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0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0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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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부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0권은 도로, 수도 등 로마의 인프라, 즉 사회간접시설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작가는 가도, 다리, 수도 등 하드 인프라와 의료, 교육 등 소프트 인프라에 대해 한꺼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인프라를 정리한 것 치고는 내용이 조금 부실해 보인다.
하드 인프라만 하더라도 항만, 성벽, 군단기지, 목욕탕, 신전 등을 추가할 수 있고 소프트 인프라만 하더라도 의료, 교육 이외에 법률, 세금, 재정, 국방, 지자체, 식량 등 훨씬 많은 것을 다룰 수 있는데 다 빠져있다.
작가 말로는 ’각 권에 틈틈히 충실하게 다루었다’고 하는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작가에게는 조금 실례일지는 모르지만, 혹시 15권을 맞추려고 중간에 인프라를 끼워넣은 것은 아닌지...ㅋ
 
작가가 정리한 하드 인프라는 가도, 다리, 수도다.  

우선 로마 가도는 작가 말대로 굉장하다. 그리고 가도는 수도와 더불어 인류역사에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로마 가도의 특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가도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가도를 단순하게 ’통행로’나 ’군사로’가 아니라 종합적인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건설했다는 점과
  목적지를 연결하는 가도라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가도와 가도를 연결하여 로마식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로마 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가도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즉 종합적으로 이용되었다.
  또 중요한 점은 로마 가도는 국가와 지도급 인사들에게 있어 ’당연히’ 건설해야 하고 확장해야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가 재정 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는 기본이고 원로원 의원이나 유력자들이 모두 앞다투어 가도를 건설하여 기증하게 된다.
  로마는 기원전 120년에 이미 최초의 ’샘프로니우스 도로법’을 제정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의 기본적인 인프라에 대해 동일한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둘째, 건설 주체
  가도를 실제 건설한 주체의 경우 간선도로는 대부분 로마군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가도 건설의 최초 목적이 대부분 군사용이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나 사도의 경우 민간 사업자에게 용역을 의뢰하여 건설한다.
셋째, 가도의 구조...
  로마 가도의 수평구조는 4m의 차도, 차도 양 옆에 3m 전후의 인도, 그리고 배수로 등 평균 약10m로 이루어져 있다.
  수직구조는 4개층으로 구성되어 최하층은 자갈층, 2층은 돌+자갈+점토, 3층은 잘게 부순 돌, 최상층은 접합면이 딱 들어맞도록 70x70cm의 마름돌
  차도는 양 옆으로 기울기를 두어 빗물이 흘러가도록 하고 양측에 배수로를 만들어 빗물을 차도의 바깥으로 빼내도록 한다.
  차도 옆에 숲이 있을 경우 적당한 폭으로 나무나 풀을 제거하여 나무 뿌리로 인하여 가도가 망가지는 것을 방지한다.
  이 로마 가도는 로마인들이 유지보수를 포기하기 시작한 서기 3세기 중반부터 150년이 지난 후에도 가도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0권을 읽다보면 연말이 될 때마다 시내의 도로와 인도를 들어내고 다시 아스팔트와 보도석을 까는 국내 상황이 우울해진다...)
넷째, 가도의 체계...
  최초 로마 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북을 X로 교차하도록 건설했다.
  모든 로마 가도에는 1로마마일(약1.5km)마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돌기둥을 세워 가도 사용자들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도록 설치했다.
  로마인들은 조선시대의 파발처럼 국영 우편제도를 활용했고 적정한 거리마다 말을 갈아타고 마차를 정비하는 ’스타티오네스’를 설치하고 그곳에 숙박업소와 음식점 등을 만들어 놓았다.
다섯째, 가도의 길이...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500년 동안 로마인이 건설한 도로의 총길이는 간선도로만 80,000km이고 지선까지 합하면 무려 15만km나 된다.
  이 길이는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갈리아 속주, 브리타니아 속주, 히스파냐 속주, 발칸반도, 소아시아 속주, 이집트, 북아프리카 모두 포함한다.
여섯째, 가도의 활용과 시스템...
  가도에 대한 로마인의 인식은 ’건설’ 뿐 아니라 ’유지보수’ 역시 정책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로마 집정관이나 통치자, 황제, 속주총독과 지방자치단체장은 로마 가도와 인프라의 유지보수에 적절한 예산을 배정,집행하고
  집행부서(내각)과 공식적인 직책에 인프라 유지보수 담당자를 임명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작가는 10권에서 로마의 가도를 정리하면서 중국 진나라 시대의 만리장성과 비교한다.
진나라의 만리장성은 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이 건설했고 총 길이는 5,000km이다.
작가는 국가규모의 대규모 토목사업이 로마는 가도로, 진나라는 방벽을 건설했는지를 비교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결론은 양측 국가와 민족의 사고방식 차이를 보여주려는데 있다.
방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가도는 사람의 왕래는 촉진한다는 것...
로마의 역사는 1,200년이고 진나라의 역사는 20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벽과 가도를 단순하게 비교하면서 두 나라 민족의 사고방식과 문화, 정책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작가가 방벽과 가도를 통해 두 나라를 비교하려면, 중국의 진나라와 그 전후 시대에 대해 로마사만큼 연구한 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방벽으로만 보면 로마 역시 로마 제국의 국경을 결정한 후 그 경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다.
나머지 지역의 경계에 방벽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 경계가 천연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은 바다(북해), 서쪽도 바다(대서양), 남쪽은 사막, 동쪽도 바다(흑해와 에게해)와 사막(아라비아 사막)...






아무튼 두 번째 하드 인프라인 로마의 다리도 상당히 역사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특히 배수 설비와 교각 공법, 수도교가 그렇다.
로마인들은 21세기에도 사용되는 교각 설치공법을 기원 전에도 사용했다.

 
 
로마의 수도는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수도교’였다.
로마의 수도라인 설치는 기원전 312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진나라는 기원전 224년에 건국되었다. 일본에는 국가다운 국가도 없었지만...)
가장 많았을 때 로마 시내에는 수도 라인이 최초 라인인 ’아피아 수도’ 등 총 11개에 이른다.
총 길이는 무려  449.5km에 달하고 하루에 로마로 들어오는 수돗물은 1백만 세제곱미터에 이른다.
인구가 100만명이라면 1인당 1세제곱미터의 수도를 공급하는 규모다.(누수 고려하면 0.5~0.6세제곱미터)
20세기 말에 서울, 도쿄, 로마, 파리, 런던시내의 수돗물 공급량은 약 0.5세제곱미터 정도였다.
수도는 로마의 문화인 목욕장과 특히 관련이 크다.

