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소안도에서 나오니 6시 30분이었다. 원래는 6시 전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배시간이 예상과 맞지 않는 바람에 늦어졌다. 7시에 특별한 손님들이 오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마음이 바빴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특별한 손님이라고 한 이유는 바로 손님이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완도에도 영어 마을이라는 게 올해 처음 생겼는데 남편이 그곳에서 몇 번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서 선생님들을 초대하고 싶다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덜컥 약속을 잡아버렸다.

원래는 지난 주에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우리 가족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눈병에 걸리는 바람에 약속을 몇 번이나 취소시켰다. 그래서 어제 소안도에 가기로 한 날인데도 그들이 시간이 된다고 하기에 약속을 잡은 것.

한번도 외국인이랑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도, 밥상 앞에 마주 앉아 본 적도 없는 촌스런 아줌마가 그들을 초대하기로 한 건 아이들에게 외국인이랑 만날 기회를 주자는 속셈이 사실은 깔려 있었다. 우리는 영어 연수 그런 거 못 가니까 외국인을 집으로 부른 거라고 했더니 얘들이 진짜 믿는 눈치다.

캐나다인 트리샤와 브라이언. 올해 3월 처음 한국에 왔고 친구 사이라고 했다. 트리샤는 성격이 명랑하고 아주 자상했다. 한국말을 거의 할 줄 몰라서 영어만 썼는데 우리가 못 알아들으면 쉬운 단어를 골라서 다시 설명을 해주곤 했다. 나야 뭐 영어를 거의 못하니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가 웃으면 같이 따라 웃기나 했다는... 

요 양반들 초대해놓고 요리에 별 재주가 없다 보니 어떤 음식을 준비하느냐 가장 큰 걱정이었다. 하지만 한국 음식을 다 잘 먹는다기에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음식 몇 가지를 하기로 하고 아침에 소안도 가기 전에 대충 준비해놓았다.


무쌈 요리. 재료 사다가 썰어놓기만 하면 되니까 정말 간단했다. 파프리카랑 보라색 양배추가 색깔을 한껏 화려하게 해주었다. 참깨 소스랑 머스터드 소스도 슈퍼에서 파는 거 그냥 사 왔다. 요기에다 아침에 미리 만들어놓은 잡채랑 양념 불고기를 함께 내었더니 이 손님들 현관문 들어서면서부터 원더풀 원더풀이었다.

무쌈은 요리에 자신 없는 사람이 손님상 차리기에 딱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양반들에게도 인기 최고였다. 트리샤는 밥은 거의 안 먹고 야채를 좋아한다며 요거랑 불고기만 먹었다. 김치도 아삭아삭하다며(크런치라고 했다) 잘 먹었고, 브라이언은 서툰 젓가락질로 잡채를 잘 먹었다. 포크를 줄 걸. 어제는 그 생각을 왜 못했나 몰라. 



식사중에 함께 마신 복분자 와인. 함평 나비 축제 갔을 때 사 온 건데 이번에 아주 요긴하게 썼다. 술을 따라줄 때마다 어찌나 땡큐를 연발하던지...  사실은 내가 편안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말이어서 더 좋았고.



밥상을 치우고 녹차를 함께 마셨다. 트리샤랑 브라이언이 오면 써 먹겠다고 미리 연습도 하더니만 입을 꽉 다물고 있던 딸아이. 


늘 설쳐서 걱정이던 아들이 외국인이 오자 방으로 숨어서 나오지도 않았다. 정말 우리 아들이랑은 안 어울리게 웃기는 행동이었다. 외국인이라고 낯을 가리다니... 밥 먹자고 간신히 끌고 나왔더니 어찌나 얌전하게 앉아서 밥을 먹던지... "아들아, 평소에도 좀 그래 봐라!"

외국인과의 식사가 처음이었는데 긴장도 안 되고 이래도 되나 싶게 편안했다. 그들과 보낸 2시간 30분이 즐거웠다면 남편이 영어를 잘했나 보다고 하겠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밥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대화를 하다 보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을 뿐이다. 

트리샤와 브라이언을 보내놓고 딸아이가 한 말이 명언이었다. "밥을 함께 먹으면 친구가 된다더니 트리샤랑 브라이언이 친구 같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이젠 만나면 인사라도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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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8-0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전 무쌈요리가 대단해 보이는 걸요. 외국인손님들 표정도 참 편안해 보여요.
아이들 얼굴도 오랜만이구요. 소나무집님 여름 잘 보내세요^^

소나무집 2008-08-05 10:19   좋아요 0 | URL
무쌈도 사온 거죠, 야채도 생으로 썰기만 하면 그만이에요.
트리샤랑 브라이언은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이더라구요.
밴쿠버 같은 대도시에 살다 왔는데도 이 시골 생활을 견디는 걸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아영엄마 2008-08-0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무쌈 요리가 쉬운 거라니 언젠가는 도전을!!.. 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들도 잘 먹을까요? ^^;; 저도 외국인 앞에서면 입이 꾹~ 다물어져요. (^^)> 같은 아파트 사신다니 왕래가 있다 보면 아이들은 외국인에 대한 울렁증이 안 생기겠어요.

소나무집 2008-08-05 10:23   좋아요 0 | URL
님, 진짜 쉬워요. 한번 해보세요. 사다가 썰어놓기만 하면 되거든요. 야채 싫어하면 아이들 좋아하는 햄이나 맛살 같은 걸로 응용해도 좋구요. 저도 이번에 처음 해보았어요.
영어를 떠나 아이들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종종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치유 2008-08-0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경험을 골고루 다하시네요..무쌈도 잊지 말고 기억해 둬야겠어요.급할때 써먹게요..^^&

소나무집 2008-08-12 09:46   좋아요 0 | URL
요즘에야 완도가 좋아지고 있어요. ㅋㅋㅋ
무쌈은 시간 없을 때, 갑자기 손님 올 때 폼나게 마련할 수 있는 요리예요.
사실은 요리랄 것도 없어요. 예쁘게 담기만 하면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