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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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0.단 하나의 문장-구병모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날카로운 면도날들을 저마다 혀 밑에 숨기거나 손끝에 꽂고 있어서(36)

펜 끝에서 한번 번져 나가기 시작한 말들이 그리는 궤적을 바라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흘러가는 말들을 포착하여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물방울의 표면에 새겨나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은 원래의 가장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기에, 그리고 말의 죽음을 맞이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일 뿐이다.(39)

서영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원래의 속도와 부피를 잃은 채 잼과 같은 감촉으로 자신의 피부를 훑고 슬로모션으로 지나가면서 자신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로 느껴졌다. 부패한 암죽처럼 흘러내리는 현실, 흩어진 윤곽, 한낮의 악몽.(119)

무조건적 애도를 받아 마땅한 위치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 클릭 한번을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미디어의 본분. 분명 사실도 있고 진실도 잇는데 그중 쓸 만한 화소의 조합으로 인해 원래의 발화와 뉘앙스와는 사뭇 다르게 번역되는 진술들. 한때 내가 했던, 지금도 남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다듬을 때 종종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인데 이때 숭배할 만한 대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서사적 전략이며,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미모가 뛰어날수록 그 대상으로 등극할 가능성은 무한등비수열로 높아진다.(208)

전복된 말에서는 비밀스러운 힘이 빠져나가고 말이 구현하던 세계는 실재의 선로에서 이탈한다. 모든 말에는 그것과 본질적으로 무관한 사물 및 사태가, 대체로 과잉과 혼동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담보로 부여되므로, 말이 지닌 힘과 더불어 기왕에 펼쳐진 현실을 축소하고 접어 가두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압축과 생략 그리고 전복이다.(219)