  
로마인들의 하드 인프라는 동시대 지구상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한 뿌리가 있었기에 뿌리를 되살린 르네상스 이후에 서구가 다른 대륙을 뛰어넘어 또 다시 전세계를 지배,재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이런 뛰어난 역사를 한 입에 말아먹어 인류 역사의 발전(통상적인 의미에서)을 가로막은 것은 기독교도였다.
(내가 지적한 것은 당시의 기독교도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소프트 인프라 역시 로마가 다른 제국과 다를 수 밖에 없는 창조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솔직이 작가가 10권에 직접 다루는 의료와 교육은 로마의 인프라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그것은 로마의 시스템이자 문화 중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이다.
의료와 교육은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의료 부분은 로마인의 ’인생관’ 또는 ’죽음관’과 관련이 있다.
로마인은 ’달이 차면 기울게’ 되듯이 사람이란 늙으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태도였다.
그래서 로마인, 특히 상류층이나 귀족으로 올라갈수록 크게 아프거나 죽을 때가 되면 식음을 전폐하여 죽음을 앞당기려고 했다.
어린이나 청장년층의 경우 신전에 들어가서 기원을 들이거나 도시 외곽에 집단 휴양소를 지어서 병과 싸우도록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로마는 유아 사망율도 높았다.
로마에는 공식적인 의료기관이나 병원이 없었다.
그리스 도시국가 출신 중 의료를 연구한 학자들이 로마에 와서 사설로 의료기관을 운영하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에 나가서 전투 중에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규모 병원시설을 건립하고 의사와 간호사를 대기시켜 놓기는 했다.
로마군대의 군단 규모는 약6,000명인데 그 중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기본적인 지원병력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에서는 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민간이 주도하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종교를 받아들여 로마화하였는데 교육의 경우에는 그리스의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로마의 상류층이나 기사계급의 자제들의 경우 그리스 도시국가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육을 받았다.
로마가 망할 때까지 유지한 정책과 시스템 중에는 ’잘하는 사람(지역)이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기’가 있다.
그리스의 경우 일찍부터 예술과 교육, 학문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굳이 로마 내에 예술이나 학문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지 않았다.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면서도 예술과 교육의 경우 그리스의 전통과 강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로마의 일반적인 교육방식은 10세 이전까지는 노예나 어머니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10세가 넘어서면 그리스 학자를 초빙하여 가르치거나 그리스 학자들이 로마 시내에 소규모로 개설한 학원에서 배우도록 한다.
10세 이전에 배우는 초등교육() 교과목은 라틴어로 읽기, 쓰기, 셈하기...
10대에는 중등교육(그람마티키 스콜라)은 17세까지이고 그리스어, 문학, 역사를 배운다.
10대 후반이나 20대에 들어가서 법률을 공부하거나 더 높은 학문을 배우려면 그리스 도시국가로 가게 된다.
(지원병으로 바꾸기 전까지 로마인들은 17세에 군대에 입대했다.)
17세에서 20세까지는 고등학교(레토리스 스콜라)에서 변론이 주요 과목이었다.(변호사나 정치가를 키우는 것이 목적...)
17세 이상부터 추가적인 전문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나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 유학을 간다.
 
법률 등 다른 소프트 인프라는 생략... 

 [ 2010년 10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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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6-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과 사진들을 쭈욱 살펴보니 금방이라도 로마에 다시 가보고 싶어지는군요.
 
비노바 바베 역사 인물 찾기 12
칼린디 지음, 김문호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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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저서 [내가 사랑한 책들]에 소개되어 있는 50여권을 올해 중에 다 읽는 것이 년초 목표였는데 여의치가 않다. 이 책은 소개된 책 50여권 중 13번째 책으로, 칼린디가 쓴 현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비노바 바베의 인물전(평전)이다. 비노바는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리고 또 자서전을 집필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친밀한 협력자이자 제자였던 칼린디는 비노바의 이야기를 모아 그의 생애와 회고와 기억들을 엮어냈다.  
 
비노바는 세계적인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이자 사회개혁자이며, 동시에 20세기에 마하마트 간디, 사티쉬 쿠마르와 함께 인도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 천년 동안 전세계인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영감과 철학을 제시했던 부처, 예수, 마호메트와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와 관계없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영감과 철학을 제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비노바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이 현대사회의 가족, 교육, 사회, 문화, 그리고 개인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가족 내에서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말과 행동, 영성과 신념, 삶과 지향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된다. 근현대 교육제도와 학교의 모습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비노바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인도의 기존 학교와 대학이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하인들’을 훈련시키는 커다란 공장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21세기 전세계 학교와 대학은 당시 인도의 그것과 크게 다를까?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키우는 교육제도가 한국을 비롯한 OECD 국가들 중 얼마나 될까? 비노바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인간으로서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평생에 걸쳐 고민하고 실천했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최소한의 의식주를 누려야한다는 데 뜻을 세우고 신의 뜻에 살기로 마음먹은 후로 비노나는 스스로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바깥에 있는 약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비노바는 ’토지헌납운동(부단)’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베풀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인도 전역에서 20년 넘게 사람들과 만났던 것이다. 비노바는 힘들고 나약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부당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개혁하는데 참여하지 않는 어떤 종교도 ’신의 참 뜻’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수 많은 종교를 접하고 경전들을 연구하였으나 결국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은 ’돕고 함께 나누고 정신적인 충만’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실천해 나간 것이다.

 
내가 처음 비노바에 대한 글을 읽은 것은 사티쉬 쿠마르의 자서전 <끝없는 여정>에서였다. 1960년대에 인도에서 영국, 미국, 일본까지 직접 걸어서 핵무기 없는 세상과 평화를 전파했던 쿠마르는 1955년부터 1962년까지 비노바의 ’토지헌납운동’에 참여한 바 있었다. 
비노바는 법정스님만큼 내가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사상가이자 실천가이자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 평생에 걸쳐 지켜온 무소유의 삶, 늘 책을 읽고 공부하는 자세, 어려운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불의와 부정의에 대한 단호한 배격, 정치와 권력과 조직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 이 모든 비노바의 생애는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무엇을 잘못하고 살아온 것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깨닫게 해주고 있다. 부끄러운 삶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노바의 말 한 마디, 그 정신과 실천을 내가 잊지 않는 한 나를 끝없이 깨우치고 채찍질할 것이다. 

인류의 정신과 미래를 제시하는 위인들의 삶과 정신에는 늘 공통점이 있다. 비노바는 ’무소유’와 ’자신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정진’이라는 측면에서 법정스님의 생애(법정의 [무소유]와 [아름다운 마무리])와 비슷하다. 간디와 함께한 ’비폭력저항(샤티야그라하)’의 정신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박홍규 교수 역 [시민의 불복종]), 마틴 루터 킹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학교제도에 대한 비노바의 태도는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와 동일하며 태양과 달, 공기와 물, 숲과 땅이 오로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으며 인류와 생명체 전체가 함께 누려야할 소중한 존재라는 비노바의 정신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정신(류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과 통하는 것이다. 
비노바는 스스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샹카라’와 ’즈나나데바’와 ’간디’라고 하였지만... ’샹카라’는 철학자로서 그가 건설한 수도원들의 후대의 우두머리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상카라차리야 1세라고 한다. ’즈나나데바’는 위대한 시인이자 성자였던 ’마라티’를 말한다. 
 
