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비가 조금 내렸다. 색이 변한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지고 보도에는 이내 가벼운 우울이 서너 겹 깔렸다. 우산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보도 위의 싱거운 우울을 밟고 지나쳐간다. 휴일이 주는 둔탁한 질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낮고 어둡고 농도가 짙은 우울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허무맹랑하지만 겉보기에 화사한, 그늘이 없는 기대는 휴일 오전에 그들이 갖는 보편적인 느낌이리라.

 

텔레비전을 틀자 '역사 교과서', 국정화' '좌편향', '올바른' 등 뉴스에는 그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이 의미도 없이 흩어졌다. 교과서의 소비 주체인 학생들의 의견은 도외시 한 채 자기네들 멋대로 결정하고, 멋대로 뜯어고치면서 그것이 옳다고 믿는 돌대가리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소름이 돋는다. 그들도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이 다할 테고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그 시간의 어둠과 우울은 가을 휴일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꺼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오늘자 조간신문을 잘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혹은 텔레비전 아침 뉴스를 잘 이해하거나. 그러나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목적이 따로 있는 듯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대한민국의 과거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보다 화려했으니 현재에 대한 불만이 더러 있더라도 참고 견디었으면 좋겠다는 뜻일 게다. 즉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다. 어디서 많이 듣던 문장이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문장도 아마 그것일 게다. "가만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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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시간을 향해 터덜터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자 자신의 의지나 열정이 포함되지 않은 기계적인 서사일 뿐이다. 반면에 가을은 짧고 가파른 언덕인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포된 자발적 서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먼 훗날 자신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는 것은 길고 길었던 여름의 기억이 아니라 짧았던 가을의 추억일 확률이 높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확률일 뿐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찌 보내고 있는지 이따금 생각해 볼 필요는 분명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시간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소비 패턴을 찬찬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무임승차의 에스컬레이터에 무심코 올라 탄 채 흐르는 시간을 무작정 지켜보는 방법과 각각의 시간 속에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거나 생각 속에 시간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면서 보내는 방법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 오후에는 이상하리만치 졸려서 잠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가을철에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한 시간 남짓 아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가을의 시간은 조각에 알맞은 장미무늬목과 같다.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시간 속에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얘기다.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 뭐 없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또 몇십 분이 흘렀다. 아까워라. 결국 내가 선택한 책은 이상한 조합이 되고 말았다.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에쿠니 가오리의 <울지 않는 아이>,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정말지 수녀의 <바보 마음>.

 

나도 왜 이런 조합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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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피폐하고 황량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똑같은 일상이 오래도록 지속되다 보면 기대감에 들떠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 하나, 둘 사라지고, 가슴 한켠으로는 마른 먼지처럼 팍팍한 느낌만 쌓이게 된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여행의 권유도, 음악회나 영화 관람의 부추김도 졸음에 겨운 나른한 오후에 의해 밀려나고 '세상에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코웃음과 함께 익숙한 권태 속으로 빠져든다.

 

어제는 아내가 외박을 했다. 대학을 두 번이나 다녔던 아내는 두 번째 대학의 나이 어린 동기생들과의 오랜만의 만남에 몹시 들떠 있는 목소리였다. 대학 시절,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홀로 지냈던 아내는 그 시절에 사귄 동기생들과 매우 각별하게 지냈던 듯하다. 다들 결혼을 하고, 각자의 삶에 얽매어 전화와 문자로만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우연처럼 만났으니 오죽이나 반가웠으랴.

 

나는 어제, 윤기가 도는 아내의 전화 목소리에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반복되는 일상에 아내도 많이 힘들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짠했다. 좋다는 곳 어디를 가더라도, 맛있다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 누구를 만나도 그저 덤덤할 뿐 이렇다 할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나로서는 아내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는 건 아니었으나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벗어날 수 없는 무게는 가슴에 와 닿았다.

 