서평을 줄이고 줄여서 한 문장으로 쓴다면 어떤 문장을 쓸 수 있을까요? 서평에 쓰여진 언어를 다 제거하고 오직 하나의 문장으로만 나타내야 한다면 어떤 말을 해야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서평을 줄여서 한 문장으로 쓴다면 딱 두 가지 가능성의 한 문장만 남습니다.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 저는 여기서 모든 서평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에 다른 것들을 덧붙이면서 서평이 태어나는 것이죠.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서의 하나의 문장이 존재하고 거기에 다른 것들을 덧붙이면서 서평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이건 서평뿐만 아니라 영화평,드라마평,예능프로그램평에 다 적용되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서평이 이 하나의 문장에만 머문다면, 아무리 많은 말과 문장이 있어도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라는 말에만 머문다면 그게 좋은 것일까요? 처음에 쓴 서평이 아니라, 이후에 쓴 수십 개, 수백 개의 서평이 오직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라는 영역에만 머문다면 그건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요? 그 글이 글을 쓴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글을 지속적으로 쓰면서 처음 시작했던 영역에 머문다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이건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도 처음 서평을 썼을 때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에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서평을 쓰면서 변화의 욕망을 느꼈습니다.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그 이후의 제 서평들은 저 몸부림의 흔적입니다. 어떻게든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몸부림으로서 글을 쓰면서 저는 차자 글에서 재미의 중요성을 약화시켜 갔습니다. 물론 필요하면 재미에 관련된 것들을 글로 썼죠. 이 말은 재미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 재미는 중요합니다. 재미가 없다면 왜 책을 읽겠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읽고 나서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그 무엇을 '서평'이라는 형식의 글로 쓰고자 한다면, 오직 '재미'에만 머무는 것이 너무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서평을 계속해서 쓴다는 건, 어떤 변화와 발전의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말과 다름없는데, 그 변화와 발전의 방향성이 처음 글을 쓴 것과 똑같다면 그게 무슨 변화와 발전입니까? 아니, 그건 과거의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행동에 불과할테죠. 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면 처음의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고, 저는 거기에 맞춰서 글을 써나갔습니다. 그게 잘됐는지 안됐는지와는 별도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저같은 아마추어도 저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소설가들은 어떨까요? 그들도 그들 나름의 변화를 위한 욕망을 가지고 글을 써나가지 않을까요? 구병모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을 읽으며 저는 구병모 작가의 변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제가 읽은 구병모 작가의 소설들에서 구병모 작가는 '이야기 제작자'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 구병모 작가는 이전까지와지는 달리 '이야기 제작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치며, 그 몸부림의 흔적으로서 책 속의 소설들을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책 뒤에 나오는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는 이 욕망을 작가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이야기 제약자가 되고 싶다는 말로 표현하고, '작가의 말'에서는 '이야기의 너머에 또는 기저에 닿고 싶어진 것이다'라는 말로 나타냅니다. 표현이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작가가 변화하고 싶어한다는 것이고 그 변화의 욕망을 소설 속에 녹여냈다는 거죠. 제가 가장 변화를 크게 느낀 건, 책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제게 찾아오는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제가 읽은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이 무조건 술술 잘 읽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이 책처럼 저에게 지속적인 불편함을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친절하지 않은 서술의 형식도 그렇고, 군데군데 내비치는 쉽지 않는 표현도 그렇고, 어딘가 이 사회의 폐부를 꿰뚫고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내용도 그렇고. 특히 제가 가장 불편했던 건, 저라는 인간이 가진 어떤 어떤 면모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에서는 한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익명의 군중들의 쉽게 내지르는 말의 흐름 속에서, <지속되는 호의>에서는 거리를 두고 사람을 대하면서도 정작 사람의 관심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무기력해지는 도시인의 모습 속에서,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서는 농촌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지나치게 예민한 한 여인의 모습 속에서, <미러리즘>에서 한 남성이 약물 테러를 당해 여성으로 변화하면서 여성의 삶을 체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현실 속에서, <웨이큰>에서는 한국에 사는 한 필리핀 주부의 입을 통해 사이버 테러를 막으러 나섰다 의식을 잃게 된 한 남자가 일깨워주는 이 세상의 진실 속에서, 저는 저 자신의 모순적이고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둔감했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봤기에 저는 불편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봤던 저의 모습은 이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바꾸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나이면서 나와 다른 또다른 '나'가 되도 상관없는. 작가는 불편한 이야기들을 써내면서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써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소설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변화의 욕망을 공공연하게 작품을 통해 드러냅니다. <사연 없는 사람>에서는 나의 욕망이 다른 이를 위한 욕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에서는 언어가 사라지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 <오토포이에시스>에서는 이야기가 아닌 단 하나의 문장을 좇는 한 인공지능의 모습을 통해서.

어쩌면 구병모 작가가 좇는 목표는 불가능할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너머 또는 기저에 닿고 싶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을 향한 도전을 통해 자기 자신이 변화하고, 자신의 작품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목표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변화 자체에는 성공한 것이 됩니다.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 자신의 삶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목표에는 도달 못하더라도 그 과정이 변화를 이끌어냈기 때문이죠. 그걸 저 자신에 적용해봐도 비슷합니다. 재미의 영역을 벗어나는 서평을 쓰고 싶다는 제 욕망이 쉽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저와 제가 쓰는 서평이 변화했다면 저는 이미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제가 했던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의 방향을 내다볼 수 있다면 저는 묵묵히 제길을 가면 됩니다. 구병모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 없이 한발한발 내딛으면 변화는 한 개인을 스쳐 지나며 삶과 세계관 전체를 변화시킬 것이고, 어느 순간 변화한 모습으로 살아나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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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드림
조지 R. R. 마틴 지음, 이수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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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9.피버드림-조지 R. R. 마틴

그러나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대부분 힘, 무시무시한 힘, 마쉬의 꿈을 박살 낸 얼음만큼이나 불안하고 무자비한 힘이었다. 마쉬는 그 안개 속 어딘가에서 천천히, 몹시도 천천히 움직이는 얼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의 배들과 의 모든 희망이 쪼개지는 끔찍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10~11)