--------------- * 칼린디는 누구인가? -----------------------------
칼린디는 비노바 바베의 제자였다. 칼린디는 1960년에 비노바를 만났다. 바로다 대학교에서 사회복지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비노바와 절친한 사이가 된 칼린디는 그의 강연과 대화를 꼼꼼히 기록하였으며, 언론 출판 관계에서 그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1964년 비노바가 힌두어 월간지 <마이트리>를 시작하자 그녀는 편집장을 맡아 오랫동안 그 일을 이어갔다. 그녀는 비노바가 파우나르에 창설한 ’아쉬람 브라마비디야 만디르’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책의 영문판 원본은 원래 1985년에 <마이트리>의 특집편집본으로 출판되었다. -----------------------
 
이 책은 서문과 맺음말, 그리고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비노바 자신이 쓴 자서전이 아닌 칼린디가 쓴 평전이지만, 책의 내용은 ’1인칭’으로 다루고 있다.
[시작하면서]에는 비노바의 인생에 대한 태도와 사상을 정리한다. 문장 하나 하나는 평생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과 진리 속에서 실천한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랑과 사상만큼 강한 힘을 가진 것은 없다’, ’나는 매순간 변하는 사람이다’, ’나는 브라만으로 태어났으나, 자발적으로 그 카스트와 결별하였다.’, ’나는 이념들을 가지고 있으나 고정되어 굳어버린 견해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모두가 나의 친족이요 나도 그들의 친족이다.’, ’나는 어떤 문제를 보면 그 문제 깊숙이 뚫고 들어가 그 근원까지 파악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문제가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인간의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한 사히의 삶과 개인의 삶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찾아내고, 그 문제들을 비록력으로 극복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만났던 행운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나는 외적인 형편들이 너무나 순탄하였다는 것을 회상하게 된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행운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느끼고 있듯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p.30~37)
 
제1부. [야생마와 같던 청년시절 (1895~1916)]에는 비노바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까지의 삶이 서술되어 있다. 그는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콩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비노바는 카스트 계급 중 가장 높은 ’브라만’ 계급이었고 그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돌아다니기와 책읽기가 취미였다. 그렇지만 그의 삶과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지주였던 그의 할아버지는 힌두교의 독실한 신자였으며 규칙적으로 서약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비노바를 참석토록 하였다. 비노바는 자신이 정신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면 할아버지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말한다.
비노바는 어머니에 대해 말할 때, "나의 정신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머니가 했던 역할에 버금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위대한 신앙인으로서 매일의 일상 속에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감사함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비노바가 매일 식사하기 전에 툴시 나무에 물을 주게하고 음식을 따로 떼어 동물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하는 등 그가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고 비노바는 그것을 가장 큰 선물로 기억한다. "우리는 먼저 베풀고 나중에 먹어야 하는 법이란다."(p.63)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p.66)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먹을 음식의 양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단다. 그러니까 오래 살려거든 적게 먹도록 해라"(p.86)
과학자이자 요가 수행자였던 비노바의 아버지는 비노바에게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공경하며 이웃을 돕는 것을 가르쳤고 비노바가 잘못한 것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들이 열여섯이 되면 그를 친구로 대해야 한다."(p.84 이 말은 전설적인 현인 마누가 지은 책 [마누스므리티]에 들어있다. )
비노바는 열 살 때 브라마차리야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고 스물 한 살에 집을 떠났다. 그는 길을 떠나기 가지고 있던 모든 자격증들을 불살랐고 어머니에게 자신은 ’월급 받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2부. [멍에를 받아들이다 (1917~1950)] 비노바는 출가했을 때 벵갈과 히말라야에 끌렸으나 출가한 이후 간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간디의 ’사티야그라하 아쉬람’에 찾아갔다. 그는 간디에게서 히말라야의 ’평화’와 벵갈의 ’혁명적인 정신’을 모두 발견했던 것이다. 비노바는 아쉬람에서 정치적 자유와 정신적인 발전을 하나의 동일하고 동시적인 목표로 삼는 간디를 발견하고 기뻐했다. 비노바는 ’카르마-요가’ 즉 영적인 행동의 길의 의미에 대해 배웠다. 그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고 비노바는 그것에 매혹되어 평생 간디를 스승으로 삼았다.
간디의 비폭력은 내적인 비폭력이었으며 정신의 폭력은 공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그 내적인 비폭력은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간디의 아쉬람의 목적은 "세계 전체의 복지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우리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서약을 받아들인다." 서약은 열 한개로 진실, 비폭력, 절도 금지, 극기, 육체적 노동 등이었으며 비노바는 그 서약을 평생토록 지켜나갔다.
간디는 비노바를 인도의 지도자로 인정했고 1940년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제안하면서 그를 대표자로 선정했다. 
 

