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어떤 작가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첫 작품이 문단 안팎으로 크게 주목을 받는 것은 물론 독자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고, 어떤 작가는 십수 년째 작품을 쓰고는 있지만 그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첫 작품에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작가는 대개 야심 차게 준비한 두 번째 작품부터 문단의 주목은커녕 독자들에게조차 매몰찬 외면을 받음으로써 이후 영영 잊힌 작가로 남겨지곤 한다. 반면에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긴 시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던 작가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관심을 끄는 한 작품으로 인해 이전 작품까지 덩달아 주목을 받는 경우도 있다. 물론 첫 작품부터 주목을 받아 쓰는 작품마다 꾸준한 인기를 누리는 더없이 행복한 작가도 있지만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사실 오랜 시간 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를 겪어온 저자가 정신과 전문의와 나눈 12주간의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인데, 처음에는 책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독립출판물로 소개됐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단행본으로 세상에 나온 흔치 않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SNS가 크게 한몫을 했으리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규모 행사와 함께 대형 출판사에서 공을 들여 내놓은 작품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출판 시장에서 단지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작가에게도 큰 행운이 아닐 수 없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있어 한 작품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다음 작품을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신인가수나 갓 등단한 작가의 1집 혹은 데뷔작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차기작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를 두고 '서퍼모어 징크스'라고 한다. 메이저리그의 슈퍼 루키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작가에게 있어 '서퍼모어 징크스'는 아마도 부담감보다는 조급함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재능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 첫 작품에 큰 성공을 거둔 작가가 우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글을 쓴다는 건 어느 정도 숙성의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첫 작품에서 성공을 거둔 작가는 다른 작가보다 더욱더 긴 시간 동안 침묵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작가 본인을 위해서, 또는 작가의 재능을 사랑하는 독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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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낙관주의자 - 심플하고 유능하게 사는 법에 대하여
옌스 바이드너 지음, 이지윤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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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래, 맞아' 하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들 중에는 전부터 알던 것들도 있고 최근에 새로 알게 된 것도 있겠지만 기억의 시차와는 상관없이 개인의 경험과 지식의 축적에 따라 저절로 공감하게 되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말들은 약간의 개인차는 있다 손 치더라도 불신 가득한 사람들에게조차 그것들이 마치 변하지 않는 진리인 양 믿어지도록 하는 막강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이 40이 넘으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 링컨 대통령의 말도 그중 하나이다. 흔히들 20대까지의 얼굴은 부모가 만들고, 30대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만들며, 60대 이후의 얼굴은 자식들이 만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중년 이후의 얼굴은 자기 삶의 투영이며, 그가 겪은 사회적 활동과 역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얼굴이 곧 그 사람'이라는 등가성을 가능하게 한다. "성격은 얼굴에 나타나고, 생활은 체형에 드러나고, 본심은 태도에 나타나며 감정은 음성으로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얼굴 표정과 주름살 하나하나에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까닭에 얼굴은 그 사람의 삶의 이력인 동시에 가치관과 같은 한 인간을 형성하는 무형의 요소, 즉 우리 영혼의 집합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계 최고의 심리학 전문가이자 낙관주의자인 옌스 바이드너 박사는 그의 저서 <지적인 낙관주의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흔한 편견(이를테면 웃음이 많은 사람을 두고 실없다거나 현실감각이 없다거나 신중하지 못하고 가볍다거나 아무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아도 경솔하다고 하는 등 낙관주의자에 대한 지독히 부정적인 인식)을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비관이나 무기력이 아닌 낙관주의라고 역설한다. 저자는 낙관주의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그중 '지적인 낙관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낙관주의 형태라고 설명한다.

 

"최고의 낙관주의자는 회색지대 대신 큰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걸 선호한다. '불가능'이란 단어를 들으면 그의 마음속엔 도전정신이 발동한다. 호기심을 자극해 무언가 대담한 일을 시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최고의 낙관주의자라고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고의 낙관주의자는 그걸 시도하거나 꿈꾸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긍정적 도움을 줄 준비를 하고 있다." (p.129)

 

저자가 말하는 '지적인 낙관주의자'는 현실적이되 비관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적이되 지나친 긍정에 도취되지 않으며, 분별력 있고 현실적이면서도 친절을 잃지 않고, 가진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즐겁게 살며 자신과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순응하면서 성취한 성공 경험이 차곡차곡 쌓임에 따라 그들의 낙관주의는 더욱더 단단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지적인 낙관주의'가 아닌, '목적 낙관주의자'나 '순진한 낙관주의자'나 '숨은 낙관주의자' 또는 '이타적 낙관주의자'라 할지라도 비관주의자로 사는 것보다 보다 나은 삶이 보장되는 까닭에 무조건 낙관주의자가 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개인의 성향이나 가치관이 마치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낙관주의나 비관주의 또한 개인의 선택이 아닌 선천적인 것으로, 고정불변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낙관주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개인적인 태도와 교육, 사회의 영향력과 직장에서의 경험이 어우러진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낙관주의는 고정불변의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학습이 가능한 가변적 습성일 뿐이라고 말한다.

