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노바 바베 역사 인물 찾기 12
칼린디 지음, 김문호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법정스님의 저서 [내가 사랑한 책들]에 소개되어 있는 50여권을 올해 중에 다 읽는 것이 년초 목표였는데 여의치가 않다. 이 책은 소개된 책 50여권 중 13번째 책으로, 칼린디가 쓴 현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비노바 바베의 인물전(평전)이다. 비노바는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리고 또 자서전을 집필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친밀한 협력자이자 제자였던 칼린디는 비노바의 이야기를 모아 그의 생애와 회고와 기억들을 엮어냈다.  
 
비노바는 세계적인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이자 사회개혁자이며, 동시에 20세기에 마하마트 간디, 사티쉬 쿠마르와 함께 인도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 천년 동안 전세계인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영감과 철학을 제시했던 부처, 예수, 마호메트와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와 관계없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영감과 철학을 제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비노바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이 현대사회의 가족, 교육, 사회, 문화, 그리고 개인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가족 내에서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말과 행동, 영성과 신념, 삶과 지향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된다. 근현대 교육제도와 학교의 모습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비노바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인도의 기존 학교와 대학이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하인들’을 훈련시키는 커다란 공장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21세기 전세계 학교와 대학은 당시 인도의 그것과 크게 다를까?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키우는 교육제도가 한국을 비롯한 OECD 국가들 중 얼마나 될까? 비노바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인간으로서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평생에 걸쳐 고민하고 실천했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최소한의 의식주를 누려야한다는 데 뜻을 세우고 신의 뜻에 살기로 마음먹은 후로 비노나는 스스로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바깥에 있는 약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비노바는 ’토지헌납운동(부단)’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베풀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인도 전역에서 20년 넘게 사람들과 만났던 것이다. 비노바는 힘들고 나약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부당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개혁하는데 참여하지 않는 어떤 종교도 ’신의 참 뜻’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수 많은 종교를 접하고 경전들을 연구하였으나 결국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은 ’돕고 함께 나누고 정신적인 충만’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실천해 나간 것이다.

 
내가 처음 비노바에 대한 글을 읽은 것은 사티쉬 쿠마르의 자서전 <끝없는 여정>에서였다. 1960년대에 인도에서 영국, 미국, 일본까지 직접 걸어서 핵무기 없는 세상과 평화를 전파했던 쿠마르는 1955년부터 1962년까지 비노바의 ’토지헌납운동’에 참여한 바 있었다. 
비노바는 법정스님만큼 내가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사상가이자 실천가이자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 평생에 걸쳐 지켜온 무소유의 삶, 늘 책을 읽고 공부하는 자세, 어려운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불의와 부정의에 대한 단호한 배격, 정치와 권력과 조직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 이 모든 비노바의 생애는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무엇을 잘못하고 살아온 것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깨닫게 해주고 있다. 부끄러운 삶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노바의 말 한 마디, 그 정신과 실천을 내가 잊지 않는 한 나를 끝없이 깨우치고 채찍질할 것이다. 

인류의 정신과 미래를 제시하는 위인들의 삶과 정신에는 늘 공통점이 있다. 비노바는 ’무소유’와 ’자신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정진’이라는 측면에서 법정스님의 생애(법정의 [무소유]와 [아름다운 마무리])와 비슷하다. 간디와 함께한 ’비폭력저항(샤티야그라하)’의 정신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박홍규 교수 역 [시민의 불복종]), 마틴 루터 킹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학교제도에 대한 비노바의 태도는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와 동일하며 태양과 달, 공기와 물, 숲과 땅이 오로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으며 인류와 생명체 전체가 함께 누려야할 소중한 존재라는 비노바의 정신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정신(류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과 통하는 것이다. 
비노바는 스스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샹카라’와 ’즈나나데바’와 ’간디’라고 하였지만... ’샹카라’는 철학자로서 그가 건설한 수도원들의 후대의 우두머리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상카라차리야 1세라고 한다. ’즈나나데바’는 위대한 시인이자 성자였던 ’마라티’를 말한다. 
 