밤과 안개 속에서, 작고 평범한 배들 사이에서 그녀는 환영 같았고, 어느 강 사람의 꿈에서 튀어나온 하얀 유령 같았다. 그곳에 서서, 마쉬는 숨이 멈출 만한 배라고 생각했다.(40)

나는 쾌락이다, 빌리. 나는 힘이다. 그리고 나의 정수는, 쾌락과 힘의 정수는 가능성에 있다. 나 자신의 가능성은 광대하고 한계가 없지. 우리의 세월에 한계가 없기에. 하나 이들 가축들에게는 내가 한계요, 이들의 모든 희망과 모든 가능성의 종말이야. 이제 이해가 좀 가는가? 붉은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을 자리에 누운 흑인으로도 갈증은 채워지지. 하나 젊은이, 부유한 이, 아름다운 이, 앞에 삶이 펼쳐져 있고 밤낮이 약속으로 반짝이는 이를 마시기란 얼마나 좋은가! 피는 피, 어떤 짐승이라도, 저들 중에 누구라도 마실 수 있지.(141)

친애하는 조슈아, 그대는 선이나 악 같은 것도 없고, 오직 강함과 약함, 주인과 노예만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해. 그대는 저들의 도덕,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들떴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런 것은 저돌의 용어지, 우리의 말이 아니라네. 그대는 새로운 시작을 설파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시작하지? 가축들처럼 되나? 저들의 태양 아래 불타고, 그냥 빼앗을 수 있을 때 일을 하고, 가축들의 신에게 고개를 숙이나? 아니자. 저들은 짐승이요, 우리의 자연적인 열등 종족이며, 우리의 크고 아름다운 먹잇감이지. 그게 세상의 방식이야."

..

아, 가엾은 조슈아. ..."창조는 가축들이 하라고 해. 생명이든, 아름다움이든, 무엇이든, 그리고 우리는 그 창조물을 취하고, 이용하고, 내키면 파괴하기도 하지. 그게 자연스러운 방식이야. 우린 주인이야. 주인은 노동을 하지 않아. 그들이 옷을 만들고, 우리는 입기만 하면 돼. 그들이 증기선을 짓고, 우리는 그 배를 타지. 영원한 삶을 꿈꾸라고 해.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고, 그들의 생명을 마시고, 그 피를 음미하지. 우리는 이 지상의 지배자고, 그것이 우리의 유산이야. 말하자면, 우리의 운명이지.(275~276)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갑자기 <뱀파이어와이 인터뷰>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저는 어린 시절에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봐서 그런지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뱀파이어로 분장한 브래드 피트와 톰 크루즈의 압도적인 비주얼만 떠오르네요. 그전까지는 뱀파이어라고 하면 무섭고 흉악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영화를 보고 '뱀파이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를 통해 아름답고 매혹적인 존재로서의 뱀파이어상을 생애 처음으로 마주했다고 해야할까요? 그 이후로 제가 그때 마주친 뱀파이어에 대한 이미지는 <트와일라잇> 시리즈까지 쭉 이어지더군요.

뱀파이어 소설로서 <피버드림>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신비한 뱀파이어 이미지와는 거리를 둡니다. 대신에 이 소설에는 지적으로 사고하며 이상을 꿈꾸는 뱀파이어가 등장합니다. 1850년이라는 미국 증기선 시대의 전성기에 미시시피강에서 제일 빠른 배를 만들어서 몰고 싶어하는 뿌리까지 뱃사람인 애브너 마쉬 앞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인물 조슈아 요크가 그 주인공입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아버지를 잃고 사람들 사이에서 처절하게 살아온 그는 인간들의 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망을 싫어해서 처절한 노력 끝에 인간의 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게 된 뱀파이어입니다. 그는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고, 인간의 문화를 즐기고, 인간들과 뱀파이어가 공존하는 이상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또 그는 자신의 힘으로 다른 뱀파이어들도 자신처럼 만드는 고귀한 뱀파이어죠. 그래서 조슈아 요크는 이상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자 몽상가인 뱀파이어입니다. 저는 이런 뱀파이어를 처음 봤습니다. 처음 본 만큼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 사는 뱀파이어들에게 한 줄기 빛이 있다면 조슈아 요크가 아닐까요? 미녀 뱀파이어인 발레리가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조슈아 요크를 사랑하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가지지 못한 어둠을 밝힐 빛의 속성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죠.

