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연대기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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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7.돌의 연대기-이스마일 카다레

그 사지와 돌 갑옷 속에 사람의 생명을 간신히 품고 있었지만 그 생명을 찢고 할퀴며 온갖 고통으로 짓누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돌로 이루어진 도시여서 당연히 그 촉감은 거칠고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도시에서 어린아이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8)

여기저기서 글자들이 아찔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린다. 자음도 달리고 모음도 달린다 그것들이 모여 말이 되거나 우박이 된다. 글자들이 다시 달린다. 단검이 만들어지고 밤이 닥치고 살인이 저질러진다. 연이어 도로가 나타나고 문들이 덜컹대고 정적이 찾아든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끝도 없이.(91)

어쩌면 그게 살육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국가를 도살장으로 데려갈지, 그들의 울음소리가 어떨지는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투박한 검정 모직 옷차림의 시골 사람들. 흰옷을 입은 도살자들. 염소, 양, 새끼양 들. 그 광경을 보러 온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다 마침내 올것이 오고야 만다. 프랑스. 노르웨이. 땅이 피로 물든다. 네덜란드가 매애매애 울어댄다. 새끼양의 모습을 한 룩셈부르크. 목에 큼직한 방울을 단 러시아. 염소의 형상인 이탈리아(125)

이 오래된 도시는 공습을 받았다. 유구한 세월 동안 노포나 대포알, 파성추의 공격을 무수히 받아온 도시. 이제 그 기반이 산산조각나 장님처럼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겁에 질린 수많은 유리창들이 파편이 굉음을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131)

세상이 피를 갈아치우는 게지. .. 사람은 사오 년에 한 번씩 피를 갈아치우지. 세상은 사오백 년마다 그렇고. 우리가 사는 시대는 피의 겨울이야.(319)

세상이 문학을 파괴하려 할지라도, 문학은 세상을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394)

어른과 아이는 다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어른과 아이가 다른 이유는 삶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아이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았고, 살아온 시간만큼 형성된 굳어진 '삶의 틀'이 있고 그에 따라 '어떤 전형성'을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아이는 어른보다 살아온 삶의 시간이 짧고, 짧은만큼 굳어진 '삶의 틀'이 없습니다. 굳어진 '삶의 틀'이 없는만큼 아이들은 저마다의 짧은 삶을 기반으로, 어른과는 다른 '삶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풍부한 상상력을 토대로 굳어진 삶의 틀이 없어 전형성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인식은, 독창적이고 색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소설가들은 아이들의 시선을 이용하여 전형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색다른 시각을 가진 소설을 써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바니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이스마엘 카다레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돌의 연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나'라는 아이의 시선으로,아이가 살아가는 '돌의 도시'를 휩싼 전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형적일 수 밖에 없는 전쟁의 모습은, 아이의 시선으로 새롭게 펼쳐집니다. 아이는, 도살장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들간의 전쟁을, 양의 모습을 한 각 국가들이 도살장에 모여서 죽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 아이는 국가들간의 전쟁을, 우편 수집의 양상으로 그려냅니다.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아이가 도시와 도시의 사물을 그려내는 방식도 어른과는 다릅니다. 집의 수조와 대화하는 아이는, 도시와 집과 각각의 사물들과 자연들이 살아있다고 여기며, 도시와 도시의 사물들과 도시를 둘러싼 자연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며 서로 경쟁하고 교류하는 존재로 그려냅니다. 어른들을 보는 시각도 아이는 다릅니다. 아이는 어른들을 강하며 어딘가 신비에 싸인 존재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생생한 치부를 가혹할정도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영향도 강하게 받습니다. 도시를 지배하는 미신과 풍습과 관습에 현혹되어 주술을 피하고자 온갖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어른들이 가진 강력한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어른들을 벗어나는 몸부림도 보여줍니다. 외가 가족들이 싫어하는 외가에 하숙하는 여인을 남몰래 연모하고, 어른들이 싫어하는 비행장의 비행기를 너무도 좋아해서 온갖 망상에 빠져 지내는 모습으로.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내부인이면서 동시에 외부인의 모습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모순적인 모습이 빚어내는 간극의 힘이 <돌의 연대기>라는 소설의 색다름과 독특함을 형성하고, 책을 읽는 독자는 거기에 빠져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이의 시선이 소설을 색다르고 독특하게 만드는 것에만 기여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시선은 비단 색다름과 독특함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시선은 전쟁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아이의 눈'이라는 여과기를 통해 보여주게 함으로써, 현실을 중화시켜 보여줍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현실이 아이의 눈 때문에, 그 참혹함과 잔혹함이 가진 강렬함이 줄어든채로 우리에게 다가가는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함을 줄인채로, 아이의 시선이라는 색다른 필터로 거른채로 보여주기 때문에, 진짜 리얼한 현실과 소설이 그려내는 현실 사이에는 일종의 공백이 발생합니다. 바로 이 공백 부분을 채우는 게 독자의 역할입니다. 여기서 이 소설의 또다른 독서가 시작되죠. 소설이 끝났다구요? 아닙니다. 이 소설은 끝나는 순간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과 진짜 리얼한 현실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는 '제2의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입니다. 소설이 끝나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독서. 끝이 시작이 되는 독서.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가상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독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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