비노바는 간디를 정신적, 실천적인 스승으로 삼은 후 30년 동안 교육과 건설활동에 투신했고 그 활동의 근거가 되어야 할 원칙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는 가르치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일 등을 하였지만, ’사티야그라하’ 이외의 정치적인 활동에는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사티야그라하’ 운동을 통해 평생 3회에 걸쳐 7년간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내가 진정한 아쉬람 생활을 경험한 것은 감옥 안에서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옥 안에서도 성찰과 정진, 봉사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비노바는 아쉬람에서 처음 옷감 짜는 일을 배운 후 인도 사람들이 옷감짜는 일로 삶에서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연구하고 물레를 개발하고 실험하고 보급하였다. 도한 마을 봉사활동을 거듭하면서 카스트 제도의 가장 낮은 계급인 ’하리잔’들과 하나가 되고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인도 사회에서 가장 낮게 인정받는 일, 즉 똥 치우는 일, 가죽일, 천을 짜는 일을 했다. 그는 그러한 일을 사람들과 함께 해나가는 것이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바꾸어 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3부. [멍에를 지다 (1951~1969)]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1948년 간디가 암살당한 후, 비노바는 "우리는 이미 정치적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제 보다 더 철저하고 훨씬 더 어려운 과제에 착수할 때가 되었다. 그 과제는 바로 사회적 경제적 혁명이다. 옛 방식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p.227)라고 생각했다. 
1948년 인도의 중앙 행정부와 지역 행정부는 토지를 하리잔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다가 포기했다. 1951년 3월 도보로 여행을 시작한 비노바는 사르보다야 대회를 끝내고 4월 우타르 프라데시 주를 여행하면서 포참찰리 마을에 도착한다. 그가 토지를 필요로 하는 하리잔들과 토지 소유자들과 면담하면서 설득하는 중에 지주인 ’쉬리 라마찬드라 레디’가 하리잔들이 필요한 토지를 헌납했다. 이로써 비노바의 ’토지헌납(부단)운동’이 시작된다. 비노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지주들을 설득했다. "모든 인간은 공기와 물과 햇빛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듯이 땅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한 개인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가 땅을 내놓을 때는 그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놓아야 한다."(p.249) 그는 지주들에게 ’헌납 토지 = 1/ (아들의 수 + 1)’의 토지를 헌납하기를 요구했다. 
1951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비노바는 지지자들과 함께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지주들에게 토지를 헌납하도록 설득하였고 하리잔들이 헌납받은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공동체 마을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도록 이끌었다. 그는 20년 동안 무려 인도 국토면적의 1.33%인 400만 에이커(16.7만km2 = 50억 평)의 스코틀랜드 국토와 맞먹는 땅을 헌납받을 수 있었다.(남한 국토면적 10만km2) 그는 그 과정에서도 공부하기, 가르치기, 공동체 만들기, 하리잔 돕기,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노바는 마을들이 스스로 자치를 해나갈 수 있도록 1957년부터 ’토지헌납운동’과 더불어 ’평화군(산티 세나)’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구 오천 명당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1958년부터는 ’삼팟티-단(재산의 육분의 일)’을 헌납하는 운동을 병행했고 1961년부터는 ’비가-카타(20분의 1)’ 운동도 시작한다. 비노바는 그 과정에서 아쉬람 여섯 개를 창설하고 수 많은 마을에 마을 자치가 이루어지도록 사람들을 교육하고 조직하였다. 그는 인도의 "가장 큰 과제를 인간 사회 전체를 비폭력의 사회로 만들어내는 일, 바꾸어 말하자면 비폭력적이고 강하고 자립적이며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두려움과 증오로부터 벗어난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이다."(p.353)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영적인 삶을 위해 기도, 침묵, 명상, 정신을 뛰어넘는 일, 선한 것을 공경함, 애정을 기르는 것, 식사 제어하기, 두려움의 정복, 빵을 위한 노동,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했다. 
 
제4부 [멍에를 벗고서 (1970~1982)] 비노바는 1969년 토지헌납운동과 아쉬람 건설, 교육과 조직화를 마지막으로 몇 년간의 준비 끝에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남은 삶을 성찰하고 정진하기 위해 외적 행위로부터의 자유, 책으로부터의 자유, 가르치는 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여행도 포기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며 내적인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맺는 말] 1982년 건강이 악화된 비노바는 의사와 병원의 치료를 거부하고 80일 간의 단식 끝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쇠약하고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온전하며 그의 얼굴은 영적인 광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p.456) 
 

비노바는 평생 동안 인도의 정신적 전승에 대한 연구는 물론, 세계의 큰 종교들의 거록한 전승에 대한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의 사회적 활동은 그러한 연구에 기초한 것이었다. 비노바가 태어난 지 백 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이 회고록은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비폭력을 실천하고 영성을 추구하며 사랑의 힘을 간직해온 한 위대한 인물의 내적인 삶과 위적인 삶을 두루 밝혀준다. 그의 사상과 생애는 인도 전역에서 수 많은 제자들과 민중들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칼린디와 같은 외부 협력자들을 통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알게 모르게 간디와 비노바의 사상이 현대의 지성인들과 학자들,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현대사회가 비폭력과 저항을 통해 ’파괴와 붕괴’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디는 1947년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내면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성자로 거듭났다. 독립 당시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것은 간디도 막지 못했다. 1947년 동파키스탄으로 존재하던 방글라데시는 인도군의 무력개입으로 1972년 독립하였다. 간디와 비노바의 사상과 실천은 독립 이후 인도에서 자주, 자립, 협동, 비폭력 등으로 이어졌다. 비노바는 인도 정부에 의존하기 이전에 민중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마을자치와 공동체운동, 토지헌납운동을 전개했고 정치권과 모든 인도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비노바의 사상과 실천이 국가적인 정책으로, 국민 전체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물론, 아직 인도에 많은 자치와 자립마을이 남아있고 비노바와 같은 사상가들의 정신과 실천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비노바의 사상이 인도 내부에 뿌리깊게 퍼지지는 못했다. 기존 종교의 모습은 ’카스트 제도’의 모습으로 남아 있고 어느 순간 ’대량생산, 대량소비’와 ’황금만능주의’가 새로운 종교로 인도를 잠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인도는 1980년대까지 간디와 그의 제자인 네루의 철학과 정책을 유지했으나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키는데 실패했다. 1990년대 들어 인도 정부는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면서 인도의 전체 GDP는 늘려가고 있으나 하층 민중들의 삶이 개선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으면서 가난한 방글라데시의 현실이 독립이나 무력분쟁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비노바의 사상과 생애가 그 이후 인도와 세계의 지성과 민중들에게 어떤 지침을 주었고 삶을 안내했는지 알고 싶다...
 
* 책 속의 책 : [바가바드기타], [우파니샤드], [마누스므리티], [요가-사트라], [즈나네스와리], [베다], [신약성서], [코란], [법구경], [담마파다], [자푸지], [나마고샤]
 
[ 2011년 6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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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현제賢帝의 세기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9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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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의 부제 : 현제의 시기

9권은 네르바가 병사한 뒤 트라야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승인받은 서기 98년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가 역시 병사한 서기 161년까지를 다룬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기간과 더불어 베르나 통치 시점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한 시점까지를 ’오현제(五賢帝)’ 시대라 부른다.
작가도 9권의 부제를 ’현제의 세기’라 붙였고 후세 뿐 아니라 동시대 로마인들도 이 시기를 ’황금시대(Saeculum Aureum)’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세대도 동시대인들도 ’현제’고 ’황금시대’라 이름을 붙였으니 당연히 이 시대의 로마는 국가의 3개 과제인 안보와 식량(경제)와 내정(사회간접자본등)에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점수를 줄만 했다.
 