빛이 있는 만큼 어둠도 있겠죠. 맞습니다. 이 작품에는 조슈아 요크와 대척점에 있는 어둠의 뱀파이어가 등장합니다.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길고 긴 시간을 살아온 뱀파이어, 너무 긴 시간을 살아왔기에 인간의 피를 갈망하는 욕망을 넘어섰지만 인간을 죽이고 피를 마시는 행위를 즐기기 때문에 살육을 일삼고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 줄리언. 두 뱀파이어의 대립을 바라보면서 저는 그 둘의 대화를 토대로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둘의 말에 따르면 둘의 차이는 명확했습니다. 둘은 차별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조슈아 요크는 인간과 뱀파이어가 다르긴 하지만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간을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같이 살아가는 존재로 여깁니다. 반대로 줄리언은 인간들을 자신들의 먹이감이자 자신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주인과 노예의 논리로 이 세상을 재단하는 그는, 뱀파이어가 인간보다 우월하며, 열등한 인간들은 노예로서 복종해야 하며, 인간을 존중할 필요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를 인간차별주의자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가 문제인건, 그에게 가득한 공허입니다. 너무나 오랜 기간 살아온 그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자신의 삶을 바꿀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바꿀 의도가 전혀 없는 만큼, 그에게 삶은 과거의 관성 그 자체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욕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에게 가득한 건 권태와 공허, 허무,야성의 폭력입니다. 어쩌면 그 모든 걸 통틀어 '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줄리언은 요슈아의 반대편에서 어둠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어둠의 끝에 위치한 '악'의 모습처럼 보여집니다.

뱀파이어만이 구분되는 건 아닙니다. 둘의 곁에 위치한 인간들조차 차이가 납니다. 줄리언의 곁에서 줄리언을 돕는 인간 빌리는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줄리언과 비슷한 차별주의자입니다. 흑인을 인간 이하로 보는 차별주의자.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 영생을 누리고 줄리언처럼 살육과 폭력을 행사하고 피를 마시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이 소설에서는 뱀파이어에게 물린다고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에 인간과 뱀파이어는 다른 종입니다.) 어쩌면 빌리는 불가능하기에 자신의 욕망에 더 집착하고 줄리언을 따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조슈아 요크의 친구로서 조슈아와 같이 줄리언에게 저항하는 애브너 마쉬는 빌리와 반대편의 인물입니다. 뼛속까지 뱃사람인 그는 인종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사람을 구분합니다. 피부가 검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는 건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뱀파이어와 친구가 될 정도로 품이 넓은 그가 살육을 일삼는 줄리언 같은 인물을 용서할리 없죠. 그래서 둘은 마지막까지 철천지원수로 남죠. 어떻게든 줄리언을 포섭하려는 조슈아와 달리. 저는 이 소설의 결말이 빌리와 마쉬의 차이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인간을 도구로 보는 줄리언이 빌리를 마지막까지 도구로 본 반면에, 인간을 존중하는 조슈아가 마쉬를 친구로서 마지막까지 존중했기 때문에 이 소설의 결말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죠. 만약에 줄리언이 빌리를 존중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악의 모습을 간직한 줄리언의 삶에 변화는 불가능했기에 앞의 '만약에'는 불가능한 말일 겁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인종차별을 둘러싼 정치적 해석이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아가고 싶지는 않네요.^^;;