 

"낙관주의자를 만드는 사회화 과정은 올바른 학습, 올바른 태도, 정확한 시점의 올바른 행동에 달렸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물론, 연구결과나 현장사례를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현명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낙관주의자가 되는 기반을 견고하게 다진 셈이다. 이미 기술한 대로 낙관주의자가 살아가는 놀라운 방식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p.268)

 

저자는 낙관주의자가 누리는 장점을 '긴 수명, 빠른 회복력, 채용과정에서 선호되는 태도, 유쾌한 기분, 직업적 성공, 좋은 배우자, 긍정적 자기평가'로 요약한다. 낙관주의가 건강에도 유익하다는 사실은 의학적 긴 설명을 차용하지 않아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볼수록 긍정적인 기운이 그의 얼굴에 즉시 드러난다. 그것이 반복되면 표정이 되고, 대인관계가 많은 사람은 상대방의 표정만으로도 성격이나 삶의 이력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이란 자신이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지만 그 모든 게 자신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누군가 정리한 '효도십훈'에 보면 "밝은 얼굴과 공손한 말씨로 부모를 대해라."라는 말이 있다. 얼굴 표정을 밝게 한다는 건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니, 이것이 자신의 부모에게는 '효'요, 사회로 확대하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예의'나 '처신'이 될 수도 있다. 예의가 바르고 처신이 올바른 자가 성공하지 못할 리 없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던가. 불쾌지수가 높은 요즘, 자신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게 아니라 얼굴을 펴고 세상을 향해 밝은 기운을 보내는 게 어떨지. 그것이 효도이자 예의라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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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나면서 천방지축 날뛰던 폭염의 기세도 한풀 꺾인 듯 한결 누그러진 느낌입니다. 물론 아직도 한낮에는 30도를 훌쩍 웃도는 지독한 더위가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40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는 이제 없을 듯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폭염이 이어지던 때만 하더라도 하늘 저편으로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보이기는 했지만 비를 머금은 먹장구름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며칠 전부터 이따금 몰려온 먹구름이 적선하듯 찔끔 비를 뿌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계절은 그렇게 가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평소에도 텔레비전을 잘 보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짙어진 듯합니다. 책을 읽는 것과는 달리 텔레비전을 한동안 넋 놓고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무거워지는 걸 느낍니다. 몸도 나른하고 머리도 무겁고 컨디션이 영 좋아지지 않는 것이죠. 그럼에도 텔레비전을 완전히 끊을 수 없는 걸 보면 저도 일종의 텔레비전 중독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에 본 것 중에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벌어졌던 사법 농단에 대한 뉴스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닐지라도(어쩌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재판을 하나의 거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공공연한 비밀로 전해져 왔고, 그 정도야 자본주의 국가에서 암덩어리처럼 존재하는 어떤 것쯤으로 인식되었지만 권력에 유착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사법부 전체가 나섰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재판 결과가 누군가에게는 전 생애를 걸 만큼 중요한 일이지 않았을까요? 그런 걸 생각한다면, 적어도 같은 인간이라면 양심에 꺼려 그런 일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었을 듯합니다.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그 문건이 주는 무게를 실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등골이 서늘하고,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을 듯합니다. 계엄령 하에서 개인의 생명이나 인권은 아주 하찮은 것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던 이전 정권의 적폐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고 노회찬 의원의 빈자리가 새삼 크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국민을 철저히 우롱했던 보수정권 9년의 폐해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자 전원을 처벌해야 마땅할 터인데 이번에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야무야 처리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날씨가 더운 까닭에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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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이 기우뚱 균형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심각하게 균형을 잃은 듯 보여도 정작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심각하게 기울어진 인생을, 가파른 경사를 한쪽 팔로 간신히 지탱한 채 겨우겨우 살고 있지만 기울어진 삶에 평생 동안 길들여진 까닭에 가파른 경사의 심각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들은 남들처럼 평탄한,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삶'으로 회귀했을 때, 이제야 비로소 삶의 균형을 찾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오히려 팍팍한 삶의 경사에서도 느끼지 못한 지독한 삶의 멀미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지독한 삶의 경사를 겪으며 인생이라는 원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을 조용히 회고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은 어쩌면 자신의 삶이 균형을 잃었다는 사실을 미처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곤 합니다. 자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의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기울어진 경사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거나, 숙명처럼 감수하며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타인과 나를 비교조차 하지 못한 채.

