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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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0.단 하나의 문장-구병모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날카로운 면도날들을 저마다 혀 밑에 숨기거나 손끝에 꽂고 있어서(36)

펜 끝에서 한번 번져 나가기 시작한 말들이 그리는 궤적을 바라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흘러가는 말들을 포착하여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물방울의 표면에 새겨나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은 원래의 가장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기에, 그리고 말의 죽음을 맞이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일 뿐이다.(39)

서영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원래의 속도와 부피를 잃은 채 잼과 같은 감촉으로 자신의 피부를 훑고 슬로모션으로 지나가면서 자신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로 느껴졌다. 부패한 암죽처럼 흘러내리는 현실, 흩어진 윤곽, 한낮의 악몽.(119)

무조건적 애도를 받아 마땅한 위치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 클릭 한번을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미디어의 본분. 분명 사실도 있고 진실도 잇는데 그중 쓸 만한 화소의 조합으로 인해 원래의 발화와 뉘앙스와는 사뭇 다르게 번역되는 진술들. 한때 내가 했던, 지금도 남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다듬을 때 종종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인데 이때 숭배할 만한 대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서사적 전략이며,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미모가 뛰어날수록 그 대상으로 등극할 가능성은 무한등비수열로 높아진다.(208)

전복된 말에서는 비밀스러운 힘이 빠져나가고 말이 구현하던 세계는 실재의 선로에서 이탈한다. 모든 말에는 그것과 본질적으로 무관한 사물 및 사태가, 대체로 과잉과 혼동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담보로 부여되므로, 말이 지닌 힘과 더불어 기왕에 펼쳐진 현실을 축소하고 접어 가두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압축과 생략 그리고 전복이다.(219)

서평을 줄이고 줄여서 한 문장으로 쓴다면 어떤 문장을 쓸 수 있을까요? 서평에 쓰여진 언어를 다 제거하고 오직 하나의 문장으로만 나타내야 한다면 어떤 말을 해야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서평을 줄여서 한 문장으로 쓴다면 딱 두 가지 가능성의 한 문장만 남습니다.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 저는 여기서 모든 서평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에 다른 것들을 덧붙이면서 서평이 태어나는 것이죠.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서의 하나의 문장이 존재하고 거기에 다른 것들을 덧붙이면서 서평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이건 서평뿐만 아니라 영화평,드라마평,예능프로그램평에 다 적용되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서평이 이 하나의 문장에만 머문다면, 아무리 많은 말과 문장이 있어도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라는 말에만 머문다면 그게 좋은 것일까요? 처음에 쓴 서평이 아니라, 이후에 쓴 수십 개, 수백 개의 서평이 오직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라는 영역에만 머문다면 그건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요? 그 글이 글을 쓴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글을 지속적으로 쓰면서 처음 시작했던 영역에 머문다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이건 저한테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도 처음 서평을 썼을 때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에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서평을 쓰면서 변화의 욕망을 느꼈습니다.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그 이후의 제 서평들은 저 몸부림의 흔적입니다. 어떻게든 '재미있다'와 '재미없다'의 영역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몸부림으로서 글을 쓰면서 저는 차자 글에서 재미의 중요성을 약화시켜 갔습니다. 물론 필요하면 재미에 관련된 것들을 글로 썼죠. 이 말은 재미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 재미는 중요합니다. 재미가 없다면 왜 책을 읽겠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읽고 나서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그 무엇을 '서평'이라는 형식의 글로 쓰고자 한다면, 오직 '재미'에만 머무는 것이 너무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서평을 계속해서 쓴다는 건, 어떤 변화와 발전의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말과 다름없는데, 그 변화와 발전의 방향성이 처음 글을 쓴 것과 똑같다면 그게 무슨 변화와 발전입니까? 아니, 그건 과거의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행동에 불과할테죠. 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면 처음의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고, 저는 거기에 맞춰서 글을 써나갔습니다. 그게 잘됐는지 안됐는지와는 별도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저같은 아마추어도 저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소설가들은 어떨까요? 그들도 그들 나름의 변화를 위한 욕망을 가지고 글을 써나가지 않을까요? 구병모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을 읽으며 저는 구병모 작가의 변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제가 읽은 구병모 작가의 소설들에서 구병모 작가는 '이야기 제작자'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 구병모 작가는 이전까지와지는 달리 '이야기 제작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치며, 그 몸부림의 흔적으로서 책 속의 소설들을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책 뒤에 나오는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는 이 욕망을 작가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이야기 제약자가 되고 싶다는 말로 표현하고, '작가의 말'에서는 '이야기의 너머에 또는 기저에 닿고 싶어진 것이다'라는 말로 나타냅니다. 표현이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작가가 변화하고 싶어한다는 것이고 그 변화의 욕망을 소설 속에 녹여냈다는 거죠. 제가 가장 변화를 크게 느낀 건, 책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제게 찾아오는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제가 읽은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이 무조건 술술 잘 읽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이 책처럼 저에게 지속적인 불편함을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친절하지 않은 서술의 형식도 그렇고, 군데군데 내비치는 쉽지 않는 표현도 그렇고, 어딘가 이 사회의 폐부를 꿰뚫고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내용도 그렇고. 특히 제가 가장 불편했던 건, 저라는 인간이 가진 어떤 어떤 면모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에서는 한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익명의 군중들의 쉽게 내지르는 말의 흐름 속에서, <지속되는 호의>에서는 거리를 두고 사람을 대하면서도 정작 사람의 관심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무기력해지는 도시인의 모습 속에서,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서는 농촌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지나치게 예민한 한 여인의 모습 속에서, <미러리즘>에서 한 남성이 약물 테러를 당해 여성으로 변화하면서 여성의 삶을 체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현실 속에서, <웨이큰>에서는 한국에 사는 한 필리핀 주부의 입을 통해 사이버 테러를 막으러 나섰다 의식을 잃게 된 한 남자가 일깨워주는 이 세상의 진실 속에서, 저는 저 자신의 모순적이고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둔감했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봤기에 저는 불편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봤던 저의 모습은 이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바꾸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나이면서 나와 다른 또다른 '나'가 되도 상관없는. 작가는 불편한 이야기들을 써내면서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써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소설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변화의 욕망을 공공연하게 작품을 통해 드러냅니다. <사연 없는 사람>에서는 나의 욕망이 다른 이를 위한 욕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에서는 언어가 사라지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 <오토포이에시스>에서는 이야기가 아닌 단 하나의 문장을 좇는 한 인공지능의 모습을 통해서.

어쩌면 구병모 작가가 좇는 목표는 불가능할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너머 또는 기저에 닿고 싶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을 향한 도전을 통해 자기 자신이 변화하고, 자신의 작품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목표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변화 자체에는 성공한 것이 됩니다. 불가능을 향한 도전이 자신의 삶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목표에는 도달 못하더라도 그 과정이 변화를 이끌어냈기 때문이죠. 그걸 저 자신에 적용해봐도 비슷합니다. 재미의 영역을 벗어나는 서평을 쓰고 싶다는 제 욕망이 쉽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저와 제가 쓰는 서평이 변화했다면 저는 이미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제가 했던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의 방향을 내다볼 수 있다면 저는 묵묵히 제길을 가면 됩니다. 구병모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 없이 한발한발 내딛으면 변화는 한 개인을 스쳐 지나며 삶과 세계관 전체를 변화시킬 것이고, 어느 순간 변화한 모습으로 살아나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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