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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years ago, the arrival of Ngo Dinh Diem in Viet Nam to be the US-puppet ruler of the South; I had just completed 7th grade in a quiet town in upstate New York.

 

66년 전 베트남에 도착한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지도자가 되었다당시 나는 뉴욕 북부의 조용한 마을에서 7학년(당시 중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을 마쳤다.

 

June, 26, 1954, fifty-four-year-old Ngo Dinh Diem was a Vietnamese aristocrat from a Roman Catholic mandarin family that had dutifully served the French-controlled, imperial court at Hue, in central Viet Nam. For four years before being selected as premier, Diem had resided at Maryknoll Catholic Order headquarters in New York State under the auspices of conservative Cardinal Francis Joseph Spellman.

 

1954년 6월 26일 54살의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중부 후에의 궁전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충실하게 복종했던 중국계 로마 가톨릭교도 가문 출신의 베트남 귀족이었다수상으로 임명되기 4년 전에는 보수주의적인 프란시스 조셉 스펠먼 추기경의 후원으로 뉴욕에 있는 메리크놀 가톨릭 교단 본부에서 거주했었다.

 

France had relinquished legal control of Viet Nam on June 4, 1954, giving Viet Nam its independence. Diem’s arrival on June 26 to begin preparing for his rule was less than a month BEFORE the signing of the Geneva Agreements officially concluding the war. The agreements would stipulate unifying elections be held two years hence, but in the meantime, no introduction of arms or troops to de-stabilize any part of Viet Nam. But in fact, the US was already making sure there would be no elections. Meanwhile, at about the same time in early July that Ngo Dinh Diem formally took office as premier of Viet Nam, Ho Chi Minh renamed the Viet Minh the North Vietnamese People’s Army (NVPA).

 

프랑스는 1954년 6월 4일 베트남에 대한 명시적인 지배를 포기하면서 베트남의 독립을 승인했다디엠이 6월 26일 도착하여 통치준비를 시작한 시점은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기 위한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기 한 달조차 남지 않은 때였다제네바 협정은 2년 이내로 전국적 선거의 실시를 약속하면서동시에 군수물품이나 베트남 각지에 불안요소로 되는 병력의 배치를 금지했다그러나 미국은 총선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이미 품고 있었다한편 응오딘지엠은 7월 초엽으로 접어들 무렵 공식적으로 남베트남 수상에 취임했으며호치민은 베트민을 북베트남 인민군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President Eisenhower welcoming NGO Dinh Diem as the new US puppet ruler of South Viet Nam, 1954. Ho Chi Minh greeting villagers in Viet Nam, 1954.

 

아이젠하워는 1954년 남베트남의 새로운 미제 꼭두각시 지도자로써 응오딘지엠을 환영했다같은 무렵에 호치민은 베트남의 농촌의 인민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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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호치민(Ho Chi Minh)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하고 난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려고 했다호치민과 프랑스측은 퐁텐블로 협상(Fontainebleau Agreements)을 통해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나프랑스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베트남에게 드러냄으로써 협상은 결렬됐다그러던 1946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Hai Phong)을 무차별적으로 포격 및 폭격했다이 과정에서 최소 6,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이와 더불어 프랑스군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 하노이(Ha Noi)를 점령했다이러자 호치민은 1946년 12월 19<전 인민에게 저항전쟁 수행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하여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맞선 항전을 선포했다프랑스-베트민 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퐁텐블로 협상 당시 프랑스에 들렸던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부, 일설에 따르면 당시 호치민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 있던 생활을 떠올리며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전쟁 초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항공기와 탱크 그리고 장갑차 등과 같은 현대화된 전쟁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그에 반해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그리고 공산당이 이끄는 베트민(Viet Minh)은 혁명적 농민군과 이를 지지하는 민중들 그리고 일본군과 미국 0SS로부터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하노이 전투가 프랑스의 점령으로 끝나면서 베트민은 후퇴할 수박에 없었다그러나 베트민은 1945년에 이미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조직으로 성장한 상태였고식민지 지배를 위해 다시 들어온 프랑스군을 환영하는 베트남인들은 소수의 가톨릭과 기득권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끌었던 베트민, 베트민은 빠르게 군대를 양성했고, 1946년 12월 시점에서 정규군 6만 명을 보유했었다.)

