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일본의 사진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놓고 그 아래서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종이달'은 거기에서 비롯된 말이란다. 가족이나 연인과 보낸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는데, 이 소설과 잘 어울린다. 자기의 불안을 가리기 위해 포장한 돈으로 무너질 시간, 진짜가 아닌 만들어놓은 달이 새겨진 사진, 가짜였지만 행복했던 한때를 그대로 그린 이야기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 게 우리 인생사겠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이성으로 취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각인시키는 소설이지만, 여전히 그런 선택이 나를 비켜갈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아서 씁쓸해지기도 한다.

 

엄마 화장대 위에 200만 원짜리 청구서를 놓고 나갔던 친구는 선을 보고 두 달 만에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혼했다.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남자의 배경을 보고 결혼했다는데, 몇 달 살아보니 그게 모두 거품이었다는 뒷얘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그 친구가 이혼한 이유가 그거 한 가지만은 아닐 수 있겠지만, 그녀를 아는 대부분 사람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그 이유를 기억에서 쉽게 지우진 못했다고 했다. 살면서 돈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겠고, 가끔은 돈을 좇아야 된다는 것도 알겠지만, 그게 인생의 1순위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배워가는 요즘이다. '가짜 행복'이라는 건 말 그대로, 가짜로 끝날 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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