--------------- * 칼린디는 누구인가? -----------------------------
칼린디는 비노바 바베의 제자였다. 칼린디는 1960년에 비노바를 만났다. 바로다 대학교에서 사회복지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비노바와 절친한 사이가 된 칼린디는 그의 강연과 대화를 꼼꼼히 기록하였으며, 언론 출판 관계에서 그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1964년 비노바가 힌두어 월간지 <마이트리>를 시작하자 그녀는 편집장을 맡아 오랫동안 그 일을 이어갔다. 그녀는 비노바가 파우나르에 창설한 ’아쉬람 브라마비디야 만디르’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책의 영문판 원본은 원래 1985년에 <마이트리>의 특집편집본으로 출판되었다. -----------------------
 
이 책은 서문과 맺음말, 그리고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비노바 자신이 쓴 자서전이 아닌 칼린디가 쓴 평전이지만, 책의 내용은 ’1인칭’으로 다루고 있다.
[시작하면서]에는 비노바의 인생에 대한 태도와 사상을 정리한다. 문장 하나 하나는 평생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과 진리 속에서 실천한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랑과 사상만큼 강한 힘을 가진 것은 없다’, ’나는 매순간 변하는 사람이다’, ’나는 브라만으로 태어났으나, 자발적으로 그 카스트와 결별하였다.’, ’나는 이념들을 가지고 있으나 고정되어 굳어버린 견해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모두가 나의 친족이요 나도 그들의 친족이다.’, ’나는 어떤 문제를 보면 그 문제 깊숙이 뚫고 들어가 그 근원까지 파악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문제가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인간의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한 사히의 삶과 개인의 삶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찾아내고, 그 문제들을 비록력으로 극복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만났던 행운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나는 외적인 형편들이 너무나 순탄하였다는 것을 회상하게 된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행운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느끼고 있듯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p.30~37)
 
제1부. [야생마와 같던 청년시절 (1895~1916)]에는 비노바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까지의 삶이 서술되어 있다. 그는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콩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비노바는 카스트 계급 중 가장 높은 ’브라만’ 계급이었고 그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돌아다니기와 책읽기가 취미였다. 그렇지만 그의 삶과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지주였던 그의 할아버지는 힌두교의 독실한 신자였으며 규칙적으로 서약을 하고 단식을 하였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릴 때마다 비노바를 참석토록 하였다. 비노바는 자신이 정신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면 할아버지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말한다.
비노바는 어머니에 대해 말할 때, "나의 정신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머니가 했던 역할에 버금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위대한 신앙인으로서 매일의 일상 속에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감사함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비노바가 매일 식사하기 전에 툴시 나무에 물을 주게하고 음식을 따로 떼어 동물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하는 등 그가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고 비노바는 그것을 가장 큰 선물로 기억한다. "우리는 먼저 베풀고 나중에 먹어야 하는 법이란다."(p.63)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p.66)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먹을 음식의 양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단다. 그러니까 오래 살려거든 적게 먹도록 해라"(p.86)
과학자이자 요가 수행자였던 비노바의 아버지는 비노바에게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공경하며 이웃을 돕는 것을 가르쳤고 비노바가 잘못한 것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들이 열여섯이 되면 그를 친구로 대해야 한다."(p.84 이 말은 전설적인 현인 마누가 지은 책 [마누스므리티]에 들어있다. )
비노바는 열 살 때 브라마차리야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고 스물 한 살에 집을 떠났다. 그는 길을 떠나기 가지고 있던 모든 자격증들을 불살랐고 어머니에게 자신은 ’월급 받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2부. [멍에를 받아들이다 (1917~1950)] 비노바는 출가했을 때 벵갈과 히말라야에 끌렸으나 출가한 이후 간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간디의 ’사티야그라하 아쉬람’에 찾아갔다. 그는 간디에게서 히말라야의 ’평화’와 벵갈의 ’혁명적인 정신’을 모두 발견했던 것이다. 비노바는 아쉬람에서 정치적 자유와 정신적인 발전을 하나의 동일하고 동시적인 목표로 삼는 간디를 발견하고 기뻐했다. 비노바는 ’카르마-요가’ 즉 영적인 행동의 길의 의미에 대해 배웠다. 그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고 비노바는 그것에 매혹되어 평생 간디를 스승으로 삼았다.
간디의 비폭력은 내적인 비폭력이었으며 정신의 폭력은 공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그 내적인 비폭력은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간디의 아쉬람의 목적은 "세계 전체의 복지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우리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서약을 받아들인다." 서약은 열 한개로 진실, 비폭력, 절도 금지, 극기, 육체적 노동 등이었으며 비노바는 그 서약을 평생토록 지켜나갔다.
간디는 비노바를 인도의 지도자로 인정했고 1940년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제안하면서 그를 대표자로 선정했다. 
 