<피버드림>을 제 나름의 해석의 그물망을 통해서 한번 말해봤습니다. 사실 해석이란 게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외에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선과 악을 통한 해석, 줄리언을 유럽이라는 구대륙의 문화로 보고 마쉬와 요크를 신대륙의 문화로 보는 해석 등등. 그 해석들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겠죠. 해석은 각자의 해석이 저마다 정답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해석의 그물망이 아닐 겁니다. 해석보다 더 중요한 이 책을 통해서 느끼는 '재미'일 겁니다. 장르문학을 읽고 재미를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저의 <피버드림> 독서는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성공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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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된 사실
이산화 지음 / 아작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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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8.증명된 사실-이산화

3년 동안의 학교 생활을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우기는 했으니까. 바로 세상의 법칙이란 바뀌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F는 ma와 화학반응 전후의 질량은 보존되며, 무슨 사립학교 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교장이 대놓고 "고등학교는 애들 대학 잘 보내려고 있는 겁니다" 같은 소리를 해도 여전히 교장이고(27)

가만히 다가가서 어깨를 맞대고 선 나의 눈에도 같은 광경이 비쳤다. 노을빛을 받아 지옥처럼 붉게 타오르는 불빛, 자습실, 교실, 운동장, 지긋지긋한 이 작은 세상.(38)

3년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의 공식적인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관계란 수능과 같아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든지 심판의 날에 친구인 사람이 진짜 친구인 법이었다.(39)

"나는 이제 온 세상을 파괴하는 자, 죽음 그 자체가 되었노라."(40)

증명된 사실과 싸우는 일은 무의미했다. 반증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70)

천문학의 역사란 곧 주제 파악의 역사니까.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류의 위치를 가늠하는 동안 우리는 매번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직면해야만 했으니까.(130)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든 팔을 뻗어 멀어져가는 네 손을 붙들려 해. 언젠가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듯이. 이해하고,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려 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어. 한순간 손가락 끝이 스치는 것 같다가도, 그 찰나의 두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는 벌써 먼지구름 속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아. 다만 그 벨소리만이, 최후의 날 시계의 불길한 초침 소리처럼, 육교 저편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어.(157)

화석의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아니, 답은 오래전에 땅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고생물학자는 답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174)

