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9 - 현제賢帝의 세기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9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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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의 부제 : 현제의 시기

9권은 네르바가 병사한 뒤 트라야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승인받은 서기 98년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가 역시 병사한 서기 161년까지를 다룬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기간과 더불어 베르나 통치 시점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한 시점까지를 ’오현제(五賢帝)’ 시대라 부른다.
작가도 9권의 부제를 ’현제의 세기’라 붙였고 후세 뿐 아니라 동시대 로마인들도 이 시기를 ’황금시대(Saeculum Aureum)’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세대도 동시대인들도 ’현제’고 ’황금시대’라 이름을 붙였으니 당연히 이 시대의 로마는 국가의 3개 과제인 안보와 식량(경제)와 내정(사회간접자본등)에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점수를 줄만 했다.
 
그렇다면, 왜 동시대인들도 후세대들도 그 시대를 ’오현제의 시대’ 또는 ’황금시대’라 불렀을까?
우선, 9권에서 다루는 3명의 통치자들이 이룩한 업적을 살펴보면,
 
< 트라야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98년 ~ 117년
- 즉위 전 :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서기 53년 에스파냐 남부 베티가 속주의 이탈리카에서 출생.
아버지는 로마 군대의 군단장 출신 원로원 계급
서기 75년 로마 군대의 대대장 진급. 라인강 군단 근무 -> 28세에 회계감사관 당선 -> 대대장 복귀 -> 원로원 진입 -> 34세 법무관 당선 ->
에스파냐 7군단 군단장 임명 -> 91년 집정관 선출 ->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겸 속주 총독 임명
서기 97년 네르바가 공동 황제로 지명하여 원로원에서 승인. 98년 네르바 사망 후 원로원 승인으로 황제 취임.
- 즉위 후 :
저지 게르마니아 및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체제 완비
트라야뉴스 투자법 제정 : 농업 투자금액 중 이탈리아 반도 내에 1/3 이사 투자하는 법안
육영자금 설립 : 황제 세입에서 출자. 법률 시행은 지방자치단체에 위임.
제1,2차 다키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다키아 지역을 속주로 편입
공공사업 추진 : 목욕탕, 수도, 포룸 건설, 오스티아항 개조, 아피아 가도 복선화
파르티아 전쟁 승리 및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속주로 편입
유대 반란 진압
로마로 귀환 중 병사







< 하드리아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117년 ~ 138년
- 즉위 전 :
두 번째 속주 출신 황제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서기 76년 이베리아 반도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 출생(트라야누스와 같은 고향)
조상은 카이사르 시대에 원로원에 진출. 아버지는 10세때 사망.
아버지가 트라야누스와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후견인으로 지명
열 살 때부터 로마에서 퀸틸리아누스의 학교에 다님 -> 그리스 문화에 너무 심취하여 고향으로 보내짐 -> 사냥에만 열중하여 로마로 돌아옴
-> 안찰관 근무 -> 판노니아 속주 제2군단 대대장 취임 -> 도나우강 하류의 먼 모에시아 속주 제5군단 대대장 -> 서기 101년 회계감사관 당선
-> 원로원 의사록 편집 -> 사비나와 결혼(사비나는 트라야누스의 누나 마르키아나의 딸인 마티디아의 딸) -> 제1차 다키아 전쟁 참전
-> 제2차 다키아 전쟁시 제1군단장 근무 -> 법무관 당선 -> 먼 판노니아 속주 총독 부임 -> 집정관 당선 -> 실업자(장군들의 반감) -> 파르티아 원정 참전
전쟁 후 파르티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 -> 트라야누스 황제 로마 귀환 중 사망. 사망시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 -> 동방 군단 장병들이 하드리아누스에게 충성 맹세
- 즉위 후 :
황제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Trajanus Hadrianus Augustus)
파르티아 전쟁 종결
로마에서 황제 암살 음모 발각. 근위대장을 통하여 전직 집정관 출신 원로원 4명 숙청
1차 방위선 현장 시찰(호위병과 문관들만 동행하여 진행)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 론강 -> 리옹(루그두눔) -> 트리어(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선 -> 게르마니아 방벽 보강 -> 마인츠 -> 저지 게르마니아 방위선 -> 본, 쾰른 -> 브리타니아 반란 진압 및 하드리아누스 성벽 건설 ->
히스파니아 속주민 내부 갈등 해소 -> 시리아 안티오키아 -> 파르티아 국왕과 강화조약 체결 -> 소아시아 서부 -> 아테네 -> 로마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랑베즈, 팀가드 -> 랩티스 마그나 -> 로마
’로마법 대전’ 집대성
베누스 신전 건립, 판테온 개축, 하드리아누스 별장 건축
2차 방위선 시찰 : 아테네 -> 소아시아 에페수스 -> 시노페 -> 카파도키아 사탈라, 말라티아 -> 시리아 라파네아이 -> 안티오키아 -> 팔미라, 다마스쿠스
-> 아라비아 속주 제3군단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유대 반란 진압 -> 로마
유대 반란 진압 결과 : 예루살렘 함락, 50개 도시 / 985개 마을 파괴, 사망 유대인 50만명, 예루살렘에서 추방, 지명 변경(유대 -> 팔레스타인), 할례 금지
매부 세르비아누스 주도의 후계자 옹립 움직임을 파악하여 세르비아누스와 손자를 처형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후계자 지명 -> 판노니아 속주로 군단 경험 중 병사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 지명. 안토니누스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인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다.
 

