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피폐하고 황량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똑같은 일상이 오래도록 지속되다 보면
기대감에 들떠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 하나, 둘 사라지고, 가슴 한켠으로는 마른 먼지처럼 팍팍한 느낌만 쌓이게 된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여행의 권유도, 음악회나 영화 관람의 부추김도 졸음에 겨운 나른한 오후에 의해 밀려나고 '세상에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코웃음과
함께 익숙한 권태 속으로 빠져든다.
어제는 아내가 외박을 했다. 대학을 두 번이나 다녔던 아내는 두 번째 대학의 나이 어린 동기생들과의 오랜만의 만남에 몹시 들떠 있는
목소리였다. 대학 시절,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홀로 지냈던 아내는 그 시절에 사귄 동기생들과 매우 각별하게 지냈던 듯하다. 다들 결혼을 하고,
각자의 삶에 얽매어 전화와 문자로만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우연처럼 만났으니 오죽이나
반가웠으랴.
나는 어제, 윤기가 도는 아내의 전화 목소리에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반복되는 일상에 아내도 많이 힘들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짠했다. 좋다는 곳 어디를 가더라도, 맛있다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 누구를 만나도 그저 덤덤할 뿐 이렇다 할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나로서는
아내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는 건 아니었으나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벗어날 수 없는 무게는 가슴에 와 닿았다.
봄부터 이어진 가뭄은 단풍이 물든 이 가을에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공기는 나날이 건조해지고 대기중에는 미세먼지의 농도만
높아지고 있다. 날씨도, 내 마음도 풀리지 않는 '건조주의보'는 여전히 계속되는 셈이다. 대지를 적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졌으면,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