<조커>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는 유투브 영상을 보면서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조커가 '예의 없는'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조커는 예의 없는 세상에서 예의 없는 자들에게 당해 미쳐버리고 예의 없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게 되죠. 예의 있는 사람은 살려주고요. 뜬금없이 서평을 쓰면서 영화 <조커>와 '예의' 이야기를 왜 하냐고 하실 수 있는데요(^^;;) 그건 <증명된 사실>이 굉장히 '예의 바른' 책이라서 일 겁니다. 첫 소설집을 내는 소설가 답게 저자는 이 책에 대한 애정, 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뽑내며, 각각의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후기 같은 글을 작품들 뒤에 덧붙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각각의 작품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됐는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소설 뒷부분에 붙일 수 있는 작은 이야기들도 써내며 독자들에게 굉장히 친절하고 예의바른 모습의 책을 완성합니다. 작가 스스로가 예의 바르니, 저도 이 글에서 '예의 있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음... 잘 모르겠네요.(^^;;) 그냥 지금까지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최대한 예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예의 있는' 말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우선 '이야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야기'에 관련된 이야기? 뭔가 동어반복같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이야기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이야기'라는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창작 양식이 시대를 거쳐 근대 문학이라는 영역에 들어와서 '소설화'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이 '이야기 파괴자'를 자처하는 소설가들은 제 말에 경기를 일으키겠지만(ㅋㅋㅋ), 저는 그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소설은 이야기를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저는 소설에서 이야기를 파괴하려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소설가도 '이야기 없는 이야기' 혹은 '이야기가 사라진 이야기'를 쓰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게도 저에게 SF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이라는 외관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이야기. 과학이라는 외관으로 자신을 포장했기 때문에, SF는 과학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SF는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과학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가상과 비현실의 면모도 보여줍니다. 과학적이면서 비과학적이고, 비과학적이면서 과학적인 이야기. 제게 SF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증명된 사실>도 제가 생각하는 SF에 속하는 책이었습니다. 과학의 외피를 둘러쓴 과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들로. 물리학자가 귀신 보는 여인의 도움을 받아 사후 세계의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를, 고생물학자가 한 성당 신부의 부탁으로 공룡의 후예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모험담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곤충학자가 지옥의 생물일지도 모를 벌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리가 불편한 한 여인이 할아버지가 남긴 유물을 조사하여 자신의 추리력으로 중국 명나라 때의 자기 조상들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를, 살아남은 공룡 인간들이 인간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수수께끼의 대기권 생물이 자신의 윤리성을 지키기 위해 사로잡힌 인간을 돕기 위해 나서는 이야기를, SF가 아니면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그 이야기들은 충분히 SF적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이야기들은 작가 이름을 따서 '이산화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이산화적'이라는 말은 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말은 점점 어떤 형태로서 나타낼 겁니다. 그날까지 저도 SF 독자로서 꾸준히 SF를 읽을 것을 다짐해봅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저는 과학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인 SF의 주술에 홀린 독자이니까요. 여기까지 쓰고보니 확실해집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제가 왜 SF를 계속 읽는지를 증명하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증명까지 하고 나니 다시 읽을 SF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술에 걸린 독자에게 휴식은 없는 법이니까요. 영원히 충족할 수 없는 갈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저는 다음번 SF를 향해 내달려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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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연대기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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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7.돌의 연대기-이스마일 카다레

그 사지와 돌 갑옷 속에 사람의 생명을 간신히 품고 있었지만 그 생명을 찢고 할퀴며 온갖 고통으로 짓누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돌로 이루어진 도시여서 당연히 그 촉감은 거칠고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도시에서 어린아이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8)

여기저기서 글자들이 아찔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린다. 자음도 달리고 모음도 달린다 그것들이 모여 말이 되거나 우박이 된다. 글자들이 다시 달린다. 단검이 만들어지고 밤이 닥치고 살인이 저질러진다. 연이어 도로가 나타나고 문들이 덜컹대고 정적이 찾아든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끝도 없이.(91)

어쩌면 그게 살육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국가를 도살장으로 데려갈지, 그들의 울음소리가 어떨지는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투박한 검정 모직 옷차림의 시골 사람들. 흰옷을 입은 도살자들. 염소, 양, 새끼양 들. 그 광경을 보러 온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다 마침내 올것이 오고야 만다. 프랑스. 노르웨이. 땅이 피로 물든다. 네덜란드가 매애매애 울어댄다. 새끼양의 모습을 한 룩셈부르크. 목에 큼직한 방울을 단 러시아. 염소의 형상인 이탈리아(125)

이 오래된 도시는 공습을 받았다. 유구한 세월 동안 노포나 대포알, 파성추의 공격을 무수히 받아온 도시. 이제 그 기반이 산산조각나 장님처럼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겁에 질린 수많은 유리창들이 파편이 굉음을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131)

세상이 피를 갈아치우는 게지. .. 사람은 사오 년에 한 번씩 피를 갈아치우지. 세상은 사오백 년마다 그렇고. 우리가 사는 시대는 피의 겨울이야.(319)

세상이 문학을 파괴하려 할지라도, 문학은 세상을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394)