< 안토니누스 피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138년 ~ 161년
- 즉위 전 :
서기 86년 로마 인근 라누비오에서 출생. 집안은 보르넨시스 속주의 원로원 계급
아버지가 공무로 자주 집을 비워 친할아버지+외할아버지 댁에서 어린시절을 보냄
서기 111년 회계감사관 -> 116년 원로원, 법무관 -> 120년 집정관 -> 아시아 속주 총독
- 즉위 후 :
황제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엘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Imperator Caesar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
하드리아누스의 인력을 그대로 승계, 연임시킴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성벽 추가 건설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임 기간에는 외적 침입이나 반란이 없었고 자신의 업적을 쌓는 것을 원하지 않아 특별한 기록이 없음
선임 황제들이 결정한 정책과 법률을 성실하게 집행하기만 함.
하드리아누스의 유언을 받들어 루키우스와 안니우스(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양자로 받아들임.
 
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시기가 로마의 ’황금시대’이자 ’오현제’의 시기였던 것은 외형적인 결과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네르바 이전 시대가 30년간 네로 황제 암살부터 시작하여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황제까지 연이어 살해, 암살되었고
황제 암살은 동시에 로마 군대 내부의 내전에 따른 로마 시민의 사망, 원로원과 관련 인물들의 살해가 동반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쉽게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시대를 지난 후 네르바부터 안토니누스 피우스까지의 황제들은 자신의 혈통에 대한 집착도 없었고 실제 혈통을 이어 황제가 될 자식들도 없었다.
혈통이나 군대 반란 등 내분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는 안정화될 수 있었고 28개 군단의 군사력은 외적,야만족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즉, ’오현제’ 시기는 로마로서는 외부적인 조건도 내부적인 조건도 따라준 셈이다.
물론 그 황제들 역시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로마 제국의 평화와 성장을 중심으로 정책을 편 것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시대 들어 특징적인 것은 연거푸 4명이나 속주 출신이 황제로 등장한 것이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히스파니야 속주 출신이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보르넨시스 속주 출신이다.
그리고 이후 대부분의 로마 황제들은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 내보다 속주 출신이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실제 2 곳 모두 카이사르 황제가 갈리아를 속주로 삼기 이전부터 로마의 속주였기 때문에 200년 이상 ’로마화’한 지역이고
따라서 이들의 조상 대부분과 자신들도 로마의 시스템(군단장, 법무관, 회계감사관, 집정관)을 거쳤다.
그 사실은 서기 100년 전후부터 속주 출신이 기존 로마 지도층보다 통치력이 더 양호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로마가 국가로 탄생한 시기부터 시작하여 일관되게 추진했던 ’로마화’ 정책과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제정 시스템과 속주 출신에게 원로원 등을 개방한 것이 성공적인 정책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로마는 서기 100년부터 인물난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로마 역사는 1,0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서히 지워졌을 것이다.

 
 
[ 2010년 10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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