 

거기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던 1946년 12월 베트민의 군사력은 6만 명이었으며소총을 보유한 군대는 4만 명이나 됐다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이 6만 명의 병력은 숫자 확인이 불가능한 지역의 의용대와 게릴라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라고 책에서 주장했다즉 이 얘기는 베트민이 그 숫자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1947년 1월 중순 프랑스 부대가 중국인 구역의 가장자리에 있는 시장까지 도착하자베트민군은 많은 지역 주민과 더불어 그 지역을 버리고 홍 강(Hong River)을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었는데그 전투에서 대략 수백 명의 베트민이 전사하고 프랑스군 100명 정도가 전사했었다이에 따라 호치민과 베트민의 주력부대는 북부 통킹의 근거지인 비엣박(Viet Bac) 지역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했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항복한 베트민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프랑스는 전쟁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그것이 바로 레아 작전(Operation Léa, Chiến dịch Việt Bắc)이었다당시 프랑스군이 레아 작전을 개시한 이유 중 하나는 산악과 밀림 지역에서 베트민이 농민과 열성 지지자들 그리고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민중들을 자신들 편으로 규합시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레아 작전의 목적은 8,000에 달하는 호치민 정부의 거점인 험난한 산악지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프랑스군은 랑썬과 까오방을 점령한 다음 병력을 남하시키고그러는 한편 다른 부대를 배로 홍강과 로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함으로써베트민의 중심부인 박칸을 공격하는 양면작전을 전개했다.

(레아 작전 전개도)

 

레아 작전은 박칸에 프랑스 공수부대를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됐으며프랑스군은 빠르게 진군하여 곧 베트민 본부를 찾아냈다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고호치민 정부 지배 아래 있던 몇몇 도시를 점령하는 한편 보급과 무기 생산시설을 파괴했다또한 수천 명에 달하는 베트민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한 것으로 알려졌다세계게릴라전사를 집필한 로버트 에스프레이(Robert B. Asprey)에 따르면, “마치 독일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에서 허풍을 떨었던 것처럼이곳의 프랑스군 지휘관들도 적을 포위한다고 떠들어 댔으며”, 또한 프랑스군은 적군 8,000명을 사살하고 수천 정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고 주장했으나베트민의 군사력을 오랫동안 분산시키는 데도 실패했다.”고 한다한마디로 기고만장 했었다는 것이다.

(비엣 박을 점령하고 나서 현장에서 사진을 찍은 프랑스군)

 

초기 기선 제압으로 프랑스군은 호치민 지휘부의 거점과 비엣 박의 마을들을 점령했지만궁극적으로 호치민을 체포하지 못했다참고로 호치민은 공격을 당했을 당시 사령부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지만프랑스 공수부대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즉시 탈출했다이것이 프랑스군이 호치민 사령부를 점령하기 하루 전의 일이었고다음날 프랑스군이 사령부를 점령했을 당시엔 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에 따르면프랑스군은 오두막의 책상에서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들과 호치민의 서명만 남겨놓은 편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이후 며칠 동안 프랑스군은 소탕작전을 전개 하려 했지만실제로 베트민 부대와 직접 맞닥뜨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베트민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프랑스군을 고전하게 만들었다결국 프랑스군은 병력 부족으로 얼마 후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고결국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됐다따라서 레아 작전은 궁극적으로 실패한 작전으로 종결됐다프랑스군의 염원과는 달리 전쟁은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이에 따라 여러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게릴라전에 고전했고교착된 전선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한 가지 외교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그것이 바로 바오다이 해결책(Bao Dai Solution)이었으며이것은 당연히 식민주의의 유산이라는 토대 위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세계게릴라전사 3, R.B 에스프레이편집부일윌서각, 1989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호치민 평전윌리엄 J. 듀이커정영목푸른숲,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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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 마인호프
울리 에델 감독, 마르티나 게덱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2008년 독일에서 제작한 영화 <바더 마인호프(The Baader Meinhof Complex)>를 봤다소위 68혁명이라고 하는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서구의 젊은이들은 기존의 세계질서와 가치관에 저항했다이런 저항은 무장투쟁이라는 급진적인 혹은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도 표출되기도 했다대표적으로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와 일본의 적군파가 그러했다고 할 수 있으며이런 움직임은 역으로 대중의 반발을 사기도 했었다.