어른과 아이는 다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어른과 아이가 다른 이유는 삶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아이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았고, 살아온 시간만큼 형성된 굳어진 '삶의 틀'이 있고 그에 따라 '어떤 전형성'을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아이는 어른보다 살아온 삶의 시간이 짧고, 짧은만큼 굳어진 '삶의 틀'이 없습니다. 굳어진 '삶의 틀'이 없는만큼 아이들은 저마다의 짧은 삶을 기반으로, 어른과는 다른 '삶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풍부한 상상력을 토대로 굳어진 삶의 틀이 없어 전형성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인식은, 독창적이고 색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소설가들은 아이들의 시선을 이용하여 전형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색다른 시각을 가진 소설을 써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바니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이스마엘 카다레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돌의 연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나'라는 아이의 시선으로,아이가 살아가는 '돌의 도시'를 휩싼 전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형적일 수 밖에 없는 전쟁의 모습은, 아이의 시선으로 새롭게 펼쳐집니다. 아이는, 도살장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들간의 전쟁을, 양의 모습을 한 각 국가들이 도살장에 모여서 죽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 아이는 국가들간의 전쟁을, 우편 수집의 양상으로 그려냅니다.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아이가 도시와 도시의 사물을 그려내는 방식도 어른과는 다릅니다. 집의 수조와 대화하는 아이는, 도시와 집과 각각의 사물들과 자연들이 살아있다고 여기며, 도시와 도시의 사물들과 도시를 둘러싼 자연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며 서로 경쟁하고 교류하는 존재로 그려냅니다. 어른들을 보는 시각도 아이는 다릅니다. 아이는 어른들을 강하며 어딘가 신비에 싸인 존재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생생한 치부를 가혹할정도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영향도 강하게 받습니다. 도시를 지배하는 미신과 풍습과 관습에 현혹되어 주술을 피하고자 온갖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어른들이 가진 강력한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어른들을 벗어나는 몸부림도 보여줍니다. 외가 가족들이 싫어하는 외가에 하숙하는 여인을 남몰래 연모하고, 어른들이 싫어하는 비행장의 비행기를 너무도 좋아해서 온갖 망상에 빠져 지내는 모습으로.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내부인이면서 동시에 외부인의 모습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모순적인 모습이 빚어내는 간극의 힘이 <돌의 연대기>라는 소설의 색다름과 독특함을 형성하고, 책을 읽는 독자는 거기에 빠져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이의 시선이 소설을 색다르고 독특하게 만드는 것에만 기여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시선은 비단 색다름과 독특함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시선은 전쟁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아이의 눈'이라는 여과기를 통해 보여주게 함으로써, 현실을 중화시켜 보여줍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현실이 아이의 눈 때문에, 그 참혹함과 잔혹함이 가진 강렬함이 줄어든채로 우리에게 다가가는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함을 줄인채로, 아이의 시선이라는 색다른 필터로 거른채로 보여주기 때문에, 진짜 리얼한 현실과 소설이 그려내는 현실 사이에는 일종의 공백이 발생합니다. 바로 이 공백 부분을 채우는 게 독자의 역할입니다. 여기서 이 소설의 또다른 독서가 시작되죠. 소설이 끝났다구요? 아닙니다. 이 소설은 끝나는 순간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과 진짜 리얼한 현실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는 '제2의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입니다. 소설이 끝나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독서. 끝이 시작이 되는 독서.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가상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독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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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죄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은모 옮김 / 달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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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6.우죄-야쿠마루 기쿠

조금이라도 관계있던 사람이 자살하면 자신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아. 허울 좋은 소리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건 사람과의 유대밖에 없어. 만약 그 사람과 좀 더 깊은 인연을 맺었다면... 누군가를 잃으면 반드시 그런 후회가 아픔이 되어 찾아오지.(57)

대중은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고 싶어서, 남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엿보고 싶어서 돈을 내가며 주간지를 사는 거라고.(208)

늘 과거에 시달려. 어디로 달아나도 과거가 쫓아오지. 아무리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다들 우르르 몰려들어 과거를 파헤치려고 해. 괴로워해, 괴로워해, 하고 몰아붙이지. 마치 너는 살 가치가 없으니까 죽으라는 것처럼...(276)

부모는 자식만은 절대로 체념하면 안 됩니다. 제 생각은 그래요.(443)