 

견딜 수 없이 심한 불안이 엄습할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정보를 차단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여 자신이 얼마나 가파르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한다고 한들 자신에게는 심한 자괴감과 열등감만 주어질 뿐 현실에서 자신의 삶은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삶이 기우뚱 균형을 잃었다고 느낀다는 건 그동안 자신의 삶이 평탄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것의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처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지요.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음은 물론 원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삶이지요. 우리 주변에서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하겠지만 물론 그 수는 적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일 테지요. 그러나 삶의 원판이 아래로 기운 사람과 극히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위로 기운 사람 중 삶의 변화에서 누가 더 취약할까요? 나는 아무래도 위로 기운 사람이 아닐까 추측하게 됩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건 그들로부터 보고 듣는 게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참고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 중에는 극단적인 경향의 한 남자를 스토리의 전면에 내세워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독립기관>이라는 제목의 단편이 그것인데, 그 소설에 등장하는 '도카이'라는 인물은 특이하기 이를 데 없지요. 롯폰기에서 '도카이 미용 클리닉'을 운영하는 성형외과 의사인 그는 쉰두 살의 독신남입니다. 의사였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클리닉은 경영이 매우 순조로워서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언행이 점잖고 교양도 있는 사람이지요. 고급 아파트에서 혼자 살지만 요리도 척척 해내고 집안일도 별문제 없이 해내는지라 부족함 없는 삶이었습니다. 다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픈 마음이 아예 없었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결혼을 전제로 하는 여자는 처음부터 멀리했습니다. 그것 하나가 문제라면 문제였지요. 그가 여자친구로 선택하는 상대는 대개 유부녀이거나, 따로 '진짜' 연인이 있는 여자들로 한정되었습니다.

 

여자 문제로 트러블을 겪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그였지만 결국 그는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고등학생 시절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단순한 만남만 이어가고자 할 뿐 가정을 깨고 싶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아이가 하나 있는 가정주부였죠. 도카이로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도, 가정을 깨기 싫다는 그녀의 마음도 어떻게 통제할 방법이 없었기에 모든 걸 내려놓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급기야 그는 곡기마저 끊고 서서히 죽어갑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흔들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죽음에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분명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혹은 단순한 기교의 나열로 끝나버릴 것이다." (p.169 '독립기관' 중에서)

 

작가는 최근에 나온 그의 인터뷰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도카이라는 인물이 '죽음에 붙들려버린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그 도카이라는 인물은 죽음 자체에 홀렸다고 할까, 죽음에 붙들려버린 사람이니까요. 도망치려야 도망칠 수 없는, 일종의 숙명이죠. 작가인 제게는 기정사실이었고. 도카이라는 인물은 지금껏 자신만의 시스템에 따라 매우 편하고 쾌적하고 즐겁게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음'에 뒷덜미를 잡혀버려요. 더는 벗어날 수 없게. 이제껏 쌓인 청구서가 날아온 건지, 혹은 숙명이었는지, 인간의 업 같은 것인지, 그저 운이 나빴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죽음이 덜미를 잡고 놔주지 않는다. 다른 수가 없죠. 그런 것에는 리얼리즘이고 뭐고 없거든요. 한번 붙들리면 끝장이니까."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중에서)

 

'명랑하고 건강하고 미식가에 멋쟁이였던' 도카이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모습을 반추할 만한 주변 사례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삶의 원판이 위로 기울어진 사람은 그 사례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시스템과 통제 하에 두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시스템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절벽을 만났을 때 그는 아마도 손을 쓸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작가는 그런 의외성,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결과로 작용할지라도 우리도 모르는 어떤 '기관이 개입'하는 듯한 돌발적인 상황을 맞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재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가끔은 삶이 기우뚱 균형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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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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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어떤 순간에도 그것만은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이를테면 청소년기에 저질렀던 우연한 범죄와 그것에서 잉태된 수많은 이차범죄는 모두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자 했던 본능적 동기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나쁘게 각인시키고 싶지 않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이른 나이에 별 뜻도 없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평생 동안 범죄자라는 오명과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죄를 감추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까닭에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거짓과 위선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던 작은 몸짓에서 잉태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알고 지내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면 자신의 범죄를 숨기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될 터였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남은 인생과도 직결되는 문제일 테니까 말이다.

