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 다섯 명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나이가 다 같았던 건 아니었던지 서로에
대해 형이나 언니, 동생 등으로 호칭을 바로잡느라 분주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같은 나이의 '젊은이' 또는 '청춘'으로 보일 뿐
나이 차이는 하등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이런 생각을 그들에게 말했더라면 그닥 기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고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던 우리는 침묵과 단답식의 질문을 몇 번 주고받다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화의 주제는 갑자기 '청년실업'의 문제로 돌아섰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 주제에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나 나나 그 주제가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두 명은 외국에 취직을 하여 캐나다와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더라면 굳이 합격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국내 기업에는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은 공히 지금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니지만 이민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아쉽거나 미련이 남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들은 하나같이 '전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질문은 괜한 것이었다.
누가 그들로 하여금 디아스포라의 삶을 선택하게 했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등떠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언론에서는 '헬조선'이나 '금수저', '흙수저' 등의 신조어를 자주 보도하면서 그것이 마치 어느 철없는 젊은이의 정서적 결함 또는 무능한 어느
젊은이의 푸념쯤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을 비켜가도 한참 비켜간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헬
코리아'도 아니고 '헬 조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아니라 16세기나 17세기의 조선시대와
비슷하다는 걸 은연중에 비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판 음서제도라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한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에 의한 낙하산 인사나 특채의 만연, 갈수록 악화되는 소득 양극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주택 가격의 상승, 편법이나 탈법이 판치는 부의 대물림, 법으로 굳어진 듯한 무전유죄 유전무죄.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탈
대한민국을 부추긴 것은 그들에게서 미래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칙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현실이요, 기득권의 욕심이 빚은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일 뿐이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곧 닥칠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보았다. 젊은이가 사라진 국가의 미래가 밝을 리 없다. 해외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조차 다시 모국으로 돌아오고 싶도록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제 나라에 뿌리박고 사는 젊은이들도 강제로 내쫓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민낯임을
그들과의 대화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암울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본 것이다. 지금 권력을 가진 자, 지금 자신의 부를 누리는
자들이 당장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대한민국 전체의 미래를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들의 미래를
병들게 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