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은 당신의 '영혼'이 아니라 당신의 '깊은 사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오래전 기억들을 뒤져보면 그의 '얼굴'보다는 그의 '태도'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언젠가 했던 당신의 '깊은 사유'는 허공에 쌓인 시간의 지층 속에 오롯이 남아 긴 세월 동안 화석화 과정을 거칠 것입니다. 당신의 '깊은 사유'가 종이에 기록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이 없는 세상의 먼 훗날에 태어난 누군가가 얼굴도 알지 못하는 당신의 '깊은 사유'를 마치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손길처럼 아주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붓질을 통해 발견해내고, 인류 영혼의 발전에 기여한 당신의 '깊은 사유'를 보물인 양 기릴 것입니다.


행복한 기억들은 순간인 양 흩어질 뿐, 당신을 '깊은 사유'로 이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살았던 당신의 삶이 '깊은 사유'로 인해 비로소 빛나는 삶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세나 전생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꾸며낸 허구라 할지라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후세의 누군가가 시간의 지층 속에서 화석으로 변한 당신의 '깊은 사유'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건 단 1%의 가능성일지라도 과학이자 부인할 수 없는 논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말초적인 기쁨이나 가벼운 행복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극히 가볍기만 한 인간이 자발적인 고통을 통해 끊임없는 '깊은 사유'의 길을 걷는다는 건 있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시간만큼은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깊은 사유'의 길로 스스로를 이끌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들어 놓은 '깊은 사유'의 유물들이 시간의 지층 속에서 화석처럼 존재하는 한 인류는 풍요로운 영혼을 간직한 채 자신의 삶을 유익한 시간으로 채워 나갈 것입니다.


나는 지금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을 읽고 있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존스 씨를 몰아낸 나폴레옹과 스노우볼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자, 동무들, 지금과 같은 우리의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똑바로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단하며, 또 아주 짧게 지나가 버립니다. 이 세상에 툭 던져지면,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먹이만 받아먹으며, 숨이 붙어 있는 한은 젖 먹던 마지막 힘까지 다 짜내어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 쓸모가 없게 되면, 정말 끔찍하도록 잔인하게 도살을 당합니다. 영국 땅의 어떤 동물도 한 살이 넘으면 행복과 여가란 꿈도 못 꾸는 일입니다. 이들에게 자유란 없습니다. 우리 동물들의 삶은 이처럼 비참하게 죽도록 일만 하는 것입니다." (p.29 동물농장(소담출판사) 중에서)

유난히 자유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만든 검찰 공화국의 대한민국은 이미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조지 오웰은 돼지들이 장악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그렇게 상상했을지도... 현충일까지 이어지는 짧은 연휴의 첫날,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동물농장>을 현실과 견주면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시간의 지층에 남은 조지 오웰의 화석을 마치 고고학자라도 된 양 조심스레 더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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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담장을 따라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붉은 너울과도 같은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우리네 삶에서 필요한 것은 생존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삶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이 우리 곁에 넘치도록 가득하다는 걸 시시각각 깨닫게 된다. 넝쿨장미 몇 송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5월을 장식하는 넝쿨장미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신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준비하셨구나, 생각할라치면 풀꽃 하나 떠가는 구름 한 장에도 눈길이 가게 되는 것이다. 우주의 작은 티끌에 불과한 각각의 인간들을 위하여...


사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고, 우주에 담긴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았던 민족이다. 살아서 집을 지을 때도, 죽어서 묏자리를 잡을 때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때와 장소를 가린다는 것은 자연에 담긴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와 같은 순수한 의지로 반만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 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푸른 희망이다. 그런데 그 역사의 현장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겠다는 작자들이 있다.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음식 반입을 철저히 금하는 박물관에서 만찬을 열겠단다. 무식도 그런 무식이 없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 대통령이야 유물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역사적 가치와 보존을 위한 지침에도 취약하다지만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식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위안부 피해 보상금이 밀린 화대'라느니 '러브샷을 하려면 옷을 벗고 오라'는 등 역사의식도 없고 윤리 의식도 없는 작자들이 정부 요직에 앉아 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니 나라의 꼴이 참으로 우습게 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는 오직 개인의 욕망과 권력의 실현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자 이뤄야 할 목표인 듯 보인다. 그런 자들에게 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선조들의 순수한 영혼이 깃든 여러 유물을 병풍 삼아 술잔이나 기울이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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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2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은 그렇다치고 안주가 문제군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안주가 필요했을까,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꼼쥐 2022-05-24 15:46   좋아요 0 | URL
아무리 안주가 필요했어도 그렇지 선조들의 얼이 서린 유물을 안주로 삼을 생가글 하다니...ㅜㅜ 꼴통들이 한둘이 아닌 모양입니다.
 

