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다녀오던 날 벌교 근처 도로에서 전엔 없던 이정표가 자꾸만 눈에 띄었다. 이정표 색깔이 빨간색이라서 특이하다 싶은 생각으로 자세히 보았더니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태백산맥>이라는 글자를 읽는 순간 결혼식이고 순천만이고 당장 저기 먼저 가자고 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결혼식 끝나고 순천만에서 자꾸 시간을 보내는 남편과 아이들을 재촉했는데도 5시가 넘어 문학관에 도착했다. 관람 마감 시간이 다 되어 도착한  문학관 주변엔 벌써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입구에 개관식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걸 보니 개관한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지만 앞으로 인기 문학 기행지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벌교는 시골 어디서나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작은 읍이다. 그런데 이런 소읍에 안 어울리게 제법 큰 규모의 기차역이 있다. 지금은 그리 많은 사람이 이용할 것 같지 않은 기차역은 벌교의 옛 영화를 잘 보여주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일제 시대 벌교는 육지(보성, 화순, 고흥)와 바로 연결되는 포구여서 일본인들의 배가 득실거렸고, 시골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가 아닌 경찰서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돈이 돌았고, 인구 또한 많았다는 얘기다.

  벌교 제석산 자락 나즈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문학관 건물이다. 논과 밭, 그리고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에 들어선 이 초현대식 건물이 통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태백산맥>의 배경을 생각하면 아주 적절한 장소구나 싶었다. 그동안 벌교 근처를 지날 때마다 벌교 꼬막이나 짱뚱어 먹을 생각만 했지 <태백산맥>이 태어난 동네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결혼 생활 10년의 후유증이다. 


"문학은 인간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문학관 이름 아래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문학의 덕을 아주 많이 본 이들 중 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이 문구를 읽으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직 <태백산맥>을 모르는 딸아이가 불만 섞인 얼굴로 따라 들어왔다가 대형으로 만들어놓은 책 앞에서 웃음보를 터뜨렸다. 만화 <태백산맥>까지 나왔으니 언젠가 딸아이도 읽을 기회가 오겠지 싶다. 

      올해(2008년)로 조정래 선생이 <태백산맥>을 집필한 지 20년이 된다고 한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 <태백산맥>이 나올 때마다 달려가 책을 사고 밤새워 읽으며 토론을 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학교 선배였던 탓에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선생의 열기는 더 뜨거웠다. 그런데 지금 선생은 모교의 석좌 교수가 되어 있고, 나는 당시 선생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세월 참!!!

<태백산맥> 1권부터 10권까지 집필한 원고 분량인 1만 6천 5백 매를 쌓아놓았다. 내 키보다 훨씬 더 높았다. 1983년에 시작해서 1989년에 완성되었으니 6년이 걸린 셈이다. 해방 직후부터 분단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태백산맥>. 군사독재 시절이던 당시는 분단 소설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이적성 시비와 협박 전화에 시달렸고, 유서까지 써놓았을 정도로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선생이 <태백산맥> 집필을 위해 취재 다닐 때 입었던 옷과 집필할 때 썼던 일등공신 만연필이다. 처음엔 볼펜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자꾸 볼펜 찌꺼기가 나오는 바람에 이 만연필을 쓰게 되었다고. 너나 할것없이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쓰는 요즘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난다.

 

  
선생의 꼼꼼한 메모들. 이 한 장의 메모가 한 권의 책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식인 출신 염상진과 그를 따르는 하대치, 또다른 지식인 김범우, 이성적인 국군장교 심재모, 우익 청년단장 염상구, 소화, 외서댁... 이들이 엮어내는 민중의 이야기가 이 작은 수첩 속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1984년에 직접 그린 자화상. 30분간 그렸다고 한 걸 보니 선생은 그림 실력도 빼어난 듯하다.   


문학관은 2층까지 있었는데 문 닫을 시간이라고 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1층만 관람하고 나왔다. 2층에는 작가의 방이랑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데 언제 근처를 지나다 한 번 더 들러야 할 모양이다. 문학관을 나와 걷다 보니 위쪽으로 서 있는 관광안내도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태백산맥>과 관련된 벌교 주변 장소들이 나와 있다.