(영화 바더 마인호프 포스터)

 

영화 바더 마인호프는 1960년대와 70년대 서독 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급진적인 좌파 조직 바더 마인호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영화의 시작은 이란의 왕족 샤가 독일을 방문하면서 일어난 집회부터 다루고 있다이 집회에서 시작된 충돌을 시작으로 68혁명이라는 흐름 속에서 급진적인 좌파 조직 바더 마인호프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준다성 해방과 과거사 청산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이들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걸고 자신들 나름의 투쟁에 나섰지만투쟁의 형태가 테러를 동반한 전략으로 흐른다.

 

물론 이들에게는 무장투쟁을 행할 때자신들 나름의 기준과 원칙이 있었으며최대한 그것을 준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예를 들면 독일에 있는 몇몇 은행을 습격하여 자금을 마련하는데이것은 과거 스탈린이 은행 강도 시절 부르주아 기관을 공격한다는 명분과 비슷했다서독에 있는 미군기지에 이들은 폭탄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는데이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는 닉슨 정부의 제국주의적 만행의 잔혹함을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들은 이스라엘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독일 언론사에 폭탄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는데이것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당하는 팔레스타인과의 연대에 의거한 것이었다.

(바더 마인호프의 로고, 로고로 MP5 기관단총을 삽입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들의 무장투쟁 노선이 불필요한 희생을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 누군가는 지적할 것이다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테러리스트 조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까나는 이러한 질문을 영화 <바더 마인호프>가 최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하지 않은 채던졌다고 생각한다나중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는 이들이 영화상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접했을 때나는 이 영화가 바더 마인호프 조직을 다면적으로 크게 접근했다는 것을 격렬히 느꼈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했던 독일의 68혁명 세대, 이들은 실제로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이름을 외치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영화는 바더 마인호프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이러한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했다이런 과정 중심에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폭력이 존재했다특히나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많은 이들이 미국의 폭력성에 큰 분노를 느꼈음을 보여준다. 68운동의 지도자인 한 사람은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인민과 연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반제국주의 투사인 호치민의 이름을 외친다영화상에서 수많은 독일의 젊은이들이 베트콩의 깃발과 붉은 깃발을 들며이에 동조한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바더 마인호프 일행은 요르단에 가서 팔레스타인 투사들에게 군사훈련을 받는다이 두 가지 국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대미제국주의 문제는 바더 마인호프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무장투쟁에 나섰던 바더 마인호프,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다. 영화 상에서 이들은 주로 자신들이 적으로 선정한 기관을 공격하거나 관련 인사들을 살해했다. 즉 무차별 민간인 살상을 추구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영화는 바더 마인호프를 단순한 테러조직으로만 보지 않는다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사회주의에 대한 순수한 믿음도 제법 잘 보여준다누군가는 이들을 보고 테러리스트라고 욕하겠으나나는 이들의 순수한 혁명정신도 숭고했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며 멈출 수가 없었다물론 이들의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불행이었을 수도 있고불필요한 희생은 당연히 안타깝다그러나 영화상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지적하는 무관심’ 그러니까 자유라는 이름하에 당시 팔레스타인과 베트남에서 저질러진 범죄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대다수의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관심을 넘어 옹호로 나가지 않았는가이러한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멈출 수가 없었다.