봄부터 이어진 가뭄은 단풍이 물든 이 가을에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공기는 나날이 건조해지고 대기중에는 미세먼지의 농도만 높아지고 있다. 날씨도, 내 마음도 풀리지 않는 '건조주의보'는 여전히 계속되는 셈이다. 대지를 적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졌으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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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인근에는 같은 이름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다. 차량 통행이 많은 편도 일차선의 도로에 인접해 있는 까닭에 운동장을 둘러 싼 울타리가 꽤나 높은 편인데 아마도 아이들이 갖고 노는 공이 차도로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가는 차들을 제외하면 인적이 드문 외진 곳이라 학생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그리 만들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무튼 나는 그 학교와 인접하여 산다는 것만으로 학교에서 적잖은 혜택을 누리고 사는지라 학교의 시설물이나 정원수 또는 학생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누리는 혜택이란 게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따금 한가로운 시간이 날 때면 가볍게 산책을 하는 장소로 이용한다거나 갑자기 몸을 움직여 땀을 내고 싶을 때 축구공이나 농구공 하나 들고 가서 시간을 보내는 정도이다. 그렇다고 학교에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도 아니니 나로서는 여간 고마운 게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 학교의 울타리 주변에는 암적색의 철 지난 넝쿨장미가 열을 맞춰 피어 있는데 나는 그 주변을 지날 때마다 시들어가는 꽃 옆에서 한나절 눈을 감고 누워 있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한나절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면 가을이 훌쩍 지나 있을 것만 같다. 바야흐로 조락의 계절, 시들어가는 붉은 꽃들이 아쉬운 시간을 붙들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다기보다는 오히려 처연하다. 내가 느끼는 처연하다는 감정인 즉 과거로 회귀하는 그리움을 껴안고 생겨난 것이기에 시들어가는 장미의 꽃송이나 그 위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이 마냥 애틋하기만 하다. 그 곁을 스치듯 걷는 철부지 학생들의 왁자한 웃음이 때로는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져 발걸음을 붙잡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의 추억은 대개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향수에 젖게 하거나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은 간절함을 낳는다. 가을에 유독 우리가 추억에 젖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생명이 스러지는 주변 풍경을 보면서 자신도 문득 그와 같이 쇠락의 길로 접어 들고 있음을 감지하는 순간, 과거의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정부 여당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가을에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락하는 계절에 자신의 신세 또한 처량해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계절에 떠오르는 추억은 모두 아름답게만 느껴져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은 욕구는 한층 강해지는 것이다. 나는 자신들의 쇠락을 조금이라도 늦춰보려 몸부림 치는 그들의 처절한 발악이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현재의 잘못이 역사를 잘못 배운 젊은이들 탓인 듯 덮어 씌우려는 생각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부러워 하는 것은 바로 젊음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지금까지 무엇 하나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고쳐질 가능성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의 잘못만 문제 삼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된다면 낮은 취업률도 견딜 수 있고, 원칙만 지켜진다면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도 당당히 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부끄러운 이유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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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vdlEjfdjwlrh 2017-07-1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가옵니다.오랜만에.장미는 지난 뙤약볕에도 묵묵하게 자태를뽐내고 초라하지않게 고개를떨구고 또 내년을 기약할것입니다.빗방울에 잎들도 나뿌끼고.자연.비..비....장미.이계절데로 감사하며 살고싶다.
 

어제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 다섯 명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나이가 다 같았던 건 아니었던지 서로에 대해 형이나 언니, 동생 등으로 호칭을 바로잡느라 분주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같은 나이의 '젊은이' 또는 '청춘'으로 보일 뿐 나이 차이는 하등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이런 생각을 그들에게 말했더라면 그닥 기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고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던 우리는 침묵과 단답식의 질문을 몇 번 주고받다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화의 주제는 갑자기 '청년실업'의 문제로 돌아섰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 주제에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나 나나 그 주제가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두 명은 외국에 취직을 하여 캐나다와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더라면 굳이 합격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국내 기업에는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은 공히 지금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니지만 이민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아쉽거나 미련이 남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들은 하나같이 '전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질문은 괜한 것이었다.

 

누가 그들로 하여금 디아스포라의 삶을 선택하게 했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등떠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언론에서는 '헬조선'이나 '금수저', '흙수저' 등의 신조어를 자주 보도하면서 그것이 마치 어느 철없는 젊은이의 정서적 결함 또는 무능한 어느 젊은이의 푸념쯤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을 비켜가도 한참 비켜간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헬 코리아'도 아니고 '헬 조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아니라 16세기나 17세기의 조선시대와 비슷하다는 걸 은연중에 비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판 음서제도라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한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에 의한 낙하산 인사나 특채의 만연, 갈수록 악화되는 소득 양극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주택 가격의 상승, 편법이나 탈법이 판치는 부의 대물림, 법으로 굳어진 듯한 무전유죄 유전무죄.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탈 대한민국을 부추긴 것은 그들에게서 미래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칙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현실이요, 기득권의 욕심이 빚은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일 뿐이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곧 닥칠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보았다. 젊은이가 사라진 국가의 미래가 밝을 리 없다. 해외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조차 다시 모국으로 돌아오고 싶도록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제 나라에 뿌리박고 사는 젊은이들도 강제로 내쫓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민낯임을 그들과의 대화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암울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본 것이다. 지금 권력을 가진 자, 지금 자신의 부를 누리는 자들이 당장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대한민국 전체의 미래를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들의 미래를 병들게 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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