 

"관건은 그거야, 에디. 찬송가를 부르거나 가공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십자가를 걸고 다니거나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남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거지. 착한 사람은 종교가 필요 없어.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감이 있거든." (p.230)

 

영국의 신예 작가 C.J. 튜더는 그녀의 데뷔작 <초크맨>을 통하여 평화로운 작은 마을 앤더베리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곳에 사는 다섯 명의 열두 살 또래 친구들은 1986년 어느 날 숲 속에서 끔찍한 사건 현장을 목격한다. 낙엽 더미에 숨겨진 여자의 시신. 마을 축제에서 춤을 추던 댄싱걸 일라이저의 시신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에디는 또래 친구들 중 한 명이다. 학교에 새로 부임하게 된 핼로런 씨와 에디는 축제 현장에서 큰 부상을 입은 일라이저를 함께 구조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죽은 일라이저와의 조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죽음은 우리 같은 어린 아이나 우리 주변이 아니라 다른 데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죽음은 추상적이고 먼 일이었다. 나는 아마 션 쿠퍼의 장례식을 통해 서늘하고 시큼한 입김 바로 그 너머에 사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의 가장 놀라운 전략이다. 그의 차갑고 어두컴컴한 소매 속에는 전략이 많이 숨겨져 있다." (p.164)

 

또래 친구들의 면면은 이러했다. 바를 운영하는 부모님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하는 뚱뚱보 개브, 불량배 형을 둔 메탈 미키(교정기를 끼고 있어서), 청소 일을 해주며 생계를 이어가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호포, 마을 교회의 목사인 마틴 씨의 딸인 니키(또래 중 유일한 여자였다), 그리고 의사인 엄마와 작가인 아빠를 둔 에디. 핼로런 씨가 부임하면서 아이들은 선물로 받은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각자 자신만의 색을 정하고 약속한 막대 그림을 통하여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곤 했다. '놀이터로 와' 또는 '숲 속으로' 등과 같은 그들만의 메시지를.

 

"나뭇잎들이 오그라들고 쭈글쭈글해지다 결국에는 힘없이 나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시들시들하게 죽어가는 분위기가 모든 것에 스며들었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신선하거나 다채롭거나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온 마을이 자기만의 부연 타임캡슐 안에 갇혀서 잠시 유예됐다." (p.255)

 

숲에서 미키의 형인 션 쿠퍼의 패거리들과 우연히 마주쳤던 에디와 그의 일당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고 그 후 에디는 션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에는 붙잡혀 곤욕을 치른다. 그 장면을 목격한 핼로런 선생님의 도움으로 션 패거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에디는 자신의 몰골을 보고 걱정하실 부모님을 생각해서 핼로런 선생님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가기로 한다. 에디는 일라이저를 그린 핼로런 선생님의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된다. 서른이 넘은 독신남과 십대 후반의 일라이저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션 쿠퍼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자전거가 물속에 있는 것을 보고 건지러 들어갔다가 물에 빠져 익사한다. 션이 사고를 당한 지점에서도 누군가가 그린 분필 그림이 있었다. 형을 사고로 잃은 미키는 형의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또래 친구들로부터 멀어진다. 에디의 엄마는 그들이 사는 앤더베리에 병원을 개원하려 한다. 그러나 낙태를 반대하는 마틴 목사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일라이저의 친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어느 날 마틴 목사는 교회에서 누군가로부터 심한 폭행을 받고 쓰러진다. 교회에는 초크맨 그림이 가득했다. 니키는 마틴 목사와 이혼한 엄마의 집으로 이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초크맨 그림을 따라 숲 속으로 갔던 아이들은 숲 속에서 일라이저의 토막 난 시신을 발견한다.

 

"그웬은 의자에 제대로 앉아서 텔레비전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그녀의 세상 속으로 아니면 제삼의 세상 속으로 길을 잃는다. 현실과 현실 사이의 그 얇은 막 속으로. 어쩌면 이성이 길을 잃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다른 공간을 거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p.264)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6년, 에디는 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개브는 부모님의 바를 물려받았고, 호포는 치매를 앓는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또래 친구들 다섯 명 중 마을에는 이제 그들 세 명만 남았다. 그들에게 전해진 초크맨 그림과 분필. 일라이저의 죽음을 소재로 책을 쓰고 싶다던 미키가 에디의 집을 방문했던 그날 술에 취해 돌아가던 중 물에 빠져 숨을 거두게 되는데... 소설은 그렇게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작가는 2016년과 1986년을 오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사춘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또래 친구들의 유대와 그럼에도 어린 시절에는 차마 밝히지 못했던 그들 개개인의 비밀들, 그리고 어른들의 위선과 폭력이 조금씩 드러난다. 작가는 유려한 필체와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장르 소설로서의 한계를 극복해나가고 있다. 데뷔작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탁월한 구성과 빼어난 글솜씨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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