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버 드림
조지 R. R. 마틴 지음, 이수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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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9.피버드림-조지 R. R. 마틴

그러나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대부분 힘, 무시무시한 힘, 마쉬의 꿈을 박살 낸 얼음만큼이나 불안하고 무자비한 힘이었다. 마쉬는 그 안개 속 어딘가에서 천천히, 몹시도 천천히 움직이는 얼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의 배들과 의 모든 희망이 쪼개지는 끔찍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10~11)

밤과 안개 속에서, 작고 평범한 배들 사이에서 그녀는 환영 같았고, 어느 강 사람의 꿈에서 튀어나온 하얀 유령 같았다. 그곳에 서서, 마쉬는 숨이 멈출 만한 배라고 생각했다.(40)

나는 쾌락이다, 빌리. 나는 힘이다. 그리고 나의 정수는, 쾌락과 힘의 정수는 가능성에 있다. 나 자신의 가능성은 광대하고 한계가 없지. 우리의 세월에 한계가 없기에. 하나 이들 가축들에게는 내가 한계요, 이들의 모든 희망과 모든 가능성의 종말이야. 이제 이해가 좀 가는가? 붉은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을 자리에 누운 흑인으로도 갈증은 채워지지. 하나 젊은이, 부유한 이, 아름다운 이, 앞에 삶이 펼쳐져 있고 밤낮이 약속으로 반짝이는 이를 마시기란 얼마나 좋은가! 피는 피, 어떤 짐승이라도, 저들 중에 누구라도 마실 수 있지.(141)

친애하는 조슈아, 그대는 선이나 악 같은 것도 없고, 오직 강함과 약함, 주인과 노예만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해. 그대는 저들의 도덕,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들떴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런 것은 저돌의 용어지, 우리의 말이 아니라네. 그대는 새로운 시작을 설파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시작하지? 가축들처럼 되나? 저들의 태양 아래 불타고, 그냥 빼앗을 수 있을 때 일을 하고, 가축들의 신에게 고개를 숙이나? 아니자. 저들은 짐승이요, 우리의 자연적인 열등 종족이며, 우리의 크고 아름다운 먹잇감이지. 그게 세상의 방식이야."

..

아, 가엾은 조슈아. ..."창조는 가축들이 하라고 해. 생명이든, 아름다움이든, 무엇이든, 그리고 우리는 그 창조물을 취하고, 이용하고, 내키면 파괴하기도 하지. 그게 자연스러운 방식이야. 우린 주인이야. 주인은 노동을 하지 않아. 그들이 옷을 만들고, 우리는 입기만 하면 돼. 그들이 증기선을 짓고, 우리는 그 배를 타지. 영원한 삶을 꿈꾸라고 해.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고, 그들의 생명을 마시고, 그 피를 음미하지. 우리는 이 지상의 지배자고, 그것이 우리의 유산이야. 말하자면, 우리의 운명이지.(275~276)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갑자기 <뱀파이어와이 인터뷰>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저는 어린 시절에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봐서 그런지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뱀파이어로 분장한 브래드 피트와 톰 크루즈의 압도적인 비주얼만 떠오르네요. 그전까지는 뱀파이어라고 하면 무섭고 흉악한 존재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영화를 보고 '뱀파이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영화를 통해 아름답고 매혹적인 존재로서의 뱀파이어상을 생애 처음으로 마주했다고 해야할까요? 그 이후로 제가 그때 마주친 뱀파이어에 대한 이미지는 <트와일라잇> 시리즈까지 쭉 이어지더군요.

뱀파이어 소설로서 <피버드림>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신비한 뱀파이어 이미지와는 거리를 둡니다. 대신에 이 소설에는 지적으로 사고하며 이상을 꿈꾸는 뱀파이어가 등장합니다. 1850년이라는 미국 증기선 시대의 전성기에 미시시피강에서 제일 빠른 배를 만들어서 몰고 싶어하는 뿌리까지 뱃사람인 애브너 마쉬 앞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인물 조슈아 요크가 그 주인공입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아버지를 잃고 사람들 사이에서 처절하게 살아온 그는 인간들의 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망을 싫어해서 처절한 노력 끝에 인간의 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게 된 뱀파이어입니다. 그는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고, 인간의 문화를 즐기고, 인간들과 뱀파이어가 공존하는 이상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또 그는 자신의 힘으로 다른 뱀파이어들도 자신처럼 만드는 고귀한 뱀파이어죠. 그래서 조슈아 요크는 이상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자 몽상가인 뱀파이어입니다. 저는 이런 뱀파이어를 처음 봤습니다. 처음 본 만큼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 사는 뱀파이어들에게 한 줄기 빛이 있다면 조슈아 요크가 아닐까요? 미녀 뱀파이어인 발레리가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조슈아 요크를 사랑하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가지지 못한 어둠을 밝힐 빛의 속성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죠.