그렇다면, 왜 동시대인들도 후세대들도 그 시대를 ’오현제의 시대’ 또는 ’황금시대’라 불렀을까?
우선, 9권에서 다루는 3명의 통치자들이 이룩한 업적을 살펴보면,
 
< 트라야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98년 ~ 117년
- 즉위 전 :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서기 53년 에스파냐 남부 베티가 속주의 이탈리카에서 출생.
아버지는 로마 군대의 군단장 출신 원로원 계급
서기 75년 로마 군대의 대대장 진급. 라인강 군단 근무 -> 28세에 회계감사관 당선 -> 대대장 복귀 -> 원로원 진입 -> 34세 법무관 당선 ->
에스파냐 7군단 군단장 임명 -> 91년 집정관 선출 ->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겸 속주 총독 임명
서기 97년 네르바가 공동 황제로 지명하여 원로원에서 승인. 98년 네르바 사망 후 원로원 승인으로 황제 취임.
- 즉위 후 :
저지 게르마니아 및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체제 완비
트라야뉴스 투자법 제정 : 농업 투자금액 중 이탈리아 반도 내에 1/3 이사 투자하는 법안
육영자금 설립 : 황제 세입에서 출자. 법률 시행은 지방자치단체에 위임.
제1,2차 다키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다키아 지역을 속주로 편입
공공사업 추진 : 목욕탕, 수도, 포룸 건설, 오스티아항 개조, 아피아 가도 복선화
파르티아 전쟁 승리 및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속주로 편입
유대 반란 진압
로마로 귀환 중 병사







< 하드리아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117년 ~ 138년
- 즉위 전 :
두 번째 속주 출신 황제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서기 76년 이베리아 반도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 출생(트라야누스와 같은 고향)
조상은 카이사르 시대에 원로원에 진출. 아버지는 10세때 사망.
아버지가 트라야누스와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후견인으로 지명
열 살 때부터 로마에서 퀸틸리아누스의 학교에 다님 -> 그리스 문화에 너무 심취하여 고향으로 보내짐 -> 사냥에만 열중하여 로마로 돌아옴
-> 안찰관 근무 -> 판노니아 속주 제2군단 대대장 취임 -> 도나우강 하류의 먼 모에시아 속주 제5군단 대대장 -> 서기 101년 회계감사관 당선
-> 원로원 의사록 편집 -> 사비나와 결혼(사비나는 트라야누스의 누나 마르키아나의 딸인 마티디아의 딸) -> 제1차 다키아 전쟁 참전
-> 제2차 다키아 전쟁시 제1군단장 근무 -> 법무관 당선 -> 먼 판노니아 속주 총독 부임 -> 집정관 당선 -> 실업자(장군들의 반감) -> 파르티아 원정 참전
전쟁 후 파르티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 -> 트라야누스 황제 로마 귀환 중 사망. 사망시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 -> 동방 군단 장병들이 하드리아누스에게 충성 맹세
- 즉위 후 :
황제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Trajanus Hadrianus Augustus)
파르티아 전쟁 종결
로마에서 황제 암살 음모 발각. 근위대장을 통하여 전직 집정관 출신 원로원 4명 숙청
1차 방위선 현장 시찰(호위병과 문관들만 동행하여 진행)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 론강 -> 리옹(루그두눔) -> 트리어(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선 -> 게르마니아 방벽 보강 -> 마인츠 -> 저지 게르마니아 방위선 -> 본, 쾰른 -> 브리타니아 반란 진압 및 하드리아누스 성벽 건설 ->
히스파니아 속주민 내부 갈등 해소 -> 시리아 안티오키아 -> 파르티아 국왕과 강화조약 체결 -> 소아시아 서부 -> 아테네 -> 로마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랑베즈, 팀가드 -> 랩티스 마그나 -> 로마
’로마법 대전’ 집대성
베누스 신전 건립, 판테온 개축, 하드리아누스 별장 건축
2차 방위선 시찰 : 아테네 -> 소아시아 에페수스 -> 시노페 -> 카파도키아 사탈라, 말라티아 -> 시리아 라파네아이 -> 안티오키아 -> 팔미라, 다마스쿠스
-> 아라비아 속주 제3군단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유대 반란 진압 -> 로마
유대 반란 진압 결과 : 예루살렘 함락, 50개 도시 / 985개 마을 파괴, 사망 유대인 50만명, 예루살렘에서 추방, 지명 변경(유대 -> 팔레스타인), 할례 금지
매부 세르비아누스 주도의 후계자 옹립 움직임을 파악하여 세르비아누스와 손자를 처형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후계자 지명 -> 판노니아 속주로 군단 경험 중 병사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 지명. 안토니누스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인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다.
 

< 안토니누스 피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138년 ~ 161년
- 즉위 전 :
서기 86년 로마 인근 라누비오에서 출생. 집안은 보르넨시스 속주의 원로원 계급
아버지가 공무로 자주 집을 비워 친할아버지+외할아버지 댁에서 어린시절을 보냄
서기 111년 회계감사관 -> 116년 원로원, 법무관 -> 120년 집정관 -> 아시아 속주 총독
- 즉위 후 :
황제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엘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Imperator Caesar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
하드리아누스의 인력을 그대로 승계, 연임시킴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성벽 추가 건설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임 기간에는 외적 침입이나 반란이 없었고 자신의 업적을 쌓는 것을 원하지 않아 특별한 기록이 없음
선임 황제들이 결정한 정책과 법률을 성실하게 집행하기만 함.
하드리아누스의 유언을 받들어 루키우스와 안니우스(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양자로 받아들임.
 
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시기가 로마의 ’황금시대’이자 ’오현제’의 시기였던 것은 외형적인 결과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네르바 이전 시대가 30년간 네로 황제 암살부터 시작하여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황제까지 연이어 살해, 암살되었고
황제 암살은 동시에 로마 군대 내부의 내전에 따른 로마 시민의 사망, 원로원과 관련 인물들의 살해가 동반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쉽게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시대를 지난 후 네르바부터 안토니누스 피우스까지의 황제들은 자신의 혈통에 대한 집착도 없었고 실제 혈통을 이어 황제가 될 자식들도 없었다.
혈통이나 군대 반란 등 내분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는 안정화될 수 있었고 28개 군단의 군사력은 외적,야만족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즉, ’오현제’ 시기는 로마로서는 외부적인 조건도 내부적인 조건도 따라준 셈이다.
물론 그 황제들 역시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로마 제국의 평화와 성장을 중심으로 정책을 편 것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시대 들어 특징적인 것은 연거푸 4명이나 속주 출신이 황제로 등장한 것이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히스파니야 속주 출신이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보르넨시스 속주 출신이다.
그리고 이후 대부분의 로마 황제들은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 내보다 속주 출신이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실제 2 곳 모두 카이사르 황제가 갈리아를 속주로 삼기 이전부터 로마의 속주였기 때문에 200년 이상 ’로마화’한 지역이고
따라서 이들의 조상 대부분과 자신들도 로마의 시스템(군단장, 법무관, 회계감사관, 집정관)을 거쳤다.
그 사실은 서기 100년 전후부터 속주 출신이 기존 로마 지도층보다 통치력이 더 양호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로마가 국가로 탄생한 시기부터 시작하여 일관되게 추진했던 ’로마화’ 정책과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제정 시스템과 속주 출신에게 원로원 등을 개방한 것이 성공적인 정책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로마는 서기 100년부터 인물난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로마 역사는 1,0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서히 지워졌을 것이다.