비노바는 간디를 정신적, 실천적인 스승으로 삼은 후 30년 동안 교육과 건설활동에 투신했고 그 활동의 근거가 되어야 할 원칙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는 가르치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일 등을 하였지만, ’사티야그라하’ 이외의 정치적인 활동에는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사티야그라하’ 운동을 통해 평생 3회에 걸쳐 7년간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내가 진정한 아쉬람 생활을 경험한 것은 감옥 안에서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옥 안에서도 성찰과 정진, 봉사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비노바는 아쉬람에서 처음 옷감 짜는 일을 배운 후 인도 사람들이 옷감짜는 일로 삶에서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연구하고 물레를 개발하고 실험하고 보급하였다. 도한 마을 봉사활동을 거듭하면서 카스트 제도의 가장 낮은 계급인 ’하리잔’들과 하나가 되고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인도 사회에서 가장 낮게 인정받는 일, 즉 똥 치우는 일, 가죽일, 천을 짜는 일을 했다. 그는 그러한 일을 사람들과 함께 해나가는 것이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바꾸어 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3부. [멍에를 지다 (1951~1969)]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1948년 간디가 암살당한 후, 비노바는 "우리는 이미 정치적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제 보다 더 철저하고 훨씬 더 어려운 과제에 착수할 때가 되었다. 그 과제는 바로 사회적 경제적 혁명이다. 옛 방식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p.227)라고 생각했다. 
1948년 인도의 중앙 행정부와 지역 행정부는 토지를 하리잔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다가 포기했다. 1951년 3월 도보로 여행을 시작한 비노바는 사르보다야 대회를 끝내고 4월 우타르 프라데시 주를 여행하면서 포참찰리 마을에 도착한다. 그가 토지를 필요로 하는 하리잔들과 토지 소유자들과 면담하면서 설득하는 중에 지주인 ’쉬리 라마찬드라 레디’가 하리잔들이 필요한 토지를 헌납했다. 이로써 비노바의 ’토지헌납(부단)운동’이 시작된다. 비노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지주들을 설득했다. "모든 인간은 공기와 물과 햇빛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듯이 땅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한 개인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가 땅을 내놓을 때는 그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놓아야 한다."(p.249) 그는 지주들에게 ’헌납 토지 = 1/ (아들의 수 + 1)’의 토지를 헌납하기를 요구했다. 
1951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비노바는 지지자들과 함께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지주들에게 토지를 헌납하도록 설득하였고 하리잔들이 헌납받은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공동체 마을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도록 이끌었다. 그는 20년 동안 무려 인도 국토면적의 1.33%인 400만 에이커(16.7만km2 = 50억 평)의 스코틀랜드 국토와 맞먹는 땅을 헌납받을 수 있었다.(남한 국토면적 10만km2) 그는 그 과정에서도 공부하기, 가르치기, 공동체 만들기, 하리잔 돕기,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노바는 마을들이 스스로 자치를 해나갈 수 있도록 1957년부터 ’토지헌납운동’과 더불어 ’평화군(산티 세나)’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구 오천 명당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1958년부터는 ’삼팟티-단(재산의 육분의 일)’을 헌납하는 운동을 병행했고 1961년부터는 ’비가-카타(20분의 1)’ 운동도 시작한다. 비노바는 그 과정에서 아쉬람 여섯 개를 창설하고 수 많은 마을에 마을 자치가 이루어지도록 사람들을 교육하고 조직하였다. 그는 인도의 "가장 큰 과제를 인간 사회 전체를 비폭력의 사회로 만들어내는 일, 바꾸어 말하자면 비폭력적이고 강하고 자립적이며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두려움과 증오로부터 벗어난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이다."(p.353)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영적인 삶을 위해 기도, 침묵, 명상, 정신을 뛰어넘는 일, 선한 것을 공경함, 애정을 기르는 것, 식사 제어하기, 두려움의 정복, 빵을 위한 노동,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했다. 
 