(68혁명 당시 휩쓴 시위현장, 당시 서구사회의 젊은이들은 80년대 한국 학생운동처럼 격렬히 저항했었다.)

 

영화는 시청자에게 바더 마인호프의 양면을 보여줌으로써이들에 대한 해석을 숙제로 남긴다나는 이 영화가 혁명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지혹은 부정적으로 생각할 지 이 두 갈래에서 보는 사람에 따라 많은 교훈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즉 영화는 한 가지 판단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나는 이점이 아주 긍정적으로 다가온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그들이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졌던 이상과 생각을 함부로 욕할 수 있을까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럴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오랜만에 정말 훌륭한 영화한편 감상했다안본 사람이 있다면이 영화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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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86년 두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베트남 혁명 연구>에 있는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세계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 베트남 공산주의 지도노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소련과 세계의 식민지 및 반식민지 지역에서의 혁명운동과 특정한 관계를 맺었던 코민테른 시대에 그 이념을 형성했다. 초창기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성공 가능성은 소련의 생존과 발전에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코민테른 간의 주된 연계주체였던 호치민(Ho Chi Minh)은 레닌의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Theses on the National and Colonial Questions)에 이끌려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각국의 억압된 민중들을 세계정치의 새로운 세력과 결합하고 있는 세계적인 규모의 혁명운동에 대한 그 테제에서의 언급을 접하면서, 호치민은 프랑스의 식민지 정권을 전복할 수 있는 베트남 민중의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다. 1925년 초창기 베트남 혁명당원들에 대해 행했던 광동 연설에서 호치민은 베트남 혁명은 세계 혁명의 지원을 받을 것이며, 그들 자신의 혁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베트남인들은 세계혁명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완수하게 될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하였다.

 

소련의 상대적 약체성과 1930년대의 긴장된 국제적 환경이라는 맥락에서 세계혁명에 대한 베트남의 의무는 소련을 지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코민테른의 감독 하에 있었던 기간 동안 세계정세에 대한 베트남 당의 언급은 소련에 대한 포위와 자본주의 진영의 공격을 반영하고 있다. 19302월 인도차이나 공산당(Indochinese Communist Party)의 설립에 즈음하여 베트남 민중들에게 행한 호치민의 호소는 소련에 대한 그러한 위험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가 베트남 혁명을 억압하려 할 뿐만 아니라, 소련이 세계의 피압박 민족들과 피착취계급들이 봉기하여 지배 세력들을 전복하도록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중국혁명을 약화시키려 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반대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193010ICP(인도차이나 공산당)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통해서 전 세계의 제국주의자들, 특히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은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하며, “사회주의 승리 국가인 소련을 수호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소련에 대한 수호라는 주제는 1935년 마카오에서 열렸던 제1차 베트남 공산당 대회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당은 교육 프로그램 속에서 소련을 세계혁명을 수호하는 방벽이며 수호자로 묘사하고,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소련의 파괴는 세계운동을 20년 이상 후퇴시킬 것이라고 논하였다.

 

이미 전쟁의 위협은 프랑스로부터 히틀러의 독일로 이전되어 갔으며,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이후로는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인민전선을 호소하였고, 베트남은 반파시즘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국제구의적 노선을 수정하는 또 하나의 대회를 개최했다. 스탈린이 19399월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을 대, 통킹(Tonkin)지역 당 위원회는 그러한 노선전환을 설명하고, 소련의 국제주의 노선에 대한 당내의 동요를 종식시키기 위해 소련은 항상 평화에 충실한다(The Soviet Union is Always Faithful to Peace)라는 책자를 출간하였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베트남 당은 비록 코민테른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으나,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모스크바와 이데올로기적 연계는 유지했다. 소련이 나치의 침략에 대항해서 싸우게 되자, 당 이론가였던 쯔엉찐(Truong Chinh)은 소련의 붉은군대(Soviet Red Army)부분적으로 인도차이나 민중을 위해서피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신뢰를 표했다. 그는 소련의 저항을 지원하고 전진하는 세계혁명운동에 공헌하는 것이베트남 당의 의무라고 썼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유럽이나 만주에서 소련에 대항해서 싸우는 음모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하여, 만약 그러할 경우 그들이 붉은 군대의 편에서 싸우도록 권고하였던 것이다.