빛이 있는 만큼 어둠도 있겠죠. 맞습니다. 이 작품에는 조슈아 요크와 대척점에 있는 어둠의 뱀파이어가 등장합니다.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길고 긴 시간을 살아온 뱀파이어, 너무 긴 시간을 살아왔기에 인간의 피를 갈망하는 욕망을 넘어섰지만 인간을 죽이고 피를 마시는 행위를 즐기기 때문에 살육을 일삼고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 줄리언. 두 뱀파이어의 대립을 바라보면서 저는 그 둘의 대화를 토대로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둘의 말에 따르면 둘의 차이는 명확했습니다. 둘은 차별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조슈아 요크는 인간과 뱀파이어가 다르긴 하지만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간을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같이 살아가는 존재로 여깁니다. 반대로 줄리언은 인간들을 자신들의 먹이감이자 자신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주인과 노예의 논리로 이 세상을 재단하는 그는, 뱀파이어가 인간보다 우월하며, 열등한 인간들은 노예로서 복종해야 하며, 인간을 존중할 필요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를 인간차별주의자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가 문제인건, 그에게 가득한 공허입니다. 너무나 오랜 기간 살아온 그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자신의 삶을 바꿀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바꿀 의도가 전혀 없는 만큼, 그에게 삶은 과거의 관성 그 자체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의욕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에게 가득한 건 권태와 공허, 허무,야성의 폭력입니다. 어쩌면 그 모든 걸 통틀어 '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줄리언은 요슈아의 반대편에서 어둠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어둠의 끝에 위치한 '악'의 모습처럼 보여집니다.

뱀파이어만이 구분되는 건 아닙니다. 둘의 곁에 위치한 인간들조차 차이가 납니다. 줄리언의 곁에서 줄리언을 돕는 인간 빌리는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줄리언과 비슷한 차별주의자입니다. 흑인을 인간 이하로 보는 차별주의자.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 영생을 누리고 줄리언처럼 살육과 폭력을 행사하고 피를 마시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이 소설에서는 뱀파이어에게 물린다고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에 인간과 뱀파이어는 다른 종입니다.) 어쩌면 빌리는 불가능하기에 자신의 욕망에 더 집착하고 줄리언을 따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조슈아 요크의 친구로서 조슈아와 같이 줄리언에게 저항하는 애브너 마쉬는 빌리와 반대편의 인물입니다. 뼛속까지 뱃사람인 그는 인종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사람을 구분합니다. 피부가 검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는 건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뱀파이어와 친구가 될 정도로 품이 넓은 그가 살육을 일삼는 줄리언 같은 인물을 용서할리 없죠. 그래서 둘은 마지막까지 철천지원수로 남죠. 어떻게든 줄리언을 포섭하려는 조슈아와 달리. 저는 이 소설의 결말이 빌리와 마쉬의 차이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인간을 도구로 보는 줄리언이 빌리를 마지막까지 도구로 본 반면에, 인간을 존중하는 조슈아가 마쉬를 친구로서 마지막까지 존중했기 때문에 이 소설의 결말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죠. 만약에 줄리언이 빌리를 존중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악의 모습을 간직한 줄리언의 삶에 변화는 불가능했기에 앞의 '만약에'는 불가능한 말일 겁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인종차별을 둘러싼 정치적 해석이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아가고 싶지는 않네요.^^;;

<피버드림>을 제 나름의 해석의 그물망을 통해서 한번 말해봤습니다. 사실 해석이란 게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외에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선과 악을 통한 해석, 줄리언을 유럽이라는 구대륙의 문화로 보고 마쉬와 요크를 신대륙의 문화로 보는 해석 등등. 그 해석들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겠죠. 해석은 각자의 해석이 저마다 정답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해석의 그물망이 아닐 겁니다. 해석보다 더 중요한 이 책을 통해서 느끼는 '재미'일 겁니다. 장르문학을 읽고 재미를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저의 <피버드림> 독서는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성공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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