제4부 [멍에를 벗고서 (1970~1982)] 비노바는 1969년 토지헌납운동과 아쉬람 건설, 교육과 조직화를 마지막으로 몇 년간의 준비 끝에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남은 삶을 성찰하고 정진하기 위해 외적 행위로부터의 자유, 책으로부터의 자유, 가르치는 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여행도 포기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며 내적인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맺는 말] 1982년 건강이 악화된 비노바는 의사와 병원의 치료를 거부하고 80일 간의 단식 끝에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쇠약하고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온전하며 그의 얼굴은 영적인 광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p.456) 
 

비노바는 평생 동안 인도의 정신적 전승에 대한 연구는 물론, 세계의 큰 종교들의 거록한 전승에 대한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의 사회적 활동은 그러한 연구에 기초한 것이었다. 비노바가 태어난 지 백 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이 회고록은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비폭력을 실천하고 영성을 추구하며 사랑의 힘을 간직해온 한 위대한 인물의 내적인 삶과 위적인 삶을 두루 밝혀준다. 그의 사상과 생애는 인도 전역에서 수 많은 제자들과 민중들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칼린디와 같은 외부 협력자들을 통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알게 모르게 간디와 비노바의 사상이 현대의 지성인들과 학자들,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현대사회가 비폭력과 저항을 통해 ’파괴와 붕괴’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디는 1947년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내면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성자로 거듭났다. 독립 당시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것은 간디도 막지 못했다. 1947년 동파키스탄으로 존재하던 방글라데시는 인도군의 무력개입으로 1972년 독립하였다. 간디와 비노바의 사상과 실천은 독립 이후 인도에서 자주, 자립, 협동, 비폭력 등으로 이어졌다. 비노바는 인도 정부에 의존하기 이전에 민중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마을자치와 공동체운동, 토지헌납운동을 전개했고 정치권과 모든 인도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비노바의 사상과 실천이 국가적인 정책으로, 국민 전체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물론, 아직 인도에 많은 자치와 자립마을이 남아있고 비노바와 같은 사상가들의 정신과 실천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비노바의 사상이 인도 내부에 뿌리깊게 퍼지지는 못했다. 기존 종교의 모습은 ’카스트 제도’의 모습으로 남아 있고 어느 순간 ’대량생산, 대량소비’와 ’황금만능주의’가 새로운 종교로 인도를 잠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인도는 1980년대까지 간디와 그의 제자인 네루의 철학과 정책을 유지했으나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키는데 실패했다. 1990년대 들어 인도 정부는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면서 인도의 전체 GDP는 늘려가고 있으나 하층 민중들의 삶이 개선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으면서 가난한 방글라데시의 현실이 독립이나 무력분쟁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비노바의 사상과 생애가 그 이후 인도와 세계의 지성과 민중들에게 어떤 지침을 주었고 삶을 안내했는지 알고 싶다...
 
* 책 속의 책 : [바가바드기타], [우파니샤드], [마누스므리티], [요가-사트라], [즈나네스와리], [베다], [신약성서], [코란], [법구경], [담마파다], [자푸지], [나마고샤]
 
[ 2011년 6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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