밤새 도둑비가 내렸는지 새벽 공기는 적당히 서늘했고, 메말라 풀석풀석 흙먼지만 일던 등산로도 촉촉한 습기를 머금고 부드러워졌다. 등산로 초입의 나무 계단을 오르자마자 달콤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취할 만큼 전해오고, 깊어진 솔향이 남았던 졸음을 말끔히 씻어내는 듯했다. 공기는 더없이 맑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낮은 톤의 멧비둘기 울음소리가 어두운 하늘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새벽 정적을 깨는 꿩의 새된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징검다리 연휴가 있었던 지난 주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겹쳐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겠다는 헛된 희망은 애시당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들과 함께 이천 호국원에 들러 부모님을 참배하고, 장인어른이 계시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들르기도 했다. 주말에 어버이날이 겹친 까닭인지 참배객은 생각보다 많았다. 장인어른이 떠나신 후 넓은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시는 장모님을 뵙고 잠시 말벗이 되어 드린 게 고작인데 연휴는 금세 사라졌고, 일로 쌓인 피로를 풀기는커녕 장거리 운전으로 누적된 피로가 더해져 몸은 천근만근 녹초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친구의 호출을 받고 나가 듣기도 싫은 정치 얘기를 두 시간 남짓 듣기도 했다.

 

서울의 모 사립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친구는 한때 보수 여당의 국회의원 연설문을 대필해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여러 선거판을 경험한 베테랑 선거꾼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인지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지방 광역시의 구청장 선거운동을 돕고 있다고 했다. 나는 딱히 관심도 없었고, 그들이 어떤 이력을 가진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의 말은 귓등으로 흘러가게 두었다. 단 하나 기억에 남았던 것은 그들이 선거에 임하는 자세 혹은 전략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의 이념 지형을 진보와 보수 양쪽이 절반 대 절반으로 나뉜다고 보았을 때, 굳이 상대 쪽의 표를 가져오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열성 지지층을 위한 정책과 선거운동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지지자들을 통한 중도층의 포섭에 공을 들인다는 전략이었다. 많은 중도층을 포섭할 필요도 없이 선거에 이길 만큼의 표, 이를테면 0.7%의 중도층만 있어도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까닭에 진보 세력은 국민으로 보지도 않고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제거해야 할 암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이러한 선거전략 때문인지 보수 여권의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뻔뻔함'을 장착한 채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였다. 당선인은 지방선거 후보자를 대동한 채 선거운동에 앞장섰고, 청와대의 용산 이전과 대통령 관저의 외교부 공관 이전을 밀어붙이고,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입법에 대해서는 국회의장실 앞에서 농성을 벌이거나 국회의장에 대한 성희롱성 발언도 서슴지 않고, 성상납 의혹을 받는 당대표도 별것 아니라는 듯 행동하고, 아무리 많은 흠결이 있는 장관 후보자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인물이면 철저히 옹호하고, 자신들을 비판하는 언론사가 있으면 항의 방문 및 협박이나 고소 고발도 불사하고, 무시해도 될 만한 사람들(이를테면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등)에 대해서는 상대도 하지 않는 것 등은 어쩌면 그들의 선거 전략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정치학 서적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 비하면 진보 세력은 너무 순하거나 샌님처럼 조용한 사람들만 있는 듯하다. 물론 어떤 못된 짓도 묵인하고 찬양 일색의 기사를 써주는 언론이 있기 때문에 보수 여당의 정치인들이 뻔뻔함으로 무장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서양 정치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있다고 하면 동양에는 이종오의 <후흑학>이 있다고들 한다. 이를테면 이종오의 <후흑학>이 동양 정치인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셈인데 사실 이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보인다. 비록 나는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한 <후흑학>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몇 년 전에 겨우 읽어보았던 터라 '후흑학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자신 있게 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다. '후흑'이라는 말은 낯이 두껍다는 면후(面厚)와 시커먼 속마음을 뜻하는 심흑(心黑)이 합쳐진 것으로 얼굴은 철면피처럼 두껍게, 마음은 음흉하게 하여 철저히 자신을 숨겨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의 정치 처세술을 담은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할 수 있다.

 

"군자는 그 자신이 늘 낯가죽이 두껍지 않을까 경계하고 속마음이 시꺼멓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얇은 것같이 위험한 게 없고 흰 것같이 위태로운 것이 없다. 이로 인해 군자는 반드시 뻔뻔하고 음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후'라고 하고 한 번 터지면 거리낌이 없는 것을 일컬어 '흑'이라 한다. 뻔뻔한 것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며 음흉한 것은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지극한 후흑의 단계에 이르면 천하가 두려워하고 귀신도 무서워한다."

 

간첩 조작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를 공직 기강 비서관으로 앉히는 등 말도 안 되는 일련의 행위들이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공직자 모두가 그들의 정책에 반기를 들기만 하면 조작을 해서라도 감옥에 보내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공정과 상식이리라. 밤새 도둑비가 내려 한결 깨끗해진 대기가 불결한 인간들의 탐욕과 아귀다툼으로 더럽혀지는 오늘 그리고 내일은 또 어떤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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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2-05-09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려워요 ㅜ

꼼쥐 2022-05-14 17:59   좋아요 0 | URL
5년이 너무나 긴 시간일 듯합니다.ㅜㅜ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인 <논어>는 전 20편, 482장, 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현실에서 <논어>를 언급하는 자체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 보입니다. 물론 <논어>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가슴에 새길 만한 명문장이고 책으로서의 가치 역시 현대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명작 고전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고리타분하고 앞뒤가 꽉꽉 막힌 '꼰대'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널리 퍼져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용의 방대함으로 인해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기도 하는 <논어>는 한 편 한 편이 각각 저마다의 특색이 있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가슴에 새길 명구들로 가득합니다. <논어> 제15장 위령공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자공문왈, 유일언이가이종신행지자호) '子'曰, 其恕乎, 己所不慾 勿施於人(자왈, 기서호, 기소불욕 물시어인)

해설: 자공이 공자께 질문하여 말씀드리기를 "평생 귀감으로 삼고 실천해야 할 말 한마디가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마도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말이다."