 

출처: 베트남 혁명 연구 p.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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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폭격하고 있는 미공군의 B-29 폭격기)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개됐던 한국전쟁(Korean War)은 참으로 끔찍하고도 처참한 전쟁이었다남북을 합쳐 수십만의 병사가 사망했고, 3만 6,000명 이상의 미군과 20만 이상의 중국군이 전사했다민간인 사망자는 남한과 북한을 합쳐 최소 150만에 달하며많게는 3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년간 전개되었던 이 전쟁은 남북한 전역을 초토화시켰고민중들의 삶도 피폐하게 만들었다이 전쟁을 파괴적인 전쟁 그리고 대량살상적인 전쟁으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이 침략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너무나 즉각적이었는데전쟁 초기부터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일부지역을 폭격하기에 이르렀다미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당시연합군에게 막강한 화력을 지원했다이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마찬가지였고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던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또한 미군의 폭격은 1950년 10월 25일에 참전한 중공군에게도 공포를 안겨주었으며이것은 중공군이 주간보다는 야간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반격하여 다시 전쟁이 원점으로 돌아온 시점에도 미공군의 폭격은 끊이지 않았다폭격은 1951년 휴전회담이 시작되는 시점에도 지속됐고사실상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까지 지속됐다심지어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심양이나 단동과 같은 중국 영토에도 미공군의 폭격이 있었다쉽게 말해 전쟁 당시 북한은 미공군의 폭격을 3년 동안이나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북한 지역)

 

폭격은 참으로 끔찍했다이 분야를 깊게 연구한 김태우 교수의 저서 <폭격>에 따르면 당시 미공군은 평양원산흥남함흥청진나진성진 등의 대도시들을 주로 폭격했다그 이유는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못 가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와 도로 및 철도 그리고 병력 이동로 및 숙소 등에 폭격 전쟁 수행의지를 꺾기 위함이었다쉽게 말해 전략폭격을 한 것이다물론 이것은 말이 전략폭격이었다. 1950년 7월 6일과 13일에 있었던 원산폭격은 그 피해는 민간인 거주지역으로 대량 확산된 양상을 보였다. 7월 13일에 있던 폭격으로만 원산에서 1,249명의 민간인이 희생됐고그 가운데 195명은 여성이었고, 125명은 어린이였으며, 122명은 노인이었다미군의 폭격을 초기에 받았던 항구도시 원산은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폭격에 시달렸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했던 미군의 폭격은 북한 북부지역에 있는 신의주에서도 발생했다중공군이 전쟁에 참가한지 2주정도가 되던 1950년 11월 8일 미공군은 신의주를 폭격했었다당시 미군 소속 항공기 100대가 신의주를 집중 폭격했다이 폭격은 신의주를 향한 최초의 공중폭격이었는데당일 폭격으로 총 3017호에 달하는 공공건물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됐다또한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호가 파괴되었다. 11월 8일에 있던 폭격으로 최소 5,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고그중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최근에 출판된 김태우 교수의 <냉전의 마녀들>에는 북한지역을 조사했던 국제여맹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그 내용을 인용하겠다.

 

“ “전쟁 전에는 어디에 사셨죠?” 누군가가 물었다.

 

이 부근에 살았어요.” 그녀는 흑갈색의 빈 공터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방 세개의 제대로 된 집이었는데모두 불타버렸어요그 안에 있는 것들까지 모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아요.”