 
 
[ 2010년 10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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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위기와 극복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8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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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의 부제는 ’위기와 극복’이다.

8권은 네로가 죽은 뒤부터 트라야누스가 등장할 때까지인 서기 68년부터 97년까지를 다룬다. 
이 30년도 안되는 기간에 제위에 오른 사람은 무려 7명(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우스아누스, 네르바)이나 된다.
이들이 집권하고 사라지는 과정은 로마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무척이나 정신이 없다.
 
- 서기 69년 -
갈바는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갈바는 네로가 집권 중 에스파냐 동북부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으로 임명한 자다.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 오토의 명령으로 갈바 암살.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되고 원로원도 승인.게르마니아 군단이 갈바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하고 저지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
비텔리우스 군단이 오토 군단을 격파. 오토 자결.
원로원 비텔리우스의 황제 취임 승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 5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 지지 선언.
키빌리스, 게르만족, 게르만계 갈리아인이 모여 ’갈리아 제국’ 창설 결의
베스파시아누스 군단과 비텔리우스 군단이 이탈리아 반도 내 크레모나와 로마 도심에서 내전.
비텔리우스 군단이 패하고 비텔리우스는 포로 로마노에서 피살.
 
- 서기 70년 -
원로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 승인
73년 국세조사 실시
 
- 서기 79년 -
베스파시아누스 사망. 공동 지접관 티투스 황제 등극
베수비오 화산 폭발. 폼페이 매몰.
- 서기 80년 -
로마 도심에서 대화재 발생
 
- 서기 81년 -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염병 발생
티투스 사망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 등극
 
- 서기 83년 -
도미티아누스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 착수
110년 만에 병사들의 급료 인상
 
- 서기 96년 -
도미티아 황후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해방노예를 시켜 도미티아누스 암살.
원로원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 원로원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기로 결의
원로원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
 
- 서기 98년 -
네르바 사망
트라야누스 황제로 등극
 
이 시기에 대해 동시대 역사가 타키투스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 제국에는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 찬 시대의 이야기다. 적과의 참혹한 전쟁 동포들 사이의 불화와 반목, 속주민의 반란이 되풀이되었고 본국의 평화조차도 많은 피를 흘린 뒤에야 겨우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4명이나 비명에 죽고(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로마 시민끼리 전투를 벌인 것도 세 차례나 된다. 속주민이나 외적을 상대로 한 전쟁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것도 로마인끼리 벌인 전쟁의 여파에 불과하다."
또한, "도나우 강을 건너 침입해온 야만족에 대해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고 제국에 대한 갈리아 속주의 충성심은 흔들리고 브리타니아는 제패가이루어졌는데도 방치되고 사르마타이족과 수에비족은 로마 군단에 소해를 끼치고 다키아족은 로마에 패했을 때도 기세를 올리고 파르티아 왕국은 네로를 자칭하는 가짜를 옹립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려 하고 있었다"
"수도 로마에서 자행되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다도 무시무시했다. 고귀한 신분도, 재물도, 공적도, 공직을 거부하는 것조차도 죄로 간주되었다. 고발자에게 금품을 주어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 결과는 더 많은 악을 낳을 뿐이었다. 고발자들은 사제나 집정관 같은 명예직마이 아니라 황제 재무관을 비롯하여 실권을 가진 관직까지 대가로 요구하고 그리하여 사회를 온통 증오와 공포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돈에 매수되어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을 배반하고 해방노예는 옛 주인에게 반항하고 적이 없었던 사람조차도 친구 때문에 파멸당했다." 
네르바에 이르러서야 로마는 안정되었고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부터 후세의 역사가들이 ’오현제(五賢帝)’라 부르는 황금기로 접어든다.
 
작가는 30여 년 간의 이 시기를 ’위기’과 ’비탄’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로마의 위기라고 하면, 제2차 포에니전쟁으로 16년간 이탈리아 반도가 한니발에게 점령당했을 때, 기원전 90년 당시 반도의 여러 부족이 단결하여 로마에 반기를 든 ’동맹시 전쟁’, 마리우스와 술라가 내전을 벌이고 수 천명을 숙청했을 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국가 형태를 둘러싸고 벌인 내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붙은 14년간의 내전 등 수 없이 존재했다는 것...
그럼에도 로마는 다시 ’위기’와 ’분열’을 극복하고 지중해의 패권자로서 서기 1세기까지 군림하였던 것이다.
즉, ’위기’를 극복하면 ’위기’는 ’기회’가 되는 것이고 극복하지 못하면 ’멸망’하는 것...
8권에 그려진 로마는 타키투스의 이야기 만큼 로마 제정, 원로원과 시민, 속주민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작가가 8권의 부제를 칭한 대로 극복해낸 ’위기와 극복’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는 자연도 그렇고 세상 사는 이치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상황 역시 ’동전의 양면’,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자어 ’위기(危機)’가 ’위기’와 ’기회’를 함께 의미하듯...
 
로마는 기원전 2 ~ 기원전 1세기 동안 정책 브레인이자 지도자 집단이었던 원로원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관계로 카이사르에 의하여 제정(또는 원수정)으로 체계가 강제로 변경되었고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로 이어지는 일인자 통치시대로 접어들었다.
그것은 로마 공화정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지중해 전역과 멀리 갈리아, 브리타니아, 도나우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관리하는데 기존의 체제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집정관-원로원-민회로 이루어진 삼각체제가 무너지고 일인 통치시대로 접어든데 따른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포함한채 유지될 수 밖에 없었다.
로마 제정은 강력하고 현명한 지도자가 통치할 때에는 더 없이 적합한 체체지이지만, 그렇지 않은 지도자가 통치할 때에는 늘 암살과 반란, 외적 침입과 정책실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게 된다.
8권은 후자에 해당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혼란기에도 로마가 튼튼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아래와 같지 않을까 싶다.
1. 외적(이민족 or 야만족)의 침입이 적었고 세력도 약함. 파르티아도 잠잠.
2. 로마 내부의 내전이 일어나더라도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들끼리 전투를 치름
3. 로마 건국 이래의 기본 정책 유지
  - 기본 방위체계 유지, 패자 동화 정책(국내외 포함), 로마 시민권 유지/확장, 제국 내 경제 활성화, 세제/재정/행정/통화정책 유지, 사회간접자본 정비 계속, 군사력에 의한 외교 실시 등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법’ 등 일부 기존과 맞지않는 정책이 실시되기는 했으나, 그 뒤의 통치자에 의하여 복원됨...)
 