      들녘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제석산 초입에 우뚝 서 있는 이 집의 정체는 바로 현부자네다. 소설 첫 장면에 등장하는 현부자네는 소화와 정하섭이 애틋한 사랑을 나눈 장소로 책을 읽은 이라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 


  현부자네 전속 무당 월녀와 소화가 거처하던 곳이다. 나무 기둥이 아직 뽀얀 걸 보니 소설 내용에 따라 현부자네 맞은편에 새로 지어놓은 듯했다.



버리고 기쁨을 얻는 곳! 어디일까? 정답은 아래 사진에 있다.



화장실 안내판을 보며 두리번거리다 눈길이 머문 곳.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빨치산들의 은신처 비트를 본따서 만든 화장실이다. 나를 비롯해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누가 겉만 보고 이곳을 화장실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네비에 태백산맥 문학관을 쳤더니 문학관 검색은 안 되고 태백산맥 화이트하우스라는 게 나왔다. 이곳에 가서 보니 문학관 맞은편에 있는 식당 겸 찻집의 이름이었다. 배가 고팠다면 들어가서 보리밥 한 그릇쯤 먹었을 텐데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어서 그냥 지나쳤다.   

    80년대 후반 서로 다른 장소에서 <태백산맥>을 읽었던 우리 부부. 20년이 지난 후 <태백산맥>을 추억하는 문학관 앞에 서서 이런 사진을 찍을 줄은 정녕 몰랐었네! 

위치 : 전남 보성군 벌교읍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전화 : 061-858-2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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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8-12-2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소나무집님 반가워요~
태백산맥을 읽은뒤 보성, 벌교 다녀온적 있습니다.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문학관 꼭 가보고 싶어요.

소나무집 2008-12-28 16:08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이런 페이퍼 읽고 반갑다 하는 걸 보니 우린 같은 세대가 확실해요, 그죠?

순오기 2008-12-2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5월에 태백산맥 문학기행을 갔을 때 막 짓고 있더군요. 그해 가을에 개관한다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1년이나 늦어서 개관했어요.ㅜㅜ
바로 그 앞에 현부자집이 있잖아요~ 작년에 찍은 사진이 커서 올리려먼 전부 줄여야 해서 못 올리고 있는데, 소나무집님 덕분에 문학관도 구경했네요.
조정래선생님과 같은 학교 나오셨군요~ ^^

소나무집 2008-12-28 16:09   좋아요 0 | URL
역시, 순오기님이에요. 벌써 다녀오셨군요.
제가 분명 태백산맥을 사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책이 어디로 갔는데 없네요.

무스탕 2008-12-26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백산맥 읽는동안 입에 전라도 사투리가 배서 애먹었었죠 ^^;
소화네집에 저렇게 눈에 보여지니 신기하기도 하고..
일부러 찾아가기엔 참 먼 거리고 ㅠ.ㅠ 시댁 내려가는 길에 어떻게든 시간 내서 가봐야 겠어요 ^^

소나무집 2008-12-28 16: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집을 실제로 보니 저도 감회가 새로웠어요.
꼭 한 번 가보세요.

세실 2008-12-26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책 골라주세용~~
http://blog.aladdin.co.kr/trackback/borim/2478991

소나무집 2008-12-28 16:11   좋아요 0 | URL
네.

전호인 2008-12-2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태백산맥의 유물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왔군요. 태백산맥을 통해 보성을 알고 벌교를 알고 그곳의 뻘을 알게 되었지요. 아마도 80년대 시대에 감명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저와 별반다르지 않겠죠? ^*^

소나무집 2008-12-28 16:15   좋아요 0 | URL
유물까지는 아니고 그냥 추억하는 장소로 보면 될 것 같더라구요.
님도 저와 같은 세대임을 확신...

아영엄마 2008-12-27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 책이랑 모빌 잘 도착했어요. 감사 포스터는 조만간 올릴께요~.
남편에 이어 둘째가 열감기에 걸렸네요. 가족 모두 건강 유의하시길~~

2008-12-28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