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 소담 클래식 5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안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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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랑은 평가하고 음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하기 일쑤여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은 결국 사랑이 모두 끝난 시점에 쓰일 수밖에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게 되는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과거 어느 시점에 대한 회고록이거나 체험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현재 시제로 변형되었다 할지라도.


막스 뮐러의 생애 유일한 소설인 <독일인의 사랑>은 한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낭만적인 사랑을 언어학자였던 작가가 시적인 문체로 그려 낸 아름다운 소설이다. 물론 사랑을 에둘러 표현할 줄 모르는 현대인이 읽기에는 다소 오글거린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젊은 남녀의 사랑이 이렇게 지적이고 이상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놀랍게 다가온다. 물론 그처럼 이상적인 사랑을 구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자 주인공인 마리아가 일생을 병상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에서 기인하는 바 크지만 그럼에도 혈기왕성한 남자 주인공인 '나' 역시 마리아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철학이나 종교적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퍽이나 존경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다가 인생의 폭포라는 것이 다가오게 된다.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기억에 남아 있어 우리가 그곳을 멀리 지나 영원이라는 고요한 대양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을 때에도 먼 곳에서 그 폭포수가 쏟아지는 웅장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소리는 우리에게 남아 우리를 앞으로 전진시키는 인생의 추진력까지도, 그 근원과 영향력을 폭포수로부터 얻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p.39)


'첫 번째 회상'에서 시작하여 '일곱 번째 회상'을 거쳐 '마지막 회상'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의 기억이 시작되는 유년기로부터 사랑의 싹이 트는 청소년기를 거쳐 사랑이 무르익는 청년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각각의 회상에 소상히 담고 있지만, 여자 주인공인 마리아의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두 남녀의 사랑이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서둘러 막을 내리게 된다는 점은 독자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나'가 병상에 누워 지내는 마리아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 모두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 역시 먼 훗날 그 시절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평가한다는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사랑이 계속되던 시점에서 두 남녀의 감정은 무척이나 애달픈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위안이 되고 그녀는 나의 휴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인생이란 결코 장난이 아니다. 두 영혼은 열풍에 불려 모였다가 허물어지는 모래알 같은 게 아니다. 다정한 운명의 손길이 우리에게 안내해 준 영혼들을 우리는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살고 싸우고 죽는다면 그 어떤 힘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리라."  (p.94)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마을의 지체 높은 후작 부부를 알현하게 되고 이때부터 후작의 성을 드나들며 그의 자녀들과 어울려 지낸다. 후작에게는 현재의 부인이 낳은 자식들 말고도 사별한 전처 소생의 마리아라는 딸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병약하여 늘 침대에서 누워 지내는 처지였다. 자신의 생일이자 견신례를 받은 날 마리아는 언젠가 자신이 하느님 곁으로 가더라도 자신을 기억해 달라며 손에 끼고 있던 반지들을 빼서 이복동생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준다. 그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동생들만큼 그녀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는데, 이를 본 마리아가 자신이 죽을 때 끼고 가려던 반지를 나에게 건넨다. 그러나 '나'는 '네 것은 다 내 것'이라는 말과 함께 거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한동안 고향에서 떨어져 지내던 '나'는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고,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게 된다. 그날 이후 매일 저녁 마리아를 찾아간 '나'는 그녀와 예술과 종교 등 여러 주제로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를 돌보던 노년의 의사가 찾아와 마리아가 시골에 있는 성으로 요양을 떠날 테니 다시는 방문하지 말라는 통보를 한다. 이에 낙담한 '나'는 여행을 떠나게 되고...


"나는 적막 속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었다. 뇌의 활동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무엇을 생각해도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 지상에 나 홀로 있어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느껴졌다. 대지는 관과 같았고, 검은 하늘은 시체를 감싸는 마포 같았으며, 아직도 내가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지가 이미 오래된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p.140)


사랑하기 좋은 계절 가을이 왔다. 한낮 기온은 한여름처럼 여전히 뜨겁지만 말이다.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은 사랑에 대한 체험을 시적으로, 때로는 철학적으로 그린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삶 전체가 사랑의 기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막스 뮐러 역시 대상은 서로 다를지언정 '나'의 회상과 회상 전반에서 사랑에 대한 기억을 빠트리지 않고 있다. 유년기에는 부모님의 사랑이 청소년기와 청년기에는 친구와 연인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장년기에는 아내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삶 전반에서 사랑에 대한 기억만 안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신에 대한 사랑이나 자연에 대한 사랑이 그가 아는 사랑의 전부인 사람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결국 사랑은 우리들 삶의 전부인 셈이다. 막스 뮐러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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