도망치지 말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직시하며 살기를... 그 뿐이야.(492)

이 책을 읽다가 감정이 너무 북받쳐서 당혹스런 경험을 했습니다. 갑자기 가슴 속에 감정이 차오르더니 눈물이 솟구치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감수성이 풍부해진 인간답게, 가끔씩 이런 일이 있는데 오랜만에 경험을 하니 놀라웠습니다. 감정의 파고가 지나가고 책에 적힌 저자의 이름을 들여다봅니다. 야쿠마루 가쿠. 이 작가가 이제 인간의 감정을 잘 파고드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써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이 작가를 만났을 때는 무언가 강렬한 열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 다음 작품에서는 어딘가 방황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첫 작품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년법'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그 주제를 소설 세계의 굳건한 토대로 삼은채로 그에 관련된 작품을 지속적으로 써내고 나니 어느새 이 작가는 사람의 흔드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돼 있더군요.

<우죄>도 야쿠마루 가쿠 답게 '소년법' 문제와 관련된 소설입니다. 소설은 두 명의 소년을 참혹하게 죽인 중3 학생이 소년원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람답게 변화하고 성인이 되어 사회로 돌아오며 겪는 일을, 그가 사회로 돌아와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살인자로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공장으로 들어오는 스즈키, 어린 시절 왕따 당하던 친구의 자살에 큰 죄책감을 가진 채로 저널리스트의 꿈을 꾸다 현실 속에서 좌절하고 공장으로 들어온 마스다, 도쿄에서 만난 나쁜 남자친구 때문에 AV 배우 시절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는 못하는 공장직원 미요코, 소년원의 정신과 의사로 스즈키에게 헌신을 다하다 아들에게 소홀해서 아들에게 미움받고 본인도 아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야요이, 이 네 명을 토대로 그들과 관계된 인물들이 엮이면서 소설이 전개됩니다. 나쁜 소설이 쉬운 질문에 쉬운 답을 내놓고, 좋은 소설이 쉽지 않은 질문에 쉽지 않은 대답을 내놓는다고 저는 생각하데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쉽지 않은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쉽지 않은 대답을 힘겹게 내놓고 있습니다. 죄와 속죄의 문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가해자의 삶과 그 인물과 연관된 삶의 문제, 죄와 우정과 사랑의 관계, 직업과 가족의 문제 같은.

사실 그렇습니다. 내가 친하게 지낸 사람이 과거에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저지른 사람의 속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니 속죄는 가능한가? 이런 질문에 쉬운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질문 자체쉽지 않기에 대답이 쉽게 나올 수는 없습니다. 친구로 지낸 스즈키의 범죄 사실을 알고 고민하는 마스다나 연인 사이로 있다 스즈키의 과거를 알고 역시 고뇌하는 미요코의 행동은 거기에 우리 모두의 이름을 대입해도 별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 모두 고민하고 나름의 행동을 하겠죠. 하지만 그게 정답일리는 없고 그저 어쩔 수 없는 행동에 불과할 겁니다. 스즈키의 문제로 넘어가면 더 복잡해집니다. 죄와 속죄의 문제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제입니다. 종교,철학,법학,사회학,범죄학, 심리학 같은 다양한 영역들이 뒤섞인 복잡한 문제. 결국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살아남아서 지속적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작가는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는, 죄를 잊지 않고 그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지는 않고, 저지른 죄는 돌이킬 수 없기에 그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태도일 겁니다. 그때의 속죄는, 속죄하는 이에게 저주이자 축복일 겁니다. 죄의 무게감을 덜 수 있는 축복이자 죄를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저주. 그 속죄의 압도적인 무게감을 알려주는 마지막 구절 앞에서 저는 그저 묵묵히 속죄의 어려움을 인정할 뿐입니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고, 속죄는 그 죄의 현실감을 지우려는 불가능을 향한 몸부림일 뿐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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