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子貢問爲仁. 子曰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居是邦也, 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자공이 공자에게 어떻게 인을 행할 수 있는지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장인이 자신의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먼저 연장을 날카롭게 해야 하는 법이다. 한 나라에 살면서 어진 관리를 섬기며, 그 나라의 어진 사람을 벗으로 삼아야 한다.")


차기 정부를 책임질 장관 후보자들의 면면을 뉴스에서 듣고 있노라면 어느 한 사람도 제대로 살아온 사람이 없는 듯합니다. 그들의 축재 과정도 그렇고, 자식을 돌보고 가정을 이끄는 과정 역시 정상적이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장관 후보자가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곧바로 수사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대통령 선거 내내 줄기차게 주장하던 공정과 상식은 바로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지껄인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불법행위는 검찰의 조사도 없을 테고, 준엄한 법의 심판도 피해 갈 수 있을 테니 그들은 아마도 자신을 지켜줄 어진 관리(?)를 섬기며, 어진 사람(?)을 벗으로 삼아 온 모양입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 역시 어진 사람들인 까닭에 천인공노할 그들의 불법행위를 보고도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고 차기 선거에서도 그들을 위해 투표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까닭에 그들의 불법행위는 나날이 대범해질 듯합니다.


한 차례 봄비가 지나간 후 무덥던 날씨는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오늘은 일요일이자 근로자 날. 취임도 하지 않은 대통령 당선인은 벌써부터 자신의 공약을 하나둘 폐기하고 있고, 느닷없는 정치 풍경에 다소 뜨악할지라도 우리는 이 봄을 의지하여 새로운 희망을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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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많이도 올랐다. 생각 없이 물건을 사다가도 영수증에 빼곡히 적힌 품목 하나하나의 물건값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바코드에 찍힌 가격을 그대로 더한 것이니 틀릴 까닭이 없겠지만 혹여라도 구매한 물건의 개수가 하나인데 둘로 계산된 것은 아닌지, 매대에서는 분명 가격 할인 이벤트 중이라는 문구를 보았는데 할인가가 아닌 정상가로 계산된 것은 아닌지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으면서도 몇 번을 확인하게 된다. 제대로 계산된 영수증임을 잘 알면서도 과하다 싶은 생각에 뭔가 톡톡히 손해를 본 느낌이 들고, 다른 누군가에게 억울한 마음을 따져 묻고 싶은 것이다.


친구와 함께 모처럼 점심을 같이 하면서도 메뉴판의 음식 종류보다는 가격에 먼저 눈이 갔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사람들은 다들 거리낌 없이 음식을 주문하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담소를 나누는데 나만 괜히 좀스럽게 구는 게 아닌가 싶어 한풀 기가 꺾였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밤에도 불을 끄지 않고 자는 게 습관이 되었다는 친구의 푸념 섞인 하소연이 있었다. 불을 켜 놓은 채 잠이 들면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는 건 알지만 불을 끄는 게 왠지 싫다고 했다. 부모와 떨어져 직장생활을 하는 딸과 지방에서 약대를 다니는 아들이 있는 친구는 외지로 자식들을 떠나보낸 후 유난히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덩그러니 부부만 남은 집에서 텔레비전의 소음도 없는 적막을 한 꺼풀 어둠으로 감싼다는 게 어디 그리 달가운 일일까마는 그 복잡한 심정마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면...


썩은 열정(경상도 사투리로는 '석은 열정' 되시겠지만)의 횡포가 도를 넘고 있는 느낌이다. 어린 훈이를 장관에 내정했다는 소식을 속보로 들었을 때 사무실 직원들 모두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저건 아니지!"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설마..." 하면서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썩은 열정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해치고 결국에는 멀쩡했던 자신의 생명을 잃고 마는 경우를 목도하게 된다. 썩은 열정이 건강한 몸과 맞짱을 뜨는 형국이랄까.


내일 4월 16일은 세월호 8주기. 나는 지금 이해인 수녀님의 <꽃잎 한 장처럼>을 읽고 있다. 2021년 4월 16일에 있었던 수녀님의 메모를 옮겨본다.


"오늘은 세월호 7주기! 나는 왠지 오늘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아픈 느낌이 드네. 지난번엔 이곳을 다녀간 주희.솔비와도 문자로 대화를 하고, 죽은 덕하의 엄마 김상희(사라) 씨와도 문자를 주고받았지. 오늘 방영하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으나 나는 <열여덟의 기억, 스물다섯의 약속> 외엔 슬퍼서 보게 되질 않는구나. 더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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