 

운이 좋다고요?” 누군가 큰 소리로 물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심중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에 따스함이 서렸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주 온전하잖아요화재를 피해 달아날 때 비행기들이 기총소사를 했어요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죠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정말 행운이었죠.”

 

이 여성 외에도 많은 신의주 시민들이 소이탄 폭격으로 당시의 저공 기총소사(strafing)에 대해 증언했다조사위원들은 이 기총소사로 인해 신의주 시내 전반이 더욱 철저하게 불타버린 것으로 파악했다.”

 

출처냉전의 마녀들 p.151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미공군은 1950년 6월 29일부터 휴전 발효 1분 전까지 끊임없이 폭격을 했는데이 전쟁 기간에 이북 지역에 투하된 폭탄은 총 47만 6천 톤이라고 한다브루스 커밍스가 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 따르면 미공군은 전쟁기간 동안 총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여기에 추가적으로 3만 2,557톤의 네이팜 폭탄도 추가되어 총 66만 5,000톤에 달하는 폭탄을 한국전쟁에서 투하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으로 일본의 60개 도시가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던 반면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로 추산된다고 한다.

(마을 지역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1952년 당시 매슈 리지웨이를 이어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마크 클라크는 그해 6월부터 북한에 대한 맹렬한 폭격을 게시했다이때 북한의 수풍댐이 연속공격을 받아 북한은 전력의 90%를 잃었고, 7월에는 평양공습이 하루에 1,254회에 달했다고 한다당시 북한의 평양 방송은 7,000명이라고 보도했었다미공군의 이 공습은 효과적인 폭격 성과를 만들기 위해 중국 국경도 침범했었으며항공모함 4척과 5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됐다당시 파괴된 수풍댐에는 900톤에 달하는 폭탄이 투하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총 100만 명에 달하는 북한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것보다 더 많이 전사자를 추정하는 통계도 있다이런 3년간의 폭격으로 북한의 도시들은 말 그대로 초토화 됐다또한 민간인 사망자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미공군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공습에 사용한 폭탄보다 3배나 많은 양의 폭탄을 북한 폭격에 사용했다미공군의 폭격으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의 도시는 초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공군의 폭격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불태워버렸어요.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700만 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아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거죠.

 

출처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p.73~74

(가족을 잃고 애타게 울고 있는 북한 여성)

 

이처럼 북한을 향한 미공군의 폭격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잔혹했다그러나 여기서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그것은 바로 이런 미공군의 폭격이 단순히 북한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서울수복 이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의 지역별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공중폭격과 총포격 등 원인별로 조사한 결과공중폭격이 4,250명이 나왔다서울 용산에서만 미군의 폭격으로 1,587명이 사망했고, 7월 16일의 경우 미군의 B-29 폭격기 47대가 225kg짜리 파괴폭탄 1,504발을 철도공장과 차량철로 등에 투하했다고 한다그 외에도 미공군의 폭격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도 빈번히 발생했고당연히 이런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있던 폭격으로 인근 지역 민간인 피해자들도 속출했었다안재성 작가가 쓴 <이현상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김태우 교수의 신간 <냉전의 마녀들>)

 

재귀열은 남부군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막대한 인명을 앗아가고 있었다미국산 세균은 북한 지역에도 대대적으로 살포되어 중공군은 물론지료약을 구할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한반도를 신무기 시험장으로 삼은 미국은 소형 핵탄두나 다름없는 네이팜탄과 세균무기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출처이현상 평전 p.386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은 남한과 북한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 피해와 살상을 야기했다따라서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이라는 주제는 절대로 제외할 수 없으며한국전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할 주제이다.

 

참고문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김성보 기광서웅진지식하우스, 2004

 

이현상 평전안재성실천문학사, 2007

 

폭격김태우창비,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저), 정소영(역), 창비, 2018

 

냉전의 마녀들김태우창비, 20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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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8-25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본 KBS다큐영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일본에서 제조한 네이팜탄으로 월미도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영상을 봤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읽지 못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다니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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