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된 사실
이산화 지음 / 아작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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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8.증명된 사실-이산화

3년 동안의 학교 생활을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우기는 했으니까. 바로 세상의 법칙이란 바뀌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F는 ma와 화학반응 전후의 질량은 보존되며, 무슨 사립학교 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교장이 대놓고 "고등학교는 애들 대학 잘 보내려고 있는 겁니다" 같은 소리를 해도 여전히 교장이고(27)

가만히 다가가서 어깨를 맞대고 선 나의 눈에도 같은 광경이 비쳤다. 노을빛을 받아 지옥처럼 붉게 타오르는 불빛, 자습실, 교실, 운동장, 지긋지긋한 이 작은 세상.(38)

3년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의 공식적인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관계란 수능과 같아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든지 심판의 날에 친구인 사람이 진짜 친구인 법이었다.(39)

"나는 이제 온 세상을 파괴하는 자, 죽음 그 자체가 되었노라."(40)

증명된 사실과 싸우는 일은 무의미했다. 반증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70)

천문학의 역사란 곧 주제 파악의 역사니까.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류의 위치를 가늠하는 동안 우리는 매번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직면해야만 했으니까.(130)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든 팔을 뻗어 멀어져가는 네 손을 붙들려 해. 언젠가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듯이. 이해하고,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려 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어. 한순간 손가락 끝이 스치는 것 같다가도, 그 찰나의 두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는 벌써 먼지구름 속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아. 다만 그 벨소리만이, 최후의 날 시계의 불길한 초침 소리처럼, 육교 저편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어.(157)

화석의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아니, 답은 오래전에 땅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고생물학자는 답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174)

<조커>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는 유투브 영상을 보면서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조커가 '예의 없는'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조커는 예의 없는 세상에서 예의 없는 자들에게 당해 미쳐버리고 예의 없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게 되죠. 예의 있는 사람은 살려주고요. 뜬금없이 서평을 쓰면서 영화 <조커>와 '예의' 이야기를 왜 하냐고 하실 수 있는데요(^^;;) 그건 <증명된 사실>이 굉장히 '예의 바른' 책이라서 일 겁니다. 첫 소설집을 내는 소설가 답게 저자는 이 책에 대한 애정, 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뽑내며, 각각의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후기 같은 글을 작품들 뒤에 덧붙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각각의 작품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됐는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소설 뒷부분에 붙일 수 있는 작은 이야기들도 써내며 독자들에게 굉장히 친절하고 예의바른 모습의 책을 완성합니다. 작가 스스로가 예의 바르니, 저도 이 글에서 '예의 있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음... 잘 모르겠네요.(^^;;) 그냥 지금까지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최대한 예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예의 있는' 말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우선 '이야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야기'에 관련된 이야기? 뭔가 동어반복같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이야기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이야기'라는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창작 양식이 시대를 거쳐 근대 문학이라는 영역에 들어와서 '소설화'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이 '이야기 파괴자'를 자처하는 소설가들은 제 말에 경기를 일으키겠지만(ㅋㅋㅋ), 저는 그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소설은 이야기를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저는 소설에서 이야기를 파괴하려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소설가도 '이야기 없는 이야기' 혹은 '이야기가 사라진 이야기'를 쓰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게도 저에게 SF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이라는 외관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이야기. 과학이라는 외관으로 자신을 포장했기 때문에, SF는 과학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SF는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과학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가상과 비현실의 면모도 보여줍니다. 과학적이면서 비과학적이고, 비과학적이면서 과학적인 이야기. 제게 SF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증명된 사실>도 제가 생각하는 SF에 속하는 책이었습니다. 과학의 외피를 둘러쓴 과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들로. 물리학자가 귀신 보는 여인의 도움을 받아 사후 세계의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를, 고생물학자가 한 성당 신부의 부탁으로 공룡의 후예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모험담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곤충학자가 지옥의 생물일지도 모를 벌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리가 불편한 한 여인이 할아버지가 남긴 유물을 조사하여 자신의 추리력으로 중국 명나라 때의 자기 조상들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를, 살아남은 공룡 인간들이 인간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수수께끼의 대기권 생물이 자신의 윤리성을 지키기 위해 사로잡힌 인간을 돕기 위해 나서는 이야기를, SF가 아니면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그 이야기들은 충분히 SF적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이야기들은 작가 이름을 따서 '이산화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이산화적'이라는 말은 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말은 점점 어떤 형태로서 나타낼 겁니다. 그날까지 저도 SF 독자로서 꾸준히 SF를 읽을 것을 다짐해봅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저는 과학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인 SF의 주술에 홀린 독자이니까요. 여기까지 쓰고보니 확실해집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제가 왜 SF를 계속 읽는지를 증명하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증명까지 하고 나니 다시 읽을 SF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술에 걸린 독자에게 휴식은 없는 법이니까요. 영원히 충족할 수 없는 갈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저는 다음번 SF를 향해 내달려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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