이 시기의 특이한 사건은 서기 66~70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진압되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이다.
유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망자는 무려 60~110만명이고 포로의 수는 10여 만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유대인 포로들은 노예가 되거나 각 속주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통치자인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예루살렘 대신전을 불태우고 파괴하면서 이후 로마 지배지역 내에서는 유대교도가 유대교의 총본산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대신전에 해마다 바치던 2드라크마의 봉납금을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에 납부하도록 한다. 이것이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 납부하는 세금이라는 명분의 ’유대인세’...
이 사건으로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되어 120년 동안 이어지던 로마의 유대 관용정책이 크게 바뀌게 된다.




 

[ 2010년 10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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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 - 양장본
앤서니 기든스 지음, 한상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기후변화의 정치학>과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에 이어 세 번째로 기든스의 저작을 읽었다. 출판 시기와는 정반대로 읽은 셈이다. <제3의 길>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그동안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3의 길’이라는 것을 내세웠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이 이라크 전쟁 등 미국의 대외정책에 늘 동참했다는 사실과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예를 들어 ’부시의 애완견’같은...) 때문에 블레어 총리에 대해서는 호감보다 반감이 많았다.
 
역자인 한상진 교수는 이 책이 ’학문적인 저술’이라고 규정하면서 독서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제3의 길’이 과거에도 논의된 적이 많기 때문에 개념의 구조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기든스는 과거에 ’제3의 길’을 주창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것으로 애기하고 있다. 다만, 기든스가 다른 점은 고전적 의미의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인류 문명의 새로운 도전으로 ’세계화(Globalization)’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종래의 ’제3의 길’과 다른 세계주의적(Cosmopolitan) 민족, 정치, 담론, 정체성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의 단점은 무엇일까?
둘째는, 이 책을 기든스의 전체 저술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든스는 1970년부터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 미국의 하버드 대학, 버클리 대학, 스탠퍼드 대학에서 가르친 바 있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주요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강의했다. 기든스는 ’구조화 이론(Structuration)’으로 명성을 얻었고 ’현대성(Modernity)’를 둘러싼 서구의 논쟁에서 독보적 위치와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30년 간 30 권의 저서를 출판했고 많은 주제를 다루었다. 이 책은 거시적인 문제를 보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즉, 좌우 이념의 대립을 넘어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국가와 경제, 시민사회의 관계를 탄력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셋째는, ’제3의 길’을 오늘의 서구사회의 변동에 접목시켜 이해하는 방법이다. 서구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역사적 대타협을 통해 복지국가의 길을 가고 있었으나 1970년대 들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다. 누적되는 국가의 재정 적자, 비대해진 국가 관료제, 시민사회 기능의 약화, 국민의 노동 의욕 감소, 국가 경쟁력 하락 등이 그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경쟁과 효율, 개인의 선택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세력을 얻게 되었다. 서구 복지국가가 위기에 빠진 이유 중에는 금융을 핵으로 하는 경제의 세계화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변화된 현실에 대한 새로운 대응이 바로 이 ’제3의 길’이었다.
넷째는, ’제3의 길’을 한국사회에 적용하여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제3의 길’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있다면 누가, 어떻게 ’제3의 길’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서구처럼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없더라도 ’제3의 길’을 요구하는 역사적 경험은 한국사회에도 필요하다. ’제3의 길’이 한국사회에 특히 필요한 이유는 한국사회에 여전히 고질적인 좌우 이념 대립, 지역 대결 구도, 노사간의 갈등과 반목, 세대나 남녀간의 불신,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데 ’제3의 길’을 둘러싼 논의가 크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기든스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살펴보겠다. 이 책은 서문과 결론, 그리고 5개 장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 기든스는 1970년대 말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복지에 대한 합의’의 파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불신,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불러일으킨 매우 중대한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변화로 인해 사회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실천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사회민주주의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고 더욱 발전할 수 있음을 믿는다고 선언하면서 그렇게 되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여태껏 해온 것보다 더욱 철저하게 기존 견해를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기든스는 1980년대 들어 보수당과 대처는 자유시장의 기치를 내세워 영국사회 전체의 변화를 강하게 촉진하면서 20년 넘게 영국 정치를 지배했음을 재확인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동당은 구좌파의 견해만 반복하면서 패배를 자초했다고 평가한다.
 
제1장. [사회주의와 그 이후] 기든스는 소련의 멸망과 해체로 ’사회주의의 사망’했음을 선언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이론은 늘 자본주의가 쇄신하고 적응하여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했다."(p.36) (저자 스스로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현대성’과 같은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고 수정하면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변화,발전한 ’사회주의 이론’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내 자세한 입장은 여기에 풀어내기는 어려우며, 단지 소련의 멸망을 도식적으로 ’사회주의의 사망’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싶다.)서유럽에서는 사회주의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변화하여 잔류하였고 전후 30년 동안 정치이념과 정치세력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채 ’복지국가 시스템’을 중심으로 정체하면서 1980년대 들어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기든스는 비교표를 통해 구식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원리의 비교한다.(기든스는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잘 비교하고 있음에도 철학적, 이념적 배경과 내용, 그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분석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유럽 사회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기든스와 비슷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980년 이후 유럽 사회의 경제구조와 인구구성의 변화, 민중들의 태도와 입장의 변화, 정치적 지지 구조가 변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최근(1990년대 후반기)의 토론을 소개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제2장. [다섯 가지 딜레마] 기든스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에서 크게 부각된 ’다섯 가지 딜레마’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범세계화(globalization)’, ’개인주의(individualism)’, ’좌파와 우파(left and right)’, ’정치적 행위체(political angency)’, ’생태적 쟁점들(ecological problems)’이다.
’범세계화’가 경제적 상호 의존 뿐만 아니라 통신 혁명과 정보기술 확산, 사람들의 생활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형에 관한 것이기도 함을 지적한다. 그것은 새로운 초국가적 체제와 세력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특히, 선진국에서 일상 생활과 제도를 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기든스는 세계화 확대, 심화를 위해 주체적으로 작동하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에 대해서는 철저히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주의’는 단순한 시장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범세계화의 충격에 수반되는 현상이며, 부분적으로는 ’복지사회’가 창출한 바로 그 풍요의 결과로서 생활 양식이 다양해짐과 더불어 문화적으로 더욱 다원회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파 및 사회민주주의 이론가들은 ’개인주의’에 대해 제대로된 해석과 입장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세계화가 ’개인주의’의 주요 원인이라는 저자의 분석은 틀린 것 같다. ’개인주의’는 봉건주의가 해체되고 자본주의 경제양식이 사회를 지배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화’는 ’개인주의’를 더 가속화시키고 ’개인’을 빈부격차로 양극화시키고 있을 뿐이다.)저자는 경제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사망함으로써 좌파와 우파를 나누던 중요한 구분선 중 하나가 사라졌고 환경이 변화하면서 좌우파 구도의 범주에 없던 새로운 문제, 즉 지구온난화, 노동, 가족, 원자력, 권력이양, EU들이 나타나면서 ’좌파와 우파’에 대한 새로운 범위 설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그는 좌파 쪽에 선다는 것은 사회적 정의와 해방의 가치, 그리고 평등의 목표를 추진하고 여기에는 정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정치적 행위체’와 관련하여 저자는 시장이 대체할 수 없는 정부의 목적과 역할을 규정하면서 1980년대 국민들의 탈정치화 과정과 영향력 고갈이 시민사회 세력에서 정치 참여와 행동주의로 나타나고 확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들이 정부가 실패하고 있는 영역들을 인수하거나 정당의 지위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며, 다만 정부는 이러한 집단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이 제기하는 쟁점에 반응하고 협상하여 문제들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직 노동자로 구성된 노동당의 지지구조와 노동조합에 지분을 할당한 의사결정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저자의 주장이 노동당에 반영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와 결합도 여의치 않을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또 다시 노동당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생태적 쟁점’에 대해 저자는 ’생태적 현대화’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이는 정부와 업계, 온건한 환경주의자, 그리고 과학자들이 환경적으로 보다 옹호할 만한 입장을 좇아 자본주의 정치 경제를 재구조화하는 데에 협력하는 형식의 동반자적 관계를 의미한다.기든스는 ’제3의 길 정치’의 전반적 목표가 ’다섯 가지 딜레마’ 속에서 시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범세계화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좌우의 구분을 벗어나는 질문의 범위들이 이전보다 더 넓어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사회 정의에 대한 핵심적 사항들을 보존해야 한다. 평등과 개인의 자유는 충돌할 수도 있지만 평등주의적 조치들은 종종 개인에게 열리 자유의 범위를 확대한다. 자유란 ’행위의 자율성’을 의미해야 하며 ’책임 없이 권리 없다(no right without responsibilities)’를 새로운 정치의 모토로서 제시할 수 있다.

제3장. [국가와 시민사회]에서 기든스는 새로운 민주국가는 ’적이 없는 국가’이어야 함을 정의하고 새로운 국가의 역할은 권력의 지방이양, 이중 민주화, 공공 영역의 쇄신과 투명성, 행정적 효율성, 직접민주주의의 메커니즘, 위험성 관리자로서의 정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활기넘치는 시민사회 육성은 ’제3의 길 정치’의 기본적인 일부분이며, 시민사회의 쇄신을 위해 정부와 시민사회의 동반자 관계 구축, 지방 주도를 통한 공동체 쇄신, 제3부문의 관여, 지방 공공 영역의 보호, 공동체에 기반한 범죄 예방, 민주적 가족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가족 관점에서의 민주화는 평등, 상호존중, 자율성, 소통을 통한 의사 결정,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민주적 가족’을 위해 정서적 성적 평등, 관계에 있어서 상호 권리와 책임, 공동 양육, 평생 양육 계약, 아이들에 대한 타협적 권위, 부모에 대한 아이들의 책무, 사회적으로 통합된 가족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제4장. [사회투자 국가]에서 저자는 ’제3의 길 정치’에서 경제분야는 ’신혼합경제(new mixed economy)를 옹호함을 말한다. ’신혼합경제’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사이의 상승 효과를 추구하며, 공익을 염두에 두고 시장의 역동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제3의 길 정치’에서 평등은 ’포용’을, 불평등은 ’배제’를 의미하며, 포용적인 사회를 위해 포용으로서의 평등, 제한적인 능력지배, 공정 영역의 부흥, 노동사회를 넘어서, 적극적인 복지, 사회투자 국가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제5장. [범세계화 시대로]에서 저자는 범세계화 시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족의 새로운 역할을 모색해야 함을 선언한다. 그는 민족주의의 분열적인 속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속성을 제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민족에 대한 세계주의적 해석임을 주장한다.
그는 범세계화 과정들은 권력을 국가로부터 탈정치화된 범세계적 영역으로 이전시켰으나, 다른 사회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것의 보편적 중요성으로 보아 훨씬 더 이런 새로운 영역은 권리와 의무를 도입하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유럽연합(EU)은 대중적인 지지를 잃어 가고 있는 동시에 유럽 시민들의 삶에서 점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EU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유럽의회의 보다 큰 권력을 보다 효과적인 초국가적 정당 조직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세계적 규모에서 시장근본주의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세계경제에서 특히, 금융시장을 규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통화의 과도한 회전과 남발을 진정시키고 통제하는 것, 단기적 통화 투기와 투자를 분리하는 것, 그리고 세계경제 관리에 참여하는 초국가적 조직을 재편할 뿐만 아니라 그 조직에 대한 책임성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로부터 새롭게 많은 것을 배웠다. ’제3의 길’에 대한 문제의식과 아이디어, 그리고 정책들, 마찬가지로 현대성, 개인주의, 정치적 행위체, 이중 민주화, 민주주의의 민주화, 직접민주주의, 민주적 가족, 행위의 자율성, 신혼합경제 등은 새로운 개념이자 사고 구조를 확대시켜 주었다. 국가의 역사, 정당의 역사, 이념의 역사 등 상당히 중요한 측면에서 영국과 한국이 다르기 때문에 기든스의 생각과 의견이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도 아이디어와 정책에서 많은 부분을 비교하고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기든스가 이야기하는 ’제3의 길’이 어떤 배경에서 제기된 개념인지, 정치적 태도와 입장은 무엇인지, 주요 정책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제3의 길’이 앞으로 어떤 변화와 발전, 실적을 보여줄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사회민주주의의 철학과 이론이 무엇인지, ’제3의 길’이 사회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제3의 길’의 철학과 이론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어렵다. 기든스는 학문적으로 ’제3의 길’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결국 현실 정치에서 필요한 정책을 제시했을 뿐이다.
<기후변화의 정치학>과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을 읽고서도 느꼈지만, 앤서니 기든스같은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가 정당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는 영국이 부럽다. 특히, 그의 철학이나 이념적 배경이 무엇이던간에 자유와 평등주의, 민주주의, 취약계층에 대한 애정, 시민사회 육성, 국가 개입,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영국 민중들에게는 행운이다.  
 
역자인 한상진 교수의 말대로 이 책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서 시장경제의 논리와 시민적 연대 및 정의의 원리를 결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같다. 한교수는 <제3의 길>을 두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보적 지식인의 최소한의 양식과 개방적 사고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처음 발간된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많은 나라들에서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중도 좌파 정부가 집권한 상태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011년 6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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